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2390

몸의 기억력 / 이주언

몸의 기억력 / 이주언 햇살이 은사처럼 감겨있는 목련나무의 몸에는이제 막 떠난 꽃잎의 몸이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다첫 만남의 설렘과 하얀 웃음과 뾰로통한 향기가나무의 껍질과 물과 자궁벽에 또렷이 새겨져 있다. 새의 발가락엔 꽉 붙잡았던 나뭇가지의 질감이내 몸에는 아버지에게서 풍겨나던 갯내음배를 쓸어주시던 할머니의 꺼칠한 손바닥네 몸의 문장들이 음각되어 있다 몸이 받아 적은 것들은작은 파문이 일 때마다 절로 살아나천 년 전 주법을 기억하는 박물관의 악기처럼 달빛의 어조로 바람의 문법으로 때론 칼금 무늬로 음각되어목련은 목련나무의 몸속에그들은 내 몸속에 욱신거리며, 있다.

좋은 시 2026.09.17

가족 화소수필의 유형/유한근

가족 화소수필의 유형/유한근유한근발표되고 있는 작가의 많은 수필 중 일상사에서 가족 이야기를 모티프로 한 수필들이 적지 않다. 작가들이 일상적인 삶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일이, 그리고 그 일들이 정서적으로 강한 충격이나 전율을 줄 수 있는 화소이기 때문일 것이다. 수필은 일상적인 경험의 문학이라는 창작문법(?)을 실현하기 일이기도 하다.그러나 가족을 모티프로 한 수필의 문제점은 문학의 궁극적 목표인 인간과 삶의 본체와 본질을 드러내는 데 저해요소인 가족 자랑, 행복자랑 일변도의 일상성 때문에 문학성 결여의 혐의를 의심받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는 작가들은 가족 모티프 수필은 회피한다.그런데 가족을 모티프로 한 수필만큼 독자들에게 큰 감동을 줄 수 있는 글감도 없지 않다.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감동을 줄 ..

평론 2026.09.13

아마릴리스, 아마조네스/송명화

아마릴리스, 아마조네스/송명화 누가 여성을 꽃이라 했던가. 손바닥만 한 꽃이라니. 씩씩한 아름다움이다. 화개장터에서 데려온 주먹만 한 구근 하나에 이렇게 큰 세계가 숨어있을지 몰랐다. 달포 넘게 애를 태우더니 드디어 꽃대 끝에 사방으로 커다란 나팔형 꽃을 세 개나 피웠다. 화피갈래 속을 들여다본다. 화판 아래쪽에서 뻗쳐 나온 삐침무늬가 빨간 치마폭에 대필로 친 댓잎처럼 거침이 없다. 파죽지세다. 그 기운에 압도된 까닭일까. 말실수를 하였다. 단체톡에 올린 사진을 보고 이름을 묻는 친구에게 ‘아마조네스’라고 알려주고 폰을 닫았던 것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무의식에 억압되었던 것이 부지불식간에 드러나 버린 것이라는데 그래도 의외의 연상이다. 아마조네스라니? 한 손에 무기를 들고 용감히 다른 손을 ..

좋은 수필 2026.09.13

모서리의 시간 / 장미숙

모서리의 시간 / 장미숙 익숙했던 공간이 갑자기 낯설고 차갑게 다가온다. 현상과 마음의 부조화가 만들어낸 일시적인 감정인가. 사방 벽이 냉기를 품고 딱딱하게 굳어 있다. 마음이 방향을 잃고 헤매다 가라앉는다. 선명하고 차가운 사각을 인식하지 않으려고 빛을 차단한다. ​ 주위 건물에서 내뿜는 인공 빛이 깊은 어둠을 밝히는 밤이다. 하지만 나는 어둠 속에 스스로를 가둔다. 암막 커튼을 치고 환한 곳을 막자 방은 이내 심연처럼 형체가 없다. 기어이 창틈을 비집고 들어온 가느다란 불빛뿐, 거실로 통하는 방문은 굳게 닫힌 채 어둠을 꽉 물고 있다. 빛은 갇힌 게 아니라 지워졌으니 이미 마음의 경계를 벗어났다. 인위적인 지움은 상실과 통한다. 어둠을 불러들이자 오히려 생각의 회로에 불이 켜진다. ​ 사각으로부터 ..

