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11 18

골목길 / 최재영

골목길 / 최재영연두빛 내력들이 제 몫의 봄을 키우느라햇살을 끌어 모으는 중이다허공 한구석 팽팽해지고골목에 나앉은 늙은 여자들볼우물 가득 생의 이력을 오물거리는지골목은 하루종일 분주하다봄의 한 복판에서 출렁이는저 환한 푸념들가지마다 탱탱하게 들어차는 수런거림한 순간 시간이 정지된 듯지상과 허공 그 짧은 간극으로물오른 생의 주름들이 펼쳐지고음탕한 농담 한 두 마디 건넬 때마다자지러지게 흩어지는 쭈글쭈글한 웃음소리잠시 생을 붉게 물들이는봄날 눈(眼)빛 환한 기억들이골목을 가득 메우고 있다담장에 기대앉은 봄꽃들한동안 그들이 피워올린 검버섯을 따라 올라가고여기 짧은 환희, 봄은 덫이었나.

좋은 시 2024.11.28

옹기 / 윤승원

옹기 / 윤승원  옹기 일가족이 베란다에 오종종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쌀이며 고추장을 담은 크고 작은 배불뚝이들이 반가운 얼굴로 나를 맞는다. 요즘엔 플라스틱, 스테인 그릇들이 대량으로 생산되어 옹기의 기능을 대신하고 있지만 그것들엔 물질문명을 지향하는 획일성만 있어 좀체 정이 가지 않는다. 그에 비해 옹기는 무뚝뚝하지만 언제나 따뜻한 흙의 질감을 느낄 수 있어 볼수록 친근감이 더해지는 것이다. 옹기는 질그릇과 오지그릇을 아울러 말한다. 질그릇은 오지잿물을 덮지 아니하고 진흙만으로 구워 만든 것이고 오지그릇은 붉은 진흙으로 만들어 볕에 말리거나 약간 구운 위에 오짓물을 입힌 것이다. 삼국시대부터 만들어진 옹기는 주 부식을 저장하거나 고추장 된장 등 양념이나 주류를 발효시키는 용구로 사용되었으며 세..

좋은 수필 2024.11.26

옛길을 걷다/허정진

옛길을 걷다/허정진길은 만남이고 소통이다. 인연을 만들고 세상을 만난다. 가고 오는 숨탄것들의 통로이고 울고 웃는 인생극장의 여백이다. 길목을 지나는 바람의 층계마다 사람 살아가던 시간과 풍경들이 시시각각 저장되어 있다. 그들만의 이야기와 숨결, 몸짓과 냄새들이다. 과거와 현재도, 미래와 영혼도 모두 길의 연장선상이고 삶의 여정이다. 하늘엔 새의 길이, 강에는 숭어의 길이 있다. 그대에겐 그대의 길이, 나에게는 나의 길이 있다.길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햇살이 따뜻한 곳을, 별빛이 반짝이는 곳을 연정으로 발걸음 하다가 오솔길이 생겨나지 않았을까. 강물 흐르는 대로 구름에 달 가듯이 고독으로 걷다가 나그네 길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처음 가는 길에는 이름이 없다. 그냥 발자국이고 흔적일 뿐이다. 화석처럼 나..

좋은 수필 2024.11.24

여백이 머무는 정자(亭子)/허정진

여백이 머무는 정자(亭子)/허정진간이역 같은 여백이다. ‘빨리’란 낱말이 낯설어지고, 째깍거리는 시간도 여기에서는 느려질 것만 같다.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손이 잠시 멈추고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올리는 정적 같은 것, 가마솥의 밥이 끓어 장작을 꺼내고 뜸을 들이는 시간 같은 것, 떠들썩한 목소리 대신 잔잔한 미소 같은 것, 그래서 여백은 한옥의 툇마루나 음악의 정가(正歌) 같은 여유가 아닐까 한다. 채우기보다 비워서 나는 소리, 단선율의 수평적 음악인 정가를 듣고 있으면 들리는 소리보다 마음을 내려놓은 상태인 나를 들여다보게 된다.여백에는 멈춤과 쉼표가 있다. 법정 스님의 ‘텅 빈 충만’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적당한 간격이다. 화폭에서 황금분할의 숨겨둔 공간이고, 어깨 힘을 뺀 간이한 행서체 같은 글씨다..

