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936

개구리소리/김규련

개구리소리/김규련지창에 와 부딪치는 요란한 개구리소리에 끌려 들에 나와 서성거려 본다. 저녁 나절 몹시 불던 바람은 잠이 들고 밤은 이미 이슥하다.모를 내기에는 아직 이르다. 물이 가득 잡힌 빈 논에는 또 하나의 밤하늘이 떠 있다. 지칠 줄 모르는 개구리소리는 연신 하늘과 땅 사이의 고요를 뒤흔들고 있다. 와글거리는 개구리소리에 물이랑이 일 적마다 달과 별은 비에 젖은 가로등처럼 흐려지곤 한다. 첩첩한 산이며 수목(樹木)들은 무거운 침묵에 잠겨 있다. 그들도 이 밤에 개구리소리에 묵묵히 귀를 모으고 있는 것일까.개골 개골 개골 가르르 가르르 걀걀걀걀. 산골의 개구리는 진달래가 피었다가 지고 제비꽃이 논둑에 점점이 깔릴 무렵 갑자기 울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무더운 여름 어느 날 녹음 속에서 매미소리가 울려..

좋은 수필 2024.05.06

청자 사발 / 이언주(은영)

청자 사발   /    이언주(은영)     내 책상 위에는 청자사발 하나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와는 오래된 친구 사이다. 긴 시간을 찻장에서 무심히 얹혀 있던 것이다. 언젠가부터 눈길만 마주치면 이 그릇이 무슨 말인가를 걸어오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내 책상 위로 옮겨 앉았다.  중국 윈난성(雲南城)에 있는 진샤강(金沙江) 상류를 여행할 때 일이다. 관광지로 이름이 알려진 곳이기는 하지만, 워낙 오지여서 하루 종일 기다려야 여행객 한 둘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곳이다. 그때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강가에 남루한 사내가 지나가는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보자기를 펼쳐놓고 그 위에다 쇠뼈에 조각된 불경과 오래된 나시족의 장신구며 생활에 쓰이던 잡다한 도구들을 늘어놓았다. 우리를 본 사내..

좋은 수필 2024.05.06

붉은 벚꽃 / 한경희

붉은 벚꽃 / 한경희  되돌아보면 할머니는 그때 할머니가 아니었다. 쉰을 갓 넘긴 아줌마였다. 열아홉에 엄마를 낳고 엄마가 스물셋에 나를 낳았으니 고작 마흔둘에 할머니가 되었다.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였고 할머니는 처음부터 할머니라고 여겼던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도 맨발로 비 오는 거리를 첨벙거리던 때가 있었고, 좋아하는 동네 오빠를 보면 골목 모퉁이로 숨던 시절이 있었다는 걸 상상하지 못했다. 그날 그 자리가 아니었다면 나는 좀 더 늦게 그것을 깨달았을 것이다.손님이 뜸한 비 오는 날 오후가 되면 할머니의 모자점은 동네 사랑방이 되었다. 할머니는 설탕을 넣고 끓인 막걸리를 양은 주전자에 내오고 고추장떡을 지졌다. 알코올기가 날아간 그 막걸리를 '모주'라고 불렀다. 어른들 틈에 끼어 있었지만 나는 내가 어..

좋은 수필 2024.05.05

무舞 / 정성희

무舞 / 정성희    화창한 봄날이다. 한 무리의 사물놀이패들이 소고와 장고를 두드리며 겨우내 잠든 대지를 깨우고 있다. 여기저기서 꽃불이 터지자, 봄물에 나들이 나온 구경꾼들이 주변으로 모여든다.  둥둥둥 북이 울리자 상쇠는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며 온몸으로 신명을 몰아온다. 바람의 장단에 몸을 떠는 대나무 마냥 주춤거리던 늙수그레한 노인네들의 소맷자락도 들썩이기 시작한다. 작대기 장단에 영춘가를 부르며 흠뻑 흥에 취한 나이 든 춤꾼들은 땟국에 전 그들의 인생만큼이나 후줄근하고 걸걸한 춤으로 무아지경에 이른다.  엎드려 숨죽이고 있던 내 본능도 겨울 문풍지처럼 들썩대며 몸을 보챈다. 그 칭얼대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몸이 시키는 대로 노장들의 원시적인 춤동작을 따라간다. 살아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환..