좋은 수필 2026.09.13

객관적 상관물의 문학적 구조화 원리/여세주

객관적 상관물의 문학적 구조화 원리 여세주 1. 한국 수필의 경향성 《수필미학》 50호에는 사물을 문학적 장치로 활용한 작품이 꽤 많다. 신작 수필 43편 가운데 무려 12편이 그렇다. 사물이란 일과 물건을 아우르는 말이지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사물은 구체적인 물체로 한정한다. 경험 서술 과정에 스며든 단순한 소재로서가 아니라, 문학적 구조를 조직하는 핵심 장치로 활용한 사물만을 가리킨다. 수필 창작에서 사물을 문학적 장치로 활용하는 전략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다. 현대 한국 수필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하나의 경향이다. 수필은 일반적으로 정서를 직접적으로 표출하는 장르이기 때문에, 수필에서 활용하는 사물은 어떤 정서를 간접적으로 우회하여 드러내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사건이나 정서를 견인하고..

평론 2026.09.13

누룽지 대첩/황진숙

누룽지 대첩/황진숙 타다닥, 비로소 뜨거운 열기로 단단해진다. 밥풀이라고 얕잡아 보는 타박도 찬밥이라고 홀대하는 냉대도 납작해진다. 살아온 날의 기억마저 압축된다. 묵은내를 몰아내고 탄내로 무장했으니 더는 두려울 게 없다.밑바닥에 깔리는 수모도 엎치락뒤치락 뒤집히는 굴욕도 별것 아니다. 거친 세파를 헤쳐 나가는 힘은 바닥에서 나온다. 뭉치고 눌리면 이루지 못할 게 없다. 짓눌려 다져진 심지가 더운밥에 밀린 찬밥을 소생시킨다. 구석에 방치되는 위기를 노릇하게 궁굴리며 존재를 항변한다. 한때는 누구나 우러르는 밥이었다. 자르르한 윤기로 고슬고슬한 경지에 올랐다. 허나 식어가는 체온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동면에 드는 것처럼 물기가 걷히자, 찰기가 사라진다. 아무리 데워본들 갓 지은 밥의 모락거리..

발표작 2026.09.11

발들의 시간 / 이복희

발들의 시간 / 이복희 하루의 발들이 엉성하게 앉아 있다. 갈 곳보다 가야 할 곳이 많은 발이다. 어제를 딛고 오늘을 살아가는 발걸음들, 신발은 벗겨지고 새끼발톱이 빠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새 신발로 갈아타도 도착지는 온 것보다 더 멀어진다.​ 마천행 5호선, 오가는 발들이 분주하다. 섰거나 앉거나 눈 맞춤은 금기사항, 마주 보고 앉아도 시선은 휴대폰 속으로 밀어 넣는다. 발부터 먼저 올라타는 무리 속에서 나팔 청바지 여자가 두 남자 사이 좁은 자리를 잽싸게 낚아챈다. 달달 떨고 있는 다리와 쩍 벌린 다리 틈에서 꽈 올린 나팔바지 다리가 중립을 지키느라 안절부절못한다. 발 디딜 곳은 점점 좁아지고, 나팔바지는 까치발로 다시 고쳐 앉는다.​ 수십 년 전 일이 되새김된다. 더는 들어설 곳도 없는데, 만원..

좋은 수필 2026.09.06

화양 바다, 그 안 파랑 같은 사랑의 화답/ 박철영-《화양바다》/김지란

화양 바다, 그 안 파랑 같은 사랑의 화답/ 김지란-박철영 화양 바다, 그 안 파랑 같은 사랑의 화답-김지란 시집 《화양바다》 중심박철영(시인, 문학 평론가)시는 있어 왔던 삶을 통해 구현되어야 할 장르가 맞다. 시가 그만큼 현실 속 진정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 살아온 동안에 겪었던 우여곡절과 시간의 더께가 층층을 이루듯 감당해 온 일들을 말해줘야 한다. 어떤 고단함과 부침이 난감하도록 밀려왔어도 서로를 사랑했기에 어느 것 하나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먼바다를 나간 아버지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어머니는 바닷가 외딴집에서 오매불망한 마음으로 고독처럼 밀려오는 궁핍을 견뎌 낸 것이다. 한 생애를 관통하고 있는 긴 세월이란 그냥 이뤄진 것이 아니다. 때로는 거친 파..

