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평론 33

사유로 번져 온 화양 바다의 순정한 문장들/박철영

사유로 번져 온 화양 바다의 순정한 문장들  -김지란 두번째 시집 『아물지 않은 상처와 한참을 놀았다』 중심                                        박철영(시인, 문학평론가)  시는 감동 기제를 고도화한 문장으로 소통하려는 데 있다. 이것은 언어의 시적 순기능과 확장성 그리고 명징성에 관한 말일 것이다. 따라서 좋은 시가 품은 기운은 눈을 현혹하지 않는다. 시를 구조하고 있는 시어들로 형용한 사유가 자연스럽게 문장의 적층(겹)을 이뤄 감싸준다. 평범한 언어가 갖는 단선적인 의미보다 질료적 정황까지 담지한다는 의미다. 문장 속에서 체험적 정서와 욕망의 투사로 발화한 상상력을 부양하는 의미언은 당연한 것이다. 시가 일반적인 언어로 이행되는 의사 전달체가 아니고 다층적인 상징성을..

평론 2024.05.07

수필의 체제론과 통치론의 변화―김만년 수필집 《사랑의 거리 1.435미터》를 읽고

[서평]수필의 체제론과 통치론의 변화―김만년 수필집 《사랑의 거리 1.435미터》를 읽고이운경oksan97@hanmail.net  1. 자연에서 길어 올린 서정의 아리아  자연은 수필에서 고갈되지 않는 지하자원이다. 자아를 자연이라는 대상에 의탁하거나 투사하는 전통적 방식은 지금도 유효하다. 자연은 ‘나’를 투사하는 거울이면서 동시에 무수한 ‘자아’를 재발견하는 경전(經典)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자연은 서정의 원천(源泉)이다. 자연이 품고 있는 촉촉한 수액은 수필이라는 텃밭에 끊임없이 서정의 비를 내리게 한다. 김만년의 수필에서도 자연은 욕망의 필터를 거쳐 반복 인화된다. 그의 작품에서 자연은 숭고한 아름다움의 대상으로 발굴되기도 하고(), 고향의 상징과 성장기 기억을 품은 공간으로 호출되기도 한다()..

평론 2024.05.02

시인의 직업은 발굴/신형철

시인의 직업은 발굴 언젠가 김경주의 첫 번째 시집에 대해 쓰면서 나는 "시인 김경주는 전천후다"라는 말로 말문을 열었더랬다. 참으로 여러 얼굴을 갖고 있는 시인이어서 종잡을 수가 없다는 얘기였다. 자기가 누구인지 아직 잘 모르는 사람만이 뿜어낼 수 있는 에너지가 좌충우돌하는 시집이었다. 두 번째 시집 (문학과지성사 펴냄)을 읽어보니 점입가경이다. 이제는 더 자유롭게, 마음 가는 대로 마음껏 놀고 있구나. 시인은 그래도 된다. 시장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내키는 대로 놀 수 있는 세계가 시 말고 또 어디 있겠나. 이 시인의 여러 얼굴을 더듬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한편으로는 이제 두 번째 시집쯤 되고 보니 이 사내의 얼굴 중 가장 아름다운 얼굴이 한결 또렷해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몇 세기 전 지층이 발견되었..

평론 2024.02.04

손택수의 ‘방심’/ 시인 문태준

손택수의 ‘방심’/ 시인 문태준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뒤 문을 열어 놓고 있다가, 앞뒤 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 스윽, 제비 한 마리가, 집을 관통했다 그 하얀 아랫배, 내 낯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순간에, 스쳐 지나가 버렸다 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 그야말로 무방비로 앞뒤로 뻥 뚫려 버린 순간,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내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고 ―손택수, 「방심」 전문 ‘마음을 놓다’라는 말 참 오랜만이다. 마음을 풀어 놓아버린 일 얼마나 오래 되었나. 마음 졸이며 염려하고 살아왔을 뿐. 시인은 대청마루에 큰 대 자로 누워 있었던 모양이다. 최대한 마음과 몸을 느슨하게 하고서. 바다처럼 편편하고 넓..

