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2336

아프니까 중년이다 / 원정란

아프니까 중년이다 / 원정란 인생을 사게절에 비유하곤 했다. 청춘을 꽃피는 봄이라 하면 여름과 가을은 장년, 중년, 노년인데 백세시대가 되면서 판도가 달라졌다. 십 대, 이십 대의 전유물이던 청춘은 어느새 삼십 대로 확장되고 간혹 40대의 일부도 포함 시켜 봄여름의 경계가 없어졌다. 중년은 신중년의 개념으로 40, 50, 60대까지 지평을 넓혔고 장년이란 말을 사라지게 했다. 이젠 노년도 80세가 넘으셔야 편하게 호칭할 수 있으며 70대는 눈치껏 아니면 생략하는 게 오히려 현명한 처신이 되었다. 그렇게 인생의 가을이 길어졌다.​ 봄, 여름을 보낸 가을은 지혜로운 계절이다. 누군가에게 탐스럽게 익은 글자로 편지를 쓰고, 봉투에는 은행잎을 가득 넣어 부치고, 흩어진 낙엽만큼 조건 없는 자비를 베풀고 싶은..

좋은 수필 2026.06.11

허송세월/김훈

허송세월/김훈​ 나는 오후에 두어 시간을 햇볕을 쪼이면서 늘그막의 세월을 보낸다. 해는 내 노년의 상대다. 젊었을 때 나는 몸에 햇볕이 닿아도 이것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했고, 나와 해 사이의 공간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지나간 시간의 햇볕은 돌이킬 수 없고 내일의 햇볕은 당길 수 없으니 지금의 햇볕을 조일 수밖에 없는데, 햇볕에는 지나감도 없고 다가옴도 없어서 햇볕은 늘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 온다. 햇볕은 신생(新生)하는 현재의 빛이고 지금 이 자리의 볕이다. 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보면 헛되어 보이는데, 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 찬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 나는 내가 사는 마을의 길 건너, 일산 호수공원 벤치에 앉아서 햇볕을 쪼인다. 햇볕을 쪼일..

좋은 수필 2026.06.11

시에 담고 마음으로 그리네

시에 담고 마음으로 그리네성근 빗방울 잠시 그치고따뜻한 바람 불어올 때엔맑은 향기 잡을 수 있다면멀리 그리운 이에게 보내야지 疏雨乍晴後 소우사청후暖風初動時 난풍초동시淸香如可掬 청향여가국千里寄相思 천리기상사 - 이명한(李明漢, 1595~1645), 『백주집(白洲集)』 「꽃 아래 독작하며 벗을 그리워하네[花下獨酌懷友生]」 이명한은 당대 제일의 문사로 꼽힌 이정귀(李廷龜)의 아들로 그 또한 문명(文名)을 떨쳤다. 호탕하고 너그러운 성격으로 풍류를 즐겼다고 하는데, 이 시에서는 그의 다정한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드문드문 내리는 비에 꽃잎이 촉촉해지면 싱그러운 내음이 바람에 실려 더없이 향기롭다. 청아한 향기를 벗과 함께 즐기고 싶지만 그럴 수 없기에 시에 담아 보..

고전 2026.06.10

배귀선 평론 / 자기 긍정의 오디세이 - 김산옥 《수필미학》(제34호)

배귀선 평론 / 자기 긍정의 오디세이 - 김산옥 《수필미학》(제34호) 1. 긍정의 시원​ 김산옥의 수필은 정자나무 아래에서 나누는 이야기처럼 자분자분하다. 서로 보듬고 다독이는 긍정의 평상에는 들고나는 여유로움이 있으며 때로는 옷감을 짜듯 섬세함이 있다. 때문에 쉽게 놓칠 수 있는 장면도 소재로 취하여 작품으로 승화하는데, 자기 긍정의 세계관으로부터 촉발된 그의 사유는 동구 밖 연못의 동심원과 같은 효과를 유발한다. 이때 “있는 것은 아무것도 버릴 것이 없으며 없어도 좋을 것은 없다”(백승영,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는 니체 철학처럼 김산옥의 세계 이해 방식은 대상으로의 전이를 통 한다 더 나은 상태의 긍정을 추구한다. 휴머니즘의 무늬와 사회 문화적 현상을 투영한 이야기에서 긍정의 철..