평론 2026.09.05

평화 고물상/유해자

평화 고물상유해자다 낡은 함석 대문이 기우뚱 열려 있는평화 고물상집 식구가 된다는 건바람에 온몸 내맡긴 채 시간을 삭히는 거다가끔은 햇살을 들이받는 객기로쓸만한 구석이 남았음을 내비치지만시대가 지나갔음을 그들도 알고 있다다리 아픈 의자와 바퀴 잃은 자전거가서로에게 기대어 난생 처음 쉬고 있다버려야 얻는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는 듯신 김치만 물리도록 먹어온 냉장고가오늘은 제 가슴을 활짝 열어 제치고싱싱한 햇살과 바람을 차곡차곡 쟁여 넣는다

좋은 시 2026.09.04

하얀, 빈티지 / 문경희

하얀, 빈티지 / 문경희 나는 지금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하긴, 살아오는 내내 이것을 취하고 저것을 버려야 하는 상황에서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 그래 봐야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라는 빤한 확률인 것을 알면서도 매 순간 세상의 끝에 선 듯 갈팡질팡하고 했다. 중차대하거나, 쓰잘머리 없거나, 나를 흔들리게 만드는 것들은 지천에 널려 있었다. 그러나 흔들림으로 서성거린 시간에 비해 결단은 가능한 귀차니즘에 손상을 입지 않는 정도에서 싱겁게 내려지곤 했다. 탕, 탕, 탕. 판사 봉을 내리치듯 마음을 굳히기까지 고심으로 보낸 시간이 아까웠지만, 그 비생산적인 일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삼십 대의 중턱을 넘은 무렵, 한두 오라기씩 반갑잖은 손님이 터를 잡기 시작했다. 민망했다. 심심찮게 눈에 띄는 ..

좋은 수필 2026.09.01

바다 / 장금식

바다 / 장금식 응봉산 정상에 올랐다. 오른쪽엔 화진포 바다, 왼쪽으로는 화진포 호수 두 개가 서로 엎드려 있다. 산과 바다, 호수가 한데 어우러져 있다. 일몰에 젖은 아랫마을은 넋을 잃게 하고 나그네의 발걸음을 재촉한다. 차도에는 어느새 가로등이 제 몸을 밝힌다. 빛에 안도하지만 배는 고프고 다리는 후들거린다. 육체의 고통은 영혼의 정화라고 했건만 의식은 자꾸 안갯속을 헤맨다. 간신히 정신의 끈을 잡으며 1시간 반 정도 더 걸으니 거진항이다. 18km, 6시간 홀로 걷기에 마침표를 찍는다. 저 멀리 비친 희미한 불빛이 칠흑 같은 바다에 스며들자 해수면엔 윤슬이 반짝인다. 여러 색으로 서 있던 등대 탑은 어둠에 가려 낮의 자취를 감춘다. 가물거리는 불빛은 내 눈에서 멀어지다가 가깝다가, 희미하다가 ..

좋은 수필 2026.08.26

유진의 詩가 있는 풍경-단체사진/이성목

서울매일신문 2026년 6월 5일 금요일자유진의 詩가 있는 풍경 단체사진 이성목나는 왜 늘 뒷줄에만 서 있었을까누렇게 얼룩지고 빛바랜 흑백사진눈부시게 터뜨려 주던 플래시 불빛과좀체 터지지 않던 억지웃음들이그땐 어쩌면 이렇게도 어정쩡한 자세였는지앞선 자들에게 얼굴 가려지고청춘이 반쪽으로 남은 사내얼마나 더 뒤꿈치를 들고 견뎌야만 할까세상의 뒷줄들은사람은 사회적인 존재다. 인정욕구가 계속 가려지고 무시당한다면 상처를 받을 수 있다.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주목받는 것과 행복한 것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시인은 ‘왜 나는 늘 뒷줄에만 서 있었을까’ ‘얼마나 더 뒤꿈치를 들고 견뎌야만 할까’ 라고 말하지만,행복이란 자신의 가치와 관계, 삶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역설로 보여주고있..

