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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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로 번져 온 화양 바다의 순정한 문장들/박철영

사유로 번져 온 화양 바다의 순정한 문장들  -김지란 두번째 시집 『아물지 않은 상처와 한참을 놀았다』 중심                                        박철영(시인, 문학평론가)  시는 감동 기제를 고도화한 문장으로 소통하려는 데 있다. 이것은 언어의 시적 순기능과 확장성 그리고 명징성에 관한 말일 것이다. 따라서 좋은 시가 품은 기운은 눈을 현혹하지 않는다. 시를 구조하고 있는 시어들로 형용한 사유가 자연스럽게 문장의 적층(겹)을 이뤄 감싸준다. 평범한 언어가 갖는 단선적인 의미보다 질료적 정황까지 담지한다는 의미다. 문장 속에서 체험적 정서와 욕망의 투사로 발화한 상상력을 부양하는 의미언은 당연한 것이다. 시가 일반적인 언어로 이행되는 의사 전달체가 아니고 다층적인 상징성을..

평론 03:18:00

개구리소리/김규련

개구리소리/김규련지창에 와 부딪치는 요란한 개구리소리에 끌려 들에 나와 서성거려 본다. 저녁 나절 몹시 불던 바람은 잠이 들고 밤은 이미 이슥하다.모를 내기에는 아직 이르다. 물이 가득 잡힌 빈 논에는 또 하나의 밤하늘이 떠 있다. 지칠 줄 모르는 개구리소리는 연신 하늘과 땅 사이의 고요를 뒤흔들고 있다. 와글거리는 개구리소리에 물이랑이 일 적마다 달과 별은 비에 젖은 가로등처럼 흐려지곤 한다. 첩첩한 산이며 수목(樹木)들은 무거운 침묵에 잠겨 있다. 그들도 이 밤에 개구리소리에 묵묵히 귀를 모으고 있는 것일까.개골 개골 개골 가르르 가르르 걀걀걀걀. 산골의 개구리는 진달래가 피었다가 지고 제비꽃이 논둑에 점점이 깔릴 무렵 갑자기 울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무더운 여름 어느 날 녹음 속에서 매미소리가 울려..

좋은 수필 2024.05.06

청자 사발 / 이언주(은영)

청자 사발   /    이언주(은영)     내 책상 위에는 청자사발 하나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와는 오래된 친구 사이다. 긴 시간을 찻장에서 무심히 얹혀 있던 것이다. 언젠가부터 눈길만 마주치면 이 그릇이 무슨 말인가를 걸어오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내 책상 위로 옮겨 앉았다.  중국 윈난성(雲南城)에 있는 진샤강(金沙江) 상류를 여행할 때 일이다. 관광지로 이름이 알려진 곳이기는 하지만, 워낙 오지여서 하루 종일 기다려야 여행객 한 둘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곳이다. 그때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강가에 남루한 사내가 지나가는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보자기를 펼쳐놓고 그 위에다 쇠뼈에 조각된 불경과 오래된 나시족의 장신구며 생활에 쓰이던 잡다한 도구들을 늘어놓았다. 우리를 본 사내..

좋은 수필 2024.05.06

붉은 벚꽃 / 한경희

붉은 벚꽃 / 한경희  되돌아보면 할머니는 그때 할머니가 아니었다. 쉰을 갓 넘긴 아줌마였다. 열아홉에 엄마를 낳고 엄마가 스물셋에 나를 낳았으니 고작 마흔둘에 할머니가 되었다.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였고 할머니는 처음부터 할머니라고 여겼던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도 맨발로 비 오는 거리를 첨벙거리던 때가 있었고, 좋아하는 동네 오빠를 보면 골목 모퉁이로 숨던 시절이 있었다는 걸 상상하지 못했다. 그날 그 자리가 아니었다면 나는 좀 더 늦게 그것을 깨달았을 것이다.손님이 뜸한 비 오는 날 오후가 되면 할머니의 모자점은 동네 사랑방이 되었다. 할머니는 설탕을 넣고 끓인 막걸리를 양은 주전자에 내오고 고추장떡을 지졌다. 알코올기가 날아간 그 막걸리를 '모주'라고 불렀다. 어른들 틈에 끼어 있었지만 나는 내가 어..

