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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에세이향기</title>
    <link>https://adoongaa.tistory.com/</link>
    <description>황진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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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nguage>ko</language>
    <pubDate>Tue, 7 Apr 2026 06:45:5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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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nagingEditor>에세이향기</managing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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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에세이향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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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막장/김정화</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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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p id=&quot;SE-79d0f53d-5166-4d61-b95c-c2bc44eb84b0&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252525;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252525;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555555; 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막장/김정화&lt;/span&gt;&lt;/p&gt;
&lt;p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252525;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252525;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555555; 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우거진 잡목 사이로 낮은 가옥들이 보인다. 머리 위로 고가다리가 놓였고, 산자락에는 소담한 논밭이 늘어졌으며, 굽은 실개천이 내림길을 따라 흐르고 있다. 마을 뒤쪽으로 달음산 고개가 있어서인지 드문드문 등산객이 산길로 향한다. &lt;/span&gt;&lt;/p&gt;
&lt;p id=&quot;SE-dc247bb4-b5a9-4e62-9b01-816fd8cbd7da&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252525;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555555; 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 어렵게 찾은 길이다. 한때 지옥마을이라 불렸던 비운의 땅, 강제징용의 흔적들이 군데군데 남아 있는 오지 마을, &amp;lsquo;꽃 피는 광산마을&amp;rsquo;이라는 팻말이 떡하니 마을 어귀를 밝히고 있다. 아, 그러고 보니 찬바람 부는 들길 가장자리와 깨밭 이랑에도 섬섬하게 취꽃 군락이 일렁인다. &lt;/span&gt;&lt;/p&gt;
&lt;p id=&quot;SE-f742edc1-e4f7-4766-acc8-5c96ef89f404&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252525;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555555; 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 옛집들이 그대로다. 지붕 밑에 지붕을 덧댄 일명 눈썹처마를 단 가옥들이 다닥다닥 모여 있다. 산언덕 가장자리와 비탈진 땅에 옹벽을 쌓아 올린 집들이라 다랑논처럼 층층이 지붕이 내려앉았다. 마치 의도적으로 서열을 나뉘어 배치한 듯 일본인 고위직의 사택이 가장 높은 곳에 지어졌고 그 아래 일본 간부들 집이 남았으며, 한국 노역자들의 가옥은 더 낮게 더 작게 담을 붙여 놓았다. 좁은 앞마당 사이로 빼꼼히 열어놓은 방 안이 훤히 보인다. 그래서인지 반듯하게 신축된 마을회관이 오래된 담장 사이에 어정쩡히 끼어 있는 것만 같아 되레 낯설다. 광산촌 입구와 주변 산사 길목에 백여 가구가 빽빽이 거주하며 번성하였던 적도 있었다지만, 이제는 모두 옛말이 되어 버렸다.&lt;/span&gt;&lt;/p&gt;
&lt;p id=&quot;SE-1cf4f508-19b1-4799-8201-2a5d8e95443b&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252525;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555555; 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 골목길을 휘돌아 나오는데 공터 한쪽 평상에 호호백발의 할머니 서너 분이 모여 있다. 짐작대로 모두 광부의 미망인이라 했다. 옛일을 물었으나 가물가물한 기억에 애매한 답만 오간다. 현재 남은 마흔여 명의 주민들은 대부분 외지에서 들어왔거나 해방 이후부터 거주한 까닭에 슬픈 역사를 제대로 아는 이도 드물다. 오히려 광산의 전성기를 경험한 광부 부인들은 돈벌이가 잘되었던 시절을 기억하며 이곳을 황금의 땅으로 인식한다. 월급날이면 광산마을 장정들이야말로 읍내 술집에서 기마이 좋기로 소문났으니, 그 추어올림에 힘든 시간도 고단한 작업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을까.&lt;/span&gt;&lt;/p&gt;
&lt;p id=&quot;SE-9feb7cee-dec8-405a-b7c7-28674974283a&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252525;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555555; 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 갱도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일반인은 출입 금지가 되었다. 멀리 푸른 철조망이 어렴풋이 보이는 듯하다. 그 속으로 시커먼 지옥도 같은 굴이 펼쳐졌을 테고, 아래로 더 깊이 내려갈수록 순식간에 생사가 갈라지는 사투의 현장이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lt;/span&gt;&lt;/p&gt;
&lt;p id=&quot;SE-7c2e016b-43f4-46af-b406-95acdbc09e7d&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252525;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555555; 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 누가 광부가 되는가. 물론 식민통치 때는 억울하게 광부가 되었으나, 세상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자들이 스스로 광부가 되었을 때도 있었다. 땅 위의 세상에서 더는 희망이 없을 때, 돈을 벌겠다는 일념으로 독기를 품고 시커먼 굴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래서 광부들이 일하는 곳을 막장이라고 부른다. 갱도의 맨 끝,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곳, 앞이 막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막다른 공간, 인생의 절망보다도 더 캄캄한 세상, 긴장을 놓쳐버리면 목숨줄이 끊어지는 곳, 어쩌면 그곳이 세상의 끝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러니 광산촌 사람들에게 금기어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lt;/span&gt;&lt;/p&gt;
&lt;p id=&quot;SE-9fc4c3d9-81d7-45bf-ae6f-18ec41d73033&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252525;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555555; 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 하지만 생각을 달리하면 오기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곳도 막장이다. 누군들 막장까지 내려갔던 삶이 없었을까. 내가 아는 박 부장도 딱 삼 년간 광부로 살았다. 그가 하던 사업이 무너졌고 통장의 잔고는 바닥이 났으며 집은 일찌감치 은행으로 넘어갔다. 끝까지 함께한 네댓 직원들의 밀린 임금과 퇴직금이 발목을 잡았다. 전세금을 찾았고 부인의 반지를 빼냈으며 두 딸의 피아노가 트럭에 실려 나갔다. 막장에서도 양심마저 버리지 않던 그가 선택한 방법은 진짜 막장 바닥이었다. 그는 검은 막장에서 검은 울음을 토하면서 견뎌내었고 기약했던 광부 생활을 마치고 목숨 같은 임금을 쥐고서 당당히 가족을 상봉했다. 지옥인 굴속에서 채탄 광부로 일한 그 종잣돈으로 지금 그는 아내와 함께 조그만 식당을 꾸려가고 있다. &lt;/span&gt;&lt;/p&gt;
&lt;p id=&quot;SE-3676ffb3-7bc1-48eb-964d-f1e75bf5c952&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252525;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555555; 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 창작의 고통을 안은 산실을 두고도 작가들은 저마다의 은유로써 이름을 붙여왔다. 소설가 김훈은 자신의 서재를 막장이란 말로 표현했다. 어찌 가만히 책상에 앉아 글 쓰는 일을 가지고 목숨이 달린 갱도의 막장과 비교할 수 있을까마는, 막장의 굴을 파듯 생사를 걸고 한 땀 한 땀 글 삽을 파는 글쟁이들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는 막장에서 광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딱 두 가지뿐이라고 한다. 앞으로 더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멈출 것인지 결정하는 일이라는 것을. 만약 멈추기를 선택했다면 내려왔던 길을 따라 지상으로 되돌아가면 된다. 하지만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싶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단단한 벽을 파내어야 할 것이다. 갱도를 개척하려는 의지를 갖고 곡괭이를 들 수 있는 곳이라면 세상 어딘들 막장 아닌 곳이 있으랴.&lt;/span&gt;&lt;/p&gt;
&lt;p id=&quot;SE-38ca13fa-2fe1-45b1-a96a-521298e3939a&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252525;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555555; 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 이런저런 생각이 깊어지는 즈음, 광산 갱도로 들어가 중석을 작업하여 먹고 살았다는 광부 미망인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옥수수를 한솥 쪄오고 어떤 이는 콩나물 국수를 삶아왔다. 훈훈해지는 인정에 광산마을 노인들은 저세상으로 떠난 광부 남편 이야기도 웃으며 한다. 바깥양반이 쇠와 돌을 지고 십 킬로미터까지 내려가서 작업했다고, 장정들이 무거운 광석을 지고 오면 여자들은 물에 걸러 서울 제련소로 보냈다고도 하고, 저 아랫골에 사는 광부는 굴속에 빠져 죽었다는데, 그 양반만 죽은 것이 아니고 그전에는 셀 수도 없었다며 목소리를 낮춘다. 그래도 그 굴 막장이 자기네들의 밥줄이 되어주었다며 아무렇지도 않게 후루룩 국수를 삼킨다. 평상 앞에 덩그러니 남은 동네 우물만이 당시의 진실을 알고 있을 터.&lt;/span&gt;&lt;/p&gt;
&lt;p id=&quot;SE-277b4a05-eb5e-48b6-8b0e-a956cd6bcc1c&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252525;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555555; 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 멀리 광부들이 다녔던 길을 올려다본다. 살기 위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무거운 짐을 지고 오르내렸던 고행의 길. 그 길에도 계절마다 꽃이 핀다. 어디 흙 위에서 피는 꽃만 꽃이던가. 붉은 녹물 내리던 실개천도 이제 흰 물꽃이 흐르고 달음산 능선 위로는 노을 꽃이 물들며 손 흔들어주는 늙은 광부 아내의 머리에는 서리꽃이 피었다. &lt;/span&gt;&lt;/p&gt;
&lt;p id=&quot;SE-7d41b030-adff-4e8b-9641-0e6a503ec0f5&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252525;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555555; 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 마을을 벗어나는 비포장길을 달리는데 이리저리 차가 흔들린다. 아니, 막장까지 무너졌던 한 여자의 옛 기억이 스멀스멀 돋다가 골바람 따라 이지러지는 중이다. &lt;/span&gt;&lt;/p&gt;
&lt;p id=&quot;SE-121261dd-204a-4d1a-b321-6281dd1688f4&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252525;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555555; 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lt;/span&gt;&lt;/p&gt;
&lt;div&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div&gt;</description>
      <category>좋은 수필</category>
      <author>에세이향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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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s://adoongaa.tistory.com/2722#entry2722comment</comments>
      <pubDate>Sun, 5 Apr 2026 08:57:54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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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봄이라 말하고 몽(夢)이라 쓴다 / 장미숙</title>
      <link>https://adoongaa.tistory.com/2721</link>
      <description>&lt;div id=&quot;SE-6385a7aa-55b9-477e-a016-e7eb092389f3&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000000; text-align: left;&quot;&gt;
&lt;div&gt;
&lt;div&gt;
&lt;div style=&quot;color: #000000;&quot;&gt;
&lt;div&gt;
&lt;p id=&quot;SE-936b4ded-33a8-4bd8-a01e-4774b42f636b&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봄이라 말하고 몽(夢)이라 쓴다 / 장미숙&lt;/span&gt;&lt;/p&gt;
&lt;/div&gt;
&lt;/div&gt;
&lt;div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amp;nbsp;&lt;/div&gt;
&lt;/div&gt;
&lt;/div&gt;
&lt;/div&gt;
&lt;div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000000; text-align: left;&quot;&gt;
&lt;div id=&quot;SE-0e122710-c997-43e8-b401-99ff3dde7c01&quot;&gt;
&lt;p id=&quot;SE-166331ea-d277-411e-aaba-997b8a56343b&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 며칠 사이 무르익은 봄이 팡팡 터지더니 집 주위가 꽃 빛으로 찬연하다. 꽃향기가 무연히 퍼지는 오후, 거실 소파에 앉아 두꺼운 책을 펼친다. 햇볕이 숨은 감각을 건드리는가 싶더니 이내 몸이 나른하다. 세상의 소리가 아득해지며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는다.&lt;/span&gt;&lt;/p&gt;
&lt;p id=&quot;SE-26821224-1776-4e7b-b02d-95e115e3e1a0&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id=&quot;SE-de8fe00d-6ed8-4b54-afae-7d32dc5b50c0&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 담벼락에 어리는 그림자가 풍성하다. 계절이 바뀌고 있음은 그림자만 봐도 알 수 있다. 은행나무는 허공으로 손을 뻗고 감나무는 밑으로 가지를 늘어뜨린다. 연둣빛 이파리에 살이 오르면서 바람 색깔도 달라졌다. 머잖아 그림자도 짙어지겠다. 자그마한 항아리 서너 개가 허리를 맞댄 장독대 위로 여린 햇살이 가지런하다. 키 작은 꽃들도 물이 오르는지 꽃대가 투명하다.&lt;/span&gt;&lt;/p&gt;
&lt;p id=&quot;SE-db4e55b1-8bd1-4e8b-b11e-8a61bb715be5&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 삽상한 공기가 주위를 맴돈다. 건너편 산을 바라본다. 산등성이 아래 골짜기마다 뽀얀 안개가 차란차란하다. 초여름의 시골 풍경은 물기 머금은 촉촉한 옷감 같다. 도시든 시골이든 아침은 기가 용솟음치는 시간이다. 생각이 돌고 머릿속이 환해지며 무뎌진 감각이 예민해진다.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버릇은 환경이 바뀌었지만 여전하다.&lt;/span&gt;&lt;/p&gt;
&lt;p id=&quot;SE-f30ed431-ccba-4cb4-a7c2-1e5b67a22e6c&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 스트레칭을 한다. 편안한 색의 데크가 놓인 마당 한쪽은 맨손체조 하기에는 그만이다. 팔다리를 쭉쭉 늘여 지난밤의 피로를 털어낸다. 댄스곡이 팔랑팔랑 바람을 타고 담을 넘어간다. 꿈에 그리던 아침 풍경이다.&lt;/span&gt;&lt;/p&gt;
&lt;p id=&quot;SE-b2d0111d-fa46-4e69-bbce-3639dfdecb77&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 음악 소리에 잠이 깬 S가 창문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이내 옷을 추슬러 입고 나온다. 그녀의 얼굴에 지난밤 꿈이 매달려 있다. 그녀도 고개를 돌리고 팔을 늘이며 다리를 구부린다. 입에서는 에구구, 소리가 후렴처럼 터진다. 요사이 조금 후덕해진 몸이 보기 좋다.&lt;/span&gt;&lt;/p&gt;
&lt;p id=&quot;SE-653fcdd9-3d72-4212-be14-d23da9a99978&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 시골로 내려오니 밥맛이 돈다며 입이 터지도록 상추쌈을 먹는 그녀다. 꽉 짜인 생활에서 풀려나자 게으름을 피우기도, 늑장을 부리기도 한다. 운동을 하다말고 그녀가 장독대 밑으로 달려간다. &amp;ldquo;세상에, 이것 좀 봐. 어쩜 색깔이 이럴까. 예쁘다.&amp;rdquo; 그녀답다. 보라색의 낭창한 겉꽃잎 안에 하얀 속꽃잎이 단정한 매발톱꽃이다. 지난해부터 자생하더니 세력을 넓혀 어느새 주위에 군락을 이뤘다.&lt;/span&gt;&lt;/p&gt;
&lt;p id=&quot;SE-3762bf6f-87d1-4c51-9f8f-b5a4569c7b85&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 그녀는 쪼그려 앉아 한참 꽃과 눈을 맞추고는 생각난 듯 외벽에 걸린 훌라후프를 든다. 훌라후프를 돌리는 그녀의 얼굴이 점차 발갛게 물들어간다. 허리를 감싸고 도는 동그란 운동기구가 가라앉은 공기를 탁탁, 쳐올린다. 고양이 한 마리가 열린 대문으로 들어오더니 담 쪽에 웅크려 앉아 눈치를 살핀다. 생선 찌꺼기를 몇 번 얻어먹은 녀석이다. &lt;/span&gt;&lt;/p&gt;
