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2412

무명 기저귀 - 최원현

무명 기저귀 - 최원현 딸아이가 출산을 한 달여 앞두고 있다. 아내는 벌써부터 산후조리며 태어날 손주에게 해줄 일들에 정신이 쏠려 있다. 그런 아내를 보며 나도 할아버지가 되는구나 생각을 하니 새삼 세월이 참 빠르구나 느껴진다. 아내가 지금 출산을 앞둔 딸아이를 낳을 무렵 나는 오랫동안 보관 중이던 어머니의 유품을 꺼내놓았었다. 외할머니께서 보관 하셨다 내게 주신 무명베 한 필이었다. 어머니는 다른 동네까지 유명할 만큼 베를 잘 짜셨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가 베틀을 내리는 날쯤 되면 그걸 서로 가져가겠다고 다툴 정도였으며 그렇기에 미리 부탁을 해오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가 베틀에 앉은 기간은 그리 길지 못했단다. 몸져누우신 후 이내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 어머니가 짠 무명베인..

좋은 수필 2026.10.18

모르고 / 김해남

모르고 / 김해남 모르고 그랬다 하면, 좀 봐 주면 좋으련만, 오늘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태세다. 매번 일을 저질러 놓고도 은근 슬쩍 웃음으로 모면하려는 마누라가 어찌 곱기만 하겠는가. 남편이 냅다 소리를 질러 댄다. 아니 대체 정신을 어디에 두고 사는지, 말귀를 알아들어야 말을 하지. 그러고도 화가 덜 풀렸는지 모진 말 한 마디를 덤으로 쥐어박는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게 대체 뭐람?땀범벅을 한 그가 다시 경운기의 시동을 걸었다. 긴 이랑 끝이 까마득히 멀다. 이랑 끝에 선 그가 수신호를 보낸다. 이번에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나는 그의 손끝을 째려보았다. 한 손을 위로 치켜 올린다. 이건 준비하라는 신호, 퉁퉁거리는 경운기 옆에 바짝 붙어 섰다. 위로 치켜 올렸던 손을 힘껏 아래로 내렸다...

좋은 수필 2026.10.17

수미차를 마시며 / 이언주

수미차를 마시며 / 이언주 스님들과 차(茶) 모임이 잦은 지인에게 수미차 대접을 받았다. 새로 들인 차가 있다 하여 가까운 사람들끼리 다회가 열렸다. 차가 몇 순배 돌고 이야기가 무르익을 무렵, 그는 빙그레 웃으며 다관의 찻물이 아닌 숙우에 남겨둔 물을 잔에다 부었다. 그리고는 찻잔과 입안에 남은 다향을 천천히 느껴보라고 하였다. 맹물 한 모금을 입안에서 굴렸다. 달짝지근하게 감도는 물맛, 이것이 바로 수미차(水味茶)라 하였다.차를 우린다. 다포를 걷어 내고 다기를 차린다. 차를 내는 것은 마음을 닦는 일, 심산계곡물은 아니더라도 가까운 약수터에서 길어 온 물을 끓인다. 주전자 속에서 미미한 물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거친 말굽소리로 들썩거린다. 묵은 생각들이 한꺼번에 일어나 먼지를 턴다. 그러다 이내 한여..

좋은 수필 2026.10.17

시침 끝을 잘랐다 / 이난호

시침 끝을 잘랐다 / 이난호 시침 끝을 잘랐다. 다섯 달 전 일인데 시계는 여전히 제구실 한다. 내내 그럴 조짐이다. 지름 30센티의 원형 면판에 열두 개의 숫자뿐인 참 익숙한 몰골로 우리집에 와 다섯 해 명부지하며 가끔 종로에서 뺨맞은 나의 눈흘김도 받았다. 혀 아니면 오른팔, 아니면 자존심이라 할 신체 일부를 훼손당하고도 꿈틀하지 않은 그에게 나는 가책이 없었다. 어느 날 외출에서 돌아오니 그가 있었다. 멋 부리려고 일껏 비워놓은 거실 벽, 하필 거기에 번득임도 없이. 내 허위의식이 띵했다. 요컨대 족보도 간판도 배경도 면판도 출신도 몸값도 하다못해 가벼운 일화 하나 지니지 못한 구체적으로 가난한 채 거기 걸리다니. 청결과 실속 위주인 가장이 동네 마트에서 샀는데 오래 충실할 거라고 보장했다. 나..

