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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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를 바꾼 사람들 ②] '인상주의'라는 말은 어떻게 만들어 졌을까?

[미술사를 바꾼 사람들 ②] '인상주의'라는 말은 어떻게 만들어 졌을까? 페이스북(으)로 기사보내기트위터(으)로 기사보내기카카오톡(으)로 기사보내기URL복사(으)로 기사보내기조롱에서 피어난 눈부신 찰나, 인상주의1874년 봄, 파리의 한 사진관 2층. 지금 보면 미술계의 어벤져스급인 화가들이 모였지만, 당시 이들의 처지는 조금 처량했다. 당시 프랑스 미술계의 중심은 국가가 주관하는 전시회인 ‘살롱(Salon)’이었다. 살롱은 보수적이었고, 정교한 묘사와 역사적 교훈이 담긴 그림만을 진정한 예술로 인정했다. 하지만 여기 그 견고한 성벽에 등을 돌린 청년들이 있었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1841-1919), ..

미술평론 2026.10.31

정서우의 욕망의 미술 ③ [ “나는 사과 하나로 파리를 놀라게 하겠다.” - 폴 세잔 ]

정서우의 욕망의 미술 ③ [ “나는 사과 하나로 파리를 놀라게 하겠다.” - 폴 세잔 ] 페이스북(으)로 기사보내기트위터(으)로 기사보내기카카오톡(으)로 기사보내기URL복사(으)로 기사보내기세상을 바꾼 세 개의 사과괴짜 같은 성격을 지녔던 현대미술의 아버지 폴 세잔운명의 화가 피사로를 만난 후 혁신적인 작품을 탄생시켜변화를 알아보는 '눈' “나는 사과 하나로 파리를 놀라게 하겠다.”-세잔이 에밀 졸라에게 보낸 편지 속 내용나도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데 타인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가족과 함께 있을 때의 나, 친구와 시간을 보낼 때의 나, 혼자 있을 때의 나. ‘나’라는 존재는 누구와 함께 있는지, 어떤 장소에 있는지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한다. 이것은 인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사물..

미술평론 2026.10.31

모더니즘으로 향한 유럽 미술의 여정 —《인상주의를 넘어: 디트로이트 미술관 걸작전》 전시 리뷰

모더니즘으로 향한 유럽 미술의 여정 —《인상주의를 넘어: 디트로이트 미술관 걸작전》 전시 리뷰허유나 페이스북(으)로 기사보내기트위터(으)로 기사보내기카카오톡(으)로 기사보내기URL복사(으)로 기사보내기디트로이트 미술관 걸작전 《인상주의를 넘어》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8월 23일까지《인상주의를 넘어: 르누아르 · 드가 · 고흐 · 마티스 · 피카소》 전시 포스터 /출처: 세종문화회관19세기 유럽은 변혁의 시기였다. 유럽의 전원 풍경은 산업혁명을 거치며 공장과 철도가 들어선 근대 도시로 빠르게 바뀌어 갔다. 이러한 변화를 겪으며 신화나 귀족의 모습을 이상적으로 그리던 전통적인 아카데미 회화를 거부하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때마침 등장한 튜브물감은 화가들이 야외로 나가 시간에 따라 변하는 빛과 색채를 직접 담을..

미술평론 2026.10.31

[현대미술가 열전 ⑦] 칸딘스키의 추상 - 영혼의 진동을 그리다

[현대미술가 열전 ⑦] 칸딘스키의 추상 - 영혼의 진동을 그리다 페이스북(으)로 기사보내기트위터(으)로 기사보내기카카오톡(으)로 기사보내기URL복사(으)로 기사보내기감정과 정신을 그린 추상의 시작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는 러시아 출신의 화가이자 판화 제작자, 그리고 예술이론가이다. 그는 추상미술을 감정과 정신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인물로, 외부 세계의 재현보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표현을 중시했다. 이러한 태도는 질서정연한 기하학을 통해 보편적인 조화를 추구한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an, 1872-1944)과는 대비되며, 칸딘스키를 흔히 '뜨거운 추상'의 작가로 부르게 만든다. 그에게 추상은 이성적인 형식의 결과가 아닌 내면에서 솟구치는 감..