좋은 시 2026.08.22

은과 실 / 박은실

은과 실 / 박은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건, 어쩌면 그와 나 사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의미의 실 하나가 생기는 일일지도 모른다. 쑥쑥, 사랑, 무럭, 축복... 그리고 온맘, 만복... 요즘 부모들은 태중胎中의 아기에게도 이름을 지어 불러준다. 이름이란 부모의 바람과 사랑이 담겨 있으니, 태명胎名이라도 그것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아기를 향한 간절한 기도일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이름이 간절한 바람이나 소망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류시화 시인이 엮은 속 인디언 이름들은 자연이나 현상, 혹은 구체적인 사물에서 비롯된 것이 많았다. 바람이 몹시 불었던 날 태어난 아이는 ‘바람의 언덕’이 되었고, 지빠귀가 울면 ‘지빠귀가 노래해’가 되었다. ‘빗속을 걷다’ 같은 서정적인 이름도 있었고, ‘너 잘 만..

좋은 수필 2026.08.12

영광 서림 / 강표성

영광 서림 / 강표성 바람이 골목의 모서리를 스치자 책들이 몸을 뒤척인다. 인도까지 밀려 나온 책더미 사이에 그가 앉아 있다. 전통시장의 헌책방 거리를 지키는 낯익은 터줏대감이다. 오랜만유” 우렁찬 목소리가 골목으로 번진다. 그저 소일하는 태도가 아니다. 한때 번화가에서 큰 서점을 운영했다는 그는 이제 낡은 활자의 숲을 지킨다. 책들의 미로 속에서 그의 과거와 현재가 이어진다. 지하로 내려가자 퀴퀴한 냄새가 훅 밀려온다. 먼지와 묵은 세월이 뒤섞인 공기다. 끝내 사라지지 못하고 제자리를 지키는 것들의 숨결이다. 주인이 뒤따라와 구석구석 전등을 건다. 불빛이 번지자 회색빛으로 가라앉아 있던 책들이 선잠에서 깨어난다. 오래된 목재와 빛바랜 종이 위로 시간의 지문이 켜켜이 스며있다. 한 권을 집어 드는 순간..

좋은 수필 2026.08.10

국밥집에서 / 박승우​

국밥집에서 / 박승우​허름한 국밥집에서국밥 그릇 먹다보면그래도 사는 게 뜨끈하다는 생각이 든다고장난 시계와 삐걱거리는 의자와비스듬히 걸린 액자가 다정하다는 생각이 든다뜨거운 국밥 한 숟갈 목젖을 데워오면시린 사랑의 기억마저 따뜻하다는 생각이 든다외로움도 쓸쓸함도 다 엄살이라는 생각이 든다한자리 모여 앉아 제각각의 모습으로 국밥을 먹는 사 람들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낯이 익었다는 생각이 든다소주 한 잔 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국밥집에서 국밥 한 그릇을 먹으며구겨진 날들이 따뜻하게 펴지고 있다

좋은 시 2026.08.09

외할머니의 숟가락 / 손택수

외할머니의 숟가락 / 손택수 외갓집은 찾아오는 이는 누구나 숟가락부터 우선 쥐여주고 본다 집에 사람이 있을 때도 그렇지만 사람이 없을 때도, 집을 찾아온 이는 누구나 밥부터 먼저 먹이고 봐야 한다는 게 고집 센 외할머니의 신조다 외할머니는 그래서 대문을 잠글 때 아직도 숟가락을 쓰는가 자물쇠 대신 숟가락을 꽂고 마실을 가는가 들은 바는 없지만, 그 지엄하신 신조대로라면 변변찮은 살림살이에도 집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한 그릇의 따순 공기밥이어야 한다 그것도 꾹꾹 눌러 퍼담은 고봉밥이어야 한다빈털터리가 되어 십년 만에 찾은 외갓집 상보처럼 덮여 있는 양철대문 앞에 서니 시장기부터 먼저 몰려온다 나도 먼 길 오시느라 얼마나 출출하겠는가 마실 간 주인 대신 집이 쥐여주는 숟가락을 들고 문을 딴다​ ‘호랑이..