좋은 수필 2026.10.17

삭수제비 뜨는 날/이난호

삭수제비 뜨는 날/이난호 삭수제비는 참 볼품없는 음식이었다. 통밀을 맷돌에 갈아 밀기울 채 그대로 수제비를 뜨는 것으로, 그러니까 삭수제비에서 ‘삭’의 사전적 의미는 ‘모두’ ‘남김없이’에 해당되리라. 요즘 소위 건강식으로 한참 고임 받는 통밀국수의 맛이 그것과 비슷하다 할까. 어림없다 할까. 어릴 때 우리 집에서는 가끔 삭수제비를 떴다. 유독 입맛 까다로웠던 할머니가, 상것들의 먹새라 폄하면서도 그 맛을 은근히 즐겼기 때문인데 나는 그 음식이 영 탐탁지 않았다. 그것은 색깔에서 감촉에서 맛에서 어린 내 입맛을 꼬드기지 못했다. 겉보매부터가 꼭 젖은 흙빛 같아 정나미가 떨어지는 데다가 크기와 굵기도 족히 어른의 손가락쯤은 되는 그 뜨거운 수제비 도막을 베어먹기란 이만저만 버거운 게 아니었다. 어렵게 겨우..

좋은 수필 2026.10.17

초록재 / 이난호

초록재 / 이난호 “저 여자!” 동행이 목소리를 낮추어 턱짓한 쪽을 나는 빠른 곁눈질로 챘다. 맑은 저녁 여덟 시, 내 오른쪽에서 삐쳐 3, 40발작쯤 상거한 전신주 옆에 선 여인의 검은 실루엣은 동행의 낮춘 음성 때문인지 벌써 선득했다. “우산을 들고 있지요?” 동행은 앞을 향하고 걸으며 속삭였다. “저 여자, 매일 일곱 시에서부터 열 시까지 꼭 저 자리에 서 있는데요. 꼭 우산을 들고.” 그러고 보니 나도 두어 번 늦은 시각 그 언저리에 선 여인을 본 것 같았다. 역시 비가 없던 날이어서 여인이 들고 있는 게 설마 우산이랴 했던 듯도 싶다. 여인의 나이 채 마흔도 안 됐을 거라는 것,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고 정신에 약간 이상이 왔다는 것, 아파트 동네의 풍문이 대..

좋은 수필 2026.10.17

망부전상서 / 김용삼

망부전상서 / 김용삼 “나를 매장하지 마라…….” 또 시작하신다. 몹쓸 병으로 자리보전하신 것도 아닌데, 유언이라며 습관처럼 입에 올리시는 말씀이다. 늘 한쪽 귀로 흘려듣는 내가 못 미더운지, 오늘은 종이에 펜까지 내밀며 받아쓰라신다. 난감하다. “유언장은 본인이 직접 써야 효력이 있는 거래요.” 순간 어머니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친다. 그제야 ‘아차!’ 싶다. 당신께서 한글에 서툰 처지임을 깜빡한 것이다. 어머니는 떠듬떠듬 읽고 쓰기는 하지만 받침 있는 글자는 아직도 극복을 못하신다. 상황을 모면한다는 것이 당신의 아픈 곳을 건드려버린 셈이었다. “너거 아부지 전쟁 나갔을 때도 위문편지 한 통 못썼는데, 내 손으로 유언장을 써라 하노?”버럭 내지르는 말씀에 역정이 묻어난다. 기어이 내 손에서 펜을 ..

좋은 수필 2026.10.15

달빛 전설을 거닐다 / 김정화

달빛 전설을 거닐다 / 김정화 스무 해 전 직접 보았던 미라가 있을까. 안동대 박물관에 들어서면서 마음이 설레었다. 그러나 흙 묻은 출토품이 뒤죽박죽 널려있고 그 옆에 미라가 평온히 잠든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그 대신 얼룩진 옷이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 하얀 주름을 펼친 채 벽에 누워있다.​ 유리 무덤 안 미투리가 눈에 들어왔다. 짚 대신 삼실과 머리카락을 섞어 지은 미투리였다. 뒤꿈치 두 기둥은 삼으로 휘돌아 감았고, 발목과 발가락이 닿는 끈 둘레는 한 겹 한 겹 한지로 감침질했다. 그 짜임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실보다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올올이 엮는 아낙의 정성이 느껴진다. 미투리만 보고 가기에는 아쉬움이 남아 북쪽 월영교로 향한다.​ 비 그친 오후는 새벽 달밤처럼 고즈넉하다. 싱그러운 공기가 코끝을..

