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소소한 이야기 4

공중전화

[사라져가는 것들 117] 공중전화   난감한 일이었다. 전남 순천의 조계산에 깃들어 앉은 선암사를 찾아가는 길, 승선교 조금 못 미친 지점에서 벌어진 사고였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눈앞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라고 할 수밖에. 초여름 햇살을 받은 숲은 황홀하다는 말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햇살을 품에 안은 내에는 물이 아니라 보석이 흐르고 있었다. 돌돌돌 물소리, 쏴아아 바람소리. 나무사이를 비껴들며 숨바꼭질하는 햇빛. 사진 찍는 사람들의 공통적 고질병이라면, 아무리 시간에 쫓겨도 그런 풍경을 절대 그냥 지나지 못한다는 것. 카메라를 꺼내들고 춤추는 빛살무리에 섞여들었다. 결국 신이고 양말이고 벗어던지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문제는 그 순간에 일어났다. 통!!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물속..

소소한 이야기 2024.05.08

사라져 가는 것들/등잔

[사라져가는 것들12] 등잔 꼭 필요한 만큼만 밝혀주던 불빛 심지를 조금 내려야겠다/내가 밝힐 수 있는 만큼의 빛이 있는데/심지만 뽑아올려 등잔불 더 밝히려 하다/그으름만 내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잠깐 더 태우며 빛을 낸들 무엇하랴 /욕심으로 타는 연기에 눈 제대로 뜰 수 없는데/결국은 심지만 못 쓰게 되고 마는데//들기름 콩기를 더 많이 넣지 않아서/방안 하나 겨우 비추고 있는 게 아니다/내 등잔이 이 정도 담으면 /넉넉하기 때문이다/넘치면 나를 태우고/소나무 등잔대 쓰러뜨리고/창호지와 문설주 불사르기 때문이다//욕심부리지 않으면 은은히 밝은/내 마음의 등잔이여/분에 넘치지 않으면 법구경 한권/거뜬히 읽을 수 있는/따뜻한 마음의 빛이여 (도종환의 '등잔' 전문) 아이가 전기라는 존재를 처음 만난..

소소한 이야기 2024.04.06

흑산/김훈

\ - 장대는 아가리 옆에 푸른 수염이 두 개 돋아 있다. 가슴 밑의 지느러미는 부채와 같다. 푸르고 투명하다. 지느러미로 물 밑바닥을 더듬어면서 짐승처럼 걸어 다닌다. 장대는 큰 소리로 운다. 장대의 울음소리는 개구리 울음소리와 같다. 해질 무렵에 울어대는 것도 개구리와 같다. 장대가 우는 연유는 알 수 없다. 조기는 때로 몰려가면서 운다. 조기 때의 울음은 우레처럼 온 바다에 울린다. 물 위에 뜬 어부들은 먼 조기 울음소리에 잠들지 않는다. 어부들은 물속에 대나무 통을 담가놓고 조기 울음소리를 듣는다. 어부들은 소리 나는 쪽으로 배를 저어가서 그물을 내린다. 길목을 아는 어부는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조기를 건져 올린다. 조기는 배 위에서도 옆구리를 벌컥거리면서 운다. 조기가 우는 연유 또한 알 수 없..

소소한 이야기 2023.07.20

조선매화/김화성

조선매화 햐아, 숨이 막혔다. 춘분을 앞두고, 올해도 어김없이 구례화엄사 각황전 옆 수백년 늙은 홍매가 몸을 풀었다. 너무 붉어 검은빛마저 감도는 흑매(黑梅)’. 붉고 깜찍한 홑꽃들이 검은 줄기에 ‘꽃등불’을 조롱조롱 매달고 있었다. 발갛게 우꾼우꾼 달아오른 숯불. 마치 두루미가 외발로 서 있는 듯, 허리를 살짝 비틀고 무심하게 먼 하늘을 돌아보고 있었다. 꽃마다 앙증맞은 다섯 장의 선홍 꽃잎. 영락없이 뿌루퉁하게 입을 내민 철부지 막내딸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홍매의 ‘검은빛’을 잡기 위해 스마트폰을 들고 헤덤볐다. 순천선암사 늙은 매화들도 우르르 꽃을 토해냈다. 사람들은 육백 살이 넘는 무우전 담장곁 홍매와 원통전 뒤편의 백매(이상 천연기념물 제488호) 주위를 쉽게 떠나지 못했다. 뒤틀린 가지..

소소한 이야기 2023.0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