좋은 시 2026.08.09

애플수박을 기르는 이유/강돈묵

애플수박을 기르는 이유/강돈묵 대부분의 사람은 과일을 고를 때 크기를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다. 값은 같은데 큰 것이 잘 익어 맛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 실컷 먹고도 남을 양이면 지친 이웃사촌과 나누어 맛을 볼 수 있는 것이 수박이다. 시골집 돌담을 넘는 소쿠리에는 종종 커다란 수박이 들어 있었다. 장마철이라 습도는 높고 한없이 기온이 오르는 날이면, 체온을 덜어내고자 온 식구가 대청마루에 모여 앉는다. 어머니는 두멍에서 큰 수박 통 하나를 꺼내 오셨다. 미리 텃밭에서 따다가 찬물에 담가 둔 것이다. 칼을 대기가 무섭게 쩍 벌어지며 빨간 속내를 내보이면 저절로 군침이 돌았다. 어머니의 무더위 퇴치법은 수박으로 시작하여 식혜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지금 내 곁에는 어머니도 아니 계시고 커다란 ..

좋은 수필 2026.08.08

등대 / 유하문

등대 / 유하문 지붕 낮은 집들이 송이버섯처럼 엎드려 있는 작은 마을 앞 바다에 방파제가 두 팔 벌려 마을을넘보는 거센 파도 막아 줍니다. 근심 끝에 파수병 하나 하얀 총 들고 서 있습니다​멀리 부레옥잠처럼 떠 있는 형제 섬들 너머로 아침나절 조업나간 배들이 돌아오고, 서녁 하늘 피조개 속살 같은 노을이 만선한 어부들 얼굴에 단풍으로 피어났습니다​이윽고 밤이 되면 보초 선 이등병이 아직 귀환하지 않은 전우들을 위해 반딧불처럼 기별을 보내고육지에선 촛불이 활화산 마그마처럼 흘러 바다까지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마을 초입에 서서 어두워진 바다를 바라보며 소매 끝 눈으로 가져가는 노모와 먼저 간 아내를 위해 우리들의 아버지는 작은 촛불 켜고 착착착 잘도 돌아옵니다​아침에야 걱정 거두고 잠이 든 등대 안쪽 부두엔..

좋은 시 2026.07.23

서리(霜)/이순금

서리(霜)/이순금올봄에 지인으로부터 목화씨를 서너 알 받았다. 솜털에 싸여있는 흑갈색의 팥알 크기다. 두말할 것 없이 옥상의 화분에 고이 심었다. 봄볕에 그중 한 개가 넓적한 떡잎을 내밀더니 무성하게 쑥쑥 자랐다. 여름날 더위 속에서 희고 발그레한 꽃들을 피워내더니 연초록색 열매를 매달기 시작한다. 제법 통통해질 무렵 하나를 따서 입속에 넣고 깨물어 본다. 목화의 소박한 향기를 품은 담백한 즙이 입안에 고인다. 한 개를 더 따려다 손을 멈추고 송이 수를 세어본다.가을의 초입에서 먼저 매달린 송이가 사방으로 입을 쩍쩍 벌리며 하얀 솜털을 부풀리기 시작한다.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보니 아픈 추억 한 자락이 재빨리 달려와 내 손을 잡는다. 그때는 과년한 딸이 있는 집들은 거의 밭에다 목화를 심었고, 가을이면 ..

좋은 수필 2026.07.22

풍경 소리 / 이봉주

풍경 소리 / 이봉주​울음 속에 쇳물처럼 솟구치는 날개가 있다천 번의 담금질에 쇳덩이 속에서 날개가 돋는다팔만 사천 번의 메질, 울음의 두께로 날개를 편다오래도록, 응어리진 울음을 풀어주고 흩어진 울음을 모아 주던 손은 천 개의, 귀 없는 바람이다법당문 꽃살무늬 고요 속으로 속세의 상처들이 돌아와 엎드리는 밤산사 지봉 아래 둥지 튼 새 한 마리한 점 바람에불의 날개로운다

좋은 시 2026.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