좋은 수필 2026.10.15

마중과 배웅

마중과 배웅저문 강변에 뿔피리 소리 울리면사또 행차에 꼬마들 우르르 모여드네외진 곳에 발자국 소리 몹시 반가우니먼지 닦고 버선발로 마중하지 않으랴서창에서 심지 돋우니 오랜 우정 알겠고남악에서 창수하니 귀한 마음 감사하네한가한 정취 글에 담을 뿐이니백제성 편지 흉내 낼 일 있으랴 日夕江天畫角鳴 일석강천화각명村童爭覩使君行 촌동쟁도사군행逃空不啻聞跫喜 도공불시문공희掃榻寧辭倒履迎 소탑영사도리영燭翦西窓看舊意 촉전서창간구의詩傳南嶽謝高情 시전남악사고정閑中記實唯文字 한중기실유문자豈效飛書白帝城 기효비서백제성 - 이소한(李昭漢, 1598~1645), 『현주집(玄洲集)』 「광주 부윤 홍진문이 와서 묵은 일에 대해 편지로 사례하다[簡謝洪廣尹振..

고전 2026.10.15

옻골마을 – 도월화

옻골마을 – 도월화옻골마을에 가보고 싶다. 동네 어귀의 느티나무숲의 사계절을 보고 싶다. 이 가을 인스타그램 사진에서 단풍 지고 낙엽 쌓인 장관을 보았다. 수령 350여 년의 느티나무가 구부정한 모습부터 거의 누운 자세까지 갖가지 형태로 서 있다. 그 아래로 긴 의자와 연못이 보인다. 숲은 벤치에 앉아서 쉬는 사람들 쪽으로 기울어 감싸주려는 듯하다. 초록 잎새 무성한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로 뜨거운 태양을 가려줄 것이다. 느티나무 비보숲은 옻골의 풍수지리적 결함을 보완하여 질병이나 나쁜 기운을 막기 위해 심은 비보림이다. 연못도 가까운 산봉우리의 생구암, 또는 대암이라고 불리는 거북 바위가 물을 찾는 형국이라서 조성됐다.옻골마을은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의 경주최씨 집성촌이다. 마을 안쪽에 종가, 백불암 고..

좋은 수필 2026.10.14

전환적 표현과 비전환적 표현

전환적 표현과 비전환적 표현 ‘전환적轉換的 표현’과 ‘비전환非轉換的 표현’이란 말은 문학 장르의 구분 기준으로 거론되는 용어이다. 조동일 교수가 주장한 이론이다. 그는 문학 장르를 서정, 서사, 극(희곡), 교술 네 종류로 분류했다. 서정, 서사, 극은 전환적 표현(픽션)으로, 교술은 비전환적 표현(논픽션)으로 규정했다. 전환적 표현은 꾸며낸 허구의 세계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체험과 생각을 허구적 장치로 바꾸어(전환) 표현하는 것’이다. 작가의 실제 경험이나 생각을 그대로 노출하지 않고 문학적 장치(허구, 상상력, 인물, 비유 등)를 통해 다른 형태의 세계로 전환해 표현하는 방식이다. 시, 소설, 희곡이 여기에 해당한다. 비전환적 표현(교술)은 있었던 일을 기록한 논픽션의 세계를 의미한다. 즉..