&lt;p id=&quot;SE-9289eecd-97c8-40c7-9af3-e633d8206aa4&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 K가 잠든 방은 아직도 조용하다. 창문을 두드리자 그녀가 &amp;ldquo;끙&amp;rdquo; 하고 돌아눕는다. 지난밤에도 손뜨개를 했는지 방 한편에 실보무라지가 소복하다. 책상 위는 올망졸망한 뜨개 인형 집합소다. 온갖 동물과 캐릭터, 공주와 왕자 인형도 있다. 손으로 하는 건 뭐든 잘하는 그녀 방은 소품 가게 같다. 인형들이 사는 나라에서 그녀만 인간 거인이다. 방귀 한 방을 오지게 날린 그녀가 신발을 끌며 나온다. &amp;ldquo;왜 이리 빨리 일어나냐고. 좀 편하게 살자고.&amp;rdquo; 늘어지게 하품하는 그녀도 이제 나이가 보인다. 우리는 깜냥껏 자유로운 공간에서 몸의 언어를 풀어낸다.&lt;/span&gt;&lt;/p&gt;
&lt;p id=&quot;SE-6669cb5f-82d5-4dd4-b2df-d687fced6aca&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 동쪽 하늘이 발갛게 물드는 걸 보니 해가 곧 뜰 모양이다. 갑자기 K가 흥이 났는지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스텝을 밟는다. 엉망진창 막춤에 S가 배를 잡는다. 웃음소리가 소녀 같다. 고양이가 놀랐는지 담벼락을 타고 줄행랑 친다.&lt;/span&gt;&lt;/p&gt;
&lt;p id=&quot;SE-bd6b0172-e73e-4422-b790-0c840edf73e7&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 한결 몸이 가뿐해진 우리는 곧 부엌으로 향한다. 부엌 중앙을 차지한 동그란 식탁 주위로 세 개의 의자가 놓여 있다. 아침 준비를 시작한다. 야채를 씻는 S, 국물을 준비하는 K, 나는 밑반찬을 접시에 담고 밥을 푼다. 이제는 서로의 눈빛만으로도 동선을 파악한다.&lt;/span&gt;&lt;/p&gt;
&lt;p id=&quot;SE-7923655c-2c5e-4383-b6ed-b3824572556a&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 아침에 유난히 밥맛이 도는 나에 비해 그녀들의 아침은 간단하다. K가 가게에서 먹을 간식을 준비한다. 그러는 사이 S와 나는 주변을 정리한다. 한 시간 정도 출근 준비가 끝나면 우리는 작은 경차를 타고 시내로 나간다. S가 운전하고 K는 시종일관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lt;/span&gt;&lt;/p&gt;
&lt;p id=&quot;SE-f428dca1-8821-4942-91c6-9df7730575d0&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 우리가 도착한 곳은 조그마한 카페다. 세 개의 테이블이 있고 주방 한편에는 작은 휴게공간도 있다. 커피와 각종 차, 샌드위치를 만들어 판다. 샌드위치는 주로 내가 만들고 S와 K는 차와 서빙 담당이다. 처음에 가게를 시작했을 때는 우왕좌왕했다. 경험이 없는 데다 나이 들어서 다시 일한다는 게 쉽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일 년이 지난 지금은 자리가 잡혔다. &lt;/span&gt;&lt;/p&gt;
&lt;p id=&quot;SE-8cabee65-39fc-4d1e-96ce-e36a83cf7cc5&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 평균 나이 예순다섯인 우리는 오랜 친구이고 한동네에서 삼십 년을 살았다. 노후에는 한집에서 지내자며 막연하나마 꿈을 키운 게 시작이었다. 셋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카페를 차렸다. 서로 뜻이 같았으므로 홀가분하게 도시를 떠나 시골에 정착할 수 있었다. 시내에서 가까운 곳에 살 집을 마련했다. 원래 있던 시골집을 개조해 방 세 개와 부엌, 화장실, 거실을 들였다. 셋이 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마당이 넓어서 텃밭도 만들었다.&lt;/span&gt;&lt;/p&gt;
&lt;p id=&quot;SE-44b27f0d-b2bf-4ac9-bfdb-08294afc3e90&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 처음부터 쉬운 건 아니었다. 성격이며 취향을 잘 아는 사이지만, 한집에서 사는 건 다른 문제였다. 몇 번 와해 될 위기도 넘겼다. 하지만 서로를 필요로 했기에 다시 마음을 모을 수 있었다. 우리는 장사보다 삶의 질을 우선했다. 낮에만 장사하게 된 이유였다. 노후의 취미생활도 놓치지 않았다. K는 그림을 그리고, S는 라인댄스를 즐겼다. 나는 틈틈이 글쓰기에 몰입했다. &lt;/span&gt;&lt;/p&gt;
&lt;p id=&quot;SE-55c03465-1820-4f6b-b0ad-1b0ceaa258e5&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 일이 끝나면 우리는 함께 경차를 타고 집으로 향한다. 변화보다는 주어진 삶에 감사하는 날들이다. 오늘도 가게 문을 닫고 막 출발하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뒤에서 요란한 경적이 울렸다. &lt;/span&gt;&lt;/p&gt;
&lt;p id=&quot;SE-56e16df1-47c0-4397-8b54-bc582a52d9a4&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id=&quot;SE-675e975b-4523-4106-9a1c-37f32da8db0a&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나는 거실 소파에 반쯤 기대 있었다. 몽롱한 상태가 한참 이어졌다. 자동차 경적은 계속 울려댔다. 정신을 차리고 밖을 내다보았다. 아파트 주차장 앞에서 택시가 길을 가로막은 자동차를 향해 빵빵거리는 중이었다. 화단 옆 나무 우듬지에서 일제히 새들이 날아올랐다. 동시에 벚나무에서는 꽃잎이 흩날렸다. 달보드레한 햇빛 아래 꿈꾸기 좋은 봄날이었다.&lt;/span&gt;&lt;/p&gt;
&lt;p id=&quot;SE-9781cc28-a2c1-4494-b200-5ec17b485c6c&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lt;/span&gt;&lt;/p&gt;
&lt;div&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div&gt;
&lt;/div&gt;
&lt;/div&gt;</description>
      <category>좋은 수필</category>
      <author>에세이향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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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s://adoongaa.tistory.com/2721#entry2721comment</comments>
      <pubDate>Sun, 5 Apr 2026 08:25:1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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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요강송 / 정장영</title>
      <link>https://adoongaa.tistory.com/2720</link>
      <description>&lt;p id=&quot;SE-2a3901e7-f971-4801-86c3-4567dcc0b35e&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6d6d6d;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00; 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lt;b&gt;요강송 / 정장영&lt;/b&gt;&lt;/span&gt;&lt;/p&gt;
&lt;p id=&quot;SE-20d318bb-68f0-4895-bf78-c90996dafb18&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6d6d6d;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id=&quot;SE-0bbc4ffa-7836-4207-b701-337f2fe6dd03&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6d6d6d;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id=&quot;SE-3429e17c-2db8-44d0-a353-e30cb053305b&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6d6d6d;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00; 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나이 지긋한 사람들은 밤중에 윗목에 놓인 요강에 시원하게 방뇨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요강의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 그나마 그것이 없었다면 요즈음같이 집안에 화장실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자다 말고 소변이 마려우면 뒷간까지 가야 한다. 그러니 깜깜하기도 하고, 겨울이면 춥기도 할뿐더러, 무섭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여 더러는 참기도 했었다.&lt;/span&gt;&lt;/p&gt;
&lt;p id=&quot;SE-a8c627c6-abc1-4d41-955b-1a76ec0aa3db&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6d6d6d;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00; 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배설排泄은 흔히들 건강을 위한 삼쾌(쾌식快食, 快眠, 快泄)의 하나다. 지금 생각하니 요강이란 걸 만들어 사용한 조상님들의 지혜가 참으로 훌륭했음을 느끼게 된다. 혹자는 비위생적이라고 했다지만 그건 속을 모르는 소리다. 날마다 정성껏 닦으니 안팎이 번쩍거려 그 이상 깨끗할 수 없고, 이름 그대로 요강일 뿐이다. 마음속으로 꺼림칙함을 일컫는 '요강 뚜껑으로 물 떠먹는 셈'이란 속언이 남아 있을 정도다.&lt;/span&gt;&lt;/p&gt;
&lt;p id=&quot;SE-464b2278-c9b1-4b1b-90ef-f5480263cdfc&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6d6d6d;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00; 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어렸을 때 밤에 귀신 이야기를 듣고 나서 요강을 가지러 마루로 나가는 일은 참으로 무서웠다. 마당에 함박눈이 쌓이던 그 춥고 긴 칠흑 같은 겨울밤이면 더욱 요긴하고 자기 전에 꼭 챙겨야 할 침구였다. 서양식 화장실이 집안으로 들어온 뒤로 요강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요강은 전통한옥에서는 우리 특유의 이동용 실내 변기로 안성맞춤이었다.&lt;/span&gt;&lt;/p&gt;
&lt;p id=&quot;SE-995df957-dee5-4c67-b4db-c42339bd6e17&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6d6d6d;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00; 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예로부터 뒷간과 처갓집은 멀리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의미심장한 말이었지만 지금은 시대 환경이 변했다. 요즘이야 오강인지 요강인지조차 모르고 살지만 1790년대까지만 해도 시집갈 때 놋요강이 빠지면 '반쪽 혼수'라고 실쭉거릴 정도로 요긴한 품목이었다. 아내의 혼수용 '요강과 대야'는 빛을 못 보고 골동품 신세로 전락한 지 오래다. 가끔 사 가겠다는 골동품 수집상들의 성화에 계속 간직할까 말까 다시 한번 생각 중이다.&lt;/span&gt;&lt;/p&gt;
&lt;p id=&quot;SE-f7325d1b-9ba6-4be7-be05-d9ff98dfc019&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6d6d6d;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00; 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옛날엔 신행길에 새 각시의 가마 속에는 으레 요강이 들어있었다. 친정어머니가 몰래 요강 속에 앉혀둔 목화씨는 창으로 그윽한 모정의 징표였다. 가마 탄 색시가 밖에는 가마꾼들이 있는데 '좔좔' 소리를 내며 오줌을 눌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요강 속에 넣어 둔 그 목화씨는 그 소리를 죽이는 역할을 해냈다고 한다.&lt;/span&gt;&lt;/p&gt;
&lt;p id=&quot;SE-9cf81e8a-8d85-4823-84e4-4ec95bc6b1b0&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6d6d6d;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00; 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안방에 들여놓은 요강은 어린이는 물론 환자나 노약자들의 배뇨에 필수품이었다. 밤새 뒷간 드나드는 수고와 가족의 수면방해를 덜어주니 그 얼마나 은근하고 천연덕스러운 지혜인가? 깜깜한 밤 고의춤을 비집고 요강 단지를 달랑 드시는 아버지, 궁둥이 까고 앉는 어머니의 '좔좔' 소리가 애들에게는 꿈결에 듣는 소리였지만 거기에는 격식 없는 진솔한 믿음과 신뢰가 배어있는 혈육의 호패가 됐던 것이다.&lt;/span&gt;&lt;/p&gt;
&lt;p id=&quot;SE-bbed7196-e3a7-43a4-b64b-d7edb2a322fa&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6d6d6d;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00; 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요강만큼 우리 삶의 흔적을 많이 함축한 것도 흔치 않다. 염치가 중했던지라 낮에는 딴전 부리듯 마루 한 쪽에 눈에 띄지 않게 엎어두지만 저녁에 부엌일을 마친 어머니는 요강 단지를 방구석에 들여놓아야 비로소 일과가 끝났다. 바로 뼈 빠지는 노동의 끝에 요강이 있었던 것이다.&lt;/span&gt;&lt;/p&gt;
&lt;p id=&quot;SE-fbd20974-6bb7-49bc-853e-75a1e5b13d8d&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6d6d6d;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00; 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어디 그뿐인가? 길가의 쇠똥 개똥 말똥, 지푸라기 하나라도 주워 모아야 하는 세상에 오줌 한 방울이야말로 가장 좋고 아끼는 거름이 아닐 수 없었다. 옛 속담에 '제 똥(배설물) 3년 안 먹으면 죽는다'했다. 자식들과 부모의 것이 뒤섞여 농작물이 잘 자라게 거름이 되는 오줌, 이 요강이야말로 농경시대의 소매 독(큰 오줌 저장용기), 장군(운반 용기) 다음가는 농사도구의 하나였다고 할까?&lt;/span&gt;&lt;/p&gt;
&lt;p id=&quot;SE-76d1e2a4-8f75-4201-a393-053c4c616b8c&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6d6d6d;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00; 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요강은 주로 놋쇠나 사기로 만들었다. 보기도 좋거니와 만들기 편하도록 둥글게 고안되었다. 세계 도처의 변기에 견주어도 뛰어나니 민속품으로도 손색이 없다. 옛날 양반들은 유기에 백자, 청자는 물론 오동나무 통에 옻칠까지 해서 썼다. 따로 전담 머슴까지 두었다지만 지린 오줌 누기는 매한가지였으니 양반 상놈이 따로 없는 게 바로 요강이었다.&lt;/span&gt;&lt;/p&gt;
&lt;p id=&quot;SE-88ed3b5c-1778-4249-8bfc-482f1b4b5178&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6d6d6d;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00; 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정력이 센 사람이 사기요강에 오줌을 주면 요강이 깨진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요강 없는 사랑방에서 한 잔 마시고 잠을 자다가 달빛에 반짝이는 대머리를 안방의 놋요강인 줄 착각하고 실례를 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30W 요강, 60W 요강 등 대머리를 놀리는 농담弄淡도 있었다. 이제 민속박물관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귀물이 되었다. 조선시대 무덤에 묻어 주었던 작은 명기冥器로 요강이 있다. 일상의 그릇들도 이 소꿉장난 도구처럼 껴묻거리 (부장품副葬品)로 무덤에 넣어준 뜻은 저승에 가서도 현세와 같이 편리한 삶을 누리라는 애틋한 정성일 것이다.&lt;/span&gt;&lt;/p&gt;
&lt;p id=&quot;SE-2065c049-ac61-4e11-b572-16ccc79a52ef&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6d6d6d;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00; 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반상班商구분 없는 요강이었다지만 임금과 왕비는 요강과 뒷간 아닌 침전의 방 하나에 매화틀梅花을 놓고 똥오줌을 누었다. 매화틀은 매우틀이라고도 했는데 굽 없는 나막신 모양과 비슷하며, 도자기로 굽고, 푸른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다. 임금의 똥은 그냥 똥이 아니라 매화꽃이라고 거룩하게 표현해야 했다. 매화틀 속에는 재를 담아 똥오줌이 튀지 않도록 했으며 필요한 경우에는 내의원으로 가져가 왕의 건강을 살피기 위해 똥 색깔과 맛을 보았다고 한다.&lt;/span&gt;&lt;/p&gt;
&lt;p id=&quot;SE-41207528-4bf9-413c-9896-3d576185aded&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6d6d6d;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00; 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뒷간(측간)은 이제 물러갔다. 이름마저도 바꿔 멀리 있어야 할 화장실이 가장 가까이 있는 게 현대식 건물이다. 집에 따라 하나 둘, 심지어는 세 개 이상 있는 집도 있어 아침마다 요강을 닦는 일도, 오줌 버릴 일도 없다. 세면장洗面場을 겸한 요즘의 화장실은 수세식 변기와 비데 등 부대시설에서 빈부차를 나타내기도 한다.&lt;/span&gt;&lt;/p&gt;
&lt;p id=&quot;SE-ec74c223-9418-4329-93a3-0abab4d75680&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6d6d6d;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00; 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오랜 세월 사랑받던 요강을 당장 쓸모없다고 버릴 것이냐 그냥 간직할 것이냐 그게 내가 결정해야 할 당면 과제다.&lt;/span&gt;&lt;/p&gt;
&lt;p id=&quot;SE-2cd03650-0fe8-4cb5-aa51-13e37328e12b&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6d6d6d;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div&gt;&amp;nbsp;&lt;/div&gt;</description>
      <category>좋은 수필</category>
      <author>에세이향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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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s://adoongaa.tistory.com/2720#entry2720comment</comments>
      <pubDate>Fri, 3 Apr 2026 09:12:13 +0900</pubDate>
    </item>
    <item>
      <title>매화 핀 보성강을 걷다 / 곽재구</title>