좋은 수필 2024.05.05

무舞 / 정성희

무舞 / 정성희    화창한 봄날이다. 한 무리의 사물놀이패들이 소고와 장고를 두드리며 겨우내 잠든 대지를 깨우고 있다. 여기저기서 꽃불이 터지자, 봄물에 나들이 나온 구경꾼들이 주변으로 모여든다.  둥둥둥 북이 울리자 상쇠는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며 온몸으로 신명을 몰아온다. 바람의 장단에 몸을 떠는 대나무 마냥 주춤거리던 늙수그레한 노인네들의 소맷자락도 들썩이기 시작한다. 작대기 장단에 영춘가를 부르며 흠뻑 흥에 취한 나이 든 춤꾼들은 땟국에 전 그들의 인생만큼이나 후줄근하고 걸걸한 춤으로 무아지경에 이른다.  엎드려 숨죽이고 있던 내 본능도 겨울 문풍지처럼 들썩대며 몸을 보챈다. 그 칭얼대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몸이 시키는 대로 노장들의 원시적인 춤동작을 따라간다. 살아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환..

좋은 수필 2024.05.05

육철낫 / 김기화

육철낫  /   김기화                                                                                          벌초하러 가는 길에 늘 챙기는 것 중 하나가 낫이다. 엄마는 의식 치르듯 며칠 전부터 낫을 갈아 신문지에 곱게 싸놓는다. 그것도 모자라 집을 나설 때는 종이에 감싼 낫을 다시 가방에 조심스레 챙겨 넣는다. 해마다 고집을 세워 동행하던 엄마가 올해는 먼저 안가겠다고, 아니 못 가겠다고 하셨다. 불편한 몸이지만 손수 낫을 잡아야만 편하다던 분이다. 우리는 벌초 후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와 보여드리겠다는 말로 안심을 시켜드린 후 집을 나섰다. 그러나 산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이전과 달리 빨라졌는데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예초기가 ..

좋은 수필 2024.05.05

엇박자노래 / 임미옥

엇박자노래 / 임미옥 따당~땅, 따당~땅, 왼손으로는 건반을 타건하며 오른손은 햄머로 조율 핀을 조여 간다. 혼을 모아 공중에 흩어지는 맥놀이들을 잡아 동음 시킨 뒤, 현들을 표준 음고에 맞춘다. 엇박자로 두들겨 생기는 맥놀이들, 기억저편서 들려오는 아련한 노래 소리들과 겹쳐진다. 들린다…. 그리운 가락들이 들려온다. 아! 오래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부르시던 엇박자 가락들이다.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몸이 아파 어머니가 몹시 그리운 날은 더욱 선명하게 들리던 소리들이다. 영혼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그윽하고 정겨운 가락들,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지던 소리들,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조율하던 손을 멈추었다. 어머니 손바닥처럼 뻣뻣하고 거칠거칠한 현들을 쓰다듬었다.현이 파르르 떤다. 두들겨 맞고 또 맞아서 건들..

좋은 수필 2024.05.05

나이테/최재영

나이테/최재영잘려진 나무를 읽는다분주했던 시절들을 기억하는지선명한 경계사이부풀어 오른 물관이 입술처럼, 붉다남쪽으로 기울어진 동심원은따뜻한 생각만으로도 잎을 틔우는 중이다밤새 별들이 머물다 가는 자리아침이면 신생의 이슬방울들 모여들어온 우주를 가만히 불러 들였으리밤낮없이 당신의 생을 접촉하느라어느 지점 등고선이 급격히 휘어지고거기 어디쯤 둥지를 틀었던새들의 족적도 역력한데,북으로 가는 길이었을까다급한 무늬들의 간격으로 폭설이 휘날린다변방으로 내달리는 서늘한 결의처럼나무들의 행간이 촘촘해지고다시, 뜨거운 한 생을 휘돌아나가는 나이테나무는 죽어서도 생장을 멈추지 않는다숲은 경건한 침묵으로 고요하다▶나이테는 나무의 생장을 알 수 있는 척도다. 잘려진 단면을 보면 나무의 성장과정이 보이고 잘려진 나무에서도 새 ..

