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622

이기영 작가의 디카시 한 편-절규/박계옥

이기영 작가의 디카시 한 편  절규나는 누구일까괜히 문들어진 입 내 안에 도시리고 있는또 다른 모습아, 길 길은 아직도 아득히 먼데 - 박계옥 시인(중국) ****수백 년을 살았을 법한 나무가 불에 타버렸는지, 아니면 고사목이 되어버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앙상한 몸이 되어서야 비로소 마주하게 된 자신의 본 모습에 경악하는 나무의 절규가 귓가에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다. 아직은 푸르게 창창한 앞날이 많을 거라고 그래서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고 한탄과 아쉬움으로 점철된 고뇌는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한 생을 다하고 돌아가는 모습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다. 오랜 세월 비바람 견뎌낸 우람한 자태와 당당한 모습은 수백 년 동안 최선을 다해 살아온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니 아직 갈 길 많이 남아있다고 서럽다고 하지..

좋은 시 2025.01.01

이기영 작가의 디카시 한 편_단풍 단상/정현숙

이기영 작가의 디카시 한 편_206  단풍 단상멀리서 바라볼 땐 곱기만 하더니가까이 가서 보니 흠투성이네하긴, 세상에 좋은 사람은 많아도알고 보면 완벽한 사람은 없더라- 정현숙멀리서 보면 곱고 예쁘기만 한 단풍도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저렇게 흠이 많다는 걸 새삼 깨닫습니다. 이걸 사람살이에 비유하고 보니 더더욱 와 닿네요. 그래요. 세상에 흠 없는 사람 어디 있겠어요. 다만, 그 흠결이 얼마나 적은가 많은가에 달렸겠지요. 조금 떨어져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때는 몰랐던 그 사람의 단점이 어느 선 안으로 들어가서 조금 가까워졌다 싶으면 발견하게 될 때가 있는데 사람에 대한 실망은 좀 오래 가더라구요. 얼마 전 믿고 있던 사람이 나 몰래 뒤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인 일이 있어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는데 ..

좋은 시 2025.01.01

이기영 작가의 디카시 한 편_따듯한 국화/박해경

이기영 작가의 디카시 한 편_212  따뜻한 국화가을이 다가오자시들했던 국화들이살아나고 있다쌀쌀해진 골목길이데워지고 있다- 박해경(2024 제2회 창원 세계디카시페스티벌 작품집 수록작)*****날이 추울수록 국화의 빛깔은 더욱 선명해진다. 아무리 추워도 그 색을 잃지 않아서 옛 선비들의 작품에 절개의 상징으로 자주 등장하고 있지만 이제는 국화빵으로 탄생해서 서민들의 간식거리로 사랑을 받아 왔다. 이 국화문양으로 만든 풀빵은 밀가루 반죽을 풀처럼 만들어서 굽는 것인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도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빵틀에서 국화꽃처럼 피어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군침이 삼켜지고 온 몸이 따뜻해져 오면서 그 고소한 냄새가 온 골목길을 돌아 집집마다 배어드는 것만 같다. 퇴근 길 어깨마저 ..

좋은 시 2025.01.01

이기영 작가의 디카시 한 편-정리가 필요한 순간/김선애

이기영 작가의 디카시 한 편_245  정리가 필요한 순간/김선애쓸모없는 것들과잡동사니로 차고 넘치는 서랍아직도버릴 걸 버리지 못한내 욕심 주머니가 보인다- 김선애****2024년 마지막 날,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저 서랍 하나가 많은 생각들을 하게 한다. 개인적인 일에서부터 가족과 친척들 그리고 사회적인 이슈들까지 다사다난했다는 말이 얼마나 적절한지 실감이 된다. 저 서랍 속 정리되지 않고 뒤섞여 있는 물건들처럼 뒤엉켜있는 나의 한 해도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 결심해야 하는 것들로 수북하다. 새날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버릴 건 버리고 비울 건 비워야겠다. 잡동사니로 가득한 공간에 새로운 무엇인가를 집어넣을 수는 없으므로 앞으로 한 발 더 나아가기 위해서 내 욕심 주머니를 과감하게 버려야겠다. 나이가 들면서 ..