수필 이론 2026.10.11

막장/황진숙

막장/황진숙 서늘하고 음습하다. 오랜 세월 수문장 노릇을 해 온 철문이 막장으로 가는 길을 단호히 막아선다. ‘관람객 출입 금지’라 적힌 경고판을 매단 채 쇠사슬로 입구를 봉쇄했다. 발길이 끊긴 폐광이어서인지 막장의 기운은 스산하다. 철근 틈새에 고드름이 얼어붙고 푸른 이끼가 뒤덮여 살풍경하다.톡톡, 철문 너머 어딘가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온다. 옛 시절의 영화를 되살리고 싶은 걸까. 레일 위의 광차는 유폐된 시간에 맞서 녹을 피워올리는 중이다. 방치된 침목은 삭아 내리며 항변을 이어간다. 한때 북적거리는 갱도였다고 보기 무색할 만큼 곰팡내와 묵은내가 뒤섞여 퀴퀴하기만 하다.보일 듯 말 듯 철로 위로 광부의 환영이 스쳐 간다. 발을 들이미는 자, 누구든지 시커멓게 뒤덮어 버리는 게 탄광의 문..

발표작 2026.10.09

냇내, 그리움을 품다 / 허정진

냇내, 그리움을 품다 / 허정진 냄새는 그리움이다. 문득 아니면 울컥, 그때 그 어느 날의 흔적과 시간을 찾아 영혼의 빗장을 푸는 알레고리이다. 갓 볶아낸 커피 향기, 담장 너머 청국장 냄새, 새로 갈아입은 옷에서 나는 새 물 내, 그 목도리에서 그 사람의 언어와 체온과 숨결이 느껴지는 체취, 꽃그늘을 지나다 흠칫 돌아보는 향수 내음. 가슴 먹먹한 날, 무심코 잊고 살아왔던 먼 기억들이 툭 치고 갑자기 밀려오는 그리운 냄새들이 있다. 인간은 아주 다양한 냄새를 구별할 수 있다. 커피나 꽃들이 가진 특유의 향기를 맡을 수 있고, 눈을 감고도 그 사람의 땀과 체취만으로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다. 후각수용체 신경은 특정 냄새에 대해 한 가지 세포만 존재하기 때문에 수많은 냄새에 대한 정밀한 뇌 지도를 만들 수..

좋은 수필 2026.10.04

아버지의 그물 / 김은숙

아버지의 그물 / 김은숙 오랜만에 아버지의 억센 팔이 촘촘한 그물을 밤바다에 던져요. 그물이 펴지며 흐르는 소리가 상쾌한 바람을 일으키죠. 밤이 잠깐 환하게 밝아오는 순간이에요. 그러면 은빛 뱃가죽을 뒤집으며 팔딱팔딱 살아있는 바다의 별들이 이드거니 몰려와요.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후리'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외치곤 해요.아버지 얼굴에 피어난 환한 파도는 찌든 걱정과 불안을 몰고 수평선으로 달아납니다. 한동안 바닷속에 별이 뜨지 않아 아버지는 한철 바다를 추슬러 변통해야 했거든요. 바닥은 가난을 담보로 하기 때문이죠.오늘은 남해에 사는 아버지로부터 묵직한 상자가 왔어요. 상자에서는 구수하고 비릿한 냄새가 흘러나와요. 서둘러 열어보니 동그랗게 눈을 뜬 검은 눈들이 올려다보고 있네요.아버지가 미처 지우지..

좋은 수필 2026.10.04

딸각, 연결의 순간 / 김은숙

딸각, 연결의 순간 / 김은숙 오래된 서랍의 깊숙한 심장을 연다. 손때 묻어 바랜 나무 서랍장 안에 묵직한 고요가 수북하다. 한때 찬란했을 원색의 철제 상자는 무심히 시간을 되새김질하고 있다. 대단한 물건이라도 간직한 듯 멋스러운 외형이다. 상자 안에는 언젠가부터 자신의 자리를 이탈해버린 단추가 가득하다. 크기도, 모양도, 색상도 다른 것들이 섞여 서로의 체온을 의지하고 있다.​ 동글동글한 플라스틱 단추가 어린 시절 입었던 멜빵바지를 데려온다. 조용함과는 거리가 먼 쨍한 노란색이라니, 필시 얌전한 옷에 매달릴만한 색은 아니다. 어린이의 발랄한 감성에 어울릴법한 단추는 장난기까지 서렸다. 한때는 세상을 누볐을 시간이 차곡차곡 담긴 단추 하나가 이제는 놓쳐 버린 시간에 대한 허무를 증명한다. 기억은 흐릿하..

