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2 55

멍석 - 정성록

멍석 - 정성록 봄의 전령사들이 남도의 이른 봄소식을 들려준다. 오백 년 된 황매화의 향기를 맡으며 꽃들의 이야기에 귀를 모아본다. 청량한 물소리가 흐르는 지리산 한 자락을 살포시 끼고 앉은 경남 산청군 남사면 예담촌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가장 아른다운 마을 1호로 선정될 만큼 고택들과 주변 경관이 조화롭다. 돌담을 타고 기어오르는 담쟁이 넝쿨따라 골목을 돌아 깨끗한 양반가의 고택을 둘러본다. ​ 바람이 빈 집의 주인인 냥 우리를 맞이한다. 어릴 적 살았던 내 고향집 같은 어느 고택에서 나도 몰래 발이 붙어버렸다. 빗장 걸린 안채를 비켜 바깥마당으로 나오다 발길을 멈추게 한 것은 초가로 된 사랑채 헛간에 있는 멍석이었다. 먼지 쌓인 멍석에서 아버지의 냄새가 폴폴 날아 오르고 나를 고향집 헛간으로 데리고 ..

좋은 수필 2024.02.28

접는다는 것/권상진

접는다는 것 ​ 권상진 ​ ​ 읽던 책을 쉬어 갈 때 페이지를 반듯하게 접는 버릇이 있다 접혀진 자국이 경계같이 선명하다 ​ 한때 우리 사이를 접으려 한 적이 있다 사선처럼 짧게 만났다가 이내 멀어질 때 국경을 정하듯 감정의 계면에서 선을 그었다 골이 생긴다는 건 또 이런 것일까 ​ 잠시 접어두라는 말은 접어서 경계를 만드는 게 아니라 서로에게 포개지라는 말인 줄을 읽던 책을 접으면서 알았다 ​ 나를 접었어야 옳았다 이미 읽은 너의 줄거리를 다시 들추는 일보다 아직 말하지 못한 내 뒷장을 슬쩍 보여주는 일 실마리는 언제나 내 몫이었던 거다 ​ 접었던 책장을 펴면서 생각해 본다 다시 펼친 기억들이 그때와 다르다 같은 대본을 쥐고서 우리는 어째서 서로 다른 줄거리를 가지게 되었을까 어제는 맞고 오늘은 틀리는..

좋은 시 2024.02.28

먼지는 힘이 세다 외

먼지는 힘이 세다 외 김은옥 먼지는 뿌리가 깊다 버림받아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입김에도 가볍게 날아가지만 돌아와 제자리에 내려앉는다 눈짓만 해도 온몸을 들썩이다가 앉은 자리에서 천 년을 숨죽이기도 한다 오래 묵은 일기장 사이에서 눈물 자국으로 얽어 있다가 돌아가신 어머니 돋보기 위에 내려앉아 흐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다가 눈 껌벅이며 돌아앉기도 하는 것이다 기쁘고 고운 날에는 낡은 성경책 갈피에 앉아 두 눈 붉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맑은 날 창가에 앉아서 보면 가닥가닥 집안 가득 뻗어 가는 먼지의 흰 뿌리들이 뼈처럼 드러나는 날도 있는 것이다 광인(狂人) 두 눈이 퀭하다 검은 외투 겹겹이 두르고 더벅머리 이마에서 재가 날릴 듯 아무도 어느 곳도 아니면 모든 것을 바라보는 방향을 전혀 알 수 없는 건널목을 ..

좋은 시 2024.02.27

꼬리칸의 시간 / 최민자

꼬리칸의 시간 / 최민자 -저쪽 끝이 314호실이에요. 안내인이 복도 끝 방을 가리켰다. 처음 와보는 요양병원, 가슴이 우당탕, 방망이질했다. 고관절이 무너져 앉지도 서지도 못하게 된 노모가 이곳으로 옮겨온 게 일주일 남짓, 좁고 지저분한 복개천을 돌아 멀뚱하게 서있는 병원건물에 들어설 때부터 마음 귀퉁이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코로나로 막혀있던 가족 면회가 때맞추어 풀린 것은 기적 같은 일이지만 시난고난 살아낸 한 생의 끄트머리를 이렇듯 심란한 종착지에서 지어야 하는 인생이라니. 복도 양쪽, 병실마다에 머리 허연 노인들이 폐기물처럼 내박쳐 있었다. 침대에 웅크려 돌아누운 사람,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쭈그려있는 사람, 반쯤 넋이 나간 퀭한 눈으로 멍하니 허공이나 주시하는 사람〮…. 대낮이었음에도 ..