      <link>https://adoongaa.tistory.com/2719</link>
      <description>&lt;p id=&quot;SE-cafd8617-148a-4d11-bd76-fd1d0faf18cf&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6d6d6d;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00; 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lt;b&gt;매화 핀 보성강을 걷다 / 곽재구&lt;/b&gt;&lt;/span&gt;&lt;/p&gt;
&lt;p id=&quot;SE-715a06a3-0d7c-42eb-944e-87aa404c729b&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6d6d6d;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id=&quot;SE-69457e3c-1415-4d90-844b-20060accc662&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6d6d6d;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id=&quot;SE-541b7f9c-9edb-4fe0-a11f-59e962aab7fa&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6d6d6d;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00; 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보성강 길을 걸었다. 전남 곡성군의 목사동에서 압록으로 흐르는 이 자그만 강줄기는 첫눈에 사람들의 마음을 붙드는 시정詩情을 지녔다. 연둣빛 강물을 따라 자리한 강마을들. 매화와 진달래 복숭아꽃이 한데 어울려 필 무렵이면 무릉도원武陵挑原이 따로 없다.&lt;/span&gt;&lt;/p&gt;
&lt;p id=&quot;SE-8352e682-f348-4f5e-90dc-73a345744cfc&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6d6d6d;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00; 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찔레꽃이 필 무렵이면 강변에는 초가집 집채만 한 찔레꽃들이 수북수북 피고 강물은 찔레꽃 향기의 터널이 된다. 운이 좋은 날은 조각배를 저어가며 대숲에서 죽순을 캐는 허리 굽은 노인을 볼 수도 있다. 전업 작가 시절에 이곳 제월리 마을에서 삼 년쯤 글을 쓰며 지낸 적이 있으니, 강변의 꽃나무들과 봄물 냄새는 내게 살붙이 형제를 만나는 느낌을 준다.&lt;/span&gt;&lt;/p&gt;
&lt;p id=&quot;SE-6d3825b9-11a2-4f32-9602-8c872b379abc&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6d6d6d;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00; 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죽곡마을에서 한 노인이 밭 구덩이에서 무를 캐내는 것을 본다. 돌담 안의 밭은 볕이 따스하다. 무가 참 튼실하고 좋소. 인사 삼아 말을 건네니 노인이 '소밥이오'라고 말한다. 얘기를 들으니 사룟값이 너무 비싸 사료를 먹이지 못하고 볏짚에 무를 썰어 넣어 먹인다는 것이다. 노인은 무 세 뿌리를 깨 내었는데 내게 한 뿌리를 건네준다. 맛이 참 좋소. 작년 김장철에 무가 똥값이 되어 소 먹을 것을 남기고 그냥 밭에서 썩혔소, 한다. 외양간에서 노인이 소밥 주는 모습을 보았는데 한눈에 소가 비쩍 말랐음을 알 수 있었다. 노인은 무를 낫으로 척척 베어내 볏짚에 떨구어 주었고, 소는 눈을 껌벅이며 밥을 먹었다. 소가 사료를 더 좋아하나요? 하고 물으니 그럼 좋아서 '환장하지'라는 말이 돌아온다.&lt;/span&gt;&lt;/p&gt;
&lt;p id=&quot;SE-25a42c20-8c77-4c98-99e2-bbb88825ea65&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6d6d6d;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00; 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환장換腸은 장이 뒤집힌다는 말이다. 살아가는 동안 좋아서 장이 뒤집힐 만한 기억이 내게 있었을까. 쉬 떠오르지 않는다.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좋았지만 환장할 정도는 아니었다. 좋았다기보다 먹먹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 전화는 내게 절망의 맨 밑바닥을 헤매고 있을 때 왔다. 한 템포 더 빨리 왔더라면 정말 좋았을 것이다.&lt;/span&gt;&lt;/p&gt;
&lt;p id=&quot;SE-637ec7c9-0e1f-4d9a-ad3f-3cff3711cf3b&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6d6d6d;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00; 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좋지 않은 일로 장이 꼬이는 경우도 환장이다. 우리는 매일 장을 뒤집으며 산다. 고3인 한국 젊은이가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에 가담하여 군사훈련을 받고 있다는 뉴스 앞에서 가슴이 아프다. 앞길 창창한 이 학생은 왜 이런 선택을 하게 되었을까. 이 학생의 사고방식에 우리 사회의 잘못은 없었을까. 23년째 수요 집회를 하는 위안부 할머니들 앞에서 성 노예는 없다고 강변하는 일본 우익 정권, 강제로 끌려간 군대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70년 만에 지급된 199엔(약 1830원)의 후생연금은 후안무치의 극을 보여준다.&lt;/span&gt;&lt;/p&gt;
&lt;p id=&quot;SE-e1c306bd-1a38-4c22-97cb-9a780e9ce797&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6d6d6d;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00; 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세월호 유족들이 가라앉은 배의 모형을 리어카에 싣고 삼보일배를 하며 팽목항을 떠나 서울로 오는 모습을 보면서도 마음은 시리고 아프다. 백주에 미국 대사를 찌른 한 사이코패스의 행태는 그가 우리와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점에서 많이 부끄럽다. 이를 두고 북의 정권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비유하니 제정신이 아니다. 종북과 종북 숙주 운운하며 공안 정국의 냄새를 풍기는 남쪽 또한 이상적인 행위가 아니다. 한국과 한국민에 대해 애정을 지닌 외국인을 그가 미국 대사라는 이유만으로 찌를 수 있는 사람은 사이코패스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닐 것이다.&lt;/span&gt;&lt;/p&gt;
&lt;p id=&quot;SE-3d23270f-c4f5-453c-91e3-3510fd83d939&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6d6d6d;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00; 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노인이 준 무 하나를 들고 강을 따라 걸어간다. 꽃샘추위를 뚫고 핀 매화꽃 향기가 자욱하다. 매화 꽃잎은 지리산의 산골 마을들을 지나 멀리 섬진강 하류의 하동까지 이어진다. 언덕과 마을, 강물에 핀 매화꽃의 분홍은 잠시 세상살이의 핍진乏盡함을 잊게 한다.&lt;/span&gt;&lt;/p&gt;
&lt;p id=&quot;SE-0980b8b9-2c8c-476d-b2d3-f8afb58d7d13&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6d6d6d;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00; 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추사 김정희의 제자인 우봉 조희룡은 그의 저서 '호산외사'에 우리 선인들이 얼마나 매화를 사랑했는지에 대한 일화를 남겨 놓았다. 어느 날 단원 김홍도의 집에 한 상인이 매화분을 팔러 왔다. 넋을 빼앗길 만큼 고아한 격을 지닌 매화였으나 끼니를 끓일 돈도 없는 단원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마침 그림을 사러 온 사람이 있었는데 3000냥에 그림을 판 단원은 2000냥을 주고 집에 온 상인에게서 매화분을 사고 800냥으로는 좋은 술 여러 말을 사서 친구들을 불러들여 매화음을 즐기고 놀았으며, 남은 200냥으로 쌀과 땔나무를 들여놓았다는 것이다.&lt;/span&gt;&lt;/p&gt;
&lt;p id=&quot;SE-224461d4-534d-4b15-8d2e-80ce1b4d6ba5&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6d6d6d;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00; 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옛 화사들이 그림 파는 일을 수치로 여겼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 아픈 일이거니와 그림으로 아름다운 매화분을 얻었으니 기쁜 일이요, 남은 돈으로 동무들과 함께 며칠 밤낮 술자리를 즐겼으니 이보다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lt;/span&gt;&lt;/p&gt;
&lt;p id=&quot;SE-00e469d1-7592-44e9-9bcc-dd84f3e9c5e6&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6d6d6d;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00; 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매화가 피는 철은 사랑스러운 철이다. 훈훈한 바람이 불고, 따뜻한 햇살이 쏟아지고, 개울물이 졸졸 소리를 내며 흐르기 시작하고, 땅속의 벌레들이 기지개와 함께 자신들의 몸을 땅 밖에 내밀기 시작한다. 삼라만상이, 존재의 의미조차 잘 알지 못하는 온갖 미물들이 자신들의 삶과 사랑이 다시 한번 펼쳐질 이승의 세계에 따스한 숨소리와 함께 찾아오는 것이다.&lt;/span&gt;&lt;/p&gt;
&lt;p id=&quot;SE-f0f46464-f21f-4c87-8fe0-d91d92a8f0f2&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6d6d6d;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00; 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삶에는 필연적으로 고통과 고난의 순간들이 내재해 있다. 생명의 의미란 다름 아닌 고통과의 지난至難한 싸움에 대한 기록인지도 모른다. 스스로의 삶이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럽다고 생각되는 순간 훌훌 털고 꽃 핀 봄 들판을 걸어 보자. 가족의 손을 잡고 함께 걸어도 좋을 것이고, 삶이 힘든 몇몇 동무들과 함께 걸어도 좋을 것이다.&lt;/span&gt;&lt;/p&gt;
&lt;p id=&quot;SE-67acc8bc-976b-494a-b734-2b3d80907e56&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6d6d6d;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00; 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봄 꽃길을 걷다 보면 내 생에 진짜 좋아서 환장할 일이 하나 남아 있다는 생각도 든다. 남에서 핀 꽃들이 북상하여 온 반도를 뒤덮듯 언젠가 남녘 북녘의 웃는 사람들 얼굴로 우리 반도가 출렁일 시간이 올 것이다. 매화꽃 향기를 따라 걷다 보면 모두 손잡고 춤추는 그날 생각이 난다. &lt;/span&gt;&lt;/p&gt;
&lt;p id=&quot;SE-aacd778e-bf7a-4172-913e-224b60a379d5&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6d6d6d; text-align: justify;&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div&gt;&amp;nbsp;&lt;/div&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description>
      <category>좋은 수필</category>
      <author>에세이향기</author>
      <guid isPermaLink="true">https://adoongaa.tistory.com/2719</guid>
      <comments>https://adoongaa.tistory.com/2719#entry2719comment</comments>
      <pubDate>Fri, 3 Apr 2026 09:05:42 +0900</pubDate>
    </item>
    <item>
      <title>옥수숫대/강돈묵</title>
      <link>https://adoongaa.tistory.com/2716</link>
      <description>&lt;p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333333; text-align: center;&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옥수숫대&lt;/span&gt;&lt;/p&gt;
&lt;p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333333; text-align: center;&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333333; text-align: center;&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333333; text-align: center;&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333333; text-align: center;&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333333; text-align: center;&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333333; text-align: righ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강 돈 묵&lt;/span&gt;&lt;/p&gt;
&lt;p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333333; 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싸한 바람이 아직 맵다.&amp;nbsp;코끝과 귀에만 와 닿는다.&amp;nbsp;밭으로 나갔다.&amp;nbsp;씨앗을 뿌릴 시기는 아니지만,&amp;nbsp;밭이 궁금했다.&amp;nbsp;긴 겨울 동안 둘러보지 않은 밭은 을씨년스럽다.&amp;nbsp;여기 저기 작물의 시체가 뒹군다.&amp;nbsp;호박 덩굴이 드러난 갈비뼈처럼 돌담에 누워 지난 시절의 아픔을 말해 준다.&amp;nbsp;말라버린 고춧대가 지나가는 바람에 엄살떤다.&amp;nbsp;저쪽 밭두둑에 홀로 선 옥수숫대가 오늘따라 외롭다.&amp;nbsp;바람받이 두둑엔 칼바람이 매섭다.&amp;nbsp;옥수숫대가 처량히 울부짖는다.&lt;/span&gt;&lt;/p&gt;
&lt;p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333333; 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333333; 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바짝 마른 옥수숫대.&amp;nbsp;너덧 잎 남은 이파리가 몸뚱이를 감싸 안고 바람 앞에 울고 있다.&amp;nbsp;한 잎은 꺾이어 아랫도리를 감았고,&amp;nbsp;또 한 잎은 위로 어깨를 감싸 안았다.&amp;nbsp;누렇게 마른 이파리는 영락없는 삼베다.&amp;nbsp;꺼칠하면서도 풀 먹인 베처럼 온몸을 두르고 있다.&amp;nbsp;동부 덩굴이 기어올라 등허리를 감아 버린 모습.&amp;nbsp;같이 말라 있다.&amp;nbsp;그것도 제 몫이려니 참아낸 옥수숫대.&amp;nbsp;마른 잎 속에는 비바람과 폭염에 시달린 삶이 숨겨져 있다.&lt;/span&gt;&lt;/p&gt;
&lt;p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333333; 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333333; 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마른 줄기에 삼베 같은 잎만 남아 있는 모습에서 문득 아버지를 기억한다.&amp;nbsp;상복을 입고 짚으로 꼰 새끼로 허리를 질끈 동여맨 아버지.&amp;nbsp;움직일 때마다 스억스억 소리를 내던 아버지의 상복.&lt;/span&gt;&lt;/p&gt;
&lt;p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333333; 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333333; 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할아버지의 상을 당했을 때,&amp;nbsp;아버지는 매우 어려워하셨다.&amp;nbsp;늘 천식으로 거동을 못하시던 아버지는 맏상주의 역할에 힘겨워하셨다.&amp;nbsp;아버지가 긴 시간 서 계신 것을 그 때 처음 보았다.&amp;nbsp;언제나 사랑채에 누워 계셨으니까.&amp;nbsp;누런 상복을 걸치고 힘들어하시던 아버지.&amp;nbsp;몸피에 비해 넉넉하게 만들어진 삼베옷을 입으시고 늘 상장에 의지하고 계셨다.&amp;nbsp;밑으로 동생이 셋이나 있어도 맏이의 몫을 감내하려 하시던 아버지를 이 들판에서 만난다.&lt;/span&gt;&lt;/p&gt;
&lt;p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333333; 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333333; 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씨만 심어놓으면 잘 자라는 것이 옥수수다.&amp;nbsp;관심밖에 두어도 이따금 먹을거리를 제공한다.&amp;nbsp;뿐만 아니라 바람에 약한 작물의 보호막으로도 안성맞춤이다.&amp;nbsp;지난봄에도 갖가지 작물을 심고 자투리땅에 옥수수를 심었다.&amp;nbsp;바람막이로 심은 것이다.&amp;nbsp;샛노란 싹이 올라왔다.&amp;nbsp;예뻤다.&amp;nbsp;그러나 그 싹을 보는 재미는 며칠 가지 못했다.&amp;nbsp;잘 자라는 싹을 까치가 모두 뽑아버렸다.&amp;nbsp;까치는 싹으로 표시된 옥수수 밑씨를 캐내어 포식하고 있었다.&amp;nbsp;다시 씨를 심었다.&amp;nbsp;이번에는 주위에 풀도 그대로 둔 채 심었다.&amp;nbsp;풀 속에서 제법 자란 후에 풀을 뽑아주자는 심사였다.&amp;nbsp;하나 그런 나의 의도도 까치는 알아차렸다.&amp;nbsp;결국 나의 옥수수 심기는 까치 밥 대주기였다.&amp;nbsp;이렇게 머리싸움을 하는 사이 밭두둑에서는 까치눈을 피한 옥수수 하나가 자랐다.&amp;nbsp;지난해에는 모두 까치에게 희생되고 이것 하나만이 자랐다.&amp;nbsp;좋은 땅에서는 모두 없어지고 척박한 밭두둑에서 혼자 견디었다.&amp;nbsp;대를 잇도록 씨앗을 주고 외로이 서 있는 옥수숫대.&amp;nbsp;겨우내 매서운 바람살에 심한 기침을 했을 옥수숫대.&amp;nbsp;그 옥수숫대가 지금 이 순간에도 느닷없이 몰아치는 바람에 스억스억 울어댄다.&lt;/span&gt;&lt;/p&gt;
&lt;p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333333; 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333333; 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아버지는 긴 세월 천식에 시달리셨다.&amp;nbsp;깡마른 몸매로 누워 계시거나,&amp;nbsp;앉아 계셨다.&amp;nbsp;여간하여서는 일어나서 집밖으로 나가시는 경우가 없으셨다.&amp;nbsp;두 살 터울인 자식들이 서로 엉겨 싸우면,&amp;nbsp;큰소리로 꾸지람을 하셨다.&amp;nbsp;그러나 아버지의 음성은 자식들에게 효력이 없었다.&amp;nbsp;아버지의 목소리는 막내둥이의 목소리보다도 작았고,&amp;nbsp;숨이 차서 제대로 말씀을 이어가지 못하셨다.&amp;nbsp;그래도 자식들의 다툼이 그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셨다.&amp;nbsp;지팡이에 의지하고 다가가나 영악스럽기 그지없는 자식들은 가까이 오신 아버지를 멀리하고 저만치 물러나 다툼을 계속했다.&amp;nbsp;쫓아가면 물러나고,&amp;nbsp;물러나면 쫓아가던 아버지와 자식들 간의 게임은 언제나 아버지의 주저앉음으로 끝이 났다.&amp;nbsp;아버지는 그 몰려오는 가쁜 숨을 이기지 못하시고,&amp;nbsp;주저앉음으로 마무리 지으셨다.&amp;nbsp;그러나 그 아버지의 울력 속에서 우리 자식들은 잘 자라 모두 사회의 한 구성원이 되어 있다.&lt;/span&gt;&lt;/p&gt;