평론 2026.06.07

맹그로브 호흡법/ 김주선

맹그로브 호흡법/ 김주선 늪지대의 도마뱀과 가난을 팔아 까마우Ca Mau를 떠나온 여자였다. 삼모작 볏단처럼 등이 굽은 아버지가 울었다고 한다. 생면부지의 땅에 뿌리내리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일까. 양철지붕의 붉은 녹물을 뒤로하고, 메콩강을 건너온 여자는 그렇게 도장공의 아내가 되었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하구에서 푸르른 숲을 이루며 살겠다는 일념이었다. 나팔꽃 같던 스무 살 처녀는, 불혹의 시숙을 만나 나의 손윗동서가 되었다. 살림살이가 소금물보다 짰기에 낮에는 공장에서 재봉틀을 돌렸다. 때로는 너무 맑고 깨끗한 물이 생生에 더 치명적일 수도 있는 법. 흙탕물이 조개도 품고 새우도 키우듯, 자신의 하루하루를 진흙밭에서 묵묵히 길러냈다. 조수가 빠져나가면 기괴하고도 장엄한 생의 골격이 드러난다. 산소..

좋은 수필 2026.06.07

나무 도마/ 김시윤

나무 도마/ 김시윤 벼린 날이 춤을 춘다. 푸른 오이가 동글동글 떨어져 나가고 붉은 당근이 어슷비슷 삐딱하게 잰 체를 한다. 풋고추는 날이 지나간 자리마다 보란 듯이 매운맛을 새겨 넣고 매끈한 양파가 쪼개질 때는 난데없이 눈물이 솟는다. 허리 잘록한 애호박은 요염한 몸뚱이를 나박나박 맥없이 내맡긴다. 올려지는 무게나 맛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납작 엎드린 허리에 힘을 주고 그저 놀아나는 칼춤을 늡늡히 우러를 뿐. 긋고 지나간 자국만큼 썰려 나간 세월이 욱신거린다. 뭉텅뭉텅 잘린 사랑이 냄비 속으로 잠기고 깍둑썰기로 조각난 이야기들이 칼날 끝에서 나뒹군다. 덩어리진 노동을 하루 멀게 썰고 다지는 순간들, 상큼한 향기가 살을 그으며 스며들 때도 있고 비리고 미끈거리는 기름기에 몸피가 짓이겨질 때도 있다. 다..

좋은 수필 2026.06.07

맨발/김희자

맨발/김희자 남편은 오늘도 탁발승처럼 종일 세상을 헤매다가 들어왔다. 작은 집으로 돌아온 그는 침대 위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나는 침대 끝에 숨을 죽이고 앉아 이불 밖으로 나온 남편의 맨발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작고 핏기 없는 맨발을 보니 눈이 시리다. 몸 중 가장 늦게 세상에 나와 제일 낮은 곳에서 큰 하중을 견뎌내는 것이 발이다. 애잔한 발을 가만히 보다가 손끝을 슬쩍 갖다 댄다. 그는 날 선 세상에 맨발을 베듯 움찔 놀라며 발을 거두어들인다. 맨발로 세상을 이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편처럼 자신을 던져 일가를 지키는 사람도 있다. 하룻밤을 빌려 저렇게 쉬고 나면 내일 아침 또다시 길을 가야 하는 사람이다. 두툼하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머니의 품을 떠나 할머니의 그늘에서 유년을 ..

좋은 수필 2026.06.07

유통기한/윤이나

유통기한/윤이나 터줏대감과 새내기의 자리바꿈을 위해 냉장고를 앞으로 당긴다. 숨 가쁘게 달려왔던 오래된 냉장고가 끌려 나온다. 판판한 냉가슴에 두 손을 얹고 문을 연다. 찌그덕 열리더니 서늘한 기운이 훅 끼친다. 나 아직 싱싱하다며 냉기를 뿜어 빈속을 달래고 있다. 전원 플러그를 잡으니 손이 떨린다. 시적거리다 플러그를 뽑는다. 드르륵 드르륵 소리를 내며 심장이 멈춘다. 수리 한 번 한 적 없던 냉장고였다. 십육 년을 버티기에는 무리였던지 여러 번 열고 닫아야 제자리를 찾았다. 수시로 문틈으로 냉기가 새어 나왔다. 고무만 바꾸면 될 듯싶어 서비스센터에 문의했더니, 오래된 제품이라 부품을 구할 수 없다고 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새 냉장고를 주문했다. 우리를 위해 뜨겁게 펌프질해댄 가족을 내보내려니 생각..