미술평론 2026.10.31

[현대미술가 열전 ⑥] 몬드리안, 수평과 수직의 격자에 담긴 우주의 질서

[현대미술가 열전 ⑥] 몬드리안, 수평과 수직의 격자에 담긴 우주의 질서 페이스북(으)로 기사보내기트위터(으)로 기사보내기카카오톡(으)로 기사보내기URL복사(으)로 기사보내기몬드리안, 차가운 추상의 화가피에트 몬드리안(Pieter Mondriaan)의 1899년 당시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피에트 몬드리안(Pieter Cornelis Mondriaan, 1872-1944)은 20세기 추상회화를 대표하는 네덜란드의 신조형주의 화가로, 진한 원색과 수직·수평으로 분할된 기하학적 형태를 특징으로 한다. 그는 창작에 있어 감정의 영역을 절제하고, 구조적 질서와 이성의 조화를 추구했다.몬드리안의 작업은 흔히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미술과 비교된다. 두 작가 모두 예술의 본질을 형태, 색, 구조로 환원하려 ..

미술평론 2026.10.31

[현대미술가 열전 ⑤] 이게 예술이라고? 마르셀 뒤샹, 예술의 정의를 흔들다

[현대미술가 열전 ⑤] 이게 예술이라고? 마르셀 뒤샹, 예술의 정의를 흔들다 레디메이드가 연 현대미술의 새로운 문1927년 마르셀 뒤샹의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은 20세기 예술사의 흐름을 단번에 비틀어 놓은, 늘 시대보다 앞서 사고했던 화가였다. 1917년 그가 전시에 출품한 샘>, 즉 서명만 더해진 하나의 변기는 당대 미술계에 커다란 충격을 남겼다. 작품인가, 모욕인가, 혹은 지적인 장난인가. 누구도 단번에 해석할 수 없었고, 사실 지금도 뒤샹의 사고는 여전히 '난해하다'는 평을 받는다. 그가 ‘회화’ 혹은 ‘조각’이라는 기존의 틀과는 단절된 새로운 곳에서 예술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흥미로운 점은 이 파격적인 시도가 처음에는 거의 받아들여..

미술평론 2026.10.31

[현대미술가 열전 ④] 비극의 기억과 초현실의 탄생 - 르네 마그리트

[현대미술가 열전 ④] 비극의 기억과 초현실의 탄생 - 르네 마그리트 페이스북(으)로 기사보내기트위터(으)로 기사보내기카카오톡(으)로 기사보내기URL복사(으)로 기사보내기초현실을 일상으로 끌어낸 화가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1898-1967)는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로, 현대 시각문화 전반에 깊은 흔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의 독창적인 표현 기법과 조형 언어는 현대미술을 넘어 대중음악, 나아가 예술 전반에 뿌리 깊은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Pink Floyd, 'Wish You Were Here' 앨범 아트 커버, 1975 /출처: Sound Cloud실제로 핑크 플로이드의 앨범 커버에는 마그리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얼굴 없는 신사 이미지가 차용되었다. 그러나 그 화려한 작품 세계..

미술평론 2026.10.31

현대미술가 열전 ①] 도시를 떠나 원시의 삶으로 - 폴 고갱

현대미술가 열전 ①] 도시를 떠나 원시의 삶으로 - 폴 고갱 페이스북(으)로 기사보내기트위터(으)로 기사보내기카카오톡(으)로 기사보내기URL복사(으)로 기사보내기우리가 접하는 현대미술은 그 이름에서부터 거리감을 안긴다. ‘현대’와 ‘미술’이 결합한 이 용어에서 우리는 ‘현대’라는 모호한 단어에 주목하게 된다. 현대는 20세기를 뜻하는가, 19세기를 의미하는가. 아니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인가. 그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 학계에서도 이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현대미술은 시작부터 낯설다. 그러나 그 배경과 흐름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 안에서 분명 즐거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화가의 주체성이 본격화한 19세기 말부터 미적 규범이 무너진 추상표현주의와 개념미술, 그리고 예술의 경계마저 허물어진 오늘날..