좋은 수필 2024.11.24

물독, 그 어느 날의 기억 / 허정진

물독, 그 어느 날의 기억 / 허정진  물 항아리에는 오래된 풍경이 세 들어 산다. 고향 옛집 낡은 공간마다 침묵 속에는 유년의 굴풋한 그리움이 흑백의 시간으로 숨어있다. 식구들 모여앉아 두리반을 펼치던 대청마루, 댓돌 아래 내려서면 아침 빗질 자국 선명한 마당이 있고 아래채에는 뒷간이 딸린 돼지우리가 있었다. 나지막한 돌담에는 호박넝쿨이 여름햇볕 아래 바지런히 기어오르고, 밤이면 빗살무늬로 쌓이는 달빛에 식구들 웃음이 휘영청 계절마다 익어갔다. 부엌은 안방과 대청마루를 끼고 집안 깊숙이 들어앉아 있었다.커다란 정지 문을 삐거덕 열고 들어서면 부엌은 동면에 든 굴속처럼 어두컴컴했다. 문틈 사이로 새어드는 햇살이 없었다면 비밀요새에 숨어있는 것 같았다. 반질반질한 가마솥과 부뚜막 아래에는 시커먼 아궁이가 ..

좋은 수필 2024.11.21

대장간을 엿보다 / 허정진

대장간을 엿보다 / 허정진단원 김홍도의 그림을 보신 적이 있나요. 18세기 말, 조선 후기 시대에 제작된 채색 민화랍니다. 설마 시골 장터에서 대장간 구경 한번 안 해본 사람이 있으려고요. 대장간은 쇠를 녹여 각종 연장을 만드는 곳으로 야방이나 야장간이라고도 한답니다.그림에는 풀무나 화덕, 소탕(燒湯) 외에 세세한 배경은 없지만 일하는 사람들의 표정과 동작이 사실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더군요. 앳돼 보이는 젊은이가 긴장된 눈길로 화덕에다 풀무질하고, 나이 든 집게잡이는 벌겋게 달구어진 쇳덩어리를 집어서 모룻돌 위에 올려놓고, 힘 좋은 메잡이 두 명이 긴 나무 자루의 쇠메로 번갈아 내리치는 그림입니다. 손님인 듯한 사내가 지게를 벗어놓고 큼직한 무쇠 낫을 숫돌에 쓱싹거리며 벼리고 있는 모습도 보이고요.“쩡..

좋은 수필 2024.11.21

행복한 콩 이야기 / 문갑순

행복한 콩 이야기 / 문갑순    나는 콩입니다. 콩깍지 속에서 형제자매들과 꼭 붙어 앉아 '콩콩콩'하고 내 이름을 불러 봅니다. 촌스러운 듯 하면서도 참 다정한 이름입니다. 나는 순수한 보라색 꽃을 피우고 가을이 깊어 가면 깍지 속에서 동그란 모양새를 가다듬습니다. 하도 오래되어 내가 어디서 이 한반도까지 오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나의 DNA를 추적해 보면 아득한 옛날 오륙천 년 전 드넓은 만주 벌판이 아스라이 기억납니다. 본디 나는 이렇게 통통하고 탐스러운 모양새는 아니었던 듯합니다. 기름진 토양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태양빛을 마음껏 받으며 나는 나대로의 삶의 찬가를 불렀지요. 그때 나와 함께 그 지역에 살던 백의민족, 선량하고 현명하던 그 백의민족은 나를 발견한 기쁨에 천지신명께 ..