&lt;p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333333; 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333333; 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밭두둑에 홀로 있어 갖은 비바람을 다 이겨내는 옥수수처럼 아버지는 온갖 풍파와 싸워야 했다.&amp;nbsp;아버지는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가족을 거느리고 고향을 떠났다.&amp;nbsp;많은 노력으로 마련한 집이 옛날 고을의 부자가 살던 집이었다.&amp;nbsp;동네 사람들은 이 집에 사는 아버지에 대해 너그럽지 않았다.&amp;nbsp;지붕의 썩은새가 두터운 것을 시빗거리로 삼았다.&amp;nbsp;한 뼘이 넘은 썩은새의 두께가 그들에게는 눈엣가시였다.&amp;nbsp;썩은새를 가지고 시비이니,&amp;nbsp;자질구레한 시비야 더 말해 무엇하랴.&amp;nbsp;아버지는 그토록 매운 타향살이의 고통을 견뎌야 했다.&lt;/span&gt;&lt;/p&gt;
&lt;p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333333; 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333333; 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전에는 가뭄도 심했다.&amp;nbsp;논에 물을 대기 위해 나가신 아버지는 가끔 논흙 칠을 하고 들어오셨다.&amp;nbsp;논에 물이 고이도록 물꼬를 보아 놓으면 몰래 물을 훔쳐 가는 경우가 있었다.&amp;nbsp;다시 물꼬를 고치시고 돌아오는 아버지는 몹시 기분이 상해 있었다.&amp;nbsp;더러는 그 가쁜 숨을 몰아쉬며,&amp;nbsp;옆 논 주인과 서로 멱살을 잡는 수모도 이겨내셨다.&amp;nbsp;그러나 아버지는 자신의 자존심을 꾹 지키셨다.&amp;nbsp;온갖 고난이 밀려와도 굽힘이 없이 참아내며 자식의 성장에서 위안을 찾으셨다.&amp;nbsp;동네의 그 어느 집도 우리 형제들의 성적을 이겨보지 못했다.&amp;nbsp;흐뭇한 눈으로 상장을 바라보며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모범인 삶을 보여 주셨다.&amp;nbsp;아무리 고난이 밀려와도 굽히지 않는 삶의 태도를 손수 가르치신 아버지.&amp;nbsp;아무 것도 모르고 자라는 자식들의 방향키였고,&amp;nbsp;바람막이였다.&lt;/span&gt;&lt;/p&gt;
&lt;p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333333; 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333333; 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비바람이 몰아치는 밭두둑에서 주위 풀들의 시기를 이겨내고 꿋꿋하게 자라 씨앗을 남기고 말라버린 옥수숫대를 바라본다.&amp;nbsp;동부 덩굴이 기어올라도 어깨를 내어주고 며느리밑씻개가 까칠한 손으로 타고 올라도 싫은 내색 없이 그 인고의 세월을 산 옥수수를 바라보면서 나는 아버지를 떠올린다.&amp;nbsp;성치 못한 몸으로 모든 역경을 이겨낸 아버지의 교훈을 만난다.&amp;nbsp;말라버린 옥수숫대에 걸쳐 있는 이파리를 보면서 아버지의 수의를 생각한다.&amp;nbsp;깡마른 몸에 둘러쳐졌던 아버지의 수의.&amp;nbsp;이생에서 난 상처를 모두 감싸주던 수의.&amp;nbsp;아버지는 그 수의 하나만 걸치고 떠나셨다.&amp;nbsp;자식들을 위해 모두 벗어놓고 가셨다.&lt;/span&gt;&lt;/p&gt;
&lt;p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333333; 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333333; 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싸한 바람이 분다.&amp;nbsp;이 바람이 코끝을 떠나면 나는 다시 옥수수 씨를 심을 것이다.&amp;nbsp;그리고 가뭄과 홍수를 이겨내며 여린 작물들의 바람막이 노릇을 하는 옥수수를 바라보면서 아버지를 추억할 것이다.&amp;nbsp;내 안에 없는 듯이 있는 아버지를 추억할 것이다.&lt;/span&gt;&lt;/p&gt;
&lt;p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333333; 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lt;/span&gt;&lt;/p&gt;
&lt;p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333333; 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amp;nbsp;&lt;/span&gt;&lt;/p&gt;</description>
      <category>좋은 수필</category>
      <author>에세이향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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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s://adoongaa.tistory.com/2716#entry2716comment</comments>
      <pubDate>Thu, 2 Apr 2026 09:17:51 +0900</pubDate>
    </item>
    <item>
      <title>소확행은 정말 행복인가- 작은 행복 담론의 정치경제학  왜 우리는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마음가짐으로 해결하려 하는가</title>
      <link>https://adoongaa.tistory.com/2715</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ffffff; background-color: #ffffff; letter-spacing: 0px; 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왜 우리는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마음가짐으로 해결하려&amp;nbsp;&lt;/span&gt;&lt;/p&gt;
&lt;div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000000; text-align: start;&quot;&gt;
&lt;div&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커피 한 잔의 여유, 깨끗이 빨아 개놓은 속옷,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는 순간. 소확행이라는 말이 우리 사회를 휩쓴 지 이제 제법 시간이 흘렀다. 2018년 전후로 소비 트렌드의 핵심 키워드로 떠올랐던 이 말은, 처음엔 각박한 세상에서 자신만의 작은 기쁨을 찾자는 위로처럼 들렸다. 그러나 이 달콤한 위로가 정말 행복으로 가는 길일까. 아니면 우리가 직면한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마음가짐으로 덮어버리는 또 하나의 기만일까.&lt;/span&gt;&lt;br /&gt;&lt;br /&gt;&lt;br /&gt;&lt;/p&gt;
&lt;div style=&quot;color: #666666; 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소확행, 하루키의 본래 의미&lt;/span&gt;&lt;/div&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소확행은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1986년 에세이 『랑겔한스섬의 오후』에서 처음 사용한 말이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줄인 이 표현은, 하루키 자신이 경험한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담았다. 그는 3년간 찾아 헤맨 레코드판을 헐값에 발견한 기쁨, 운동 후 마시는 맥주의 상쾌함, 정결한 면 냄새 나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쓸 때의 느낌을 소확행이라 불렀다. 중요한 건, 이런 행복이 그냥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3년간 레코드를 찾아다니고, 운동을 격렬하게 하고, 셔츠를 제때 빨아 말리는 수고로움이 전제됐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하지만 한국에 수입된 소확행은 다른 모습이다. 마케팅 키워드가 된 소확행은 &quot;작은 것에서 행복을 찾자&quot;는 달콤한 주문이 되었다. 편의점 디저트를 사고,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SNS에 예쁜 사진을 올리는 일. 소확행은 곧 소비와 동의어가 되었다. 본래 소확행이 담았던 자기 수양과 인내, 그리고 자신만의 기준으로 행복을 발견하는 주체성은 사라졌다. 남은 건 소비를 정당화하는 구호뿐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br /&gt;&lt;/p&gt;
&lt;div style=&quot;color: #666666; 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성과사회가 만들어낸 위로의 문법&lt;/span&gt;&lt;/div&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현대사회를 성과사회로 진단한다. 과거 규율사회가 &quot;~하지 말라&quot;는 금지의 부정성으로 작동했다면, 오늘날은 &quot;~할 수 있다&quot;는 긍정성이 지배한다. 문제는 이 긍정성이 폭력으로 변한다는 점이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은 개인을 끝없는 자기계발과 성과 경쟁으로 내몬다. 실패는 더 이상 사회 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무능으로 전가된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된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소확행 담론은 바로 이 성과사회의 피로에 대한 대응으로 등장했다. 집도 살 수 없고, 결혼도 출산도 불가능한 현실. 2025년 11월 기준 청년 고용률은 44.3%로 19개월 연속 하락했고, 서울의 평균 주택가는 10억 원을 넘어섰다. 구조적으로 큰 행복이 불가능해진 청년들에게, 사회는 작은 행복이라도 찾으라고 말한다. 이것은 위로가 아니라 체념의 강요다. 성과사회가 요구하는 끝없는 경쟁에서 탈락한 이들에게, &quot;그래도 커피 한 잔의 여유는 누릴 수 있잖아&quot;라고 속삭이는 것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br /&gt;&lt;/p&gt;
&lt;div style=&quot;color: #666666; 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개인화된 행복, 사라진 연대&lt;/span&gt;&lt;/div&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소확행 담론의 진짜 문제는 구조적 불평등을 개인의 감정 관리 문제로 축소시킨다는 점이다. 청년 실업, 주거 불안정, 임금 정체는 사회경제 시스템의 문제다. 하지만 소확행은 이런 문제들을 &quot;어차피 바꿀 수 없으니 작은 것에서 행복을 찾자&quot;는 개인적 대처법으로 전환시킨다. 분노할 이유는 사라지고, 남는 건 각자도생의 생존 전략뿐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더 심각한 건, 소확행이 타인과의 연대 가능성마저 차단한다는 점이다. 나의 작은 행복은 철저히 사적이고 개인적이다. 혼밥, 혼술, 나홀로 여행. 소확행은 고립된 개인의 위안이지, 함께 문제를 해결하려는 집단적 실천이 아니다. 시스템이 만들어낸 불행을 시스템에 맞서 바꾸는 대신, 각자 자기만의 작은 행복에 안주하게 만든다. 이것이야말로 성과사회가 바라는 완벽한 순응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결국 소확행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생존 감각이다. 큰 꿈은 포기하되, 작은 만족은 유지하라. 사회를 바꾸려 하지 말고,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라. 이런 메시지 속에서 청년들의 불안과 분노는 개인의 감정 문제로 축소되고, 구조적 변화의 가능성은 점점 멀어진다. 진짜 행복은 커피 한 잔이 아니라, 커피값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사회 구조에서 온다. 소확행에 안주하기 전에, 우리는 왜 큰 행복이 불가능해졌는지 묻고 답해야 한다.&lt;/span&gt;&lt;/p&gt;
&lt;/div&gt;
&lt;/div&gt;
&lt;div id=&quot;wrap&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000000; text-align: start;&quot;&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description>
      <category>철학</category>
      <author>에세이향기</author>
      <guid isPermaLink="true">https://adoongaa.tistory.com/2715</guid>
      <comments>https://adoongaa.tistory.com/2715#entry2715comment</comments>
      <pubDate>Wed, 1 Apr 2026 14:00:44 +0900</pubDate>
    </item>
    <item>
      <title>들뢰즈 『의미의 논리』: 들뢰즈가 여는 새로운 사유의 지평</title>
      <link>https://adoongaa.tistory.com/2714</link>
      <description>&lt;div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000000; text-align: start;&quot;&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
&lt;div id=&quot;wrap&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000000; text-align: start;&quot;&gt;
&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의 『의미의 논리』(Logique du sens, 1969)는 현대 철학에서 가장 난해하면서도 독창적인 저작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책은 의미가 어떻게 발생하는지, 사건이란 무엇인지, 언어와 사물의 관계는 어떠한지를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탐구한다. 들뢰즈는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스토아 철학이라는 언뜻 무관해 보이는 두 가지 소재를 결합시켜, 의미가 깊이도 높이도 아닌 '표면'에서 생성된다는 혁명적 주장을 펼친다.&lt;/span&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
&lt;div style=&quot;color: #666666; 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역설과 계열: 의미는 어디서 오는가&lt;/span&gt;&lt;/div&gt;
&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들뢰즈가 이 책에서 가장 먼저 제기하는 질문은 단순하지만 근본적이다. 의미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가? 전통 철학은 의미를 사물의 본질이나 주체의 의식 속 깊은 곳에서 찾았다. 하지만 들뢰즈는 의미가 사물도 아니고 정신도 아닌, 그 둘 사이의 '표면'에서 효과로 생성된다고 본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이를 설명하기 위해 들뢰즈는 루이스 캐럴의 역설들을 동원한다. &quot;먹어&quot;와 &quot;마셔&quot;가 동시에 명령되는 병,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앨리스의 몸, &quot;내가 말하는 것은 거짓이다&quot;라는 역설적 문장. 이런 역설들은 단순한 언어 유희가 아니라 의미 생성의 메커니즘을 드러낸다. 의미는 고정된 지시 대상이 아니라 차이들의 유희, 계열들의 공명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예컨대 SNS에서 누군가 &quot;요즘 MZ세대는...&quot;이라고 쓰는 순간, 이 표현은 세대론이라는 계열과 청년 담론이라는 계열 사이에서 의미를 생성한다. &quot;MZ세대&quot;라는 기표 자체에 본질적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다른 기표들(밀레니얼, Z세대, 꼰대, 요즘 애들)과의 차이 관계 속에서 의미가 표면에 나타난다. 들뢰즈가 말하는 의미의 표면성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
&lt;div style=&quot;color: #666666; 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비물체적 사건: 순수한 되기의 영역&lt;/span&gt;&lt;/div&gt;
&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들뢰즈는 고대 스토아 철학에서 '비물체적인 것'(incorporel) 개념을 끌어온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세계를 물체들과 비물체적 사건들로 구분했다. 나무는 물체지만, &quot;나무가 푸르다&quot;는 나무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칼은 물체지만, &quot;자르기&quot;는 비물체적 사건이다. 사건은 물체가 아니라 물체에 '속한' 어떤 것, 물체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효과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이 구분이 중요한 이유는 사건이 순수한 '되기'의 영역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나무는 존재하지만, &quot;푸르게 되기&quot;는 존재도 비존재도 아닌 순수한 생성이다. 앨리스가 커진다는 것은 이미 커진 상태도 아직 작은 상태도 아닌, 순수한 &quot;커지기&quot;의 사건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현대의 디지털 플랫폼은 이런 사건의 논리를 완벽하게 구현한다. 트위터(현 X)에서 &quot;트렌딩&quot;이 되는 것은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 순수한 사건이다. 어떤 해시태그가 급상승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사건적 생성이며, 이 사건은 개별 트윗들(물체)과는 구분되는 비물체적 효과다. 알고리즘이 만들어내는 &quot;추천&quot;도 마찬가지다. 유튜브의 추천 영상은 영상 자체(물체)가 아니라 시청 패턴들의 표면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
&lt;div style=&quot;color: #666666; 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의미의 표면: 깊이도 높이도 없는 장소&lt;/span&gt;&lt;/div&gt;
&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들뢰즈 철학의 독창성은 의미의 장소를 '표면'으로 설정한 데 있다. 전통적으로 철학은 표면을 피상적인 것, 가상으로 폄하하고 깊이나 높이에서 진리를 찾았다. 플라톤은 이데아의 높이에서, 정신분석은 무의식의 깊이에서 의미를 찾았다. 하지만 들뢰즈는 의미가 깊이로 내려가지도 높이로 올라가지도 않고 표면에서 미끄러진다고 본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표면은 두 계열을 분리하면서 동시에 연결하는 경계다. 언어와 사물, 기표와 기의, 원인과 결과 사이의 표면. 이 표면에서 의미는 고정되지 않고 유동한다. 마치 기름이 물 위를 미끄러지듯, 의미는 표면을 따라 이동하며 계속 변형된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인스타그램의 피드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이미지들의 '표면'을 스크롤한다. 각 게시물은 깊은 의미도 높은 진리도 담지 않는다. 그저 다른 이미지들과의 연쇄 속에서, 해시태그와 필터의 조합 속에서 의미를 생성할 뿐이다. &quot;오늘의 #데일리룩&quot;이라는 게시물의 의미는 그 옷 자체의 본질이 아니라, 다른 데일리룩들, 다른 패션 트렌드들과의 차이 관계 속 표면에서 발생한다. 들뢰즈라면 이것이야말로 의미의 본래 작동 방식이라고 말할 것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