좋은 수필 2024.05.05

육철낫 / 김기화

육철낫  /   김기화                                                                                          벌초하러 가는 길에 늘 챙기는 것 중 하나가 낫이다. 엄마는 의식 치르듯 며칠 전부터 낫을 갈아 신문지에 곱게 싸놓는다. 그것도 모자라 집을 나설 때는 종이에 감싼 낫을 다시 가방에 조심스레 챙겨 넣는다. 해마다 고집을 세워 동행하던 엄마가 올해는 먼저 안가겠다고, 아니 못 가겠다고 하셨다. 불편한 몸이지만 손수 낫을 잡아야만 편하다던 분이다. 우리는 벌초 후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와 보여드리겠다는 말로 안심을 시켜드린 후 집을 나섰다. 그러나 산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이전과 달리 빨라졌는데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예초기가 ..

좋은 수필 2024.05.05

엇박자노래 / 임미옥

엇박자노래 / 임미옥 따당~땅, 따당~땅, 왼손으로는 건반을 타건하며 오른손은 햄머로 조율 핀을 조여 간다. 혼을 모아 공중에 흩어지는 맥놀이들을 잡아 동음 시킨 뒤, 현들을 표준 음고에 맞춘다. 엇박자로 두들겨 생기는 맥놀이들, 기억저편서 들려오는 아련한 노래 소리들과 겹쳐진다. 들린다…. 그리운 가락들이 들려온다. 아! 오래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부르시던 엇박자 가락들이다.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몸이 아파 어머니가 몹시 그리운 날은 더욱 선명하게 들리던 소리들이다. 영혼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그윽하고 정겨운 가락들,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지던 소리들,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조율하던 손을 멈추었다. 어머니 손바닥처럼 뻣뻣하고 거칠거칠한 현들을 쓰다듬었다.현이 파르르 떤다. 두들겨 맞고 또 맞아서 건들..

좋은 수필 2024.05.05

내 책상 앞의 풍경과 죽비에 대한 헌사/배한봉

내 책상 앞의 풍경과 죽비에 대한 헌사/배한봉    이야기 하나 ; 풍경과 죽비를 위하여  내 책상에 앉으면 두 개의 물건이 보인다. 하나는 풍경(風磬)이고 하나는 죽비(竹篦)다. 풍경은 책상 앞의 베란다와 통하는 거실 문틀에 걸려 있고, 죽비는 책상 옆, 손이 잘 닿는 곳에 있다. 이 풍경과 죽비는 나의 오래된 친구다. 잘들 아시겠지만 풍경과 죽비는 수행자들의 방일이나 나태함을 깨우치는 역할을 한다. 처음 이 풍경과 죽비를 내 곁에 둘 때만 해도 나의 방일과 나태를 경계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새 처음의 그 목적은 잊히고 그저 나를 묵묵히 바라보는 친구가 되어 있다. 친구와 포도주는 오래 될수록 좋다는 말이 있다. 오랜 벗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도 있다. 굳이 말하자면 풍경과 죽비도 그..

좋은 수필 2024.05.03

거룩한 본능 / 김규련​

거룩한 본능 / 김규련​​동해안 백암(白巖) 온천에서 눈이 쌓인 주령(珠嶺)을 넘어 내륙으로 들어서면, 산수가 빼어난 고원 지대가 펼쳐진다. 여기가 겨우내 눈이 내리는, 하늘 아래 첫 고을인 수비면(首比面)으로, 대구(大邱)에서 오자면 차편으로 근 다섯 시간을 달려야 하는 곳이다.​마을이라고 하지만, 여기저기 산비탈에 농가가 몇 채씩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난한 자연 촌락이다. 이 근방에는 천혜(天惠)의 절경이 많이 있다. 그리고 이 고장 사람들 자신이, 그 절경을 이루는 웅장한 산이며 기암 절벽이며 눈 덮인 수림이며 산새며 바람 소리와 함께, 없어서는 안 될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 있다. 이들의 주된 생업은 채소(菜蔬) 농사와 담배 농사지만, 철 따라 산나물과 약초를 캐고 송이버섯을 따들이기도 한다. 이..