미술평론 2026.10.31

[현대미술가 열전 ③]'작은 입방체들'에서 시작된 혁명, 브라크와 입체주의

[현대미술가 열전 ③]'작은 입방체들'에서 시작된 혁명, 브라크와 입체주의 페이스북(으)로 기사보내기트위터(으)로 기사보내기카카오톡(으)로 기사보내기URL복사(으)로 기사보내기조르주 브라크, 1908년 촬영 /출처: 위키피디아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 1882–1963)는 흔히 피카소의 ‘파트너’로 자주 언급된다. 그러나 그는 입체주의의 공동 창시자이자 프랑스 현대미술의 핵심 화가였다. 프랑스 르아브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샤를 브라크는 장식공(peintre-décorateur)이었고, 브라크 역시 장식공 자격증(certificat de peintre-décorateur)을 취득했다. 낮에는 일을 하고, 저녁에는 파리 국립미술학교(École des Beaux-Arts)의 야간반에서 수업..

미술평론 2026.10.31

[현대미술가 열전 ➁] 검은 사각형, 예술의 제로 디그리(zero degree) - 카지미르 말레비치

[현대미술가 열전 ➁] 검은 사각형, 예술의 제로 디그리(zero degree) - 카지미르 말레비치 페이스북(으)로 기사보내기트위터(으)로 기사보내기카카오톡(으)로 기사보내기URL복사(으)로 기사보내기카지미르 말레비치(Kasimir Malevich, 1878-1935)의 사진, 1925년 촬영 / 출처: 위키피디아 카지미르 말레비치(Kasimir Malevich, 1878-1935)는 기하학적 추상미술의 선구자, 순수한 회화 미술인 절대주의 화가로 일컬어진다. 그가 활동했던 20세기 초 러시아는 새로운 미술 양식과 실험이 넘쳐나던 시기였다. 신원시주의(Neoprimitivism)·광선주의(Rayonism)·입체미래주의(Cubo-futurism)·절대주의(Supre-matism)·구성주의(Constru..

미술평론 2026.10.31

[그림에 인문을 입히다 ②] 삶이란 기울어진 식탁 위에 놓인 사과 바구니일까? - 폴 세잔의 '사과 바구니'

[그림에 인문을 입히다 ②] 삶이란 기울어진 식탁 위에 놓인 사과 바구니일까? - 폴 세잔의 '사과 바구니' 페이스북(으)로 기사보내기트위터(으)로 기사보내기카카오톡(으)로 기사보내기URL복사(으)로 기사보내기폴 세잔, 사과바구니(Le panier de pommes), 1893, 캔버스에 유화, 65cm × 80cm /출처: 위키디피아식탁은 기울어 있다. 바구니 속 사과들은 금세라도 쏟아질 듯 몸을 내밀고, 병은 고개를 조금 기운 채 서 있다. 폴 세잔의 에는 이렇다할 사건이 없다. 사과 몇 알과 과자 한 접시, 구겨진 식탁보가 기우뚱한 식탁 위에 놓여 있을 뿐이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 삶의 생김새인지도 모른다. 기울어도 무너지지 않고, 쏟아질 듯하면서도 끝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지 않는 것이 인생 아니..

미술평론 2026.10.31

[그림에 인문을 입히다 ①] 절규의 비명은 소리가 없다 - 뭉크의 〈절규〉

[그림에 인문을 입히다 ①] 절규의 비명은 소리가 없다 - 뭉크의 〈절규〉 페이스북(으)로 기사보내기트위터(으)로 기사보내기카카오톡(으)로 기사보내기URL복사(으)로 기사보내기Edvard Munch,The Scream, 1893, ,Oil, tempera, pastel, and crayon on cardboard, 91× 73.5cm /출처: 위키디피아그림은 본래 침묵의 예술이다. 물감은 소리를 내지 않고 캔버스는 울지도 웃지도 않는다. 그런데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 뭉크는 1893년에 그 침묵의 화면 위에 ‘소리’를 그렸다. 더 정확히는 소리가 지나간 자리다. 거대한 음파가 풍경 전체를 관통한 직후처럼 하늘은 휘어지고, 물결은 소용돌이치고, 사람의 몸은 촛불처럼 일렁인다. 그림은 묻는다. 너는 언제 ..

