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전기스탠드/이규리

에세이향기 2025. 4. 3. 09:07

전기 스탠드

이규리



사물도 존재다.

동그라미는 그렇게 왔다. 처음 큰언니가 초록색 플라스틱 갓이 달린 탁상용 전기스탠드를 사와 불을 밝혔을 때 책상 위엔 태초인 듯 환한 동그라미가 생겨났다. 그 둘레의 안쪽은 두근거리는 새 세상인 듯 동그라미를 가득 채운 빛은 뭔가 이전과 다른 세계를 펼쳐 보여줄 거라는 뜬금없는 기대를 갖게 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쉬 빨리 오지 않았다. 전기스탠드를 차지하려는 인구는 일곱이었고 내 차례는 맨 마지막이었으니까. 배급을 기다리는 줄이 그만큼 지루했으리라 비교하기도 했다. 백열등 하나가 천장에 달랑 매달려 방 안 곳곳에 분산된 빛을 뿌리던 일에 비하면 그 환한 동그라미는 불빛이라는 존재를 단숨에 인간 가까이 당겨놓고 있었다.

그 테두리 안의 세상을 차례로 차지하던 언니들의 등은 너무도 넓고 커서 내 차례는 멀었고 내 자리의 그늘은 더욱 짙게 보였다. 둥근 불빛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줄 수 있을까. 그 안에 있으면 모든 미래가 아름답게 흘러드는 것일까. 그러던 어느 날, 어쩌다 새벽녘에 눈을 떴을 때 책상은 텅 비어 있었고 환호하며 다가가 더듬더듬 스위치를 올렸을 때 딸깍하던 그 소리의 촉감을 잊을 수가 없다. 모든 빛이 한곳을 향해 모이고 있었고 내 삶이 춥고 외로워도 이 불빛 아래서는 위로되리라 믿고 싶었다. 잠시 그 둥근 나라에 속했던 순간은 따뜻했다. 어둠을 뚫고 유일하게 한 사람을 위해 존재하던 빛, 그렇게 동그라미는 왔다.

이제 스탠드는 더 이상 귀한 물건이 아니고 동그라미 안의 세상이 찬란한 것만은 아니나 여전히 그것은 내게 특별하다. 아직도 디지털적인 터치식보다 아날로그적인 스위치를 고집하는 이유는 딸깍할 때의 그 청각과 촉각을 포기할 수가 없어서이다. 종일 다니다가 돌아와 앉으며 가장 먼저 스탠드의 스위치를 올릴 때, 비로소 나에게로 돌아오는 시간인 것이다. 딸깍, 정지된 시간이 반짝 살아 있다는 눈짓과 함께 달려오는 일. 어떤 부름이 무어라 이리도 절실하게 다가오겠는지. 무어라 충실하게 전신을 다 내어 봉사하겠는지.

때때로 긴 밤을 지날 때도 오직 그가 함께 있었다. 밀린 작업을 하다가 문득 어깨를 펼 때 혼자 눈을 동그랗게 뜬 스탠드가 거기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강한 유대감이 들었다. 견뎌준 것이었다. 함께 온 것이었다. 그 시간과 공간에 오직 그가 제일 가까운 곳에서 나를 지켜준 것이었다. 내 방은 필로티 위에 자리해서 겨울이면 꽤 추웠는데 나는 손이 시릴 때면 전등갓을 감싸 쥐곤 했다. 그걸 안다는 듯 얼른 전해주던 온기, 체온은 동물에게만 있는 게 아니었고 나는 그에게서 하나의 존재를 느끼기 시작했다. 언제부턴가 사물들에게 존재성을 부여하고 있었는데 살아 움직이는 존재들이 늘 배반이고 갈등이며 욕망인 데 비해, 사물들은 정직하고 충실하고 또한 한량없어서 물성의 신성함을 확인하기도 했다.

둥글게 밝힌 스탠드 불빛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능성을 완성해왔을까. 필요한 시간, 필요한 장소에 존재했던 불빛의 기능 역시 ‘지금 여기’의 사명에 충실했을 것이다. 어둠 가운데 핀 한 송이 꽃, 그 집중은 누구에게서나 긍정적으로 피어났을 것인데, 그러나 나는 종종 그에게 미안하다. 나에게 와서 그는 좋았을까. 언제나 밝은 빛을 주었으나 나는 무지했고 생을 허비했으며 또 상당 부분 세계를 잘못 보았으니, 게다가 환하고 둥근 불빛 아래서 참담하게 무너진 시간은 또 얼마였는지 헤아릴 수 없다.

스탠드는 꺼진 곳에서 다시 켜진다. 내가 넘어진 곳에서 다시 일어나야 하듯이 그는 이러한 나를 봐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환히 눈 뜨고 있는 동안 우리는 더 이상 치사할 수도 졸렬할 수도 없다.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스위치를 올리는 시간이 있고, 스위치를 올리면 어김없이 달려오는 불빛이 있는 한, 지난한 현실이지만 다시 미래를 들이밀면서 계속 나아가보는 거다. 그가 어둠을 밝혀주는 한 적어도 내일이 더 나아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죽을 때까지 진보할 작정이다.”라는 나쓰메 소세키의 말을 나지막하게 들려주며 나 스스로에게도 다짐해보는 게 그에 대한 예의일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