좋은 시 2025.01.01

이기영 작가의 디카시 한 편 - 어떤 조문

이기영 작가의 디카시 한 편 - 어떤 조문  어떤 조문/권현숙쪼들린 살림 환히 필 거라더니꿀맛 같은 날 올 거라더니죽을 둥 살 둥 일만 하더니 눈치도 없이 환한 봄날 수필가(2023년 한국디카시연구소 디카시신인문학상 수상작) ******************************************************봄, 모든 것이 사라진 것만 같던 대지에 생명이 있음을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계절이다. 죽음은 생각할 수 없고 모든 것이 다 환하고 즐겁고 활기차서 어둡고 우울한 것들은 아예 없어야 하는데,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봄날에 맞이한 어느 죽음은 그래서 더 안타깝고 쓸쓸하다. 일만하다 뜻하지 않게 맞닥뜨린 죽음이, 원 없이 피어난 꽃을 배경으로 조문 온 조화처럼 병풍으로 둘러친 저 눈치 없이 환..

좋은 시 2025.01.01

헌옷/김왕노

헌 옷 /김왕노 잠든 아버지 내가 벗어 던진 헌 옷 같다.다려도 주름이 사라지지 않는 아버지스타일도 뭐도 없이덧대 바느질을 할 수 없을 정도로실밥 터지고 낡아 남루한 아버지어머니도 손질하다가그냥 쓰레기통에 버릴 아버지일터에서 지쳐 돌아와쉰내 나는 곤한 잠이 들었다.뱀 허물처럼 늘어져 잠이 들었다. 피곤한 세상을 두고겨우 잠으로 도망가신 아버지 흑 하고 치받는 내 울음이 들킬까 봐아버지에게서 멀어지자아버지는 한 번 더 버려지는 헌 옷이다.   ​경상도 가랑잎/김왕노 보훈병원 병상에 가랑잎이 된 자형이 바스락거리고 있었다.고엽제 환자인 자형의 말라서 드러난 핏줄은가랑잎에 도드라진 잎맥이었다.월남전 참전에서 한 잎 가랑잎으로 굴러서 끝내 병상까지 온경상도 가랑잎 한 장병문안 간 내게 기어코 일어나 그간 팽개친..

좋은 시 2025.01.01

젊은 날을 소환하다_ 조태숙

젊은 날을 소환하다_ 조태숙  하늘에 덧대어 구름을 깁듯삶의 곡선을 거슬러 올라​한 올 한 올흐릿한 기억을 수선하고 있다 _ 조태숙  여인은 누구를 위해, 무엇을 꿰매고 있는 걸까. 고요한 배경의 하늘과 대조를 이루며 앉아 있는 그의 실루엣은 바람에 흔들리는 듯하지만 여전히 단단하다. 세상의 상처와 갈라진 틈을 마주하며, 그것을 아물게 하기 위해 실을 꿰고 있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치유의 과정을 보여주는 듯하다.​감상: 설강

좋은 시 2025.01.01

봉인해제/이은솔

24. 11.15(금)_ 제민일보_소하의 디카시 산책_에는 김영빈 시인의 디카시 '봉인해제'가 초대되었습니다.​​_본문​비움으로 비로소 해탈에 이른 조개를 본다. 아니 회중시계를 본다. 그는 이제 시간이 멈춘, 더는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시간이라는 경계 너머에 앉아 깊은 삼매에 든 수도자처럼 고요하다. '스마트폰 사진의 달인'으로 인정받고 있는 김영빈 시인의 작품이다. 역시나 영상언어가 주는 울림이 크다.​썰물 지는 갯벌 위로 윤슬이 부드럽게 내려앉고 있는 사진 속은 한 점의 바람도 없이 한 점의 구름도 없이 그저 고요하기만 할 거 같은 풍경이다. 그 풍경에 '봉인해제'라는 제목이 붙었다. ‘거짓말처럼’ 평화가 깃드는 순간이다. ​빈속을 훤히 드러내고 앉은 저 회중시계 속에는 어떤 시간이 봉인되어 있었..