평론 2024.02.04

신동엽의 「산문시 1」 평설 / 신형철

신동엽의 「산문시 1」 평설 / 신형철 산문시 1 신동엽 스칸디나비아라던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데거 러셀 헤밍웨이 장자(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소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 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갯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트럭을 두대씩이나 가지..

평론 2024.01.19

릴케, 「두이노의 비가」 중 제2비가 평설 / 신형철

릴케, 「두이노의 비가」 중 제2비가 평설 / 신형철 「두이노의 비가」 중 제2비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 (중략) 연인들이여, 어울려 만족하는 그대들이여, 너희들에게 묻는다, 우리의 존재를. 너희들은 손을 꼭 잡는다. 그것으로 증명하는 것인가? 그렇다, 내 자신의 두 손도 서로를 느끼고, 혹은 그 두 손 안에 지친 얼굴을 묻고 쉬는 일도 있다. 그것이 얼마간은 나 스스로를 감지하게도 한다. 허나 누가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가? 그러나 연인들이여, 서로가 상대의 환희 속에서 성장하는 너희들. 끝내는 압도되는 상대가 , 하고 애원하는 너희들 ─ 서로의 애무 속에서 풍년 든 포도처럼 풍요하게 영그는 너희들. 다만 상대가 완전한 우위를 차지하는 것만으로도 가끔은 소멸하는 너희들. 너희에게 묻는다,..

평론 2024.01.19

김수영의 「봄밤」 평설 / 신형철

김수영의 「봄밤」 평설 / 신형철 봄밤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業績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行路와 비슷한 回轉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人生이여 災殃과 不幸과 격투와 청춘과 千萬人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節制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靈感이여 —합동시집 『平和에의 證言』 (1957) ...

평론 2024.01.19

김시습의 「나는 누구인가自寫眞贊」 평설 / 신형철

김시습의 「나는 누구인가自寫眞贊」 평설 / 신형철 나는 누구인가 —자화상에 부쳐自寫眞贊 김시습 이하李賀를 내려다볼 만큼 俯視李賀 부시이하 조선 최고라 했지. 優於海東 우어해동 드높은 명성과 헛된 기림 騰名謾譽 등명만예 어찌 네게 걸맞을까? 於爾孰逢 어이숙봉 네 몸은 지극히 작고 爾形至眇 이형지묘 네 말은 지극히 어리석네. 爾言大侗 이언대동 네가 죽어 버려질 곳은 宜爾置之 의이치지 저 개굴창이리라. 丘壑之中 구학지중 ※ 정길수 편역, 『길 위의 노래』 (돌베개,2006) .......................................................................................................................................

평론 2024.01.16

배우식 / 죽음 앞에서 만난 북어

배우식 / 죽음 앞에서 만난 북어*2011년가을 배우식 / 죽음 앞에서 만난 북어 *문창2011년가을 ​ 1.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짐승의 눈빛이었다고 했다. 열정을 넘어 광기의 눈빛이었다고 했다. 학생들의 그런 웅성거림 속에서 나는 쓰러졌다. 알 수 없는 병으로 이미 한쪽 눈을 잃었고, 남은 한쪽 눈마저 멀어갈 때 그래도 쓰러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며 붙잡았던 시였는데……, 나는 쓰러졌다. 늦깎이로 들어간 대학원, 아이러니하게도 ‘시창작’ 수업시간에 나는 쓰러졌다. 2001년, 그날 이후 혼미해진 의식상태가 한동안 계속되었고, 방에 혼자 덩그러니 남은 나는 그만 막막한 적막 속에 갇히고야 말았다. 끊임없는 고통이 밀려왔고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참아낼 수 없는 극한상황으로 치달았다. 병원에서는 그 원인을..