좋은 수필 2024.05.01

봄의 그림자 / 김규련

봄의 그림자 / 김규련  봄은 천지의 기를 뚫고 나오는 것일까.햇볕과 바람, 물과 땅에 온기가 돈다. 누리 가득한 초목의 새싹에서 열여섯 살 소녀의 입술 같은 봄이 얼굴을 뻘쭘히 내민다.산수유 꽃, 생강나무 꽃, 수달래… 온갖 꽃들이 향기를 흩뿌려 남아 있는 냉기를 밀어낸다. 산새며 들짐승이며 사람들, 모든 생령들이 생기를 얻어 저마다의 몸짓에 힘이 넘친다. 마침내 초록 빛깔이 밀물마냥 번져와 온 산야를 물들였다.나는 신록이 향연을 펼칠 때와 갈잎이 귀토의식을 마감할 무렵이면 광기를 참다못해 팔공산에 오른다. 산허리를 감도는 순환도를 따라 파계사 방향으로 걷고 있다.오늘은 일요일. 상춘객과 승용차가 길을 가득 메우고 있다. 웅장한 신록의 바다와 풋풋한 내음, 뛰어난 산세의 위용과 신묘한 산정기, 사람마다..

좋은 수필 2024.05.01

깃들이다 / 김은주

깃들이다 / 김은주아마 이른 봄이었나 보다. 겨울 일을 막 끝내고 풍성하게 주어진 시간을 바느질로 달래고 있는데 베란다 광목 커튼 뒤가 이상하게 수상쩍다. 꾸르륵 꾸르륵, 창자가 밥을 밀어내는 소리 같기도 하고 어찌 들으니 개수대에 물 빠지는 소리 같기도 하다. 자투리 천으로 말 여러 마리 만들고 고무신 한 켤레를 다 깁는 사이에도 정체 모를 소리는 내내 주위를 맴돌았다. 창밖은 위태로운 난간이고 강을 끼고 있어 사나흘이 멀다 하고 바람이 불어대니 그 무엇도 깃들 틈이 없는 곳이다. 소리의 정체가 궁금하긴 했으나 아직 바람이 차니 창을 열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다 변화무쌍한 봄 날씨는 황사 바람이 몰아치고 볕이 났다가 또 사월에 함박눈까지 내렸다. 조석으로 변하는 날씨에 휘둘리다 묘한 소리는 사라..

좋은 수필 2024.04.30

벽 / 허세욱

벽 / 허세욱벽을 보면 왠지 친근했다. 그 텁텁한 살결이 이웃집 아저씨 같고, 고집불통으로 서 있는 모습은 답답한 선머슴을 보는 느낌이다. 우릴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지만 지금도 작은 공을 꺼내 거기다 벽치기 하고 싶다. 우릴 건너가지 못하게 버티고 섰지만 거기엔 누가 누굴 좋아한다고 갈겨놓은 낙서가 심심찮게 보인다. 우릴 더 멀리 볼 수 없도록 막았지만 거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등짝을 기대고 시원하게 두 어깨를 문지르고 싶다.그 구조는 별 게 아니었다. 황토에다 지푸라기를 반죽하면 그만이다. 양회벽이라도 철근이나 각목을 촘촘히 세우고 거기에 덕지덕지 흙을 붙이고 시멘트를 바르고, 다시 환한 벽지에다 풀을 멱칠하여 슬슬 손질하면 말끔해졌다.작은 집에 많은 것은 섬돌 위에 고무신만 아니었다. 작은 초가삼간..

좋은 수필 2024.04.30

김치와 고등어 / 백금태

김치와 고등어 / 백금태김치와 고등어 / 백금태 시큼한 김치 한 쪽을 썩둑썩둑 썰어 냄비 바닥에 깔았다. 양파와 파도 길쭉길쭉하게 잘라 옆에 곁들였다. 그 위에 금방 어물전에서 사 온 살아 펄펄 뛸 것 같은 고등어를 손질하여 얹고 고춧가루를 듬뿍 뿌렸다. 고등어가 잠길 듯 말 듯 물을 잘박하게 붓고 가스 불을 댕겼다. 시간이 흐를수록 온 집안이 김치의 시큼한 맛과 고등어의 구수한 냄새에 푹 빠졌다. 몇 년이나 냉장고 밑바닥에 묵혀 있던 김치와 고등어가 서로를 품으며 깊은 맛을 뿜어낸다.그 김치는 부산에 사는 언니가 삼 년 전에 담가 준 것이었다. 직장 다니는 동생이 안쓰러운지 툭하면 김치 상자가 택배로 배달되곤 한다. 그해는 동생에 대한 언니의 사랑이 더 깊었는지 아니면 바닷가에 사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