좋은 시 2024.05.03

부지깽이/조경숙

부지깽이​​  ​조경숙​​   한때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던 나무였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죽어가는 불씨를 끌어 모아살리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다 막힌 숨통을 트며 조금씩 검게 타들어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마당에 솥을 걸고 돼지를 삶아동네잔치라도 하는 날이면 더욱 바빠졌다 곡식을 널어놓은 멍석을 어슬렁거리는닭들을 내쫓기도 하고마당에 기역 니은을 끼적거리는 연필이 되었다가가끔 길손이 묻는 길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당당하던 나도끝이 까맣게 타들어가 점점 키가 줄고몽당연필처럼 닳아끝내 아궁이속으로 들어가한 줌의 재가 된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그동안 저 캄캄한 무덤으로 숲이 사라졌다토사구팽兎死拘烹기어이 아궁이는 나를 삼킬 것이다

좋은 시 2024.05.03

억새/박은양

억새​​​박은영​​​​흔들릴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억세게 운이 좋은 날은 앞날을 내다볼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나의 흔들림은 비루해서 체머리를 앓는 독거노인의 고독을 닮았다​인생은 혼자인 것이니, 라며 애써 자위를 할수록 모든 날은 으악새 슬피 우는 계절이었다​울음에도 곡조가 있다​그 음계를 따라 새가 둥지를 짓고 울 줄 아는 것들이 알을 깨고 나오는 밤이면 나는 불면에 시달렸다 선대가 그랬듯이 젓가락을 쥔 손은 떨리고 혀끝은 둔해져 발음이 허투루 새어 나갔다​늙어 가고 있구나​마른기침을 하면 어린 새들이 입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허공을 위무하는 날갯짓 아래에서 나는 갈대라는 착각을 하며 여러 해를 살았다 비루한 떨림으로 마디를 세우고 가슴이 벌어지듯 흰 머리카락을 날렸다​나는 억새,억세게 ..

좋은 시 2024.05.03

내 책상 앞의 풍경과 죽비에 대한 헌사/배한봉

내 책상 앞의 풍경과 죽비에 대한 헌사/배한봉    이야기 하나 ; 풍경과 죽비를 위하여  내 책상에 앉으면 두 개의 물건이 보인다. 하나는 풍경(風磬)이고 하나는 죽비(竹篦)다. 풍경은 책상 앞의 베란다와 통하는 거실 문틀에 걸려 있고, 죽비는 책상 옆, 손이 잘 닿는 곳에 있다. 이 풍경과 죽비는 나의 오래된 친구다. 잘들 아시겠지만 풍경과 죽비는 수행자들의 방일이나 나태함을 깨우치는 역할을 한다. 처음 이 풍경과 죽비를 내 곁에 둘 때만 해도 나의 방일과 나태를 경계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새 처음의 그 목적은 잊히고 그저 나를 묵묵히 바라보는 친구가 되어 있다. 친구와 포도주는 오래 될수록 좋다는 말이 있다. 오랜 벗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도 있다. 굳이 말하자면 풍경과 죽비도 그..

좋은 수필 2024.05.03

수선집 근처/전다형

수선집 근처​​​​전다형​​​​​​구서1동 산 18번지무허가 간이 수선집이 있었네의수족 아저씨는 십 수년 째주일만 빼고 수선일을 했네나는 팔 부러진 우산을 들고 찾아갔네허름한 문이 굳게 닫혀 있는단골집 돌아서다 어둠 속우두커니 서 있는 입간판에게 물었네수척한 얼굴로 속사정을 털어놓았네꺾어진 골목으로 어둠 몇 장 굴러다니고영문을 모르는 바람이 틈새를 드나들고 있었네맞은 편 산뜻한 수선집 미싱 요란하게푸른 하늘을 박고 있었네찾아준 은혜 잊지 못할 겁니다헛걸음하게 해 죄송합니다삐뚤한 글씨체가 손잡이 근처 붙어 있었네나는 뜨거운 것을 목에 걸었네발길을 돌려 건널목에 섰네의수족 아저씨가손때 묻은 연장을 메고 걸어가고 있었네누가 맡겼다 찾아가지 않은 낡은 가방에망치, 칼, 가위 쓰다 남은 실, 지퍼, 우산대 몇땅으..

