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2400

막장/황진숙

막장/황진숙 서늘하고 음습하다. 오랜 세월 수문장 노릇을 해 온 철문이 막장으로 가는 길을 단호히 막아선다. ‘관람객 출입 금지’라 적힌 경고판을 매단 채 쇠사슬로 입구를 봉쇄했다. 발길이 끊긴 폐광이어서인지 막장의 기운은 스산하다. 철근 틈새에 고드름이 얼어붙고 푸른 이끼가 뒤덮여 살풍경하다.톡톡, 철문 너머 어딘가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온다. 옛 시절의 영화를 되살리고 싶은 걸까. 레일 위의 광차는 유폐된 시간에 맞서 녹을 피워올리는 중이다. 방치된 침목은 삭아 내리며 항변을 이어간다. 한때 북적거리는 갱도였다고 보기 무색할 만큼 곰팡내와 묵은내가 뒤섞여 퀴퀴하기만 하다.보일 듯 말 듯 철로 위로 광부의 환영이 스쳐 간다. 발을 들이미는 자, 누구든지 시커멓게 뒤덮어 버리는 게 탄광의 문..

발표작 06:59:56

냇내, 그리움을 품다 / 허정진

냇내, 그리움을 품다 / 허정진 냄새는 그리움이다. 문득 아니면 울컥, 그때 그 어느 날의 흔적과 시간을 찾아 영혼의 빗장을 푸는 알레고리이다. 갓 볶아낸 커피 향기, 담장 너머 청국장 냄새, 새로 갈아입은 옷에서 나는 새 물 내, 그 목도리에서 그 사람의 언어와 체온과 숨결이 느껴지는 체취, 꽃그늘을 지나다 흠칫 돌아보는 향수 내음. 가슴 먹먹한 날, 무심코 잊고 살아왔던 먼 기억들이 툭 치고 갑자기 밀려오는 그리운 냄새들이 있다. 인간은 아주 다양한 냄새를 구별할 수 있다. 커피나 꽃들이 가진 특유의 향기를 맡을 수 있고, 눈을 감고도 그 사람의 땀과 체취만으로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다. 후각수용체 신경은 특정 냄새에 대해 한 가지 세포만 존재하기 때문에 수많은 냄새에 대한 정밀한 뇌 지도를 만들 수..

좋은 수필 2026.10.04

아버지의 그물 / 김은숙

아버지의 그물 / 김은숙 오랜만에 아버지의 억센 팔이 촘촘한 그물을 밤바다에 던져요. 그물이 펴지며 흐르는 소리가 상쾌한 바람을 일으키죠. 밤이 잠깐 환하게 밝아오는 순간이에요. 그러면 은빛 뱃가죽을 뒤집으며 팔딱팔딱 살아있는 바다의 별들이 이드거니 몰려와요.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후리'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외치곤 해요.아버지 얼굴에 피어난 환한 파도는 찌든 걱정과 불안을 몰고 수평선으로 달아납니다. 한동안 바닷속에 별이 뜨지 않아 아버지는 한철 바다를 추슬러 변통해야 했거든요. 바닥은 가난을 담보로 하기 때문이죠.오늘은 남해에 사는 아버지로부터 묵직한 상자가 왔어요. 상자에서는 구수하고 비릿한 냄새가 흘러나와요. 서둘러 열어보니 동그랗게 눈을 뜬 검은 눈들이 올려다보고 있네요.아버지가 미처 지우지..

좋은 수필 2026.10.04

딸각, 연결의 순간 / 김은숙

딸각, 연결의 순간 / 김은숙 오래된 서랍의 깊숙한 심장을 연다. 손때 묻어 바랜 나무 서랍장 안에 묵직한 고요가 수북하다. 한때 찬란했을 원색의 철제 상자는 무심히 시간을 되새김질하고 있다. 대단한 물건이라도 간직한 듯 멋스러운 외형이다. 상자 안에는 언젠가부터 자신의 자리를 이탈해버린 단추가 가득하다. 크기도, 모양도, 색상도 다른 것들이 섞여 서로의 체온을 의지하고 있다.​ 동글동글한 플라스틱 단추가 어린 시절 입었던 멜빵바지를 데려온다. 조용함과는 거리가 먼 쨍한 노란색이라니, 필시 얌전한 옷에 매달릴만한 색은 아니다. 어린이의 발랄한 감성에 어울릴법한 단추는 장난기까지 서렸다. 한때는 세상을 누볐을 시간이 차곡차곡 담긴 단추 하나가 이제는 놓쳐 버린 시간에 대한 허무를 증명한다. 기억은 흐릿하..