좋은 수필 2026.10.02

그리고 싶은 그림 / 최민자

그리고 싶은 그림 / 최민자 빚살무늬토기를 바라볼 때마다 떠오르는 의문 하나가 있다. 누가 이 질박한 흙 그릇에 처음으로 무늬를 넣을 생각을 했을까. 왜 꽃이나 새, 하늘과 구름을 그리지 않고 어슷한 줄무늬를 아로새겼을까? 누군가 날카로운 뼈바늘 같은 그릇 아가리에 첫 획을 긋는 순간을 상상해 본다. 감격하여 가슴이 뛴다. 그는 어쩌면 인류 최초의 추상 화가였을지 모른다. 구석기 시대의 동굴 벽화가 들소 그림 같은 사실화인데 비하여 신석기의 빗살 무늬는 리드미컬한 기하학 문양이다. 그 가는 빗금 하나가 현대미술의 주 흐름인 추상성으로 이어져 왔음을 생각하면, 달에 첫 발자국을 낸 암스트롱만큼이나 위대한 첫 손자국이 아닌가. 미술사학자 보링거(Wilhilm Worringer)에 의하면 인간의 추상 충동은 ..

좋은 수필 2026.09.29

-국제여관/이현호-

-국제여관/이현호-너를 經처럼 읽던 밤이었지낯선 문법에 길 잃고 자주 행간에 발이 빠져시든 줄기 같은 문맥을 잡고, 점자인 양 널 더듬거렸지창틈으로 난입하는 빗소리에 글자들이 번져점점 눅눅해지는 어둠을 헤치며, 너를 읽어 내려갔지페허가 된 驛舍 에서 너의 그림자,검은 장미 숲으로 떠나는 열차를 기다리며산문적이었던 삶의 非文들을 생각했지레코드판같이 돌아가는 밤하늘 아래안개는 가로등 불빛을 한 뼘 비껴 흐르고歷史가 되감겨 와, 가물거리는 한 구절 경을늘어진 테이프처럼 읆조렸지마지막 페이지를 새긴 열차는 끝내 오지 않고,어둠의 깊이만큼 경은 또 한 번 두꺼워지는

좋은 시 2026.09.26

이현호의 시 모음

뻐끔뻐끔/이현호 오래되었던 애인과 헤어지고 돌아가는 길에 부고가 온다오랜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울고 싶은 사람 뺨을 때리시다니요 집에도 들리지 않고 찾은 장례식장에는 슬픔이 먼저 와 있고낯익은 친구 옆에서처음 보는 아버지의 얼굴 앞에서 이렇게 멍석을 깔아주시다니요 우는 듯 웃는 듯 친구는 네가 왜 그렇게 우냐고 하지만나는 나라서 울음이 필요해친구도 아버지도 나도 무언가 놓쳐 버렸다끈 떨어진 사람들 슬픔보다 늦게 일어나 슬픔보다 먼저 술잔을 비우며홍어를 뒤적이다 보니먼바다에서 잡혀 도마 위까지 살아서 도착해야 했을 것들 먼바다와 도마 사이에서애인이었던 사람은 집에 잘 도착했겠지요 낚시바늘에 걸린 물고기를 풀어줄 때화들짝 물속으로 사라지듯이나도 가고 싶은데 이곳은 너무 울기에 좋고 끈 떨어진 사람들 사..

좋은 시 2026.09.26

뜰힘 / 이현호(1983~)

뜰힘 / 이현호(1983~) 새를 날게 하는 건날개의 몸일까 새라는 이름일까구름을 띄우는 게구름이라는 이름의 부력이라면나는 입술이 닳도록네 이름을 하늘에 풀어놓겠지여기서 가장 먼 별의 이름을잠든 너의 귓속에 속삭이겠지나는 너의 비행기 네 꿈속의 양떼구름 입술이 닿기 전에 입맟춤해줄래?너의 입술일까 너라는 이름일까 잠자리채를 메고 밤하늘을 열기구처럼 솟아오르는 나에 대해----------------------------나를 나로 만드는 것은 실체(몸)인가, 이름인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사회적 소통에는 이름(기표·記標)이 끼어든다. 이름은 껍데기 같지만 존재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굴절시킨다. 우리가 모든 이름을 ‘허명(虛名)’이라 내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개’라는 기표는 짖지 않..

좋은 시 2026.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