&lt;div style=&quot;color: #666666; 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역설적 심급: 의미를 순환시키는 빈 칸&lt;/span&gt;&lt;/div&gt;
&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들뢰즈는 의미 생성의 핵심에 '역설적 심급'(instance paradoxale)이라는 개념을 놓는다. 이것은 두 계열 사이를 순환하며 공명을 일으키는 특이한 지점이다. 루이스 캐럴의 이야기에서 저 유명한 &quot;스나크&quot;처럼, 역설적 심급은 이름은 있지만 정체가 없고, 양쪽 계열에 동시에 속하면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이 역설적 심급은 비어있기 때문에 의미를 생성한다. 고정된 의미가 없기에 끊임없이 의미를 생산하는 빈 칸, 결여가 아니라 과잉으로 작동하는 공백이다. 라캉의 '떠도는 기표'(signifiant flottant)와 유사하지만, 들뢰즈는 이를 언어적 구조가 아니라 사건의 논리로 설명한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현대 밈 문화를 보라. &quot;그것이 알고 싶다&quot;는 프로그램 제목이 원래 맥락을 벗어나 온갖 상황에 적용되는 밈이 되었다. 이 문구는 역설적 심급처럼 작동한다. 고정된 의미가 없기에 무한한 변주를 낳고, 매번 새로운 맥락에서 의미를 생성한다. &quot;아니 근데&quot;로 시작하는 문장들, &quot;~하면 안 돼요?&quot; 같은 표현들도 마찬가지다. 빈 틀이기에 무한한 내용을 담을 수 있고, 바로 그 공백이 의미의 증식을 가능케 한다.&lt;/span&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
&lt;div style=&quot;color: #666666; 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정적 발생: 의미에서 명제로&lt;/span&gt;&lt;/div&gt;
&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들뢰즈는 책의 후반부에서 '정적 발생'(gen&amp;egrave;se statique)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전개한다. 이것은 의미가 어떻게 현실의 명제들로 응결되는지를 설명하는 이론이다. 순수 사건으로서의 의미는 아직 참도 거짓도 아니다. 하지만 이 의미가 명제로 응결될 때, 지시와 표현과 기의의 세 가지 차원이 발생한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지시(d&amp;eacute;notation)는 명제가 사물을 가리키는 것, 표현(manifestation)은 말하는 주체의 신념을 드러내는 것, 기의(signification)는 개념적 내용을 뜻한다. 전통 논리학은 이 세 가지 중 하나를 근본으로 삼았지만, 들뢰즈는 이 모두가 더 근본적인 차원, 즉 '의미'로부터 발생한다고 본다. 의미는 이 세 차원에 선행하면서 이들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챗GPT 같은 생성형 AI를 생각해보자. AI가 &quot;서울의 날씨는 화창합니다&quot;라고 생성할 때, 이 문장은 지시(서울의 실제 날씨), 표현(정보 전달의 의도), 기의(날씨 개념)를 모두 갖춘 명제처럼 보인다. 하지만 들뢰즈의 관점에서 보면, AI는 더 근본적인 의미의 층위에서 작동한다. 수많은 텍스트 데이터의 표면에서 패턴을 추출하고, 단어들 간 차이와 관계를 계산하며, 그 결과로 의미를 생성한다. 진짜 날씨를 아는 게 아니라 의미의 표면을 따라 미끄러지는 것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
&lt;div style=&quot;color: #666666; 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사건의 윤리: 운명애와 되기&lt;/span&gt;&lt;/div&gt;
&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들뢰즈는 이 모든 논의를 윤리학으로 전환한다. 사건의 철학은 단순한 인식론이 아니라 삶의 태도를 요구한다. 들뢰즈가 제시하는 윤리는 스토아적 '운명애'(amor fati)다. 일어난 사건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그 사건을 원하고 긍정하는 것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하지만 이것은 체념이 아니다. 오히려 사건 속에 내재한 순수한 '되기'를 파악하고, 그 되기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적극적 긍정이다. 배우가 무대에서 역할을 연기하듯, 우리는 삶의 사건들을 연기한다. 중요한 것은 역할에 갇히지 않으면서도 그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것, 사건의 표면에 머물면서도 그 표면을 완전히 횡단하는 것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현대인의 삶은 끊임없는 사건의 연속이다. SNS의 알림, 메신저의 메시지, 실시간 뉴스 속보. 우리는 매순간 수많은 사건에 반응하며 산다. 들뢰즈의 윤리학은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통찰을 준다. 각각의 사건에 휘둘리는 것도, 무감각하게 소비하는 것도 아닌, 사건의 의미를 파악하고 능동적으로 연기하는 태도. &quot;좋아요&quot;를 누르는 순간조차 하나의 사건으로 경험하고, 그 사건이 만드는 의미의 표면을 의식하는 것. 이것이 디지털 시대의 운명애일 수 있다.&lt;/span&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
&lt;div style=&quot;color: #666666; 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차이와 반복을 넘어: 의미의 정치학&lt;/span&gt;&lt;/div&gt;
&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의미의 논리』는 들뢰즈의 이전 저작 『차이와 반복』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새로운 영역을 연다. 『차이와 반복』이 존재론에 집중했다면, 『의미의 논리』는 언어와 의미의 문제를 다룬다. 하지만 두 책의 핵심은 같다. 동일성과 재현의 논리를 넘어서, 차이 그 자체를 긍정하는 철학.&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이 철학은 단순히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 함의를 갖는다. 의미가 표면에서 생성된다는 것은, 의미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언제나 재전유될 수 있다는 뜻이다. 지배 담론이 강요하는 의미에 갇히지 않고, 새로운 의미를 생성할 수 있는 가능성. 들뢰즈는 이것을 '되기'의 정치학이라고 부를 만하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예컨대 &quot;페미니즘&quot;이라는 기표를 둘러싼 논쟁을 보라. 같은 단어가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생성한다. 이 의미는 본질적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다양한 계열들(젠더, 세대, 계급, 정치적 입장)이 교차하는 표면에서 끊임없이 재생성된다. 들뢰즈의 철학은 이런 의미 투쟁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도구가 된다. 의미는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는 것이며, 그 생산의 장은 언제나 열려 있다.&lt;/span&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
&lt;div style=&quot;color: #666666; 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결론: 표면의 사유, 사건의 철학&lt;/span&gt;&lt;/div&gt;
&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의미의 논리』는 철학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형이상학도 아니고 언어철학도 아니며, 그 둘을 가로지르는 사건의 철학이다. 들뢰즈는 우리에게 표면을 다시 보라고, 깊이의 환상에서 벗어나라고 촉구한다. 의미는 숨겨진 본질이 아니라 관계들의 유희 속에서 발생하는 효과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이 책이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깊이의 사유에 길들여져 왔기 때문이다. 플라톤 이래 서양 철학은 현상 너머의 실재를 찾았고, 표면은 언제나 이차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다. 들뢰즈는 이 위계를 전복한다. 표면이야말로 사건이 일어나는 곳, 의미가 생성되는 곳, 삶이 펼쳐지는 곳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21세기 디지털 문화는 들뢰즈의 철학을 입증하는 거대한 실험장이다. 우리는 매일 의미의 표면들을 스크롤하고, 사건들의 흐름 속에서 살아가며,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라 유동하는 프로필들로 존재한다. 들뢰즈가 1969년에 쓴 이 난해한 책은,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가장 현실적인 철학서가 되었다. 의미의 논리는 알고리즘의 논리이며, 사건의 철학은 플랫폼의 철학이다. 표면을 사유한다는 것, 그것이 우리 시대의 철학적 과제다.&lt;/span&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
&lt;div style=&quot;color: #666666; 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주요인용문&lt;/span&gt;&lt;/div&gt;
&lt;br /&gt;&lt;br /&gt;&lt;br /&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의미는 명제의 세 가지 관계, 즉 지시, 표현, 기의에 의해 산출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의미 자체가 이 세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의미는 명제 자체도 아니고, 명제의 항들과 관계들의 상태도 아니다. 의미는 명제에 대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완전히 다른 것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사건은 물체들 속에서 실현되지만, 사건 그 자체는 이 실현을 초과한다. 사건은 비물체적이며, 물체들의 표면에서 효과로서만 존재한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역설은 공통감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감각에 반대되는 것이다. 역설은 양 방향을 동시에 긍정한다. 역설은 고정된 정체성과 방향을 파괴한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스토아 철학자에게 사건이란 물체에 일어나는 것이면서 물체와는 전적으로 구별되는 것이다. 사건은 속성이 아니라 술어이며, 물체의 상태가 아니라 물체에 생기는 비물체적 효과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의미의 표면에는 깊이도 높이도 없다. 표면은 두 가지를 분리하면서 동시에 연결하는 순수한 경계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사건을 원하라. 사건 속에서 영원한 진리를 찾는 것, 이것이 스토아적 윤리학의 핵심이다.&lt;/span&gt;&lt;/div&gt;
&lt;br /&gt;&lt;br /&gt;&lt;/div&gt;
&lt;/div&gt;
&lt;/div&gt;</description>
      <category>철학</category>
      <author>에세이향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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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s://adoongaa.tistory.com/2714#entry2714comment</comments>
      <pubDate>Wed, 1 Apr 2026 13:58:44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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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왜 지금 라캉인가?욕망의 설계자를 묻는 시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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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div id=&quot;content&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000000; text-align: start;&quot;&gt;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
&lt;div id=&quot;wrap&quot;&gt;
&lt;div&gt;
&lt;div&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quot;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quot; 이 한 문장을 처음 접하면 대부분 고개를 갸우뚱한다. 무의식이라면 프로이트가 말한 그 어둡고 혼돈스러운 충동의 세계 아닌가? 그런데 그것이 '언어처럼' 구조를 갖고 있다니?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1&amp;ndash;1981)은 생전에 난해하기로 악명 높았고, 사후에도 여전히 &quot;읽히지 않는 사상가&quot;로 분류되곤 한다. 그런데 21세기 들어 라캉은 기묘하게도 가장 '잘 팔리는' 정신분석가가 되었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의 대중적 저작들을 통해, K-드라마와 K-팝의 욕망 구조를 분석하는 문화비평에서, 알고리즘과 소비사회를 해부하는 철학 유튜브에서. 왜 하필 라캉인가?&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이 질문에 답하려면, 라캉이 무엇을 말했는가보다 라캉이 무엇을 겨냥했는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라캉의 정신분석은 개인의 심리 치료를 넘어서 주체, 언어, 욕망에 대한 근본적 물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물음이 겨냥하는 지점이, &quot;나다움&quot;과 &quot;내 욕망&quot;을 끊임없이 말하면서도 정작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우리의 상황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lt;/span&gt;&lt;br /&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1. &quot;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quot; &amp;mdash; 프로이트로의 귀환, 그러나 다른 귀환&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라캉의 출발점은 프로이트(Sigmund Freud)다. 그러나 라캉이 말하는 &quot;프로이트로의 귀환(retour &amp;agrave; Freud)&quot;은 프로이트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겠다는 선언이 아니었다. 오히려 당시 미국과 유럽에서 주류가 된 자아심리학(ego psychology)이 프로이트의 핵심을 배반했다는 비판에서 출발한 것이다. 자아심리학은 정신분석의 목표를 환자의 자아를 강화하여 사회에 적응시키는 것으로 설정했다. 라캉이 보기에 이것은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의 파괴력을 길들여 무해한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었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라캉의 혁신은 구조주의 언어학, 특히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의 기호학을 정신분석에 도입한 데 있다. 라캉은 「도둑맞은 편지에 관한 세미나」(Le s&amp;eacute;minaire sur &quot;La lettre vol&amp;eacute;e&quot;, 1956)에서 무의식이 이미지나 본능의 무질서한 저장소가 아니라, 기표(signifiant)의 연쇄로 구성된다고 주장했다. 쉽게 말해, 우리가 말실수를 하거나 꿈에서 엉뚱한 장면을 볼 때, 거기에는 랜덤한 혼란이 아니라 일정한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말실수나 꿈을 &quot;무의식으로 가는 왕도&quot;라고 본 것은 바로 이 논리를 감지했기 때문이며, 라캉은 그 논리의 구조를 언어학적 개념으로 정밀하게 재구성했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이것이 왜 지금 중요한가? &quot;나를 찾겠다&quot;, &quot;내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겠다&quot;는 말은 이제 상투어가 되었다. 그런데 라캉은 바로 그 &quot;내 마음&quot;이라는 것이 이미 타인의 언어, 사회의 코드, 문화의 관습으로 짜여 있다고 말한다. 내가 하는 말,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두려워하는 것 &amp;mdash; 이 모든 것이 내 안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솟아오르는 것이 아니라 언어라는 구조 안에서 배치된 것이다. 이 통찰은 &quot;나를 찾는다&quot;는 프로젝트 자체를 근본부터 재고하게 만든다.&lt;/span&gt;&lt;br /&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2. 거울단계 &amp;mdash; 나는 어떻게 '나'가 되는가&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라캉의 개념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quot;거울단계(le stade du miroir)&quot;다. 1949년 국제정신분석학회에서 발표된 이 이론은,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유아가 거울에 비친 자기 이미지를 보고 환호하는 순간을 분석한다(「거울단계 &amp;mdash; 정신분석적 경험에서 드러나는 '나'의 기능 형성자로서」, Le stade du miroir comme formateur de la fonction du Je, 1949).&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핵심은 이렇다. 유아는 아직 자기 신체를 통합적으로 경험하지 못한다. 팔과 다리가 따로 노는 듯한 파편적 신체 경험 속에 있다. 그런데 거울 속에서 하나의 완결된 형체를 보는 순간, 유아는 &quot;저것이 나다!&quot;라고 동일시한다. 문제는 이 동일시가 일종의 오인(m&amp;eacute;connaissance)이라는 점이다. 파편적이고 불안정한 실제의 나와, 거울 속의 완결된 이미지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틈이 있다. 그러나 유아는 &amp;mdash; 그리고 이후 성장한 우리 모두는 &amp;mdash; 이 이미지 쪽을 '진짜 나'로 받아들인다. 자아(moi)란 처음부터 하나의 허구적 구성물이라는 것이 라캉의 도발적 주장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이 분석을 인스타그램 시대에 대입해 보면 거의 소름이 돋는 정확성을 보인다. 우리는 프로필 사진을 고르고, 피드를 큐레이션하고, 스토리에 올릴 순간을 연출한다. 이 과정에서 구축되는 것은 '진짜 나'가 아니라 '이미지로서의 나' &amp;mdash; 라캉의 용어로 말하면 상상적 자아(moi imaginaire)다. 좋아요와 팔로워 수는 거울 속 이미지에 대한 타인의 승인이며, 우리는 그 승인에 기대어 자기 존재를 확인한다. 라캉이 1949년에 간파한 구조가, 소셜 미디어라는 거대한 거울 장치 속에서 전 지구적 규모로 재연되고 있는 셈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3. &quot;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quot; &amp;mdash; 내 욕망은 정말 내 것인가&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라캉의 사유에서 가장 전복적인 명제는 아마도 이것일 것이다. &quot;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Le d&amp;eacute;sir de l'homme est le d&amp;eacute;sir de l'Autre).