평론 2024.01.11

조금만(灣)/정상미

조금만(灣)/정상미 아쉬움이 담긴 말엔 물소리가 납니다//옆구리 깊이 파여 먼 곳을 바라보면//돌아온 파도의 말이 귓전에 쏟아집니다//퉁퉁 부은 발목들이 찾아드는 늦저녁//슬리퍼도 운동화도 물소리에 녹아듭니다//차르르 지워진 발자국, 만 가득 들이칩니다//해초 냄새 덜 밴 기다림을 매만질 때//짠물을 맞아 봤거나 흘려본 사람들은//발돋움 숨어 자라는 조금만의 근육입니다 「시와문화」(2021, 여름호) 정상미 시인은 2021년 등단했다. 등단작을 통해 현대인의 불안한 심리를 담백하고 정갈한 언어로 풀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조금만(灣)’은 제목이 특이하다. 시작도 새롭다. 아쉬움이 담긴 말엔 물소리가 납니다, 라는 첫줄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퍽이나 감각적이다. 이러한 참신한 발상은 신인으로서 어떤 ..

평론 2023.11.11

허허롭거나 허허롭지 않은 그 안/박철영

허허롭거나 허허롭지 않은 그 안 -김지란, 이재연, 선종구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상상력에 대하여 유추해 본다. 신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살아가는 환경을 만들어 놓았다. 그 안에 시간을 구분해 계절을 나누어 다가오는 봄을 선물했다. 우리가 고대하던 봄이 온다. 누구나 따뜻한 봄이 오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꿈꾼다. 바람을 구체화하면서 삶에 대한 전망을 상상할 것이다. 오랜 시간 꿈꿔온 단상들이 깊은 사유로 이전 축적되면서 그 모습을 세상에 ‘시’라는 형상으로 드러낼 때 심연을 통과한 고뇌와 혼신에 찬 몰입을 환희를 위한 것으로만 볼 수 없다. 그것은 세상을 긍정으로 바라보고 불안한 순간순간을 희망으로 전환하려는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의 산물로 봐야 한다. 그런 지점을 응시하고 있는 시인의 시선은..

평론 2023.10.19

허허롭거나 허허롭지 않은 그 안

허허롭거나 허허롭지 않은 그 안 -김지란, 이재연, 선종구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상상력에 대하여 유추해 본다. 신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살아가는 환경을 만들어 놓았다. 그 안에 시간을 구분해 계절을 나누어 다가오는 봄을 선물했다. 우리가 고대하던 봄이 온다. 누구나 따뜻한 봄이 오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꿈꾼다. 바람을 구체화하면서 삶에 대한 전망을 상상할 것이다. 오랜 시간 꿈꿔온 단상들이 깊은 사유로 이전 축적되면서 그 모습을 세상에 ‘시’라는 형상으로 드러낼 때 심연을 통과한 고뇌와 혼신에 찬 몰입을 환희를 위한 것으로만 볼 수 없다. 그것은 세상을 긍정으로 바라보고 불안한 순간순간을 희망으로 전환하려는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의 산물로 봐야 한다. 그런 지점을 응시하고 있는 시인의 시선은..

평론 2023.07.09

사람의 깊이 20집 이상인 시집 해설/박철영

사람의 깊이 20집 이상인 시집 해설 순백해진 말들의 상상속 우화羽化 -이상인 시집《툭, 건드려 주었다》 시인, 문학 평론가 박철영 어둑해질 무렵 인 밭둑길을 퍼덕이며 달아나는 암탉 한 마리 배고픈 어른들이 새까맣게 뒤쫒아 가고 있다 -두 번째 시집 《연둣빛 치어들》 전문 대체적으로 네 번째 시집 이전까지의 이상인 시인은 은은한 서정에 근접한 시적 세계를 성찰하고 사유한다. 두 번째 시집 《연둣빛 치어들》에서도 시골 아이들의 순박한 모습을 교사의 눈으로 바라본다. 의 “범 바위골에서 새벽밥 먹고 달려온/호재의 책가방 속에서/노랑턱멧새의 울음소리가 들린다./국어책을 꺼내자/푸드득 교실 뒷문으로 빠져 날아간다.//호재의 가방 속에는 늘 날고 싶은/무엇인가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며 아이의 희망을 염원하고 있..