좋은 수필 2024.11.13

아버지가 짓는 집 / 염정임

아버지가 짓는 집 / 염정임  아버지는 평생에 세 채의 집을 지으셨다.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마산의 언덕 동네에 지은 집은 안방과 건넌방 외에 뒷방도 있었는데, 뒷방은 방바닥에 전기 코일을 깔아 난방을 해결한 실험적인 방이었다.연구심이 많았던 아버지는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시도를 하신 셈이다. 그리고 마루가 깔린 조그만 응접실도 만드셨다.아버지는 집짓기를 좋아햐셨다. 틈만 나면 종이에 네모를 그리고 그 옆에 다른 네모를 덧붙이며 평면도를 그리곤 하셨다. 내 방은 어디에 있어요? 하면 네모 한 칸을 옆에 붙여 그리며 여기가 너희들 공부방이야 하셨다. 아버지는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듯 줄을 긋고 자우고, 다시 반듯하게 네모를 그리셨다.기둥을 세우고 대들보를 얹는 날은 상량식을 한다고 떡을 하고 동네 사람들..

좋은 수필 2024.11.13

봉정사 단청 / 강별모

봉정사 단청 / 강별모    단청에 대한 지식이 없다 보니, 고궁이나 사찰에 가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해 공부하게 되었다. 붉을 단(丹) 푸른 청(靑)을 단청이라고 하는데, 어찌 붉고 푸른색만 있겠는가. 백의민족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온갖 색을 동원해 그려낸 그림을 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다. 단청은 건물의 벽이나 천장, 기둥 등에 그림이나 무늬를 그리고 색칠하는 것을 말한다. 건축물 말고도 공예품, 고분, 불화, 동굴, 가구 등에도 단청으로 장식한다. 단청은 비록 장식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비바람이나 병충해에 갈라지고 썩어가는 것을 방지해 목재나 벽의 수명을 연장케 한다. 거친 표면과 상처를 감춰주는 역할뿐 아니라, 화재나 잡귀 등을 막아주는 상징적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작품의 품위와 위엄..

좋은 수필 2024.11.13

숨은 촉 / 김애자

숨은 촉 / 김애자    아침부터 굴착기가 들어와 다리 밑에 쌓인 흙을 퍼올리고 있다. 70년대 초에 새마을 사업으로 놓였던 다리를 헐어내고 다시 놓은 다리를 정비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열 푼 짜리 굿판에 떡값이 일곱 푼 격이었던 구시대의 유물이 사라지고, 철근을 촘촘히 박아가며 새로운 공법으로 소 잃기 전에 외양간 먼저 고쳐놓기 위해 벌인 공사가 시공한 지 한 달 만에 완공을 보게 되었다.지난여름 장마는 끔찍한 재난이었다. 일주일 동안 내리며 붓는 물벼락으로 곳곳에서 사람들은 목숨을 잃었고, 수천 평의 농지와 수십 채의 가옥이 토사에 묻혔다. 폭탄이 떨어진 자리처럼 폐허로 변해버린 수마의 상처는 전쟁의 상흔을 연상케 하였다. 그래도 오지마을인 이곳은 몇 군데의 산사태가 난 것과, 범람하는 물살로 약간의..

좋은 수필 2024.11.13

스펑나무야, 더 누르면 아파! / 고경서

스펑나무야, 더 누르면 아파! / 고경서  아주 무시무시한 동물들이다.분홍 코끼리를 통째로 삼킨 보아 구렁이처럼 벌러덩 드러누웠다가 서서히 꿈틀거린다. 묵직한 똬리를 풀어 지붕 위로 기어오르거나 땅을 짓밟고 깔아뭉갠다. 쓰러뜨린 담장에 걸터앉아 거드름을 피우며 생색내는 놈도 여럿 보인다. 하나같이 먹잇감을 잔뜩 움켜쥐고, 더 갖고 싶은 본능으로 무수히 뻗어나간 뿌리들.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다. 스펑나무를 두고 하는 말이다.앙코르 와트의 따프롬사원이다.크메르 왕조의 최대 전성기를 맞았던 자야바르만 7세가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기리기 위해 창건한 불교 사원이다. 하지만 지금은 나무들의 제국이다. 다양한 수목들이 이웃으로 살아간다. 지체 높은 거목들의 위용이 하늘을 찌를 듯하다. 기기묘묘하게 생긴 나무뿌리들이 ..