좋은 수필 2026.10.02

그리고 싶은 그림 / 최민자

그리고 싶은 그림 / 최민자 빚살무늬토기를 바라볼 때마다 떠오르는 의문 하나가 있다. 누가 이 질박한 흙 그릇에 처음으로 무늬를 넣을 생각을 했을까. 왜 꽃이나 새, 하늘과 구름을 그리지 않고 어슷한 줄무늬를 아로새겼을까? 누군가 날카로운 뼈바늘 같은 그릇 아가리에 첫 획을 긋는 순간을 상상해 본다. 감격하여 가슴이 뛴다. 그는 어쩌면 인류 최초의 추상 화가였을지 모른다. 구석기 시대의 동굴 벽화가 들소 그림 같은 사실화인데 비하여 신석기의 빗살 무늬는 리드미컬한 기하학 문양이다. 그 가는 빗금 하나가 현대미술의 주 흐름인 추상성으로 이어져 왔음을 생각하면, 달에 첫 발자국을 낸 암스트롱만큼이나 위대한 첫 손자국이 아닌가. 미술사학자 보링거(Wilhilm Worringer)에 의하면 인간의 추상 충동은 ..

좋은 수필 2026.09.29

-국제여관/이현호-

-국제여관/이현호-너를 經처럼 읽던 밤이었지낯선 문법에 길 잃고 자주 행간에 발이 빠져시든 줄기 같은 문맥을 잡고, 점자인 양 널 더듬거렸지창틈으로 난입하는 빗소리에 글자들이 번져점점 눅눅해지는 어둠을 헤치며, 너를 읽어 내려갔지페허가 된 驛舍 에서 너의 그림자,검은 장미 숲으로 떠나는 열차를 기다리며산문적이었던 삶의 非文들을 생각했지레코드판같이 돌아가는 밤하늘 아래안개는 가로등 불빛을 한 뼘 비껴 흐르고歷史가 되감겨 와, 가물거리는 한 구절 경을늘어진 테이프처럼 읆조렸지마지막 페이지를 새긴 열차는 끝내 오지 않고,어둠의 깊이만큼 경은 또 한 번 두꺼워지는

좋은 시 2026.09.26

이현호의 시 모음

뻐끔뻐끔/이현호 오래되었던 애인과 헤어지고 돌아가는 길에 부고가 온다오랜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울고 싶은 사람 뺨을 때리시다니요 집에도 들리지 않고 찾은 장례식장에는 슬픔이 먼저 와 있고낯익은 친구 옆에서처음 보는 아버지의 얼굴 앞에서 이렇게 멍석을 깔아주시다니요 우는 듯 웃는 듯 친구는 네가 왜 그렇게 우냐고 하지만나는 나라서 울음이 필요해친구도 아버지도 나도 무언가 놓쳐 버렸다끈 떨어진 사람들 슬픔보다 늦게 일어나 슬픔보다 먼저 술잔을 비우며홍어를 뒤적이다 보니먼바다에서 잡혀 도마 위까지 살아서 도착해야 했을 것들 먼바다와 도마 사이에서애인이었던 사람은 집에 잘 도착했겠지요 낚시바늘에 걸린 물고기를 풀어줄 때화들짝 물속으로 사라지듯이나도 가고 싶은데 이곳은 너무 울기에 좋고 끈 떨어진 사람들 사..

좋은 시 2026.09.26

뜰힘 / 이현호(1983~)

뜰힘 / 이현호(1983~) 새를 날게 하는 건날개의 몸일까 새라는 이름일까구름을 띄우는 게구름이라는 이름의 부력이라면나는 입술이 닳도록네 이름을 하늘에 풀어놓겠지여기서 가장 먼 별의 이름을잠든 너의 귓속에 속삭이겠지나는 너의 비행기 네 꿈속의 양떼구름 입술이 닿기 전에 입맟춤해줄래?너의 입술일까 너라는 이름일까 잠자리채를 메고 밤하늘을 열기구처럼 솟아오르는 나에 대해----------------------------나를 나로 만드는 것은 실체(몸)인가, 이름인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사회적 소통에는 이름(기표·記標)이 끼어든다. 이름은 껍데기 같지만 존재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굴절시킨다. 우리가 모든 이름을 ‘허명(虛名)’이라 내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개’라는 기표는 짖지 않..