좋은 시 2025.01.01

11월/배한봉

유진의 詩가 있는 풍경 11월배한봉늑골 뼈와 뼈 사이에서 나뭇잎 지는 소리 들린다햇빛이 유리창을 잘라 거실 바닥에 내려놓는 정오파닥거리는 심장 아래서누군가 휘파람 불며 낙엽을 밟고 간다늑골 뼈로 이루어진 가로수 사이 길그 사람 뒷모습이 침묵 속에서 태어난 둥근 통증 같다누군가 주먹을 내지른 듯아픈 명치에서 파랗게 하늘이 흔들린다♦ ㅡㅡㅡㅡㅡ 나뭇잎지고 억새꽃도 말라 버썩거리는 가을 끝자락, 해도 많이 짧아졌다. 잎 다 내려놓은 나무들은 홀가분하기만 할까. 낙엽 밟는 소리도, 아련한 추억도, 정오의 햇살 속에 잠시 머물다가고, 뼈처럼 늘어선 가로수 사이로 스산한 바람이 종횡무진, 낙엽을 굴리며 휘파람을 분다.떠날 것들 다 보내고 난 뒤 허전하고 쓸쓸한 가을 끝자락이 ‘침묵 속에서 태어난 둥근 통증 같다’ ..

좋은 시 2024.12.06

골목길 / 최재영

골목길 / 최재영연두빛 내력들이 제 몫의 봄을 키우느라햇살을 끌어 모으는 중이다허공 한구석 팽팽해지고골목에 나앉은 늙은 여자들볼우물 가득 생의 이력을 오물거리는지골목은 하루종일 분주하다봄의 한 복판에서 출렁이는저 환한 푸념들가지마다 탱탱하게 들어차는 수런거림한 순간 시간이 정지된 듯지상과 허공 그 짧은 간극으로물오른 생의 주름들이 펼쳐지고음탕한 농담 한 두 마디 건넬 때마다자지러지게 흩어지는 쭈글쭈글한 웃음소리잠시 생을 붉게 물들이는봄날 눈(眼)빛 환한 기억들이골목을 가득 메우고 있다담장에 기대앉은 봄꽃들한동안 그들이 피워올린 검버섯을 따라 올라가고여기 짧은 환희, 봄은 덫이었나.

좋은 시 2024.11.28

가랑잎자서전/민진혜

가랑잎 자서전​                                                           민진혜​등 굽은 지팡이에 몸을 싣는 저물녘나른한 공원 벤치 낮달 함께 앉은 그대숨소리 바스락바스락, 뼈가 닳은 노인이다​해를 쫓던 녹음이며 뜨건 비도 쪼개 담아한껏 부푼 정복의 꿈 흙에 도로 뱉어낸다바람이 읽는 판결문 무릎 꿇고 들으며​꿈에 기댄 지난날도 돌아보면 아지랑이보풀 같은 겹을 누벼 나이테에 새겨둔 채뒤틀린 뿌리에 안겨 별의 안부 건넨다​제1회  시조 부문 대상                          물풀                                                   백점례불볕 터진 들녘 너머 풀떨기 못물 아래따라지들 몰려들어 스크럼을 짜고 있다..

좋은 시 2024.11.01

참기름 / 素人

참기름 / 素人  그저 나태함으로 따사로운 가을 볕 몸 감는 건 아니야 날선 검에 허리 잘리고도 꼿꼿한 정신 곧추세운 채 두름으로 묶인 목숨 찌는 한숨 忍苦하는 열정으로 젖은 육신 서서히 말리는 거다  빈들에 모여 선 우리들 모습에 까마귀도 울고 가지만 이대로 저물진 않아 너희들 모진 작대기에 멍들고 터져 나간 몸뚱아리 살과 뼈 문드러져도 더 세게 내리쳐라 세게 내리쳐라 훌훌 가짜들 쫓겨 껍데기는 가고 알맹이만 남았는데  너희들 거대한 조직고문실 같은 섬뜩한 열기 훅훅 볶아치고 전기구이 통닭 빙글빙글 뺑뺑이 돌려 우리들 일그러진 표정이어도 끝내 하나로 뭉쳤다 더러는 검게 그을린 육신 하나 둘 해체되고 타 버렸어도 밀려오는 거대한 무게 더 세게 내리눌러라 세게 내리눌러라  마지막 한 방울로 정제되는 우리들..