좋은 수필 2024.04.30

옴살/김은주

옴살/김은주 가을이 내리는 골목길은 한적하고 쓸쓸하다. 인적 없는 길을 따라 올라가니 거기 곧 쓰러질 듯 집 한 채 있다.  주황색 양철지붕 아래 한 뼘 크기의 일자집이다. 여닫이 방문 두 짝과 작은 창이 하나 있는 조촐한 여염집이다. 방문 앞에는 낮은 나무 책상이 둘, 나란히 놓여 있고 그 위에 누가 꺾어다 뒀는지 빈 병에 코스모스 한 줌 꽂혀 있다. 오른쪽 추녀 아래로 감나무 한 그루 서 있고 그 아래 블록으로 쌓아 올린 허름한 부엌이 있다. 부엌문은 따로 없고 군용천막을 말아 올렸다 내리는 정도로 문을 대신하고 있다. 예배당 종지기로 일생 살다간 권정생의 생가다. 마당에 무성하게 잡초가 자라나 폐가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 분의 삶에 비춰보자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더 나아 보인다. 물색없이 조성해..

좋은 수필 2024.04.28

다시 시작 / 김은주

다시 시작 / 김은주 목화가 툭 하고 고개를 꺾었다. 경주어 얻어 온 씨앗이 되 피우고 다시 살아나 여러 해 나의 뜰에서 산다. 솜이 칭칭 감긴 씨앗 몇 알을 누구에게 받아 왔는지 통 기억에 없다. 백련이 지고만 어느 논둑에서 받은 기억은 아련한데 누구였는지 무슨 일로 연 밭에서 목화씨를 건넸는지 아득하기만 하다. 마른 기억은 바람에 사라졌지만 해마다 야무진 검은 씨앗을 쓰다만 종이에 싸 확독에 보관해 둔다. 옹기에서 겨울을 난 씨앗은 봄이 되면 다른 일년초와 함꼐 뜰 여기저기 뿌려지는데 그 위치는 꽃 피는 여름이나 되어야 정확히 알게 된다. 마당 귀퉁이에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꽃 피우고 지다가 초록이 쓰러지는 이맘때쯤 흰 솜꽃을 피워 존재를 드러낸다. 집 비운 사이 된서리가 다녀간 모양이다. 온통 ..

좋은 수필 2024.04.28

글밥/김은주

글 밥                                                     김은주 젓가락을 밥 속에 찔러 넣는다. 옆으로 젖히니 덩어리에서 덜어져 나온 밥 한 덩이가 내 입속으로 들어온다. 밥을 입속으로 데리고 온 젓가락을 빼내며 오래 밥을 씹는다. 밥을 씹으며 내다 본 창밖에는 오월의 장미가 붉다. 참으로 게으른 식사다. 어른들이 봤으면 복 달아난다며 등을 쳤을 일이다. 매번 처음인 듯 밥을 씹는다. 처음에는 혀 위에서 구르던 밥 덩어리가 씹을수록 알갱이로 변하며 양옆 턱 선으로 가 고인다. 고인 밥 알갱이가 다시 어금니 위로 올라와 부서지고 다시 턱 아래로 가 씹힌다. 한참을 이러다 보면 혀 아래 침샘에서 달달한 침이 입 안 가득 고여 온다. 밥 알갱이가 녹아들며 느껴지는 이..

좋은 수필 2024.04.28

사막 건너기/김은주

사막 건너기 / 김은주   첫닭이 울기도 전 더듬더듬 어둠을 가르고 골목길에 나선다. 골목길은 이미 낯선 이국의 언어와 분주한 지프의 시동 소리가 함께 실타래처럼 엉켰다. 세상의 모든 말은 귀가 열리면 언어이고 귓등을 되돌아 나가면 소음이다. 왕왕거리는 소음도 며칠 듣다가 보니 말속에 가락도 있고 정情도 느껴진다. 여남은 대의 지프가 일제히 한 방향으로 불빛을 쏜다. 길쭉한 빛 사이로 건조한 먼지가 둥둥 떠다니고 출발을 재촉하는 시동 소리가 사뭇 우렁차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흰옷을 입은 남자가 고개와 손을 동시에 차 쪽으로 흔들며 차에 오르라는 신호를 보낸다. 긴말은 필요 없고 서로 알아서 제자리를 찾아 차에 오른다. 찬 새벽공기에 코트 깃을 세우고 손가방도 가슴을 가로질러 단단히 맸다. 지금 우리는 깜..