&quot; 이 문장은 『세미나 제11권: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Le S&amp;eacute;minaire XI: Les quatre concepts fondamentaux de la psychanalyse, 1964)에서 체계적으로 전개되었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여기서 &quot;타자(Autre)&quot;는 특정한 타인이 아니다. 라캉이 대문자 A로 표기하는 &quot;대타자(grand Autre)&quot;는 언어, 법, 사회적 규범, 상징적 질서 전체를 가리킨다. 라캉의 주장을 단순화하면 이렇다. 우리가 무언가를 욕망할 때, 그 욕망은 순수하게 우리 내부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대타자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며, 대타자에게 인정받기를 욕망한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일상적 예를 들어 보자. 명품 가방을 사고 싶다는 욕망을 생각해 보자. 이 욕망은 가방의 기능적 우수성 때문에 발생하는가? 대부분의 경우 아니다. 그 가방이 특정 사회적 위치를 표시하고, 타인의 시선 속에서 나를 특정한 방식으로 자리매김하기 때문에 욕망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quot;나는 명품에 관심 없다&quot;고 선언하는 것 역시 또 다른 방식으로 대타자 앞에서 자신을 위치시키는 행위일 수 있다. 라캉의 분석이 불편한 이유는 욕망의 &quot;바깥&quot;이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이 구도를 알고리즘 시대에 적용하면 사태는 더욱 복잡해진다. 넷플릭스의 추천 알고리즘은 &quot;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quot;를 제시한다. 그런데 이 추천은 과거의 시청 이력에 기반한 것이다. 알고리즘이 제시하는 것은 내가 이미 욕망한 것의 반복이며, 나는 그 반복 속에서 &quot;이것이 내 취향&quot;이라고 믿게 된다. 여기서 대타자의 자리에는 알고리즘이 앉아 있다. 내가 알고리즘을 이용하는 것인지, 알고리즘이 내 욕망을 설계하는 것인지 &amp;mdash; 이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지점에서 라캉의 물음은 날카로워진다.&lt;/span&gt;&lt;br /&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4. 실재계, 상징계, 상상계 &amp;mdash; 세 겹으로 읽는 세계&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라캉은 인간의 경험을 세 가지 차원(질서)으로 분절한다. 상상계(l'Imaginaire), 상징계(le Symbolique), 실재계(le R&amp;eacute;el). 이 세 차원은 서로 분리된 영역이 아니라, 보로메오 매듭(n&amp;oelig;ud borrom&amp;eacute;en)처럼 서로 얽혀 있다 &amp;mdash; 하나를 풀면 나머지 둘도 풀어진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상상계는 거울단계에서 설명한 이미지와 동일시의 차원이다.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는 것, 타인과의 상상적 관계, 나르시시즘적 매혹과 공격성이 여기에 속한다. 상징계는 언어, 법, 사회적 규칙의 차원이다. 우리가 말을 배우고, 이름을 부여받고, 사회적 역할 속에 자리 잡는 것은 상징계에 진입하는 과정이다. 라캉에게 &quot;주체&quot;는 상징계 안에서, 기표의 연쇄 속에서 구성된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그리고 실재계. 이것은 라캉의 가장 독특하고 가장 까다로운 개념이다. 실재계는 &quot;현실(r&amp;eacute;alit&amp;eacute;)&quot;과 다르다. 현실은 이미 상상계와 상징계를 통해 구조화된 경험이다. 반면 실재계는 상징화를 벗어나는 것,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것, 그래서 불안이나 외상(trauma)의 형태로만 우리에게 침입하는 것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이 개념이 현대적으로 유의미한 이유는 이렇다. 우리는 &quot;정보화 사회&quot;에 살고 있으며 모든 것이 데이터로 번역 가능하다고 믿는다. 감정도 수치화하고, 건강도 앱으로 추적하며, 관계도 매칭 알고리즘으로 최적화한다. 그런데 때로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이 밀려오고, 모든 것이 잘 풀리는 데도 무언가가 근본적으로 어긋나 있다는 감각이 사라지지 않는다. 라캉이라면 이것을 &quot;실재계의 귀환(retour du R&amp;eacute;el)&quot;이라고 부를 것이다. 상징화의 그물이 아무리 촘촘해져도 빠져나가는 무언가가 있으며, 그것이 바로 주체의 진실에 가장 가까운 지점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5. 대상 a &amp;mdash; 욕망의 원인이자 욕망의 덫&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라캉의 개념 체계에서 가장 독창적이면서 가장 까다로운 것이 &quot;대상 소문자 a(objet petit a)&quot;이다. 라캉 자신이 &quot;나의 유일한 발명&quot;이라고 부른 이 개념은, 욕망을 일으키지만 결코 손에 잡히지 않는 것, 욕망의 원인이자 대상인 동시에 영원히 상실된 것을 가리킨다(세미나 제10권, 『불안』, Le S&amp;eacute;minaire X: L'angoisse, 1962&amp;ndash;63).&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이해를 돕기 위해 일상적 경험을 떠올려 보자. 오랫동안 갖고 싶었던 물건을 마침내 손에 넣는 순간, 기대했던 만큼의 만족이 오지 않는 경험. 그래서 곧 다음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향해 다시 달려가는 반복. 라캉의 분석에 따르면, 이것은 개인의 욕심이나 성격 문제가 아니다. 욕망의 구조 자체가 그렇다. 우리가 추구하는 대상에는 항상 &quot;대상 a&quot;가 덧씌워져 있으며, 대상을 획득하는 순간 대상 a는 다음 대상으로 미끄러진다. 욕망은 결코 충족되지 않는다 &amp;mdash;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욕망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이 구조를 가장 노골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현대 소비자본주의다. 광고는 제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결핍을 판다. &quot;이것만 있으면 당신의 삶이 완전해질 것이다&quot;라는 약속은, 제품을 구매한 뒤에도 충족되지 않는 결핍을 남기고, 그 결핍이 다음 구매를 추동한다. 라캉의 대상 a 개념은 이 순환의 메커니즘을 구조적으로 설명하는 도구가 된다. 소비사회 비판에서 라캉이 빠지지 않고 소환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lt;/span&gt;&lt;br /&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6. 라캉이 지금 소환되는 진짜 이유&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라캉이 21세기에 다시 절실해진 이유를 정리하면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첫째, 자아의 위기가 전면화되었기 때문이다. &quot;나를 찾겠다&quot;는 말이 이토록 넘쳐나는 시대에, 라캉은 찾아야 할 &quot;진짜 나&quot;라는 것 자체가 허구적 구성물일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냉소가 아니다. 오히려 자아라는 환상에 기대지 않고 주체의 진실에 접근하라는 요청이다. &quot;자기다움&quot;이 마케팅 전략이 되고, &quot;진정성(authenticity)&quot;이 하나의 브랜드가 된 시대에, 라캉의 주체론은 이 담론들의 이면을 들여다보게 만든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둘째, 욕망의 작동 방식이 가시화되었기 때문이다. 알고리즘이 우리의 시선을 유도하고, 플랫폼이 우리의 선호를 학습하며, 인플루언서가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을 설계하는 시대다. &quot;내가 원하는 것&quot;과 &quot;내가 원하도록 설계된 것&quot;의 경계가 사라지는 이 상황에서, &quot;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quot;라는 라캉의 명제는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일상적 경험의 정확한 기술이 된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셋째, 언어와 주체의 관계에 대한 물음이 새로운 국면을 맞았기 때문이다. AI가 인간의 언어를 모방하고, 챗봇이 상담사를 대체하려 하며, 생성형 AI가 글을 쓰는 시대다. &quot;언어를 사용하는 존재&quot;로서의 인간의 특이성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다. 라캉이 말한 &quot;말하는 존재(parl&amp;ecirc;tre)&quot; &amp;mdash;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비로소 주체가 되지만, 동시에 언어에 의해 소외되는 존재 &amp;mdash; 라는 개념은 AI 시대에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데 있어 예기치 않은 유효성을 갖는다.&lt;/span&gt;&lt;br /&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7. 라캉을 읽을 때 주의할 것&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라캉에 접근할 때 반드시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라캉의 텍스트는 의도적으로 난해하게 쓰여졌다. 이것은 라캉의 허세나 비사교성의 문제가 아니라 &amp;mdash; 물론 그런 측면도 없지 않지만 &amp;mdash; 일종의 방법론적 선택이다. 라캉은 무의식이 명확한 명제로 번역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에, 자신의 언어 역시 일종의 수행적 실천으로 만들었다. 의미가 고정되지 않고 미끄러지는 라캉의 문체 자체가 기표의 운동에 대한 시연인 셈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따라서 라캉의 한 문장만 떼어 격언처럼 인용하는 것은 &amp;mdash; 니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amp;mdash; 가장 비(非)라캉적인 독법이다. &quot;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quot;를 &quot;남의 눈치를 보지 마라&quot;는 자기계발 조언으로 읽는 것은 라캉 사유의 전복력을 완전히 거세하는 것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입문 독서로는 브루스 핑크(Bruce Fink)의 『라캉의 주체』(The Lacanian Subject, 1995)가 가장 접근하기 쉽다. 슬라보예 지젝의 『삐딱하게 보기』(Looking Awry, 1991)는 대중문화를 통해 라캉을 풀어낸 흥미로운 입문서다. 한국어로는 홍준기의 『라캉과 현대철학』(문학과지성사, 2020)이 국내 학술 맥락에서 라캉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며, 민승기 외 편역의 『에크리 선집』(새물결, 2019)이 라캉 원전 접근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라캉의 세미나 번역은 아직 완역되지 않았지만, 자크-알랭 밀레르(Jacques-Alain Miller) 편집의 프랑스어 세미나 시리즈가 정본(正本)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라캉 이후의 라캉&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라캉은 치유를 약속하는 사상가가 아니다. 그는 주체가 자기 자신에 대해 품고 있는 편안한 환상을 건드리는 사상가다. &quot;당신이 원하는 것은 정말 당신이 원하는 것인가?&quot;라고 묻고, &quot;당신이 '나'라고 부르는 것은 정말 당신인가?&quot;라고 되묻는다. 알고리즘이 욕망을 설계하고, 이미지가 자아를 대체하며, AI가 언어의 지위를 재편하는 시대에 &amp;mdash; 라캉의 질문은 불쾌하지만, 그래서 정확히 필요하다.&lt;/span&gt;&lt;br /&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주요 참고 문헌]&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라캉의 주요 저작 및 세미나: 『에크리』(&amp;Eacute;crits, 1966), 「거울단계」(1949), 「도둑맞은 편지에 관한 세미나」(1956). 세미나 시리즈 &amp;mdash; 제7권 『정신분석의 윤리』(L'&amp;eacute;thique de la psychanalyse, 1959&amp;ndash;60), 제11권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Les quatre concepts fondamentaux de la psychanalyse, 1964), 제10권 『불안』(L'angoisse, 1962&amp;ndash;63), 제20권 『앙코르』(Encore, 1972&amp;ndash;73). Bruce Fink, The Lacanian Subject: Between Language and Jouissance (Princeton UP, 1995). Slavoj Žižek, Looking Awry: An Introduction to Jacques Lacan through Popular Culture (MIT Press, 1991). 홍준기, 『라캉과 현대철학』(문학과지성사, 2020). 민승기 외 편역, 『에크리 선집』(새물결, 2019). 이수련, 『라캉 정신분석의 근본 개념들』(문학과지성사, 2022).&lt;/span&gt;&lt;/div&gt;
&lt;/div&gt;
&lt;/div&gt;
&lt;/div&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r /&gt;&lt;br /&gt;&lt;/p&gt;</description>
      <category>철학</category>
      <author>에세이향기</author>
      <guid isPermaLink="true">https://adoongaa.tistory.com/2713</gu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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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 Apr 2026 13:56:1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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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피에르 부르디외 『구별짓기』당신의 취향은 당신의 계급을 말한다</title>
      <link>https://adoongaa.tistory.com/2712</link>
      <description>&lt;div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000000; text-align: start;&quo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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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2002)의 『구별짓기』(La Distinction: Critique sociale du jugement, 1979)는 20세기 사회학의 가장 중요한 저작 중 하나로 꼽힌다. 1998년 국제사회학회(ISA)가 선정한 '20세기 가장 중요한 사회학 저서' 목록에 이름을 올린 이 책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취향'이라 부르는 것이 사실은 계급적 권력관계의 산물이자 도구라는 사실을 방대한 경험적 데이터와 정교한 이론적 틀로 입증했다. 부르디외는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칸트 이래 서양 미학의 근본 전제였던 '순수한 취향'이라는 관념을 뿌리째 뒤흔들었다.&lt;/span&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
&lt;div style=&quot;color: #666666; 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우체부의 아들, 파리의 지식인이 되다&lt;/span&gt;&lt;/div&gt;
&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부르디외의 삶 자체가 『구별짓기』의 가장 생생한 사례였다. 그는 프랑스 남서부 피레네산맥 자락의 작은 마을 당갱(Denguin)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소작농 출신의 우체부였고, 가정에서는 지금은 거의 소멸한 가스코뉴 방언을 썼다. 파리의 화려한 지식인 세계와는 거리가 먼, 그야말로 프랑스의 변두리에서 자란 셈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하지만 학업에 뛰어났던 부르디외는 포(Pau)의 리세를 거쳐 파리의 명문 루이르그랑 고등학교로 진학했고, 프랑스 최고의 엘리트 교육기관인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amp;Eacute;cole normale sup&amp;eacute;rieure)에 입학해 철학을 전공했다. 당시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 밑에서 공부하면서 마르크스주의의 세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부르디외는 순수 철학에 머물지 않았다. 졸업 후 교직에 몸담다가 1955년 징병되어 알제리에 파견되었는데, 이 경험이 그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바꾸었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알제리 독립전쟁(1954~1962) 한가운데에 던져진 부르디외는 식민지 사회에서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몸으로 체험했다. 카빌(Kabyle) 족 공동체에 대한 민족지학적 현장 연구를 수행하면서, 추상적 철학에서 경험적 사회과학으로 완전히 방향을 전환했다. 시골 우체부의 아들이 파리 최고의 엘리트 학교에서 느꼈을 문화적 이질감, 그리고 알제리에서 목격한 식민지적 지배 구조 &amp;mdash; 이 두 가지 체험이 부르디외 평생의 학문적 화두인 '상징적 지배'와 '문화적 재생산'의 씨앗이 되었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1960년대에 프랑스로 돌아온 부르디외는 교육, 문화, 예술에 관한 일련의 경험적 연구를 수행했다. 『상속자들』(Les H&amp;eacute;ritiers, 1964), 『재생산』(La Reproduction, 1970) 등을 통해 교육 체계가 계급 불평등을 어떻게 재생산하는지를 분석했고, 이러한 연구의 집대성이 바로 1979년에 출간된 『구별짓기』였다. 이 책은 1963년부터 1968년까지 수행된 대규모 설문조사(이른바 '코닥 조사'와 '취향 조사')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프랑스 사회의 계급별 문화 소비와 생활양식의 차이를 총체적으로 분석한 역작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
&lt;div style=&quot;color: #666666; 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칸트를 뒤집다 &amp;mdash; 순수한 취향이란 없다&lt;/span&gt;&lt;/div&gt;