좋은 수필 2026.06.07

보이고 싶은 것과 감추고 싶은 것의 충돌/함미혜

함미혜 / 보이고 싶은 것과 감추고 싶은 것의 충돌강철얼굴 있는 풍경(89)“신체의 몸짓, 감정, 일정 기간 동안 쌓인 사유 등의 모든 단편적인 행위들을 고스란히 한데 모으고 쏟아놓는다. 마치 흙덩어리를 뭉쳐놓듯이 어떤 덩어리들이 만들어진다. 내 안에 존재하는 것들을 꾹꾹 눌러오다가 어느 한 순간에 토해버리듯이 화면에 쌓아 던져두는 것으로 나는 숨을 쉴 수 있고, 내면과 외부세계, 현실과 공상 사이의 경계를 뛰어넘어 ‘진짜 나’를 불러내고 싶은 욕망과 의지를 발견한다. 화면의 덩어리들은 외로워하기도 하고, 웅크리기도 하고, 모호한 어떤 것들을 분출하기도 한다. 이렇듯 내 안의 것들을 잘 주시하며 꺼내놓아 재확인하는 목적은 결국 이 모든 복잡한 충격들이 없는 상태로 돌아가고픈 또 다른 욕망의 표현일지도 모..

글과 그림 2026.06.06

팔꿈치와 책상/김도희

팔꿈치와 책상김도희 만인융릉, 2019, 한국의 흙, 설치, 820×820cm : ‘판타스틱시티:셩’(2019,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1. “살면서 매끈한 서사로 처리되지 않은 경험들은 감각의 조각이 되어 몸의 여기저기에 웅크려 점차 밀도를 가진다. 아마 그것이야말로 사실에 접촉했던 강력한 증거이다. 서로 다른 밀도를 가진 쪼가리들은 자석처럼 서로 당겼다 떨어지며 몸속에 기묘한 인상과 이미지와 감촉과 온도의 물질감을 피워 올린다. 내 오른손이 반대편 왼손을 잡듯 그 물질감에 사로잡힐 때 나는 이 무엇인가를 궁금해하며 시간을 보낸다. 비로소 나는 매끈하게 팽창된 자아의 외피가 아니라 나의 경계, 내 몸이 놓인 방식을 본다. 그리고 이 무엇인가의 실감을 어떻게 발화해야 할 것인지 자연궁리한다.”2018.1..

글과 그림 2026.06.06

툇마루와 베란다/이만수

툇마루와 베란다이만수자연과 인간, 그리고 사물을 포함한 세계 내의 모든 존재는 쉬지 않고 서로를 흔들어 놓는다. 시각과 청각으로, 혹은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자극하고, 그렇게 흔들린 이미지들은 기억 속에 남아 서로를 다시 반영한다. 이른 아침에 툇마루에 앉거나 마당을 쓸면서 세상을 바라본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을 보는 동시에, 마당에서부터 들판과 언덕을 지나 대관령까지 첩첩이 싸인 산들의 사이에, 그 너머의 공간 속에서 생겨나고 사라지는 삶의 깊이와 두께를 동시에 감각하고 느낀다. 〈산조2424〉, 2024, 캔버스에 백토, 채색, 162×131cm ⓒ 이만수 강릉 안반데기. 말로만 듣던 이곳을 직접 본 그때의 충격은 언어를 넘어서는 침묵 그 자체이다. 그 풍경은 오랫동안 묻혀 있던 ..

글과 그림 2026.06.06

어떤 마음을 입으시겠습니까/이대흠

어떤 마음을 입으시겠습니까이대흠 한 생각에 오래 매달려 있는 사람에게서는 오랫동안 옷을 갈아입지 않은 것 같은냄새가 납니다 슬픔이건 기쁨이건 갈아입어야 합니다 몇 달 동안 외로움을 입고있는 여자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녀의 외로움에서는 쾌쾌한 냄새가 났습니다모든 생각은 소모됩니다 낡거나 때가 묻습니다 아침에 옷장에서 옷을 고르듯 오늘입을 정서를 골라야 합니다 속에는 아무래도 부드러운 호감이나 자존감을 걸치는게 좋을 것입니다 우울을 입어도 좋습니다만 날마다 입지는 마십시오 슬픔을 신고우는 남자는 구입한 슬픔에 만족하는 중입니다몇 가지 주의 사항이 있습니다오만의 속옷은 감추어도 드러납니다비굴의 외투는 몸을 옥죄어 숨통으로 파고들 것입니다날씨가 추울 때는 다정의 외투를 껴입는 것도 좋습니다 이따금..