좋은 시 2024.05.03

겨울, 눈사람/신미나

겨울, 눈사람​​​신미나​​​​​몇번인가 그 눈빛을 훔친 적 있었네촛농처럼 흘러내린 얼굴, 코가 없는 얼굴눈이 마주칠 때마다 이내 눈길을 거뒀지만나는 보았네 촛불처럼 흔들리는 눈동자소문은 악취처럼 쉽게 뭉쳤다 흩어지곤 했지만오늘은 벽에 귀를 대고 그녀가 우는 소릴 듣네그 얼굴을 똑바로 보는 일이란허기와 마주 앉아 다 식은 저녁을 말아 먹듯서둘러 묵묵해야 하는 일사방을 좁혀오는 빈방의 어둠속에서반짝 물기를 감추는 그릇을 못 본 체하는 일가늘게 새는 물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네그녀가 문 앞에 내놓은 밥그릇핥고 가는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조금씩만 그녀를 엿보고 가네열린 문틈 사이로 그녀천천히 녹고 있었네방바닥이 온통 물집이었네

좋은 시 2024.05.03

항아리/최재영​

항아리/최재영​​​​​​ ​​​​​처음 나는 겸손한 흙이었다진흙 층층이 쌓인 어둠을 밀어내고누군가와 끈끈하게 얽혀진 숨결불룩한 옆구리를 뽐내며어느 집의 연륜을 저장하는,도대체 우화를 꿈꾸지 않았건만나는 햇살을 움켜쥐고내 안의 목록을 삭여내는 중이다아주 오랫동안해마다 비밀스런 내력을 보태며맛과 맛, 그 아귀를 맞추는 시간들은서로 맥박을 주고받는 것인지도 모른다그럴때마다번쩍이는 세월의 빗금하나 그어지고그리운 것에 대한 열망으로짜고 싱거움에 길들여진 것들손꼽아 여닫히던 햇살들점점 순도 높은 깊은 맛을 우러낸다내게 저장된 세월을프리스틱 통에 담아가는 사람들,그리움을 꾹꾹 눌러 담으며겸손한 덕담 하나씩 건네준다.

좋은 시 2024.05.03

옹기 / 최재영

옹기 / 최재영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아요인품 좋은 종가집 장독대에서반질반질 몇 해를 보냈는지 알 수 없어요미세하게 실금을 틔우고 아무것도 담을 수 없을 때칠흑같은 어둠과 고요만이 남게 되었죠덕분에 나는 아름다운 몇 날을 뒤척여안팎 온 몸이 간지러운 듯 새들을 불러들이곤 해요이제 봄을 기억하는 건 내가 아니라내 안에서 피고 지는, 아직도 나를 관통해가는 세월이죠이제야 알게 되었어요대를 이어가는 건 화려한 혈통만이 아니라는 것을,내 안에서 부풀어 오르던 달빛도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하고제 집처럼 드나들던 바람도 슬슬이 빠진 소리로 흥얼거리는군요나는 앞으로 몇 번의 호시절을 더 노래하게 될까요나의 달빛은 강물처럼 흘러 어디에 가 닿을까요수천의 봄날이 지난 뒤에수줍은 새색시 가슴처럼 혼미한 숨결..

좋은 시 2024.05.03

수필의 체제론과 통치론의 변화―김만년 수필집 《사랑의 거리 1.435미터》를 읽고

[서평]수필의 체제론과 통치론의 변화―김만년 수필집 《사랑의 거리 1.435미터》를 읽고이운경oksan97@hanmail.net  1. 자연에서 길어 올린 서정의 아리아  자연은 수필에서 고갈되지 않는 지하자원이다. 자아를 자연이라는 대상에 의탁하거나 투사하는 전통적 방식은 지금도 유효하다. 자연은 ‘나’를 투사하는 거울이면서 동시에 무수한 ‘자아’를 재발견하는 경전(經典)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자연은 서정의 원천(源泉)이다. 자연이 품고 있는 촉촉한 수액은 수필이라는 텃밭에 끊임없이 서정의 비를 내리게 한다. 김만년의 수필에서도 자연은 욕망의 필터를 거쳐 반복 인화된다. 그의 작품에서 자연은 숭고한 아름다움의 대상으로 발굴되기도 하고(), 고향의 상징과 성장기 기억을 품은 공간으로 호출되기도 한다()..