&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구별짓기』의 부제는 '판단력 비판의 사회적 비판'(Critique sociale du jugement)이다. 이 부제 자체가 임마누엘 칸트의 『판단력 비판』(Kritik der Urteilskraft, 1790)을 정면으로 겨냥한 것이다. 칸트는 미적 판단이 개인의 이해관계나 사회적 조건과 무관한, 보편적이고 순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능력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진 보편적 감각이며, 이러한 '무관심적 쾌'(d&amp;eacute;sint&amp;eacute;ressement)야말로 미적 경험의 본질이라는 것이 칸트 미학의 핵심이었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부르디외는 이 칸트적 전제를 정면으로 뒤집었다. 우리가 '취향'이라고 부르는 것은 결코 순수하거나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사회적 조건에서 형성되고, 특정한 계급적 위치를 반영하며, 무엇보다 계급 간의 '구별짓기' 수단으로 기능한다. 부르디외의 유명한 명제 &amp;mdash; &quot;취향은 분류하며, 분류하는 자를 분류한다&quot;(Le go&amp;ucirc;t classe, et classe celui qui classe) &amp;mdash; 는 이 핵심 논지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이를 일상적인 예로 풀어보자. 누군가가 &quot;나는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좋아한다&quot;고 말할 때, 이 발언은 단순한 음악적 선호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화자의 교육 수준, 문화적 배경, 계급적 위치를 '분류'하는 표지가 된다. 반대로, &quot;나는 트로트를 좋아한다&quot;는 발언은 또 다른 방식으로 화자를 '분류'한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음악만큼 계급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도 없다. 음악은 가장 '순수한' 예술 형식인 동시에, 가장 강력한 계급 표지이기도 하다.&lt;/span&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
&lt;div style=&quot;color: #666666; 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아비투스 &amp;mdash; 몸에 새겨진 사회 구조&lt;/span&gt;&lt;/div&gt;
&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구별짓기』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파악해야 할 핵심 개념이 바로 '아비투스'(habitus)다. 아비투스란 특정한 사회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 성향 체계, 지각과 판단과 행위의 무의식적 도식이다. 쉽게 말해, 아비투스란 '몸에 새겨진 사회 구조'라 할 수 있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예를 들어보자. 어린 시절부터 부모와 함께 미술관을 다니고, 클래식 음악을 듣고, 문학 작품을 읽으며 자란 아이가 있다. 이 아이에게 미술관은 낯선 공간이 아니라 편안한 장소이고, 추상화 앞에서 불편함을 느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형식적 특질'을 감상하는 눈을 갖게 된다. 이것이 바로 아비투스의 작동 방식이다. 반면, 그런 경험 없이 자란 사람에게 미술관은 여전히 낯설고 위압적인 공간으로 남는다. 이 사람은 그림 앞에서 &quot;이게 뭘 그린 거지?&quot;라고 묻게 되는데, 이는 그의 아비투스가 '기능'과 '내용'을 중시하는 '대중적 미학'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중요한 것은, 아비투스가 의식적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아무도 자신의 아비투스를 의식적으로 선택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특정한 사회적 환경에 노출됨으로써 자연스럽게 체화된 것이다. 마치 모국어를 배우듯, 우리는 자신의 계급적 위치에 부합하는 취향과 감각을 몸으로 습득한다. 바로 이 때문에 취향이 그토록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고, 바로 이 때문에 취향에 의한 구별짓기가 그토록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오늘날 인스타그램 피드를 떠올려보면 이해가 쉽다. 누군가는 미니멀한 카페 인테리어와 자연광으로 찍은 브런치 사진을 올리고, 누군가는 고기가 가득한 삼겹살 파티 사진을 올린다. 둘 다 '맛있는 음식 사진'이지만, 그 시각적 코드, 연출 방식, 해시태그에는 전혀 다른 아비투스가 작동하고 있다. 부르디외라면 이것을 '형식의 취향'과 '내용의 취향'의 대비로 설명했을 것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
&lt;div style=&quot;color: #666666; 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자본의 세 가지 얼굴 &amp;mdash; 경제자본, 문화자본, 사회자본&lt;/span&gt;&lt;/div&gt;
&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부르디외의 또 다른 핵심 개념은 '자본'(capital)이다. 그는 마르크스의 경제자본 개념을 확장하여, 사회적 권력을 구성하는 자본에는 최소 세 가지 형태가 있다고 주장했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첫째, 경제자본(capital &amp;eacute;conomique)은 돈, 재산, 소득 등 물질적 부를 가리킨다. 이것은 가장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형태의 권력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둘째, 문화자본(capital culturel)은 교육, 지식, 교양, 예술적 감수성 등 문화적 역량을 말한다. 문화자본은 세 가지 상태로 존재한다. 체화된 상태(아비투스로서 몸에 새겨진 교양), 객체화된 상태(그림, 책, 악기 등 문화적 재화), 제도화된 상태(학위, 자격증 등 공인된 증명서)가 그것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셋째, 사회자본(capital social)은 인맥, 관계망, 소속 집단 등 사회적 연결을 의미한다. 누구를 알고, 어떤 모임에 속하느냐가 곧 사회적 자원이 된다는 뜻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부르디외가 특히 강조한 것은 문화자본이다. 경제자본이 아무리 풍부해도, 문화자본이 결여된 사람은 지배계급의 문화적 게임에 온전히 참여할 수 없다. 반대로, 문화자본은 경제자본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사람(예를 들어 교수나 예술가)에게도 일정한 사회적 지위를 부여한다. 부르디외는 지배계급 내부에서도 경제자본이 풍부한 분파(기업가, 경영인)와 문화자본이 풍부한 분파(교수, 예술가, 지식인) 사이에 끊임없는 긴장과 경쟁이 존재한다고 분석했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오늘날 이 분석은 더욱 절실한 현실감을 갖는다. 부동산 자산 수십억을 가진 사람이 미술 경매에서 어색해하는 모습이나, 반대로 박사학위를 가진 학자가 강남의 사교 모임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상황은,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의 불일치가 만들어내는 전형적인 장면이다. 부르디외의 틀로 보면, 이 두 사람은 '사회적 공간'(espace social) 안에서 서로 다른 좌표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
&lt;div style=&quot;color: #666666; 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세 가지 취향 &amp;mdash; 정당한 취향, 중간 취향, 대중적 취향&lt;/span&gt;&lt;/div&gt;
&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구별짓기』에서 부르디외는 프랑스 사회의 취향을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첫째, '정당한 취향'(go&amp;ucirc;t l&amp;eacute;gitime)은 지배계급의 취향이다.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 같은 음악을 선호하고, 추상미술이나 아방가르드 예술을 감상할 수 있는 '순수한 시선'(regard pur)을 가진 사람들의 취향이다. 이들에게 예술 작품의 가치는 그것이 '무엇을 재현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있다. 형식이 내용보다 우위에 서는 것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둘째, '중간 취향'(go&amp;ucirc;t moyen)은 프티부르주아지, 즉 중간계급의 취향이다. 이들은 정당한 취향을 갈망하지만, 그것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하지는 못한다. 부르디외가 '문화적 선의'(bonne volont&amp;eacute; culturelle)라 부른 이 태도는, '올바른' 문화를 소비하려는 열망과 그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 사이의 간극에서 생겨난다. 라프소디 인 블루를 좋아하거나, 유명한 클래식 선율은 알지만 작곡가의 이름은 잘 모르는 식이다. 오늘날로 치면, 넷플릭스에서 '예술영화' 카테고리를 일부러 찾아보지만, 실제로 끝까지 보는 것은 범죄 스릴러인 사람들의 모습과 닮았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셋째, '대중적 취향'(go&amp;ucirc;t populaire) 또는 '필연의 취향'(go&amp;ucirc;t de n&amp;eacute;cessit&amp;eacute;)은 서민계급의 취향이다. 이들의 미학은 형식보다 기능을 중시한다. 음식은 배불리 먹을 수 있어야 하고, 옷은 실용적이어야 하며, 그림은 무엇을 그렸는지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서민계급의 '대중적 미학'은 칸트적 미학의 정반대에 서 있다. 예술과 삶의 연속성을 긍정하고, 형식보다 기능에, '순수한 형식'보다 삶의 내용에 충실한 미학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여기서 부르디외의 분석이 날카로운 것은, 이 세 가지 취향이 단순한 '차이'가 아니라 위계적인 '구별'이라는 점을 밝힌 것이다. 정당한 취향은 자신을 보편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제시함으로써, 다른 취향들을 '저급한 것', '천박한 것'으로 배제한다. 취향의 위계질서는 곧 계급의 위계질서를 반영하고 재생산한다.&lt;/span&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
&lt;div style=&quot;color: #666666; 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먹는 것이 계급이다 &amp;mdash; 음식과 몸의 정치학&lt;/span&gt;&lt;/div&gt;
&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구별짓기』의 가장 인상적인 분석 중 하나는 음식에 관한 것이다. 부르디외는 계급에 따른 식습관의 차이를 '양과 질의 대립'(l'antith&amp;egrave;se entre quantit&amp;eacute; et qualit&amp;eacute;), '내용과 형식의 대립'으로 파악했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서민계급의 식탁에서는 양이 중요하다. 배를 든든히 채울 수 있는 음식, 열량이 높고 포만감을 주는 음식이 선호된다. 고기가 넉넉하게 올라온 식탁, 국물이 가득한 찌개, 밥 한 공기를 더 먹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이것이 부르디외가 말한 '필연의 취향' &amp;mdash; 물질적 필요에서 출발한 취향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반면, 지배계급의 식탁에서는 형식이 중요하다. 무엇을 먹느냐보다 어떻게 먹느냐, 어떻게 차려내느냐, 어떤 분위기에서 먹느냐가 관건이 된다. 식사는 단순한 영양 섭취가 아니라 하나의 '의례'이며 '연출'이다. 소량의 음식을 정교한 플레이팅으로 담아내는 파인다이닝의 미학은, '필연으로부터의 거리'(distance &amp;agrave; la n&amp;eacute;cessit&amp;eacute;)를 과시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배고픔으로부터 충분히 자유로운 사람만이 음식의 '형식'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이 분석은 오늘날의 '푸디(foodie) 문화'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오마카세'와 '맛집 투어'로 대표되는 현대의 미식 문화는, 음식을 단순한 생존의 문제에서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한 끼에 30만 원짜리 오마카세를 먹는 것과, 5천 원짜리 김치찌개로 점심을 해결하는 것 사이에는 단순한 가격 차이 이상의 것이 존재한다. 부르디외라면, 그 차이 속에서 계급적 구별짓기의 작동을 읽어냈을 것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몸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다. 부르디외는 계급에 따라 몸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진다고 분석했다. 서민계급에게 몸은 노동의 도구이며, 강하고 든든한 것이 좋은 몸이다. 반면 지배계급에게 몸은 '자기 표현'의 매체이며, 날씬하고 건강한 것, 적절히 관리된 것이 좋은 몸이다. 오늘날 필라테스, 요가, 유기농 식단, 간헐적 단식 같은 건강 트렌드가 특정 계층에서 더 활발하게 소비되는 현상은, 부르디외의 분석이 여전히 유효함을 보여준다.&lt;/span&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
&lt;div style=&quot;color: #666666; 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상징적 폭력 &amp;mdash; 보이지 않는 지배&lt;/span&gt;&lt;/div&gt;
&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부르디외의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인 '상징적 폭력'(violence symbolique)은 『구별짓기』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다. 상징적 폭력이란, 지배 질서가 자신의 자의적(arbitrary) 성격을 은폐하고, 마치 자연스러운 것처럼 받아들여지게 만드는 메커니즘을 가리킨다. 부르디외의 다른 저작에서 나온 표현이지만, 그 논리는 『구별짓기』 전체를 관통한다. &quot;모든 확립된 질서는 자신의 자의성을 자연화하는 경향이 있다&quot;는 것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취향의 영역에서 상징적 폭력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지배계급의 취향이 '세련된 것', '고급스러운 것', '교양 있는 것'으로 인정받고, 서민계급의 취향이 '천박한 것', '저급한 것'으로 평가절하될 때, 이것은 단순한 미학적 판단이 아니라 계급적 지배의 한 형태다. 더 교묘한 것은, 이러한 위계질서가 피지배자들에게도 내면화된다는 점이다. 서민계급 출신의 사람이 미술관에 가서 현대미술 작품 앞에서 &quot;나는 이런 게 뭔지 잘 모르겠다&quot;고 말할 때, 그는 자신의 문화적 '무능력'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지배계급의 문화적 우월성을 간접적으로 승인하게 된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오늘날 이 메커니즘은 더욱 정교해졌다. SNS 시대에 '취향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는 일종의 사회적 화폐가 되었다. '힙한' 카페를 알고, '쿨한' 브랜드를 소비하고, '감성적인' 여행지를 방문하는 것은 단순한 소비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알리는 기호 행위다. 부르디외가 만약 인스타그램 시대에 살았다면, 피드에 올라오는 사진 한 장 한 장이 곧 계급적 '구별짓기'의 무대라고 분석했을 것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
&lt;div style=&quot;color: #666666; 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장 이론 &amp;mdash; 취향의 전쟁터&lt;/span&gt;&lt;/div&gt;
&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부르디외는 사회를 여러 개의 '장'(champ, field)으로 구성된 것으로 보았다. 장이란 특정한 유형의 자본을 둘러싼 경쟁이 벌어지는 관계적 공간이다. 예술의 장, 학문의 장, 정치의 장, 경제의 장 등이 있으며, 각각의 장에는 고유한 규칙과 내기물이 존재한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구별짓기』에서 부르디외가 분석한 것은 바로 '문화적 장'(champ culturel)에서 벌어지는 계급 간의 상징적 투쟁이다. 이 장에서는 무엇이 '좋은 취향'이고 무엇이 '나쁜 취향'인지를 둘러싼 끊임없는 경쟁이 벌어진다. 그리고 이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 즉 자신의 취향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게 만드는 것이 곧 상징적 권력의 행사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특히 흥미로운 것은 '생산의 장'과 '소비의 장' 사이의 대응관계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문화 상품의 생산자들(작가, 예술가, 디자이너, 비평가 등)은 소비자들의 취향을 단순히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형성한다. 그리고 이 형성 과정에서 특정한 취향의 위계질서가 만들어지고 유지된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현대의 알고리즘 기반 플랫폼이 이 역할을 대신한다고 볼 수 있다. 넷플릭스의 추천 알고리즘, 스포티파이의 큐레이션, 인스타그램의 탐색 피드는 사용자의 기존 취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하면서, 동시에 '트렌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경계를 끊임없이 재설정한다. 부르디외의 장 이론은 디지털 플랫폼 시대의 문화적 권력관계를 분석하는 데에도 여전히 강력한 도구가 된다.&lt;/span&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
&lt;div style=&quot;color: #666666; 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프티부르주아의 비극 &amp;mdash; 문화적 선의와 그 좌절&lt;/span&gt;&lt;/div&gt;
&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구별짓기』에서 가장 날카로운 분석이 이루어지는 대목 중 하나는 프티부르주아지, 즉 중간계급에 대한 것이다. 부르디외는 프티부르주아지의 문화적 태도를 '문화적 선의'(bonne volont&amp;eacute; culturelle)라는 개념으로 포착했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문화적 선의란, '올바른' 문화를 소비하고 '세련된' 취향을 갖추려는 간절한 열망을 가리킨다. 프티부르주아는 서민계급의 '필연의 취향'에서 벗어나려 하면서도, 지배계급의 '정당한 취향'에 완전히 도달하지 못하는 중간 지대에 놓여 있다. 이들은 '좋은' 음악을 들으려 하고, '교양 있는' 대화를 나누려 하며, '격조 있는' 생활양식을 갖추려 한다. 하지만 이 노력 자체가 역설적으로 그들의 불안정한 위치를 드러낸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부르디외의 분석에서 프티부르주아는 어떤 의미에서 가장 비극적인 존재다. 지배계급은 자신의 취향을 마치 자연스러운 것처럼 행사한다. 그들에게 '고급 문화'는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이다. 반면 프티부르주아에게 문화적 상승은 의식적인 노력과 학습을 필요로 하며, 바로 그 노력의 흔적 자체가 '부자연스러움'으로 읽히게 된다. 부르디외는 이것을 '현학가'(p&amp;eacute;dant)와 '세속인'(mondain)의 대비로 설명했다. 현학가는 이해하되 깊은 감흥은 없고, 세속인은 이해 없이 향유한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오늘날의 '자기계발' 문화, '교양 콘텐츠' 소비 붐, '인문학 열풍' 같은 현상을 부르디외적으로 읽으면 흥미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유튜브에서 &quot;10분 만에 이해하는 니체&quot;를 시청하고, 서점에서 &quot;하루 한 쪽 철학&quot;을 구매하는 것은, 문화적 상승에 대한 열망의 현대적 발현이다. 부르디외라면 이러한 현상 속에서 중간계급의 '문화적 선의'가 새로운 형태로 작동하고 있음을 읽어냈을 것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