좋은 시 2026.06.06

즐거운 등 / 강기영

즐거운 등 / 강기영 우리 동네 수선집 아저씨는늘 등 뒤에다 라디오를 틀어 놓는다​세상 돌아가는 일들 다 등 뒤에다 놓아두고눈앞에 놓인 실밥을 뜯는다​등 뒤에서 벌어지는 일들이지만, 돋보기안경 알에 우묵하게 고이듯 온갖 일들 다 알고 있다​줄이고 늘리고 뜯고 다시 깁는 일이구부린 등의 힘에서 벌어진다고도로 집중하는 저 각도는 최선을 다하는 자세다보이지 않는 등 뒤를 믿는 자세다​라디오 사연들은 마치 아저씨의 등에 업히듯,때로는 업힌 아이를 깨우지 않으려 다독이듯 흘러나온다​등 뒤로 지나가는 시간은 늘 지금이고손때 묻은 재봉틀의 노루발이 느릿느릿 걸어도어느 날엔 실밥이 터져 정오가 줄줄이 새는 태양이 찾아오기도 하고또 어느 날엔 지루한 장마가 찾아와잿빛 구름 수선을 의뢰하기도 한다​즐거운 등 뒤,고개를 들..

좋은 시 2026.06.03

무릎이 무르팍이 되기 위해서 / 이문숙

무릎이 무르팍이 되기 위해서 / 이문숙 넘어져서 무릎을 다치고 난 뒤무릎을 편애하기 시작했다 무릇 무릎이라 하면기어서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아픈 무릎이라도 사용하지 않으면무르팍이라고부르기 어렵다 불쑥 솟아난 돌의 미간서걱거리는 잎을 달고 꼼짝 않고 서 있던마가목 나동그라진다나는 엎어져서 깨진 무릎을 들여다본다 찌륵거리며 건너온다그만 저곳으로 갔던 게 아니다아직 마가목은 파르스름 흠칠대는 기류를 흘려보내고 있다귀뚜라미 수염 같은가슬가슬한귀뚫이의 마가목 가지는 하나도헐거워지지 않았다흐트러지지 않았다어떻게든 철제 난간에 저를 뻗어걸치고 있다무릎이 무릇 무르팍이 되기까지콱 힘주어 일어서기까지

좋은 시 2026.06.02

곰보 주전자/김중일

곰보 주전자 — 김중일 주전자를 본다태생부터 얽둑빼기에다 어수룩한 게볼품이라곤 별로 없다아내가, 돈을 주고 산 게 아니라그릇행상에게 고물과 바꾼 것인데몇 차례 다비를 치를 때마다 화근내가 등천을 해도그럭저럭 다시 부려먹었다이제, 아무리 문질러도 묵은 때가 끼어보는 이들마다 입을 대며 민망해 해도버리면 발병이라도 날 것 같아문갑 위에 올려 뒀다가끔 뚜껑을 열어보면아내의 비린 세월을 담고 있는 듯깊은 강(江) 하나가 출렁인다 몇 년 전에 어머니가 이사하실 때 이삿짐을 정리하다 보니 다듬이 방망이가 한 벌 그대로 보관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다듬이돌을 쓰지 않은 것이 언제인데 아직도 방망이를 가지고 계시냐 물었더니 그냥 버리기 아까우셨단다. 홍두깨로도 쓰지 못하는 다듬이방망이 - 그런데 어머니는 그것을 그때..

좋은 시 2026.05.31

가닿지 못하는 날의 무게/황진숙

가닿지 못하는 날의 무게/황진숙 평온하다. 고통의 흔적은 지워졌다. 시퍼렇던 낯빛과 입술이 본래의 안색으로 돌아왔다. 생체 신호를 나타내는 기계장치도 위험을 알리는 경보음도 없다. 하얀 침대보에 반듯하게 누워 떠날 채비를 마쳤다. 환자복에서 수의로 갈아입은 오빠가 금방이라도 눈을 뜰 것만 같다.요동치는 생의 곡선이 사라진 육신은 적막하다. 떠나려는 오빠를 받아들인다. 모니터 위로 그어지는 일직선을 보며 미친 듯이 울었던 원통함을 내려놓는다. 가지 말라고 매달리던 절망을 가라앉힌다. 목숨을 주었다가 도로 뺏어가느냐며 신을 향한 원망 또한 거둬들인다.그런들 맥없이 꺾인 스물다섯의 한을 어찌할까. 고작 한 살 많은 오빠로 가난한 집 맏이로 어리광 한 번 부려보지 못했다. 끝없이 달리고 싶다던 마라토너의 ..