좋은 수필 2024.11.13

6월의 오후/황진숙

6월의 오후/황진숙  나른한 오후다. 세상 만물이 오수에 들었는지 고요하다. 아직 한여름은 도착하지 않았는데 마당의 기운은 습하고 끈적하다. 무심하게 내리쬐는 햇살마저 지루하다.오랜만에 들른 시골집이다. 굳게 잠긴 현관문이 부재중인 주인을 대신에 출입을 막아선다. 낯선 이의 등장에 백구가 요란하게 짖어댄다. 제 밥그릇도 못 알아보는지 찌그러진 양은 냄비가 목줄에 쓸려 마른 먼지를 일으키건 말건 이리 뛰고 저리 뛴다. 마당 한 귀퉁이엔 연탄재가 비닐봉지에 담긴 채 방치되어 있다. 진즉에 두어 계절이 지났건만, 여전히 겨울을 품고 있는 시골집이 답답하다. 며칠째 물을 못 얻어먹었는지 수국이 바짝 말라 시들하다. 보다 못해 수도꼭지를 튼다. 물을 담아서 뿌려줄 요량으로 물뿌리개를 가져다 댄다. 콸콸거리며 쏟아..

발표작 2024.11.10

간조/김시윤

간조/김시윤 아침햇살이 붉은 물비늘을 흔들어 대며 솟아오른다. 작은 포구가 어느새 왁자해진다. 낚시꾼들이 부려놓은 생물들의 몸짓이 분주하다. 더나온 곳이 그리운 저마다의 몸부림일테지. 떠난 후에야 그리워지는 이유를 그땐 나도 알지 못했다. 발을 딛지 못할 곳에 서 있으려면 몸부림이라도 쳐야 하는 거지. 분주한 움직임들을 쫓던 내 눈길은 은빛 갈치에 가서 멈춘다. 사람들의 손짓에 이끌려 당겨지고 미끄러지는 몸짓이 서럽다. 분명 바다의 자식이련만 땅에 깔린 파란색 비닐 깔개 위를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 어찌하여 얄팍한 미끼 하나 피하지 못하고 뭍으로 오르고 말았는가. 지느러미 속에 갇힌 날개를 펼치고 푸른 하늘을 날고픈 욕망이 미늘의 속셈을 알고도 물고 말았을 테지. 나는 안다. 날개를 꿈꾸며 하늘을 향해 ..

좋은 수필 2024.11.08

구석자리 / 도창회

구석자리 / 도창회    지구란 땅덩이가 둥글다는데 둥그런 땅덩이 위에 무슨 구석자리가 있다던가. 구석자리는 늘 썰렁한, 그런 장소이던가.옥상의 구석자리는 폐화분이 놓여있고, 부엌 구석자리에는 신 김치 독이 있고, 마루 밑 구석자리에는 털 빠진 똥개가 자리잡고, 마당 한구석에는 거름자리가, 변소간 구석자리는 똥장군이 놓여 있다.그런가 하면 할아버지가 기거하는 사랑방 구석자리에는 요강단지가 차지하고, 책상 밑 구석에는 휴지통이 있고, 카센타 사무실의 구석자리는 늘 시다바리가 앉는 자리다. 그러니깐 별볼일 없다. 싶은 것들은 모두 구석자리로 밀려나 있다.그리고 밭뙈기 구석자리에는 호박 심을 똥구덩이가 있고, 담장 밑 구석은 하수구가 자리하고, 난시장 구석자리에는 공중변소가 놓여 있다.지하철 구석자리는 노숙자..