좋은 시 2026.09.26

궤적사진/이현호

궤적사진/이현호​나를 치열하게 했던 착란들은 어디로 갔을까창밖 가로등은 제시간에 불을 밝힌다, 여느 때처럼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른 채나는 저주하는 이유를 모르고 여전히 저주한다불행하게 태어나는 건 없다는 당신의 말을너 따위가 알까, 추락한다는 것죽을힘으로 뿌리치면 죽을힘으로 되돌아오는 부메랑 같은 인간을 향한 갈망을사람의,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맹목의 시간 속에뜨내기 같은 마음의 바컷자국을 망망연히 들여다보다가 나는 무서운 게 없어져버렸다필연을 따라서언제든 부고장 물고 이 천공으로 회귀할 철새들너무 오래 삶의 객지에 노출되어 있었다​죽은 별들의 궤적사진에서 참혹한 선의를 본다나의 불행은 누가 꿈꾸던 미래였을까

좋은 시 2026.09.26

혼자 무렵의 태풍/이현호

혼자 무렵의 태풍/이현호 잠잠하다고 태풍이 물러났겠는가더욱 적요하다태풍의 한가운데는, 그 혼자 무렵은때맞춰 이름을 달리해 찾아드는 태풍 같은 너나는 뒤집어 벗어놓은 양말같이 무력하다날아간 지붕과 함께 겉과 속의 경계도 허물어졌다빗방울의 기총소사에 내상 입은 시간들누명 입은 복역수가 흔들어대는 철창처럼 덜컹거리는 유리창신발 안을 굴러다니는 성가신 돌 조각 같은, 별들풍속 너와 나 사이의 큰센바람에 쓸려 다닌다; 그것이 태풍의 일갈 곳 잃은 꿈들이 갈수록 세를 더해 사나워지는 것속엣것들을 죄다 휘젓는 태풍만을 사랑하는 사람; 그것은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하는 일체념의 깊이만큼의 강우량 속에서 추깃물을 흘리는 이 밤의 비정(非情)태풍과 태풍의 눈 다시 고요와 극렬의 징검다리를 오가는 마음불게 하기는 쉬워도 ..

좋은 시 2026.09.26

몸의 기억력 / 이주언

몸의 기억력 / 이주언 햇살이 은사처럼 감겨있는 목련나무의 몸에는이제 막 떠난 꽃잎의 몸이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다첫 만남의 설렘과 하얀 웃음과 뾰로통한 향기가나무의 껍질과 물과 자궁벽에 또렷이 새겨져 있다. 새의 발가락엔 꽉 붙잡았던 나뭇가지의 질감이내 몸에는 아버지에게서 풍겨나던 갯내음배를 쓸어주시던 할머니의 꺼칠한 손바닥네 몸의 문장들이 음각되어 있다 몸이 받아 적은 것들은작은 파문이 일 때마다 절로 살아나천 년 전 주법을 기억하는 박물관의 악기처럼 달빛의 어조로 바람의 문법으로 때론 칼금 무늬로 음각되어목련은 목련나무의 몸속에그들은 내 몸속에 욱신거리며, 있다.

좋은 시 2026.09.17

가족 화소수필의 유형/유한근

가족 화소수필의 유형/유한근유한근발표되고 있는 작가의 많은 수필 중 일상사에서 가족 이야기를 모티프로 한 수필들이 적지 않다. 작가들이 일상적인 삶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일이, 그리고 그 일들이 정서적으로 강한 충격이나 전율을 줄 수 있는 화소이기 때문일 것이다. 수필은 일상적인 경험의 문학이라는 창작문법(?)을 실현하기 일이기도 하다.그러나 가족을 모티프로 한 수필의 문제점은 문학의 궁극적 목표인 인간과 삶의 본체와 본질을 드러내는 데 저해요소인 가족 자랑, 행복자랑 일변도의 일상성 때문에 문학성 결여의 혐의를 의심받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는 작가들은 가족 모티프 수필은 회피한다.그런데 가족을 모티프로 한 수필만큼 독자들에게 큰 감동을 줄 수 있는 글감도 없지 않다.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감동을 줄 ..