좋은 수필 2024.02.26

파종 / 손훈영

파종 / 손훈영 도타운 햇살이 땅 속 생명들을 깨우고 있다. 바야흐로 텃밭 걸음이 잦아질 때다. 허름한 바지에 긴 장화를 신고 끈 달린 밀짚모자를 쓴 남편은 제법 농사꾼 티가 난다. 손에는 호미 한 자루 밖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텃밭지기 남편의 어엿한 조수, 제일 중요한 씨앗 봉지를 주머니에 넣고 뒤를 따른다. 산을 끼고 있는 아파트라 뒷문만 열고 나가면 바로 등산로 입구다. 그 어름에 작지만 윤기 나는 우리의 텃밭이 있다. 오른쪽 골에는 상추씨를 뿌리기로 한다. 왼쪽 골에는 쑥갓을 위쪽으로는 부추를 뿌리면 맞춤 맞을 것 같다. 적당한 간격으로 씨를 흘려 넣는다. 텃밭 가꾸기는 딱히 수확을 내야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순전히 뿌리고 가꾸는 재미다. 조금씩 솎아 먹는 즐거움도 제법이지만 막 올라오는 새..

좋은 수필 2024.02.21

동백마을에 동백꽃이 피면 - 김희숙

동백마을에 동백꽃이 피면 - 김희숙 동죽조개 맛이 깊어지면, 서쪽 바닷가 동백마을에 가리라. 마을 앞 고두섬 주변으로 바닷물이 빠져나가면 갯벌에 숨구멍이 보이고 그곳을 호미로 깊숙이 파내 보리다. 부지런히 뻘 속을 뒤지면 봄볕 품은 동죽이 물총을 쏘아대며 손에 잡힐 것이다. 혹여 귀한 백합조개라도 찾는다면 산삼을 발견한 심마니처럼 소리쳐보리라. 심봤다! 걸어가도 좋으리라. 느직한 걸음걸이에 맞춰가는 길이니 지나치는 풍경을 차곡차곡 눈에 넣기에 좋으리라. 드문드문 다니는 군내버스 시간과 바다의 물때가 다른 날에는 천천히 걸어서 동백마을로 들어가리라. 배낭에 기다란 물장화는 개켜 챙기고 김 올린 모시송편을 찬합에 넣고 보온병에 팔팔 끓인 커피물을 내려 등에 짊어져야지. 자동차 길은 산허리를 휘돌아가니 가로지..

좋은 시 2024.02.20

들 / 민혜

들 / 민혜 빈들에 서면 왠지 안도의 숨이 나온다. 추수 끝난 벌판엔 아직 분망했던 잔재가 남아 있지만 새봄이 오기까지 들은 긴 휴식에 들어간다. 나는 때로 늦가을의 빈들을 찾아 그 텅 빈 휴지기를 망연히 바라보곤 하였다. 허허롭고 황량하기까지 한 들녘을 향해 한 자락 삶의 고단함을 내려놓을 때면 알 수 없는 안식의 숨이 가슴 저 밑으로부터 새어 나오곤 했다. 들은 길게 누워 모처럼의 한유를 누리는 것 같았다. 자식들을 품은 어미인 양 들은 언제나 숙명의 언저리를 뜨지 못했다. 그 자리를 지켜가며 숱한 새끼들을 키워내고 살찌워냈다. 그러다 때가 되면 어디론가 떠나보내곤 했다. 재주는 곰이 부렸으나 주머니는 왕서방이 챙기는 것처럼 들은 늘 모든 걸 내어주고 빈 가슴으로 황혼을 맞는다. 곁을 스쳐가는 냇물이..

좋은 시 2024.02.20

삼우 무렵 - 김사인

삼우 무렵 - 김사인 ​ ​ 서리태 한두홉을 냄비에 볶습니다. 서리태를 볶아 와 팔순의 아버지와 작은아들 나와 손녀아이가 둘러앉아 콩을 먹습니다. 어머니는 가시고 장맛비가 오는데 갓 올린 봉분 안부를 아무도 묻지 않고 오독오독 콩을 깨뭅니다. 콩그릇 곁으로 삼대가 둘러앉아 찧고 까부르는 테레비, 테레비만 멀거니 건너다봅니다. ​ ​ ​ ​ * 삼우제(三虞祭): 장사 마친 뒤 세 번째 날의 제사. ​ ​ ​ 하필 장맛비 오는 철이었나. 어머니 봉분은 무사한가, 아무도 묻지 않고 볶은 콩이나 깨문다. 낼 모레가 어머니 첫 기일(忌日)인데, 책 쓴다고 산골짜기에 박혀 있으니 내 처지도 딱하다. 남루하기가 굴 파고 들어앉은 들짐승 꼬락서니나 다름없다. 팔순 아버지와 딸이 있다면 서리태 한두 홉 볶아 오독오독 깨..