좋은 시 2024.10.16

숲의 정거장 / 곽효환

숲의 정거장 / 곽효환 사람들 드문드문 들고 나는호젓한 시골 마을 간이역 철길을 이어백두대간 숲속 깊은 곳에/ 작은 역 하나 더 지어야겠다간이역과 간이역을 잇는 기차하루에 한 번 혹은 두 번 오고 가게 해야겠다비자나무 가죽나무 굴참나무 측백나무 팔 벌리고작은 짐승들 새들 벌레들 분주함 가득한 / 숲의 정거장엔철커덕 철커덕 쉼 없이 달려왔을 기차도같이 온 바람도 잠시 숨 고르리라플랫폼에 이어진 호젓한 오솔길 따라나란히 흐르는 계곡물에 발 담갔다가단청 고운 절집 탱화 아래 앉아잠시 먼 산에 한눈팔아도 좋겠다세상의 시간과 일상이 한동안 멈춰몸부리고 쉬었다 느릿느릿 흘러가는/ 작은 역 하나 숲의 양식대로 지어야겠다빛바랜 회색 기와집 아래 의상실과 세탁소슬레이트 지붕집엔 전파사와 분식집붉은 벽돌집에 포목점과 연쇄..

좋은 시 2024.09.27

의자/박철

어느 강연 자리에서 질문을 받았다. 시가 뭐라고 생각하나요? 말간 얼굴로 무자비한 질문을 하는 독자가 있다. 꼭 있다. 뒷걸음질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호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꺼내듯 말을 찾았다. 변변찮은 대답을 동전 몇 푼처럼 꺼내놓은 순간을 지나고 생각하노니, 그때 이 시를 알았더라면! 나는 무구한 얼굴로 커다란 질문을 한 독자에게 답변 대신 이 시를 낭독해줬을 게다.이 아름다운 시는 1연에서 이미 끝났다. 높고도 깊은 ‘참말’이 순하게 놓여 있다. 시의 시원이 궁금한 자의 목마름을 해갈하는 순간이다. 갈참나무 의자 허리에 누군가 “연선아 좋아해” 하고 새기는 일과 시인이 원고지에 시를 써내려가는 일의 본질이 같다는 것! 그러니까 마음 깊이 치밀어 올라 꺼내놓은 말이 날아가지 못하도록 새겨두는..

좋은 시 2024.09.27

길/조용미

누군들 없을까. 인생의 한 페이지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사람. 칸칸의 마디를 넘겨도 페이지 속에 묻히지 않는, 인생이라는 책을 펼칠 때마다 자동으로 펼쳐지는 사람. 충분히 용서했어도 되살아나는 사람. 누군들 그 사람 때문에 힘든 적이 없을까.무자비하게 찾아오는 그 아찔함은 생의 허기를 더 도드라지게 한다. 나에게도 그런 사람 하나 있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고 흘려보냈던 것을 애써 들춰내어 스산함을 자처한다. 왜 인간은 ‘돌아보는 맛’을 놓지 못하는가.조용미 시인은 인생의 여정에서 그 한 사람을 떠올린다. 아무리 용서를 서로 수박 나누듯 나눠 가졌다 해도 그것은 해결 나지 않는 일임을, 그것은 이 세계에서 덮이지 않는 사건임을 사무치게 선언한다. 증오하면서도 그리워하는 인연이라니. 이 어찌할 수 없는 ..

좋은 시 2024.09.27

손을 사랑하는 일/피재현

손을 보는데 마음이 미어지는 사람, 있다. 다른 것도 아닌데 손만으로 그 사람의 많은 걸 들여다보고 있는 기분. 어쩌면 손에 보이는 것은 얼굴 표정일 수도 있으며 사연일 수도 있으며 마음일 수도 있는 것. 손은 당신하고 조화롭게 잘 지내고 있을 터인데 숨이 턱 하고 막혀오는 것은 당신에 대한 그만큼의 애정 때문이런가. 그때 덥석 손을 잡아주고 싶다는 충동만으로 찌르르 전기가 오르는 것 같은 것은 주책일런가.시인은 자신의 갈라진 손을 돌보다가 손이 했던 일들을 들춰내는데 참 절묘한 것은, 그의 손 역사와 내 손의 역사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손인데 뭐 어때서 그리 잡질 못했나. 손만 잡으면 좀 괜찮아질 텐데 우린 뭐 하느라 손을 내려놓고만 있었나.오랜만에 선배를 만나 아주 안 좋은 이야기를 듣고는 늦은..

