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문 / 김미향비가 내린다. 허공이 젖고 나도 젖는다. 저녁나절에 깃든 적막한 폐사지. 부처가 없다고 사찰이 아닐까. 범종이 보이지 않는다고 그 소리를 듣지 못할까. 폐허라도 언제나 금당이고 대적광전인 것을. 빈 윤회의 공간을 지키는 불탑이 서럽도록 장엄하다.세월이 삼층 석탑의 기상만은 꺾지 못했다. 맨 위 노반의 한 모서리만 풍상에 내주었을 뿐 흐르는 시간에서 비켜난 듯하다. 임진왜란 때 재가 되어버린 법수사의 맥을 잇고자 석탑은 부처를 대신해 천 년이나 생불의 삶을 살아왔다. 자신을 버려둔 세상이 노여울 만도 하련만 하루하루 웅숭깊은 숨을 가다듬으며 불법을 전하고 있다. 순정한 시간 앞에 엄숙해진다.매장 문화재 보호 및 발굴, 훼손의 행위를 금한다는 안내문이 눈길을 보내온다. 석탑과 빈터를 에두르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