&lt;div style=&quot;color: #666666; 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디지털 시대의 구별짓기 &amp;mdash; 부르디외는 아직 살아 있다&lt;/span&gt;&lt;/div&gt;
&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구별짓기』가 출간된 1979년 이후 세계는 극적으로 변했다. 인터넷, 소셜미디어, 스트리밍 서비스, AI 기술의 등장으로 문화의 생산과 소비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부르디외의 분석은 여전히 유효한가?&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일부 학자들은 '문화적 잡식성'(cultural omnivorousness) 이론을 통해 부르디외를 비판했다. 미국의 사회학자 리처드 피터슨(Richard Peterson) 등은, 현대 사회에서 상류층은 오히려 다양한 장르와 취향을 아우르는 '잡식성'을 보이며, 이것이 전통적인 고급/저급 문화의 위계를 약화시킨다고 주장했다. 클래식도 듣고, K-POP도 듣고, 재즈 바에도 가고, 포장마차에도 가는 사람이 오히려 '세련된'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하지만 이 비판은 부르디외를 제대로 반박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잡식성' 자체가 새로운 형태의 구별짓기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문화를 넘나들 수 있는 '능력', 고급 문화와 대중 문화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유연성'은 그 자체로 높은 문화자본의 표현이다. 누구나 K-POP을 들을 수 있지만, K-POP을 들으면서 동시에 바흐를 '적절하게' 감상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구별짓기의 기준이 변했을 뿐, 구별짓기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디지털 플랫폼은 이 구별짓기를 더욱 정교하게 만들었다. 넷플릭스에서 무엇을 보느냐, 스포티파이에서 어떤 플레이리스트를 만드느냐, 인스타그램에서 어떤 계정을 팔로우하느냐는 모두 디지털 시대의 '취향 표지'다. 알고리즘은 사용자의 기존 취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콘텐츠를 추천함으로써, 계급별 문화적 격리를 심화시킬 수 있다. 각자의 필터 버블 속에서 서로 다른 문화적 세계를 살아가는 현상은, 부르디외가 말한 '사회적 공간'의 분절이 디지털 형태로 재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lt;/span&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
&lt;div style=&quot;color: #666666; 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비판과 한계 &amp;mdash; 그러나 읽어야 하는 이유&lt;/span&gt;&lt;/div&gt;
&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물론 『구별짓기』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가장 빈번한 비판은 이 책이 1960년대 프랑스 사회에 대한 분석이라는 점이다. 프랑스 특유의 계급 문화, 파리 부르주아지의 문화적 전통은 다른 나라에 그대로 적용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부르디외 자신도 이 점을 의식하여 영어판 서문에서, 이 책이 일종의 '프랑스 민족지'로 읽힐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특수한 사례의 분석을 통해 보편적 명제를 이끌어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또 다른 비판은 부르디외의 분석이 지나치게 결정론적이라는 것이다. 아비투스 개념은 사회 구조의 힘을 강조하는 반면, 개인의 자유와 변화 가능성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있다. 실제로, 계급적 배경을 뛰어넘어 문화적 취향을 바꾸거나 사회적 이동에 성공하는 사례들이 존재하며, 부르디외의 틀만으로는 이러한 예외적 사례를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문체에 대한 비판도 빠질 수 없다. 부르디외의 글쓰기는 악명 높을 정도로 난해하다. 영어판 서문에서도 스스로 인정했듯이, &quot;사회 세계의 복잡성을 재구성&quot;하려는 시도가 길고 복잡한 문장 구조로 이어졌다. 670쪽에 달하는 이 방대한 저작은 통계표, 도표, 사진, 인터뷰 자료가 뒤섞여 있어, 일반 독자에게는 상당한 인내를 요구한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별짓기』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 책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 &amp;mdash; 좋은 취향, 세련된 감각, 교양 있는 태도 &amp;mdash; 의 이면에 작동하는 권력관계를 폭로한다. &quot;취향에 관해서는 논쟁하지 않는다&quot;(De gustibus non est disputandum)라는 오래된 격언은, 부르디외 이후 더 이상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되었다. 취향은 논쟁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정확히 말하면 이미 항상 논쟁 &amp;mdash; 즉 계급 간의 상징적 투쟁 &amp;mdash; 의 무대였다는 것이 부르디외의 가르침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2026년 현재, 우리는 취향을 둘러싼 구별짓기가 그 어느 때보다 가시화된 시대를 살고 있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는지가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전시되고 평가되는 시대다.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는 이 거대한 취향의 전시장 뒤에 숨어 있는 권력의 문법을 해독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안내서로 남아 있다.&lt;/span&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
&lt;div style=&quot;color: #666666; 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주요 인용문&lt;/span&gt;&lt;/div&gt;
&lt;br /&gt;&lt;br /&gt;&lt;br /&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quot;취향은 분류하며, 분류하는 자를 분류한다. 자신의 분류에 의해 분류되는 사회적 주체들은,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구별되는 것과 천박한 것 사이에서 내리는 구별짓기를 통해 스스로를 구별하며, 이러한 구별짓기 속에서 객관적 분류 체계 안에서의 그들의 위치가 표현되거나 노출된다.&quot;&lt;/span&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amp;mdash; 피에르 부르디외, 『구별짓기』 서론(영역판 p.6)&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quot;음악만큼 자신의 '계급'을 뚜렷이 확인시켜주는 것도 없고, 음악의 취향만큼 확실하게 분류해주는 것도 없다.&quot;&lt;/span&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amp;mdash; 피에르 부르디외, 『구별짓기』 서론(영역판 p.18)&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quot;취향이란 무엇보다 혐오이며, 타인의 취향에 대한 역겨움이자 본능적 참을 수 없음이다.&quot;&lt;/span&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amp;mdash; 피에르 부르디외, 『구별짓기』(영역판 p.56)&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quot;음악은 가장 '순수한' 예술이다. 음악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며, 말해야 할 것이 없다.&quot;&lt;/span&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amp;mdash; 피에르 부르디외, 『구별짓기』(영역판 p.18)&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quot;대중적인 회화나 사진에 대한 판단은, 칸트적 미학의 정확한 반대편에 있는 '미학'(사실은 에토스)에서 비롯된다.&quot;&lt;/span&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amp;mdash; 피에르 부르디외, 『구별짓기』(영역판 p.4)&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quot;사회 세계에 관한 모든 지식, 그리고 특히 사회 세계에 관한 모든 인식은 사유와 표현의 도식을 작동시키는 구성 행위이며, 존재 조건과 실천 혹은 표상 사이에는 기계적 자극에 기계적으로 반응하기는커녕, 자신이 의미를 만드는 데 참여한 세계의 초대와 위협에 응답하는 행위자들의 구조화 활동이 개입한다.&quot;&lt;/span&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amp;mdash; 피에르 부르디외, 『구별짓기』 결론부(영역판 p.467)&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quot;(특권자의 금욕주의)와 '용이한 것'의 거부 &amp;mdash; 이것이 모든 '순수' 미학의 기초이다 &amp;mdash; 는, 소유자가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소유를 확인하는 주인-노예 변증법의 변형인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피박탈자들로부터 더욱 멀어지며, 피박탈자들은 필연의 모든 형태에 예속될 뿐 아니라 소유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고, 따라서 아직 소유하지 못한 소유물에 잠재적으로 사로잡혀 있다는 혐의까지 받는다.&quot;&lt;/span&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amp;mdash; 피에르 부르디외, 『구별짓기』(영역판 p.56)&lt;/span&gt;&lt;/div&gt;
&lt;br /&gt;&lt;br /&gt;&lt;/div&gt;
&lt;/div&gt;
&lt;/div&gt;</description>
      <category>철학</category>
      <author>에세이향기</author>
      <guid isPermaLink="true">https://adoongaa.tistory.com/2712</guid>
      <comments>https://adoongaa.tistory.com/2712#entry2712comment</comments>
      <pubDate>Wed, 1 Apr 2026 13:49:50 +0900</pubDate>
    </item>
    <item>
      <title>애도는 끝이 있는가, 없는가: 프로이트와 데리다, 애도에 대한 두 가지 시선</title>
      <link>https://adoongaa.tistory.com/2711</link>
      <description>&lt;div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000000; text-align: start;&quot;&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
&lt;div id=&quot;wrap&quo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000000; text-align: start;&quot;&gt;
&lt;div&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애도는&amp;nbsp;끝이&amp;nbsp;있는가,&amp;nbsp;없는가:&amp;nbsp;프로이트와&amp;nbsp;데리다,&amp;nbsp;애도에&amp;nbsp;대한&amp;nbsp;두&amp;nbsp;가지&amp;nbsp;시선&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친한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을 치르고, 49재를 지내고, 1주기를 보냈다. 그런데도 문득문득 그 친구가 생각난다. SNS에서 우연히 그와 비슷한 프로필 사진을 보면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이럴 때마다 주변 사람들은 말한다. &quot;이제 그만 잊어. 네 인생도 살아야지.&quot; 그렇다. 우리는 도대체 누군가를 얼마나 오래 슬퍼해야 하는가? 애도에도 마감 기한이 있는 것일까?&lt;/span&gt;&lt;br /&gt;&lt;br /&gt;&lt;br /&gt;&lt;/p&gt;
&lt;div&gt;
&lt;div style=&quot;color: #666666; 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프로이트의 답변: 애도는 끝나야 한다&lt;/span&gt;&lt;/div&gt;
&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1917년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애도와 멜랑콜리』에서 명확한 답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애도는 정상적인 심리 과정이며,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끝난다. 사랑하는 대상을 잃은 사람은 처음에는 그 대상에 집중했던 모든 심리적 에너지를 조금씩 회수한다. 그리고 그 에너지를 새로운 대상에게 다시 투자한다. 이것이 건강한 애도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프로이트는 이를 '애도 작업'이라고 불렀다. 죽은 이와 관련된 기억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그 기억 속에 묶여 있던 감정을 조금씩 풀어내는 과정이다. 이 작업이 완료되면 애도는 끝난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죽은 이 없는 삶을 살아갈 준비가 된 것이다. 만약 이 과정이 지나치게 오래 지속되면? 그것은 멜랑콜리아라는 병리적 상태로, 치료가 필요한 우울증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한국 사회는 프로이트의 이 관점을 충실히 따른다. 장례 기간이 지나면 슬픔을 표현하는 것은 점점 부적절한 것이 된다. &quot;고인도 편히 가시게 이제 그만 울어&quot;라는 말이 반복된다.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쏟아진 &quot;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quot;는 말들도 마찬가지다. 애도에는 마감이 있고, 그 마감을 넘기면 비정상이라는 무언의 압력이 작동한다.&lt;/span&gt;&lt;br /&gt;&lt;br /&gt;&lt;br /&gt;
&lt;div style=&quot;color: #666666; 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데리다의 반론: 애도는 끝날 수 없다&lt;/span&gt;&lt;/div&gt;
&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하지만 자크 데리다는 프로이트의 이 '정상적 애도'라는 개념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데리다에게 진정한 애도란 결코 끝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은 이는 절대적으로 타자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고유함, 그 사람만의 특별함은 결코 완전히 이해되거나 대체될 수 없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데리다는 프로이트의 애도 개념이 가진 역설을 지적했다. 만약 내가 애도에 '성공'해서 죽은 이를 내 안에 완전히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그 사람을 나의 일부로 만드는 것이다. 타자로서의 그 사람은 사라지고, 내 기억 속의 이미지만 남는다. 그것은 사실상 망각이다. 반대로 내가 애도에 '실패'해서 죽은 이를 끊임없이 그리워한다면, 그것은 타자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진정한 애도는 이 불가능한 지점에 있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데리다 자신도 수많은 동료와 친구들의 죽음을 겪으며 이런 애도의 글들을 남겼다. 롤랑 바르트, 폴 드 만, 에마뉘엘 레비나스... 그는 이들에 '대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이들에게 '말을 거는' 방식으로 글을 썼다. 비록 대답이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끊임없이 죽은 이들과의 대화를 시도했다. 이것이 데리다에게 애도였다.&lt;/span&gt;&lt;br /&gt;&lt;br /&gt;&lt;br /&gt;
&lt;div style=&quot;color: #666666; 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우리 시대의 애도 - 빨리 잊으라는 강요&lt;/span&gt;&lt;/div&gt;
&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현대 사회는 효율성을 중시한다. 슬픔도 마찬가지다. 적절한 기간 동안 적절한 방식으로 슬퍼하고, 빨리 일상으로 복귀해야 한다. SNS에는 고인을 추모하는 게시물이 올라오지만, 그것도 며칠이 지나면 뉴스피드에서 사라진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콘텐츠가 필요하다. 슬픔은 계속 소비되어야 한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특히 한국 사회는 '극복'과 '치유'를 강조한다. 상담센터에서는 애도 상담 프로그램을 운영하지만, 그 목표는 대부분 '정상적인 일상으로의 복귀'다. 슬픔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고, 애도는 끝내야 할 과제다. 회사는 몇 일의 애도 휴가를 주지만, 그 기간이 지나면 업무에 복귀해야 한다. 감정적으로 회복되지 않았어도 말이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그렇게 간단히 정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상실은 평생을 가기도 한다. 부모를 잃은 아이, 자식을 잃은 부모, 짝을 잃은 배우자... 이들에게 &quot;이제 그만 잊고 앞으로 나아가라&quot;고 말하는 것은 폭력이다. 그것은 죽은 이를 배신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애도에는 정해진 시간표가 없다. 누군가는 1년 안에 일상을 회복하고, 누군가는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슬퍼한다. 둘 다 정상이다. 중요한 것은 죽은 이와 나만의 방식으로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프로이트가 말한 대로 에너지를 회수하는 방식이든, 데리다가 말한 대로 불가능한 대화를 시도하는 방식이든, 그것은 각자가 선택할 문제다.&lt;/span&gt;&lt;br /&gt;&lt;br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Noto Sans KR';&quot;&gt;죽음 앞에서 우리는 모두 무력하다. 애도는 그 무력함을 인정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니 서둘러 슬픔을 끝내려 하지 말자. 죽은 이를 기억하는 것, 그리워하는 것, 때로는 슬퍼하는 것은 우리가 그들과 함께 했던 시간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lt;/span&gt;&lt;br /&gt;&lt;br /&gt;&lt;/div&gt;
&lt;/div&gt;
&lt;/div&gt;</description>
      <category>철학</category>
      <author>에세이향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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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 Apr 2026 13:45:16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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