평론 2023.07.08

밤 꽃/박제영

밤 꽃/박제영 - 유월에 산에 오르다보면 비린내 같기도 한데 뭐라 말하기 참 거시기한, 참 묘한(?) 향기가 코를 찡긋거리게 만드는 그런 경험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돌려 말하면 오히려 헷갈릴 수 있겠네요. 온 산을 진동하는 정액 냄새로 정정하지요. 중학생 때, 처음 몽정을 했을 때, 화장실에 가서 엄마 몰래 빤쓰(?)를 빨면서 처음 맡아보았던 그 정액 냄새. 산을 오르는데 난데없는 정액 냄새라니! 그 냄새 아는 사람이라면 조금은 민망하기도 할 듯한데요. 그 망측한 냄새를 풍기는 범인은 바로 밤꽃이지요. 그래요. 오늘은 조금은 야한 꽃, 동서고금 시인 묵객들이 야화(夜花)라고 부르곤 했던, 그러나 실은 밤나무꽃인, ‘밤꽃’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밤나무와 밤 그리고 밤꽃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평론 2023.07.01

풍경과 시간이 살아가는 남녘 섬의 따뜻한 서정

풍경과 시간이 살아가는 남녘 섬의 따뜻한 서정 - 신진순의 시세계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1. 삶의 지극한 원형을 찾아가는 미학적 페이소스 신진순의 신작시집 『난파선 한 척, 그 섬에』는 남녘 섬에서 겪어온 삶의 순간들을 낱낱이 기록한 아름다운 풍경과 시간의 도록(圖錄)이다. 시인이 살고 있는 전남 고흥 나로도는 차랑차랑, 하염없이, 오랜 풍경과 시간을 쌓아가는 천혜의 공간이다. 시인은 그러한 풍경과 시간의 흐름을 때로는 잔잔하고 투명하게, 때로는 격정과 회한을 얹어 토로해간다. 시종 진정성 있는 목소리를 통해, 삶의 만만찮은 굴곡을 품은 채, 새로운 희망을 일구어가려는 의지를 충만하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풍경과 시간을 발화하는 시인의 언어는 과장된 감상(感傷)이나..

평론 2023.06.10

사각형의 세상에서 쌍봉낙타의 꿈을 꾸다

사각형의 세상에서 쌍봉낙타의 꿈을 꾸다 - 이지엽,『사각형에 대하여, 고요아침, 2011. - 박성민,『쌍봉낙타의 꿈, 고요아침, 2011. 이 송 희 (시인,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1. 현대시조의 현실인식, 그 실험과 성취 시인은 이 세계의 모순과 결핍을 진단하며 경고하는 ‘잠수함 속의 토끼’ 같은 존재들이다. 그들은 비유와 상징, 알레고리의 방식으로 시대의 모순과 부조리, 물화된 욕망, 소외된 삶의 단면들을 때로는 직접적으로, 때로는 우회적으로 표현하면서 독자와 소통하기를 원한다. 치열한 역사적 사건들이 즐비했던, 열망과 고뇌의 20세기에 시인들은 기꺼이 잠수함 가장 밑바닥에 들어가서 산소의 부족함을 경고하고 먼저 죽는 역할을 했다. 시인들이 현실에 대해 냉정하게 거리를 유지하려는 것은 곧 현실에..