미술평론 2026.10.31

현대미술가 열전 ⑨] 색과 침묵 사이, 색면회화 - 바넷 뉴먼

현대미술가 열전 ⑨] 색과 침묵 사이, 색면회화 - 바넷 뉴먼 거대한 색면과 수직의 ‘지프(zip)’로 현대 회화의 숭고를 그린 추상표현주의 화가바넷 뉴먼, 영웅적 숭고함(Vir Heroicus Sublimis ), 1950-51 / 출처: 모마 홈페이지추상표현주의 미술은 하나의 흐름처럼 보이지만, 그 내부에는 서로 다른 방향성이 공존한다. 한쪽에는 잭슨 폴록과 윌렘 드 쿠닝처럼 몸의 움직임과 즉흥적 제스처를 전면에 내세운 작가들이 있다. 반면 다른 한쪽에는 색면과 정적인 화면을 통해 전혀 다른 방향을 제시한 화가들이 자리한다. 그 중심에 있는 인물이 바로 바넷 뉴먼과 마크 로스코이다. 이들은 1950년대 색면 회화를 통해 추상표현주의의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 보였다. 그러나 두 작가의 회화는 서로 다..

미술평론 2026.10.31

무명 기저귀 - 최원현

무명 기저귀 - 최원현 딸아이가 출산을 한 달여 앞두고 있다. 아내는 벌써부터 산후조리며 태어날 손주에게 해줄 일들에 정신이 쏠려 있다. 그런 아내를 보며 나도 할아버지가 되는구나 생각을 하니 새삼 세월이 참 빠르구나 느껴진다. 아내가 지금 출산을 앞둔 딸아이를 낳을 무렵 나는 오랫동안 보관 중이던 어머니의 유품을 꺼내놓았었다. 외할머니께서 보관 하셨다 내게 주신 무명베 한 필이었다. 어머니는 다른 동네까지 유명할 만큼 베를 잘 짜셨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가 베틀을 내리는 날쯤 되면 그걸 서로 가져가겠다고 다툴 정도였으며 그렇기에 미리 부탁을 해오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가 베틀에 앉은 기간은 그리 길지 못했단다. 몸져누우신 후 이내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 어머니가 짠 무명베인..

좋은 수필 2026.10.18

모르고 / 김해남

모르고 / 김해남 모르고 그랬다 하면, 좀 봐 주면 좋으련만, 오늘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태세다. 매번 일을 저질러 놓고도 은근 슬쩍 웃음으로 모면하려는 마누라가 어찌 곱기만 하겠는가. 남편이 냅다 소리를 질러 댄다. 아니 대체 정신을 어디에 두고 사는지, 말귀를 알아들어야 말을 하지. 그러고도 화가 덜 풀렸는지 모진 말 한 마디를 덤으로 쥐어박는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게 대체 뭐람?땀범벅을 한 그가 다시 경운기의 시동을 걸었다. 긴 이랑 끝이 까마득히 멀다. 이랑 끝에 선 그가 수신호를 보낸다. 이번에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나는 그의 손끝을 째려보았다. 한 손을 위로 치켜 올린다. 이건 준비하라는 신호, 퉁퉁거리는 경운기 옆에 바짝 붙어 섰다. 위로 치켜 올렸던 손을 힘껏 아래로 내렸다...