좋은 시 2024.09.27

면벽/박용래

여름의 촉감, 여름의 냄새, 여름의 소리, 여름의 색깔이 짧은 시 한편에 고루 담겨 있다. 때는 여름의 한복판, “바람 한 점 없는 밤”이다. 고양이는 덜 더운 누다락으로 피신하고, 화자는 모기향 앞에서 벽을 마주하고 수련 중이다. 눈 감고 5분이란 오묘한 시간이 흐르고, 화자는 다른 시공간으로 건너간다. 감은 눈 속에서 펼쳐진 세계는 가을, 한밤이다. 누가 죽었을까. 꽃상여가 벼이삭을 스치며 내는 소리, 망자를 보내는 산 자들의 곡소리가 들린다. “어허 어하……” 다시 눈 뜨면 코끝엔 모기향 냄새, 여름은 가을밤처럼 돌연 깊어져 있으리라.눈 감으면 떠오른다. 어릴 적 모기향에서 연기가 올라갈 때 나던 냄새, 선풍기는 더운 바람을 만들어내고 나를 향해 부채질을 해주던 할머니의 손이 느려지다 멈추면 여름이..

좋은 시 2024.09.27

불면/최지은

나는 쉽게 잠드는 편이다. 복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크고 작은 걱정이나 불안이 있을 때는 다르다. 작은 망치로 하룻밤을 조각내듯, 여러번 깨고 잠들기를 반복한다. 그럴 땐 하룻밤이 아니라 여드레 밤을 겪은 느낌이다. 몸은 자고 싶은데, 마음이 자꾸 헤매는 기분이 들 때 이 시를 만났다.시인은 단 두 줄로 아름다운 불면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군더더기 없이 환하다. 머릿속에서 누가 작은 횃불을 들고 서성이는 것 같다. 발은 차갑고 머리는 뜨거워 몸의 순환 회로가 고장 난 것 같을 때, 잠이 자꾸만 달아날 때 눈 감으면 보인다.“오래 가꾸지 않은 정원을/ 홀로 거니는 아이”의 혼곤한 서성임! 가꾸지 않은 정원은 어떨 것인가? 사람의 손길이 오래 닿지 않은 정원은 자연보다 황량해진다. 꽃이었던 꽃, 나무였던 ..

좋은 시 2024.09.27

장마/김사인

비 오신다. 긴 긴 장마다. 어릴 땐 장마가 싫었다. 더운 것만으로도 고단한데 축축해지기까지 해야 하다니 심통이 났다. 언제부터일까? 갇히는 것 중 제일은 빗속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됐다. 장마 지면 비를 피한다는 핑계로 어느 산장 같은 곳에 숨어, 한 사나흘 틀어박혀 있고 싶다. 벽난로 앞에 젖은 양말을 널어두고, 질릴 때까지 빗소리를 듣다 졸고 싶다. 꿈같은 일일까?눅눅한 빨래를 개다 ‘장마’의 첫 구절을 돌림노래 외듯 흥얼거린다. “공작산 수타사로 물미나리나 보러 갈까” “구죽죽 비는 오시는 날”……. 듣는 이가 없어도 괜찮다. 그저 내리는 비에 대고 흥얼거릴 뿐이다. 그런데 공작산 수타사는 어디쯤에 있는 절일까? 그곳의 물미나리·패랭이꽃은 얼마나 싱싱할까? 시 속 화자를 따라 수타사 요사채 아랫목..

좋은 시 2024.09.27

어디 사는지 모른다/황인숙

골목이 사라지자 구멍가게가 없어졌다.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편의점이 생겼다. ‘시다’가 하던 일을 ‘알바’가, 덤 대신에 ‘1+1’이, 외상은 신용카드가 몰아냈다.그 많던 단골집은 다 어디로 갔을까. 식당·빵집·과일가게·정육점·전파사·양장점·문방구…. 간판이 떠오르지 않는가. 락희슈퍼·서울사진관 같은 가게 이름도 불러보자.주인장 얼굴과 가게 안팎이 눈에 선할 것이다. 모든 단골집에는 적어도 두가지 공통점이 있으니, 오래된 주인과 오래된 자리(장소)다. 그래야 단골이 생긴다.황인숙의 시에서 단골은 단골이 아니다. 알바는 점주(店主)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에서 단골은 소비자다. 오직 구매력으로만 인정되는 소비자. 우리는 언제나 소비자이고 가끔 생산자다.알바는 또 누구인가. 간혹 명찰을 달고 있지만 그..

좋은 시 2024.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