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9/22 3

도법(刀法)/ 김은주

도법(刀法)/ 김은주  칼끝이 닳았다. 자루를 보니 한창 시절에는 몸피가 제법이었을 칼날이 턱없이 야위었다. 뽀족한 칼끝이 퍼덕이는 전어의 아가미를 내려찍는다. 바다로 돌아갈 듯 퍼덕이던 전어는 일순 잠잠해진다. 할머니 잽싼 손놀림에 물속에 있던 전어 수십 마리가 순식간에 물 빠진 소쿠리로 이동한다. 할머니는 반쯤 내려온 머릿수건을 걷어 올릴 시간도 없이 절명한 전어의 옷을 벗긴다. 은빛 비늘이 할머니 손등에 눈가루처럼 쏟아진다. 전어의 등줄기를 긁어내리는 할머니 손길이 리드미컬하다. 어깨와 굵은 팔뚝을 적당히 흔들 때마다 칼질은 신명이 오른다. 물오른 칼날에 알몸이 된 전어는 다시 소쿠리에서 물이 든 바가지로 옮겨져 배를 연다. 그리고 자신의 속을 토해 낸다. 이때도 여윈 칼끝은 전어 배 가르기에 안성..

좋은 수필 2024.09.22

명왕성 유일 전파사/김향숙 시 모음

명왕성 유일 전파사  흑백 텔레비전에는 명왕성(冥王星)이 들어 있다어쩌면 모든 가전(家電)에도 있는지 모른다 목숨 다하면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제 몫을 못 하는 것이 명을 다한 거라고, 별명이 백과사전인 그 사내 모르는 게 없다 빛나는 지구도 저 없으면 돌지 않는다고 사십 년 기름때 묻은 공구함을 가리킨다 바닥에 엎드려 기술을 익히던 무릎, 생의 페이지가 너덜너덜해지도록 달달 외우던 공구들의 이름마다 알파벳이 벗겨져 반들반들하지만 마치 자기 뼈처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 닷새마다 망가진 것들이 몰려드는 난전(亂廛), 지문이 닳도록 눌러 헐거워진 버튼, 눌러도 빠져나오지 않는 중고 카세트테이프를 어깨너머의 기술로 척척 고쳐낸다 스프링을 갈아 끼우자 사라진 가수를 불러내는 카세트 녹음기, 구성진 노래가 전..

좋은 시 2024.09.22

여백, 삶을 묻다 / 허정진

여백, 삶을 묻다 / 허정진  여백은 간이역이다. ‘빨리’란 낱말이 낯설어지고, 째깍거리는 시간도 느려질 것 같은 시공이다.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손이 잠시 멈추고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올리는 정적 같은 것, 가마솥의 밥이 끓어 장작을 꺼내고 뜸을 들이는 시간 같은 것, 떠들썩한 목소리들 사이에 누군가의 잔잔한 미소 같은 것. 그래서 여백은 한옥의 툇마루나 음악의 정가(正歌) 같은 여유가 아닐까 한다. 채우기보다 비워서 나는 소리, 단선율의 수평적 음악인 정가를 듣고 있으면 들리는 소리보다 마음을 내려놓은 상태인 나를 들여다보게 된다. 여백에는 멈춤과 쉼표가 있다. 법정 스님의 ‘텅 빈 충만’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적당한 간격이다. 화폭에서 황금분할의 숨겨둔 공간이고, 어깨 힘을 뺀 간이한 행서체 같은 ..

좋은 수필 2024.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