좋은 수필 2024.11.06

호미병원에서 / 김덕임

호미병원에서 / 김덕임  온몸이 벌겋다. 호미는 모루 위에서 알몸으로 두들겨 맞고 있다. 쇠망치를 든 사내의 이마는 진땀으로 번들번들하다. 그는 작은 몸이 불덩이로 변해버린 몽톡한 호미를 엎었다 뒤집었다 한풀이하듯 두들긴다.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강자끼리 겨루는 힘의 꼭짓점. 아니다. 닳아버린 무쇠붙이에게 수백 도의 불까지 먹여가며 마음대로 구부렸다 폈다 굴복시키는 영악스런 인간의 불 고문이다. 수원 지동 못골시장 ‘동래 대장간’, 요즘도 누가 대장간을 찾을까? 그런데 오늘 그곳을 긴하게 찾게 되었다. 자루는 깨지고 날도 무너져서 고철이 되어버린 녹슨 호미를 데리고서. 이 호미는 시어머니가 생전에 쓰던 것이다. 그때는 어머니의 갈퀴 손과 하나인 듯 경계가 없었다. 지금도 깨진 자루를..

좋은 수필 2024.11.04

와목臥木/ 최경숙

와목臥木/ 최경숙  나무가 기어간다. 달팽이가 더듬이를 세워 포복하듯 나무 둥치가 땅에 붙었다. 땅에 누워 몸통을 박은 뿌리는 머리를 하늘로 쳐들었고 줄기는 네댓 개 팔처럼 벌렸다. 생명을 놓치지 않으려는 몸부림인가. 욕망이 생존의 표상으로 비친다. 생명의 끈질김. 밤낮으로 기어가는 나무의 기운이 백 년의 세월을 이겨낸다. 태어나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생명은 없다. 새도 벌레도 사람도 태어나는 곳은 물론, 자라는 곳 죽는 곳도 쉼 없이 바뀐다. 개체마다 종족마다 매번 장소가 달라진다. 하지만 나무는 한 곳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라고 같은 곳에서 죽는다. 땅에 누운 고목의 몸체를 보니 그 생각이 더욱 뚜렷해진다. 김수로 왕릉공원을 찾았다. 유년시절을 추억하며 숲속으로 들어섰다. 가락국의 번..

좋은 수필 2024.11.01

가랑잎자서전/민진혜

가랑잎 자서전​                                                           민진혜​등 굽은 지팡이에 몸을 싣는 저물녘나른한 공원 벤치 낮달 함께 앉은 그대숨소리 바스락바스락, 뼈가 닳은 노인이다​해를 쫓던 녹음이며 뜨건 비도 쪼개 담아한껏 부푼 정복의 꿈 흙에 도로 뱉어낸다바람이 읽는 판결문 무릎 꿇고 들으며​꿈에 기댄 지난날도 돌아보면 아지랑이보풀 같은 겹을 누벼 나이테에 새겨둔 채뒤틀린 뿌리에 안겨 별의 안부 건넨다​제1회  시조 부문 대상                          물풀                                                   백점례불볕 터진 들녘 너머 풀떨기 못물 아래따라지들 몰려들어 스크럼을 짜고 있다..

좋은 시 2024.11.01

주전자 / 최장순

주전자  / 최장순                                                                         ‘酒전자’. 붉은 글씨가 내 눈을 낚아챘다. 술 酒, 삼수변만 보아도 컬컬한 목이 확 트일 것 같다. 주점이 연상되는 기발한 간판의 글씨에 벌써 불콰한 기운이 가슴 저 안쪽에서 올라오듯, 금방이라도 막걸리가 양은 대접으로 콸콸 쏟아질 것만 같다.   한 잔 걸치고 싶은 최근 무렵, 저 간판이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군상들을 불러 모을 것이다. 내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다는 듯 간판 옆으로 집어등集魚燈 처럼 매달린 주전자들은 하나같이 찌그러져있다. 하기야 점잖은 얼굴로 나올 수 없는 곳이 주점이다. 화풀이라도 할 냥이면 냅다 무언가를 발로 차야할 것, 그..

좋은 수필 2024.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