발표작 2026.05.31

염화/우은숙

염화鹽花우은숙곰소항 염전에 햇살이 곧두박질이다한곳을 향하여 모질게 내리꽂는다그 빛에 비틀대는 나는 비정규직 노동자숨죽이고 있던 내가 부르튼 속살을 허옇게 내보이기 시작한 건 이때였다납작한 몸을 절이고 마음까지 절인 그때바람에 물기 말려 서걱해진 서류 위에짜디짠 염화로 피기 위한 몸부림올해도 근로계약서에 사인할 수 있을까 모든 것 내보여야 비로소 피는 꽃 온전히 내려놓아야 비로소 피는 꽃가쁘게 햇살 토해내는 곰소항의 그 소금

좋은 시 2026.05.29

속이 썩어도 산다 / 김향남​

속이 썩어도 산다 / 김향남​ 숲길을 걷다 보면 가끔 그런 나무를 만난다. 잎은 무성한데 속은 텅 비어 시커멓게 썩어버린 나무. 마치 누군가가 몸 한가운데를 오래 후벼 파낸 듯 깊은 구멍이 나 있지만, 놀랍게도 그 나무는 여전히 살아 있다. 햇빛을 받으면 연둣빛 잎을 피우고, 바람이 지나가면 가지 끝을 흔들어 기척을 낸다. 사람이라면 이미 끝났다고 여길 상처인데도, 나무는 다시금 잎을 내고, 단풍이 들고, 겨울을 건넌다.식물 생태학에서는 이런 나무를 ‘비어있는 중심’을 가진 개체, 혹은 ‘중공中空나무’라고 부른다. 흥미롭게도 나무에게 속이 썩는다는 것은 반드시 죽음의 신호가 아니다. 오히려 오래된 나무일수록 중심부가 비어있는 경우가 많다. 나무는 생장 층, 즉 겉껍질 마로 안쪽의 얇은 부분에서 살아 움..

좋은 수필 2026.05.28

구두도 구두를/이가은

구두도 구두를/이가은 누가 벗어놓고 간 오목한 마음일까조금 더 깊어지면 바닥에 닿을지도 발들은 지금 외출 중, 구두끼리 모였다 다른 길 걸어와도 아픈 건 같았구나상처에 광을 내면 오래 빛날 별이 된다 마른 천 손가락에 둘러 그러안고 닦아 준다 구두도 구두를 벗어 보고 싶었을까부르튼 밑창 대신 홀가분한 맨발로 헐거운 내일이라도 성큼성큼 가 봤으면!​​구두들은 모두 다르다. 각각 “다른 길”을 걸어왔다. 서로 다른 삶이지만 동변상련의 아픔을 공유한다. 닳고 닳은 “상처에 광을 내면 오래 빛날 별”이 될 수 있으려니 기대하며, 「마른 천 손가락에 둘러 그러안고 닦아」 줄 때, 구두의 삶은 별빛처럼 살아나 다시 오래도록 반짝일 수 있을까. 그럴 성싶지는 않기에, 차라리 “부르튼 밑창 대신” 구두를 벗어나 “홀가..

좋은 시 2026.05.25

거룩한 도구/강정숙

거룩한 도구/강정숙​검푸르게 변색된 옛 수저를 닦는다두툼했던 살집은 시나브로 얇아졌다닳아진 그 시간만큼 손잡이도 굽었다​문지르면 지워질까 검정 때 묻은 날들쓸쓸했던 사연은 벼리면 빛이 날까먹먹한 시간을 건너 다시 피는 문양들​신접살림 1호 보물이 퇴물이 되기까지모래 밥 소금 찬饌도 마다 않고 퍼 올렸던나란히 또 어긋난 채, 달그락대는 수저 두벌​-강정숙, 《시조21》 2024·겨울, 목언예원, 2024.

좋은 시 2026.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