평론 2024.05.02

거룩한 본능 / 김규련​

거룩한 본능 / 김규련​​동해안 백암(白巖) 온천에서 눈이 쌓인 주령(珠嶺)을 넘어 내륙으로 들어서면, 산수가 빼어난 고원 지대가 펼쳐진다. 여기가 겨우내 눈이 내리는, 하늘 아래 첫 고을인 수비면(首比面)으로, 대구(大邱)에서 오자면 차편으로 근 다섯 시간을 달려야 하는 곳이다.​마을이라고 하지만, 여기저기 산비탈에 농가가 몇 채씩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난한 자연 촌락이다. 이 근방에는 천혜(天惠)의 절경이 많이 있다. 그리고 이 고장 사람들 자신이, 그 절경을 이루는 웅장한 산이며 기암 절벽이며 눈 덮인 수림이며 산새며 바람 소리와 함께, 없어서는 안 될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 있다. 이들의 주된 생업은 채소(菜蔬) 농사와 담배 농사지만, 철 따라 산나물과 약초를 캐고 송이버섯을 따들이기도 한다. 이..

좋은 수필 2024.05.01

봄의 그림자 / 김규련

봄의 그림자 / 김규련  봄은 천지의 기를 뚫고 나오는 것일까.햇볕과 바람, 물과 땅에 온기가 돈다. 누리 가득한 초목의 새싹에서 열여섯 살 소녀의 입술 같은 봄이 얼굴을 뻘쭘히 내민다.산수유 꽃, 생강나무 꽃, 수달래… 온갖 꽃들이 향기를 흩뿌려 남아 있는 냉기를 밀어낸다. 산새며 들짐승이며 사람들, 모든 생령들이 생기를 얻어 저마다의 몸짓에 힘이 넘친다. 마침내 초록 빛깔이 밀물마냥 번져와 온 산야를 물들였다.나는 신록이 향연을 펼칠 때와 갈잎이 귀토의식을 마감할 무렵이면 광기를 참다못해 팔공산에 오른다. 산허리를 감도는 순환도를 따라 파계사 방향으로 걷고 있다.오늘은 일요일. 상춘객과 승용차가 길을 가득 메우고 있다. 웅장한 신록의 바다와 풋풋한 내음, 뛰어난 산세의 위용과 신묘한 산정기, 사람마다..

좋은 수필 2024.05.01

깃들이다 / 김은주

깃들이다 / 김은주아마 이른 봄이었나 보다. 겨울 일을 막 끝내고 풍성하게 주어진 시간을 바느질로 달래고 있는데 베란다 광목 커튼 뒤가 이상하게 수상쩍다. 꾸르륵 꾸르륵, 창자가 밥을 밀어내는 소리 같기도 하고 어찌 들으니 개수대에 물 빠지는 소리 같기도 하다. 자투리 천으로 말 여러 마리 만들고 고무신 한 켤레를 다 깁는 사이에도 정체 모를 소리는 내내 주위를 맴돌았다. 창밖은 위태로운 난간이고 강을 끼고 있어 사나흘이 멀다 하고 바람이 불어대니 그 무엇도 깃들 틈이 없는 곳이다. 소리의 정체가 궁금하긴 했으나 아직 바람이 차니 창을 열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다 변화무쌍한 봄 날씨는 황사 바람이 몰아치고 볕이 났다가 또 사월에 함박눈까지 내렸다. 조석으로 변하는 날씨에 휘둘리다 묘한 소리는 사라..

좋은 수필 2024.04.30

벽 / 허세욱

벽 / 허세욱벽을 보면 왠지 친근했다. 그 텁텁한 살결이 이웃집 아저씨 같고, 고집불통으로 서 있는 모습은 답답한 선머슴을 보는 느낌이다. 우릴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지만 지금도 작은 공을 꺼내 거기다 벽치기 하고 싶다. 우릴 건너가지 못하게 버티고 섰지만 거기엔 누가 누굴 좋아한다고 갈겨놓은 낙서가 심심찮게 보인다. 우릴 더 멀리 볼 수 없도록 막았지만 거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등짝을 기대고 시원하게 두 어깨를 문지르고 싶다.그 구조는 별 게 아니었다. 황토에다 지푸라기를 반죽하면 그만이다. 양회벽이라도 철근이나 각목을 촘촘히 세우고 거기에 덕지덕지 흙을 붙이고 시멘트를 바르고, 다시 환한 벽지에다 풀을 멱칠하여 슬슬 손질하면 말끔해졌다.작은 집에 많은 것은 섬돌 위에 고무신만 아니었다. 작은 초가삼간..

좋은 수필 2024.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