좋은 수필 2026.10.17

수미차를 마시며 / 이언주

수미차를 마시며 / 이언주 스님들과 차(茶) 모임이 잦은 지인에게 수미차 대접을 받았다. 새로 들인 차가 있다 하여 가까운 사람들끼리 다회가 열렸다. 차가 몇 순배 돌고 이야기가 무르익을 무렵, 그는 빙그레 웃으며 다관의 찻물이 아닌 숙우에 남겨둔 물을 잔에다 부었다. 그리고는 찻잔과 입안에 남은 다향을 천천히 느껴보라고 하였다. 맹물 한 모금을 입안에서 굴렸다. 달짝지근하게 감도는 물맛, 이것이 바로 수미차(水味茶)라 하였다.차를 우린다. 다포를 걷어 내고 다기를 차린다. 차를 내는 것은 마음을 닦는 일, 심산계곡물은 아니더라도 가까운 약수터에서 길어 온 물을 끓인다. 주전자 속에서 미미한 물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거친 말굽소리로 들썩거린다. 묵은 생각들이 한꺼번에 일어나 먼지를 턴다. 그러다 이내 한여..

좋은 수필 2026.10.17

시침 끝을 잘랐다 / 이난호

시침 끝을 잘랐다 / 이난호 시침 끝을 잘랐다. 다섯 달 전 일인데 시계는 여전히 제구실 한다. 내내 그럴 조짐이다. 지름 30센티의 원형 면판에 열두 개의 숫자뿐인 참 익숙한 몰골로 우리집에 와 다섯 해 명부지하며 가끔 종로에서 뺨맞은 나의 눈흘김도 받았다. 혀 아니면 오른팔, 아니면 자존심이라 할 신체 일부를 훼손당하고도 꿈틀하지 않은 그에게 나는 가책이 없었다. 어느 날 외출에서 돌아오니 그가 있었다. 멋 부리려고 일껏 비워놓은 거실 벽, 하필 거기에 번득임도 없이. 내 허위의식이 띵했다. 요컨대 족보도 간판도 배경도 면판도 출신도 몸값도 하다못해 가벼운 일화 하나 지니지 못한 구체적으로 가난한 채 거기 걸리다니. 청결과 실속 위주인 가장이 동네 마트에서 샀는데 오래 충실할 거라고 보장했다. 나..

좋은 수필 2026.10.17

삭수제비 뜨는 날/이난호

삭수제비 뜨는 날/이난호 삭수제비는 참 볼품없는 음식이었다. 통밀을 맷돌에 갈아 밀기울 채 그대로 수제비를 뜨는 것으로, 그러니까 삭수제비에서 ‘삭’의 사전적 의미는 ‘모두’ ‘남김없이’에 해당되리라. 요즘 소위 건강식으로 한참 고임 받는 통밀국수의 맛이 그것과 비슷하다 할까. 어림없다 할까. 어릴 때 우리 집에서는 가끔 삭수제비를 떴다. 유독 입맛 까다로웠던 할머니가, 상것들의 먹새라 폄하면서도 그 맛을 은근히 즐겼기 때문인데 나는 그 음식이 영 탐탁지 않았다. 그것은 색깔에서 감촉에서 맛에서 어린 내 입맛을 꼬드기지 못했다. 겉보매부터가 꼭 젖은 흙빛 같아 정나미가 떨어지는 데다가 크기와 굵기도 족히 어른의 손가락쯤은 되는 그 뜨거운 수제비 도막을 베어먹기란 이만저만 버거운 게 아니었다. 어렵게 겨우..

좋은 수필 2026.10.17

초록재 / 이난호

초록재 / 이난호 “저 여자!” 동행이 목소리를 낮추어 턱짓한 쪽을 나는 빠른 곁눈질로 챘다. 맑은 저녁 여덟 시, 내 오른쪽에서 삐쳐 3, 40발작쯤 상거한 전신주 옆에 선 여인의 검은 실루엣은 동행의 낮춘 음성 때문인지 벌써 선득했다. “우산을 들고 있지요?” 동행은 앞을 향하고 걸으며 속삭였다. “저 여자, 매일 일곱 시에서부터 열 시까지 꼭 저 자리에 서 있는데요. 꼭 우산을 들고.” 그러고 보니 나도 두어 번 늦은 시각 그 언저리에 선 여인을 본 것 같았다. 역시 비가 없던 날이어서 여인이 들고 있는 게 설마 우산이랴 했던 듯도 싶다. 여인의 나이 채 마흔도 안 됐을 거라는 것,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고 정신에 약간 이상이 왔다는 것, 아파트 동네의 풍문이 대..

좋은 수필 2026.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