평론 2026.09.13

아마릴리스, 아마조네스/송명화

아마릴리스, 아마조네스/송명화 누가 여성을 꽃이라 했던가. 손바닥만 한 꽃이라니. 씩씩한 아름다움이다. 화개장터에서 데려온 주먹만 한 구근 하나에 이렇게 큰 세계가 숨어있을지 몰랐다. 달포 넘게 애를 태우더니 드디어 꽃대 끝에 사방으로 커다란 나팔형 꽃을 세 개나 피웠다. 화피갈래 속을 들여다본다. 화판 아래쪽에서 뻗쳐 나온 삐침무늬가 빨간 치마폭에 대필로 친 댓잎처럼 거침이 없다. 파죽지세다. 그 기운에 압도된 까닭일까. 말실수를 하였다. 단체톡에 올린 사진을 보고 이름을 묻는 친구에게 ‘아마조네스’라고 알려주고 폰을 닫았던 것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무의식에 억압되었던 것이 부지불식간에 드러나 버린 것이라는데 그래도 의외의 연상이다. 아마조네스라니? 한 손에 무기를 들고 용감히 다른 손을 ..

좋은 수필 2026.09.13

모서리의 시간 / 장미숙

모서리의 시간 / 장미숙 익숙했던 공간이 갑자기 낯설고 차갑게 다가온다. 현상과 마음의 부조화가 만들어낸 일시적인 감정인가. 사방 벽이 냉기를 품고 딱딱하게 굳어 있다. 마음이 방향을 잃고 헤매다 가라앉는다. 선명하고 차가운 사각을 인식하지 않으려고 빛을 차단한다. ​ 주위 건물에서 내뿜는 인공 빛이 깊은 어둠을 밝히는 밤이다. 하지만 나는 어둠 속에 스스로를 가둔다. 암막 커튼을 치고 환한 곳을 막자 방은 이내 심연처럼 형체가 없다. 기어이 창틈을 비집고 들어온 가느다란 불빛뿐, 거실로 통하는 방문은 굳게 닫힌 채 어둠을 꽉 물고 있다. 빛은 갇힌 게 아니라 지워졌으니 이미 마음의 경계를 벗어났다. 인위적인 지움은 상실과 통한다. 어둠을 불러들이자 오히려 생각의 회로에 불이 켜진다. ​ 사각으로부터 ..

좋은 수필 2026.09.13

객관적 상관물의 문학적 구조화 원리/여세주

객관적 상관물의 문학적 구조화 원리 여세주 1. 한국 수필의 경향성 《수필미학》 50호에는 사물을 문학적 장치로 활용한 작품이 꽤 많다. 신작 수필 43편 가운데 무려 12편이 그렇다. 사물이란 일과 물건을 아우르는 말이지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사물은 구체적인 물체로 한정한다. 경험 서술 과정에 스며든 단순한 소재로서가 아니라, 문학적 구조를 조직하는 핵심 장치로 활용한 사물만을 가리킨다. 수필 창작에서 사물을 문학적 장치로 활용하는 전략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다. 현대 한국 수필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하나의 경향이다. 수필은 일반적으로 정서를 직접적으로 표출하는 장르이기 때문에, 수필에서 활용하는 사물은 어떤 정서를 간접적으로 우회하여 드러내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사건이나 정서를 견인하고..

평론 2026.09.13

누룽지 대첩/황진숙

누룽지 대첩/황진숙 타다닥, 비로소 뜨거운 열기로 단단해진다. 밥풀이라고 얕잡아 보는 타박도 찬밥이라고 홀대하는 냉대도 납작해진다. 살아온 날의 기억마저 압축된다. 묵은내를 몰아내고 탄내로 무장했으니 더는 두려울 게 없다.밑바닥에 깔리는 수모도 엎치락뒤치락 뒤집히는 굴욕도 별것 아니다. 거친 세파를 헤쳐 나가는 힘은 바닥에서 나온다. 뭉치고 눌리면 이루지 못할 게 없다. 짓눌려 다져진 심지가 더운밥에 밀린 찬밥을 소생시킨다. 구석에 방치되는 위기를 노릇하게 궁굴리며 존재를 항변한다. 한때는 누구나 우러르는 밥이었다. 자르르한 윤기로 고슬고슬한 경지에 올랐다. 허나 식어가는 체온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동면에 드는 것처럼 물기가 걷히자, 찰기가 사라진다. 아무리 데워본들 갓 지은 밥의 모락거리..