평론 2023.05.31

화엄의 숲, 그 마음의 감옥에 갇혀 성찰하는 시간

화엄의 숲, 그 마음의 감옥에 갇혀 성찰하는 시간 - 오종문론 이 송 희(시인) 1. 현실 비판의 지상에서 자아성찰의 땅 속으로 시인은 끊임없이 세상과 타자, 또한 스스로의 삶에 관여하는 존재다. 감각적으로 인지함으로써 느끼는 모든 감정들을 최소의 언어로 함축하여 표현해야 하는 존재들이다. 공자의 말처럼 “시란 뜻(志)이 향해 가는 바라, 마음 안에 있으면 뜻이 되고 말로 나타내면 시가 되는 것”이다. 마음 안에 있는 사유를 문자언어로 표현하는 존재가 시인이 아니던가. 요즘처럼 빠른 속도와 경쟁의 시대에 현대의 시들은 할 말이 많아졌다. 시 한 편이 두 페이지를 넘는 것은 기본이고, 심지어는 시집 한 권이 단 한 편의 시로 구성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의도적인 경우도 있겠지만, 우리는 시에서조차도 말을 ..

평론 2023.05.30

갈망과 좌절의 비린내 나는 삶, 물고기의 표정들/이송희

《시조춘추》2011. 겨울 기획특집《시조, 물고기를 낚다》 갈망과 좌절의 비린내 나는 삶, 물고기의 표정들 이 송 희 1. 이번 계절에는 물고기를 소재로 취한 작품들을 읽는다. 다른 대상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물고기는 그 종류에 따라 다양한 특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인간의 다채로운 살림살이와 비유되어 시적 소재로 차용되어 왔다. 특히, 납작한 모양새를 하고 있으면서 눈이 한쪽으로 쏠려 있는 가재미, 삭힐수록 암모니아 냄새가 더 진해지는 홍어, 강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 매 맞고 부러져서 더욱 슬픈 북어, 그 외에도 숭어, 꽁치, 복어, 새우, 거북 등은 시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한다. 시인은 물고기의 속성을 인간 삶의 다양한 양태와 연결 지어 때로는 풍자와 해학을 동반하고, 때로는 에로티시즘적 상상력과..

평론 2023.05.30

낯섦의 부재에서 치환해낸 자연의 시어

낯섦의 부재에서 치환해낸 자연의 시어 -김계식 시선집 《연리지의 꿈》을 중심 박철영(시인, 문학평론가) 자연과 맞닥뜨리는 촉수는 사물을 바로보는 의식이고, 자아가 외부 세계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이다. 그 첨예한 접점에서 발현한 자의식으로 시적 상상력은 형상화에 다다른다. 시의 세계로 내재화된 자연은 삶의 경계를 여지없이 허물어 낸다. 그러한 작업이 환원되어 건강한 시어로 추수됨을 알 수 있다. 나는 무리의 질서를 존중하는 한 마리의 일벌 - 부분 비록 부분을 보여주지만, 전체를 나타내주기에 충분하다. 이 싯구를 통해 시인의 시적 방향성과 삶의 정신을 가늠해볼 수 있다. 여기에 “나는 / 한 마리의 일벌”이었다며 기나긴 침묵을 고해하는 성사를 마저 이룬다. 시인의 고백을 통해 단정할 수 있는 것은 공감할 ..

평론 2023.05.07

변용變容과 관용寬容 사이

변용變容과 관용寬容 사이 -신용목 시집《그 바람을 다 걸어야한다》중심으로 암흑을 꼭 어둠이라고 말할 수 없다. 굳이 어둠을 말하면서 암흑을 떠올리지 않듯 그 모든 것은 사람의 마음에서 시작된다. 짙은 어둠에 둘러싸인 지리산 어느 낮은 산자락에 든 어둠은 결코 불편하지 않은 어둠이다. 이 어둠은 암흑에서 잉태되었지만, 암흑이 분만한 새끼라 해도 옴팍한 가슴께로 파고든다면 더 이상 어둠이라 불릴 수 없다. 어차피 어둠은 거대한 혼돈 사이에 존재한다는 코라(chora)라는 기제를 통과해야만 가능한 빛으로 우리가 인식해야하는 또 다른 현대적 문학의 언표다. 그 어둠을 오랫동안 응시하면 사물 분별의 안목이 생겨 조금씩 사물에 대한 형상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최근 젊은 시인들이 추구하는 시의 성향은 어둠에서 막..

평론 2023.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