좋은 시 2024.02.18

누룽지/정경해

누룽지/정경해 삶이 누룽지 같을 때가 있다 이제 막다른 길이라며 솥을 껴안고 바짝 눌러 붙어 떼를 쓰는 누룽지 같은 으르고 달래고 속을 박박 긁어 봐도 제 말이 옳다 우기는 홧김에 푸념 가득 물 한 바가지 확 끼얹으면 눈물 퉁퉁 반성하며 마음 풀고 일어서는 때로는 모진 삶이 미워 등짝 한번 갈기고 싶지만 돌이켜 보면 구수한 날이 더 많았던 게 삶이다

좋은 시 2024.02.18

가을날 - 김사인

가을날 - 김사인 ​ ​ 좋지 가을볕은 뽀뿌링 호청같이 깔깔하지. 가을볕은 차 젊은 나이에 혼자된 재종숙모 같지. 허전하고 한가하지. ​ 빈 들 너머 버스는 달려가고 물방개처럼 추수 끝난 나락 대궁을 나는 뽁뽁 눌러 밟았네. 피는 먼지구름 위로 하늘빛은 고요 ​ 돌이킬 수 없었네 아무도 오지 않던 가을날. ​ ​ ​ ​ ​ 이 시에 무슨 말을 더 얹겠는가. 다만 오늘 하루는 잠시 창문을 열고 손을 내밀어 보자. 손을 내밀고 손가락들을 부벼 보자.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러나 이미 내 손을 서운하게도 감싸고 있는 차갑고 까끌까끌한 다 늦은 가을볕, 그 서늘하고 서늘해서 허전하고 허전해서 한가한 빛살들을 가슴 한편에다 가만히 대 보자. 텅 빈 마루 끝에 혼자 앉아 저 멀리 단풍도 저물어 온통 비어만 가..

좋은 시 2024.02.17

팔짱을 끼다/정상미

팔짱을 끼다 정상미 요즘은 그렇다 외로워지고 싶어 팔장을 낀다 혼자서 팔짱을 끼는 것은 흔들리는 나를 내가 붙들고 가는 것이다 차가워지는 내가 싫어서 내가 나를 데우는 것이다 7년 사귄 애인이 안개 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을 때 나를 추스르려 팔짱을 낀다 박 팀장에게 서류뭉치로 얻어맞고 내가 나를 어쩔 수 없을 때 기우뚱하지 않으려 팔짱을 낀다 팔짱을 끼면 내가 더 촘촘해진다 단단해진 팔짱은 애인에게 긁히고 팀장에게 찔려온 나를 지그시 눌러준다 팔짱을 끼면 내가 도도해진다 눈에는 힘을 주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다 애인 같은 거 팀장 같은 거 별 거 아니라며 입을 앙다물고 깨진 어깨를 올린다 팔짱이 나를 밀고 간다 가끔은 조금 거만해 보여도 좋다 시작노트 언제부턴가 팔짱을 끼지 않으면 불안했다. 빈손은 날 ..

좋은 시 2024.02.17

숲, 그 오래된 도서관/김영식

숲, 그 오래된 도서관/김영식 삐걱, 숲의 문을 떠밀면 꽃과 나무들이 수백만 권 푸른 장서가 된다. 산모롱이 돌아 오솔길 하나 고즈넉이 걸어오고, 어디선가 책장 넘기는 소리도 들려온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니 고마리며, 쑥방망이, 꽃향유들이 길가에 가지런히 피어있다. 새로 발간된 문고판처럼 귀엽고 앙증맞다. 어디 꽃들의 책뿐이랴! 박달나무, 층층나무, 굴참나무들이 온고지신溫故知新, 초록 위에 단풍을 덧얹고 산등성이에 고요히 펼쳐져 있다. 이때쯤이면 으레 늙은 사서司書가 내 앞에 나타난다. 이 숲의 사서는 오랜 지인이지만 그의 나이는 종내 가늠할 수 없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 숲에 살았다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있는 이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는 나뿐만 ..