발표작 2026.09.11

발들의 시간 / 이복희

발들의 시간 / 이복희 하루의 발들이 엉성하게 앉아 있다. 갈 곳보다 가야 할 곳이 많은 발이다. 어제를 딛고 오늘을 살아가는 발걸음들, 신발은 벗겨지고 새끼발톱이 빠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새 신발로 갈아타도 도착지는 온 것보다 더 멀어진다.​ 마천행 5호선, 오가는 발들이 분주하다. 섰거나 앉거나 눈 맞춤은 금기사항, 마주 보고 앉아도 시선은 휴대폰 속으로 밀어 넣는다. 발부터 먼저 올라타는 무리 속에서 나팔 청바지 여자가 두 남자 사이 좁은 자리를 잽싸게 낚아챈다. 달달 떨고 있는 다리와 쩍 벌린 다리 틈에서 꽈 올린 나팔바지 다리가 중립을 지키느라 안절부절못한다. 발 디딜 곳은 점점 좁아지고, 나팔바지는 까치발로 다시 고쳐 앉는다.​ 수십 년 전 일이 되새김된다. 더는 들어설 곳도 없는데, 만원..

좋은 수필 2026.09.06

화양 바다, 그 안 파랑 같은 사랑의 화답/ 박철영-《화양바다》/김지란

화양 바다, 그 안 파랑 같은 사랑의 화답/ 김지란-박철영 화양 바다, 그 안 파랑 같은 사랑의 화답-김지란 시집 《화양바다》 중심박철영(시인, 문학 평론가)시는 있어 왔던 삶을 통해 구현되어야 할 장르가 맞다. 시가 그만큼 현실 속 진정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 살아온 동안에 겪었던 우여곡절과 시간의 더께가 층층을 이루듯 감당해 온 일들을 말해줘야 한다. 어떤 고단함과 부침이 난감하도록 밀려왔어도 서로를 사랑했기에 어느 것 하나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먼바다를 나간 아버지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어머니는 바닷가 외딴집에서 오매불망한 마음으로 고독처럼 밀려오는 궁핍을 견뎌 낸 것이다. 한 생애를 관통하고 있는 긴 세월이란 그냥 이뤄진 것이 아니다. 때로는 거친 파..

평론 2026.09.05

평화 고물상/유해자

평화 고물상유해자다 낡은 함석 대문이 기우뚱 열려 있는평화 고물상집 식구가 된다는 건바람에 온몸 내맡긴 채 시간을 삭히는 거다가끔은 햇살을 들이받는 객기로쓸만한 구석이 남았음을 내비치지만시대가 지나갔음을 그들도 알고 있다다리 아픈 의자와 바퀴 잃은 자전거가서로에게 기대어 난생 처음 쉬고 있다버려야 얻는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는 듯신 김치만 물리도록 먹어온 냉장고가오늘은 제 가슴을 활짝 열어 제치고싱싱한 햇살과 바람을 차곡차곡 쟁여 넣는다

좋은 시 2026.09.04

하얀, 빈티지 / 문경희

하얀, 빈티지 / 문경희 나는 지금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하긴, 살아오는 내내 이것을 취하고 저것을 버려야 하는 상황에서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 그래 봐야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라는 빤한 확률인 것을 알면서도 매 순간 세상의 끝에 선 듯 갈팡질팡하고 했다. 중차대하거나, 쓰잘머리 없거나, 나를 흔들리게 만드는 것들은 지천에 널려 있었다. 그러나 흔들림으로 서성거린 시간에 비해 결단은 가능한 귀차니즘에 손상을 입지 않는 정도에서 싱겁게 내려지곤 했다. 탕, 탕, 탕. 판사 봉을 내리치듯 마음을 굳히기까지 고심으로 보낸 시간이 아까웠지만, 그 비생산적인 일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삼십 대의 중턱을 넘은 무렵, 한두 오라기씩 반갑잖은 손님이 터를 잡기 시작했다. 민망했다. 심심찮게 눈에 띄는 ..

좋은 수필 2026.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