좋은 수필 2024.04.28

달개비/김은주

달개비                                                                                                                 김은주  국 안에 무가 제법 투명하다. 함께 넣은 파와 마늘이 어우러져 끓고 있는 국물도 곡진해졌다. 반찬 몇 가지를 조물조물하고 뒤이어 식혜 한 통을 다 삭혀 두는 사이에도 그녀는 여태다. 빠진 목으로 짐작건대 오고도 남았을 시간이건만 감감무소식이다. 기다리는 자가 느끼는 시간은 오마는 사람의 두 배로 길다. 같은 시간이지만 오는 이에게는 서둘러야 하니 짧게 느껴질 테고 기다리는 사람은 오리무중이니 까막눈이 될 수밖에 없다. 엿가락처럼 늘어진 시간을 주체할 수 없어 걸레질하다가 무단히 멀쩡하게 놓인..

좋은 수필 2024.04.28

토굴 /김은주

토굴 /김은주  글을 재우려고 방문을 닫는다. 자꾸만 들떠 달아나는 글을 잡고 뉘여 토닥토닥 등을 두드린다. 이불도 끌어당겨 덮어 보고 흥얼거리며 자장가도 불러 본다. 겨드랑이 아래 끼고 누워 충분히 숨길도 열어주고 그래도 뒤척이면 머리까지 쓰다듬어 준다. 스르르 눈 감을 때까지, 달디 단 잠 속에 들 때까지 오래 글을 어르고 달랜다. 처음부터 재우려는 생각은 없었다. 행간을 넘나들며 혼자 잘 놀 때는 그러려니 하고 두고 보지만 걸려 넘어지고 징징거리기 시작하면 그때는 푹 재우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문턱에 걸리고 툴툴거리는 글을 어찌 그냥 두고 보겠는가? 쓰는 자는 툴툴거림의 이유라도 알지만 읽는 자에게 그것은 독서의 물길을 막는 일이니 말이다. 접시꽃 흐드러진 칠월의 뙤약볕이 방까지 도달하기에는 ..

좋은 수필 2024.04.28

자객 / 김은주

자객 / 김은주  자객이 떴다. 푸른 안개도 바람을 가르는 그림자도 없다. 끊어 놓을 듯한 호흡도 꿈틀거리는 맥박 또한 찾아볼 수 없다. 달빛 한줌 등에 업지 않고 월담은 애당초 꿈도 꾸지 않은 듯하다. 자객은 그 흔한 검 한 자루 손에 쥐지 않고 무더운 염천을 건너 우리에게로 왔다. 심복 하나쯤 둘 법도 한데 오직 혼자다. 이울어진 빛의 배후에 도사리고 앉았다가 싸늘한 쇠붙이 올가미 하나 달랑 들고 긴 유리병의 목을 따러 하강한 것이다. 금방이라도 숨 줄을 끊어 놓을 듯한 자객의 기세에도 마개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다. 병은 긴 목을 빼고 앉아 언제나 목숨을 내놓기 위한 것이라는 듯 일말의 저항도 없어 뵌다. 병은 자객을 만나기 전 냉골의 방에 앉아 긴 참선에 들었을 것이다. 화두타파를 위해 목구멍까지 ..

좋은 수필 2024.04.28

빈방/김은주

빈방                                                                                            김은주  홍매화가 붉게 핀 길 건너 할머니집이 전에 없이 부산하다. 마당 가득 사람이 북적대고 환하게 불도 밝혀져 있다. 집 앞 텃밭에 흙이 녹아 씨를 넣어야 할 때가 다 되었는 데도 할머니는 기척이 없었다. 추운 겨울을 건너기 위해 아들네 집에라도 가셨나 싶었는데 오늘 밤 할머니는 조등(弔燈)으로 내걸려 있다. 일 년 내도록 드나드는 사람 하나 없더니 오늘 보니 식구들도 참 많다. 보이지 않는 식구들이 저리 많은데 할머니는 겨우내 빈방에 사람을 들이고 싶어 그리 안달이셨을까. 나는 베란다 창틀에 기대 할머니 집 마당을 유리병 속처럼 내려..

좋은 수필 2024.0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