좋은 수필 2024.02.15

연잎밥/조경숙

연잎밥 조경숙 연잎밥을 지었다. 큰 솥뚜껑을 열자 향을 껴안은 주먹만 한 연밥이 소복하게 담겨있다. 오뉴월 땡볕에 싸움질을 하던 아이들이 마치 한 이불 속에 서로의 몸을 포갠 채 잠자는 모습 같다. 하나 둘 조심스레 펼치니 이리저리 곡선을 그리는 김이 오른다. 평소 '옴마밥'이라며 찬 없이도 밥그릇을 단숨에 비워내던 열 명이나 되는 식솔들은 연밥을 싸는 동안 신기한 듯 하나둘 얼굴을 들이밀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다. 굳이 이런 풀이파리에 밥을 싸는 이유가 뭐냐며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내 주위를 빙빙 돌기만 했다. 한 주걱씩 푼 밥을 연잎에 올리고 고명으로 대추 은행 잣을 올려 마음을 포개듯 돌려가며 동여맸다. 밥은 하루를 잇는 징검다리다. 밥이 보약이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사 일상의 소박한 행..

좋은 수필 2024.02.14

질그릇 - 윤석산

​ 질그릇 - 윤석산 ​ 경주박물관 한 귀퉁이, 조명마저 다소 비켜간 자리 못생긴 질그릇 하나 놓여 있다. 본래부터 그 자리가 제 자리인 양 자리를 잡고 앉은 질그릇. 아무것도 보일 것 없는 속, 모두 드러내놓고 그저 그렇게 놓여져 있다. ​ 있는 속, 없는 속 모두 드러내놓고 사는 요즘. 아무리 속 다 드러내놔도 들여다보는 이 하나도 없는, 지지리 못난 질그릇 하나 세상 한 귀퉁이,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자리하고 있다. ​ 尹錫山 시집『나는 지금 운전 중』 ​ 있는 속, 없는 속 모두 드러내놓고 살아야 그나마 간신히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다. 속이 깊어 그 속을 다 들여다볼 수 없거나 속이 얕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그 속을 간파당하거나 간에, 어쩔 수 없이 속을 드러내야만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쓰..

좋은 시 2024.02.12

그 골목의 필경사들/안희옥

그 골목의 필경사들 안 희 옥 이 골목엔 오래된 필경사들이 산다. 날마다 골목을 베끼는 것들, 호프집은 호프집을 베끼고, 북경반점은 북경반점을 베끼고, 세탁소는 세탁소를 베낀다. 낡아가면서 따뜻해지는 것들 중에 골목만한 것이 또 있을까. 날마다 반복되는 문장사이를 걸어 오늘도 집으로 돌아온다. 흑백사진 같은 풍경의 양쪽으로 회색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차있다. 골목입구에는 하루를 마감하려는 듯 포장마차가 불을 밝히고, 찐빵가게와 세탁소, 아동복가게, 미장원 등이 어깨를 맞대며 늙어간다. 사람 한 명이 간신히 들어갈 만한 대문 앞에는 우편물이 나뒹굴고 담벼락 아래엔 누군가 버리고 간 슬리퍼 한 짝도 놓여 있다. 월세와 전세 쪽지가 너풀대는 전봇대 뒤로 길고양이가 재빨리 모습을 감춘다. 골목 끝 언덕을 오르면 ..

좋은 수필 2024.02.12

포옹/손 훈 영

포옹/손 훈 영 텅 빈 벽면에 흑백 사진 한 점이 걸려있다. 네 개의 팔로 세상의 위협과 폭력을 차단시키겠다는 듯 굳세게 끌어안고 있는 사진 속 두 남녀를 본다. 맞닿은 심장에서 솟구치는 힘찬 박동소리가 들린다. 그 박동소리에 몸을 실어 어딘가로 날아가고 있는 듯 여자의 입가엔 희마한 미소가 서려있다. 이 방의 이름을 지어주고 싶다. 서재라고 그냥 밋밋하게 부르기에는 방의 느낌이 너무 특별하다. 다갈색 벽지가 차분한 벽면을 따라 연한 검정 색깔의 나지막한 책장 두개가 이어져 있다. 그 앞으로 놓여 진 폭이 좁은 긴 책상이 책장과 맞춤인 듯 어우러진다. 책꽂이의 책들은 필를 나눈 혈육들처럼 다정히 포개어져 있다. 스틸 프레임이 심플한 데스크 탑과 하얀 색 복합기. 그것들이 이 방의 전부다. 세평도 채 되지..

좋은 수필 2024.02.11

화암사, 내 사랑 - 안도현

화암사, 내 사랑 - 안도현 ​ 인간세(人間世) 바깥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나를 미워하는지 턱 돌아앉아 곁눈질 한번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 나는 그 화암사를 찾아가기로 하였습니다 세상한테 쫓기어 산속으로 도망가는 게 아니라 마음이 이끄는 길로 가고 싶었습니다 계곡이 나오면 외나무다리가 되고 벼랑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었습니다. ​ 마을의 흙먼지를 잊어먹을 때까지 걸으니까 산은 슬쩍, 풍경의 한 귀퉁이를 보여주었습니다 구름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구름 속에 주춧돌을 놓은 잘 늙은 절 한 채 ​ 그 절집 안으로 발을 들여 놓는 순간 그 절집 형체도 이름도 없어지고, 구름의 어깨를 치고가는 불명산 능선 한 자락 같은 참회가 가슴을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을에서 온 햇볕이 화암사 안마당에 먼저 와 ..

좋은 시 2024.02.11

멸치 - 김태정

멸치 - 김태정 ​ ​ 네 뼈로 내 뼈를 세우리 네 살로 내 살을 보태리 네 몸을 이루는 바다로 삶의 부력을 완성하리 은빛 비늘의 눈부심으로 무디어진 내 눈물을 벼리리 어느날 문득 육지를 보아버린 네 그리움으로 메마른 서정을 적시리 ​ 그리하여 어느 궁핍한 저녁 한소끔 들끓어오르는 국냄비 생의 한때 격정이 지나 꽃잎처럼 여려지는 그 살과 뼈는 고즈넉한 비린내로 한 세상 가득하여, ​ 두 손 모아 네 몸엣것 받으리 뼈라고 할 것도 없는 그 뼈와 살이라고 할 것도 없는 그 살과 차마 내지르지 못하여 삼켜버린 비명까지 ​ ​ ​ ​ ​ ​ 올해 여름에도 삼계탕을 먹었다. 이 집 삼계탕은 참 부드럽고 쫄깃하다고, 땀 흘리며 뼈를 발라내며 말했다. 그 닭한테 뭐라고 해야 하나. 한평생 사는 동안 내 이빨이 씹은 ..

좋은 시 2024.02.11

식당 의자 - 문인수

식당 의자 - 문인수 ​ ​ 장맛비 속에, 수성 못 유원지 도로가에, 삼초식당 천막 안에, 흰 플라스틱 의자 하나 몇 날 며칠 그대로 앉아있다. 뼈만 남아 덜거덕거리던 소리도 비에 씻겼는지 없다. 부산하게 끌려다니지 않으니, 앙상한 다리 네 개가 이제 또렷하게 보인다. ​ 털도 없고 짖지도 않는 저 의자, 꼬리 치며 펄쩍 뛰어오르거나 슬슬 기지도 않는 저 의자, 오히려 잠잠 백합 핀 것 같다. 오랜 충복을 부를 때처럼 마땅한 이름 하나 별도로 붙여주고 싶은 저 의자, 속을 다 파낸 걸까, 비 맞아도 일절 구시렁거리지 않는다. ​ 상당기간 실로 모처럼 편안한, 등받이며 팔걸이가 있는 저 의자, 여름의 엉덩일까, 꽉 찬 먹구름이 무지근하게 내 마음을 자꾸 뭉게뭉게 뭉갠다. 생활이 그렇다. 나도 요즘 휴가에 ..

좋은 시 2024.02.11

어깨너머라는 말은 - 박지웅

어깨너머라는 말은 - 박지웅 ​ ​ 어깨너머라는 말은 얼마나 부드러운가 아무 힘 들이지 않고 문질러보는 어깨너머라는 말 누구도 쫓아내지 않고 쫓겨나지 않는 아주 넓은 말 매달리지도 붙들지도 않고 그저 끔벅끔벅 앉아 있다가 훌훌 날아가도 누구 하나 알지 못하는 깃털 같은 말 먼먼 구름의 어깨너머 있는 달마냥 은근한 말 어깨너머라는 말은 얼마나 은은한가 봄이 흰 눈썹으로 벚나무 어깨에 앉아 있는 말 유모차를 보드랍게 밀며 한 걸음 한 걸음 저승에 내려놓는 노인 걸음만치 느린 말 앞선 개울물 어깨너머 뒤따라 흐르는 물결의 말 풀들이 바람 따라 서로 어깨너머 춤추듯 편하게 섬기다가 때로 하품처럼 떠나면 그뿐인 말 들이닥칠 일도 매섭게 마주칠 일도 없어 어깨너머라는 말은 그저 다가가 천천히 익히는 말 뒤에서 어슬..

좋은 시 2024.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