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622

몸살/김선우

몸살             - 김선우  나는 너의 그늘을 베고 잠들었던 모양이다.깨보니 너는 저만큼 가고.나는 지는 햇살 속에 벌거숭이로 눈을 뜬다.몸에게 죽음을 연습시키는 이런 시간이 좋아.아름다운 짐승들은 떠날 때 스스로 곡기를 끊지.너의 그림자를 베고 잠들었다 깨기를 반복하는지구의 시간.해 지자 비가 내린다바라는 것이 없어 더없이 가벼운 비.잠시 겹쳐진 우리는잠시의 기억만으로 퍽 괜찮다.별의 운명은 흐르는 것인데흐르던 것 중에 별 아닌 것들이 더러 별이 되기도 하는이런 시간이 좋아.운명을 사랑하여 여기까지 온 별들과별 아닌 것들이 함께 젖는다.있잖니, 몸이 사라지려 하니내가 너를 오래도록 껴안고 있었다는 걸알게 된 날이야.알게 될 날이야.축복해.  시집 『녹턴』(문학과지성사, 2016) * 김선우(..

좋은 시 2024.09.25

명왕성 유일 전파사/김향숙 시 모음

명왕성 유일 전파사  흑백 텔레비전에는 명왕성(冥王星)이 들어 있다어쩌면 모든 가전(家電)에도 있는지 모른다 목숨 다하면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제 몫을 못 하는 것이 명을 다한 거라고, 별명이 백과사전인 그 사내 모르는 게 없다 빛나는 지구도 저 없으면 돌지 않는다고 사십 년 기름때 묻은 공구함을 가리킨다 바닥에 엎드려 기술을 익히던 무릎, 생의 페이지가 너덜너덜해지도록 달달 외우던 공구들의 이름마다 알파벳이 벗겨져 반들반들하지만 마치 자기 뼈처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 닷새마다 망가진 것들이 몰려드는 난전(亂廛), 지문이 닳도록 눌러 헐거워진 버튼, 눌러도 빠져나오지 않는 중고 카세트테이프를 어깨너머의 기술로 척척 고쳐낸다 스프링을 갈아 끼우자 사라진 가수를 불러내는 카세트 녹음기, 구성진 노래가 전..

좋은 시 2024.09.22

권상진 시

접는다는 것 / 권상진 읽던 책을 쉬어 갈 때페이지를 반듯하게 접는 버릇이 있다접혀진 자국이 경계같이 선명하다 한때 우리 사이를 접으려 한 적이 있다사선처럼 짧게 만났다가 이내 멀어질 때국경을 정하듯 감정의 계면에서 선을 그었다골이 생긴다는 건 또 이런 것일까 잠시 접어두라는 말은접어서 경계를 만드는 게 아니라서로에게 포개지라는 말인 줄을읽던 책을 접으면서 알았다 나를 접었어야 옳았다이미 읽은 너의 줄거리를 다시 들추는 일보다아직 말하지 못한 내 뒷장을 슬쩍 보여주는 일실마리는 언제나 내 몫이었던 거다 접었던 책장을 펴면서 생각해 본다다시 펼친 기억들이 그때와 다르다같은 대본을 쥐고서 우리는 어째서 다른 줄거리를 가지게 되었을까 어제는 맞고 오늘은 틀리는* 진실들이우리의 페이지 속에는 가득하다 *홍상수 ..

좋은 시 2024.09.14

거울 속으로 온 손님 / 이대흠(1967~ )

거울 속으로 온 손님 / 이대흠(1967~ )​ 치매에 걸렸던 아버지는 소파에 앉아 있는 걸 좋아하셨다 소파 뒤에는 커다란 거울이 있어서 나를 볼 때마다 아버지를 보았던 소파였다 낡은 초록색 소파는 아버지의 마지막 주소지였다 아버지는 그곳에 자기 생을 다 놓고 앉아서 창밖만 바라보았다​ 어느날이었다​ 끼니때가 되어 아버지를 부르자 아버지가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거울 속 한 노인을 발견하고는 손을 내밀었다 같이 가서 밥먹읍시다 하지만 거울 속 노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아버지가 밥상 쪽으로 올수록 그 노인은 멀어졌다 어허, 자식들이 다 이해하니 같이 가잔 말이오 아버지가 여러번 권했으나, 거울 속 노인은 겸양한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손을 내밀면 마주하여 손을 내밀었고, 등 돌려 밥상으로 오면 멀어졌다 그 노인..

좋은 시 2024.09.11

비빔밥 / 이대흠

비빔밥 / 이대흠  비빔밥엔 잡다한 것이 들어가야 한다 싱건지나 묵은 김치도 좋고 숙주노물이나 콩노물도 좋다 나물이나 남새 노무새도 좋고 실가리나 씨래기 시락국 건덕지도 좋다 잘못 끓인 찌개 찌끄래기나 달걀을 넣어도 좋지만 빼먹지 않아야 할 것은 고추장이다 더러 막걸리를 넣거나 된장국을 홍창하게 넣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취향일 뿐 그렇다고 국밥이 되는 것은 아니다  비빔밥엔 여러 가지 반찬과 참기름 고추장이 들어가야 하지만, 정작 비빈 밥이 비빔밥이 되기 위해서는 풋것이 필요하다 손으로 버성버성 자른 배추잎이나 무잎 혹은 상추잎이 들어가야 비빔밥답게 된다 다 된 반찬이 아니라 밥과 어우러지며 익어갈 것들이 있어야 한다 묵은 것 새것 눅은 것 언 것 삭은 것 그렇게 오랜 세월이 함께 해야 한다  하지만 ..

좋은 시 2024.09.11

꿈틀거리다 - 김승희

꿈틀거리다 - 김승희 어느 아픈 날 밤중에가슴에서 심장이 꿈틀꿈틀할 때도 괜찮아꿈이 있으니까 꿈틀꿈틀하는 거야꿈꾸는 것은 아픈 것토마토 어금니를 꽉 깨물고꿈틀꿈틀바닥을 네발로 기어가는 인간의 마지막 마음(김승희 시집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  꿈을 가진 마음서점의 일상을 요약하자면 ‘고요한 가운데 번잡함’일 것이다.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게 하루를 보내고 밤이 오면 풀려버린 운동화 끈처럼 맥을 놓아버린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그즈음 서점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는 애틋한 동질감을 느낀다. 김종삼의 시 ‘묵화’ 속 할머니와 소처럼 서로의 부은 발잔등을 위로하고 싶어진다.그날 밤 찾아온 학생은 문 닫을 시간을 넘겨서까지 책장 앞을 서성였다. 잠시 후 계산대 앞에 다가선 그는 시집 말고도 작은 ..

좋은 시 2024.09.06

돌멩이들 - 장석남(1965~ )

일러스트=양진경돌멩이들 - 장석남(1965~ )  바닷소리 새까만돌멩이 너덧 알을 주워다책상 위에 풀어놓고읽던 책 갈피에도 끼워두고 세간기울어진 자리도 괴곤 했다잠 아니 오는 밤에는 나머지 것들물끄러미 치어다도 보다가 맨 처음이 돌멩이들 있던 자리까지를궁금해하노라면,구름 지나는 그림자에귀 먹먹해지는 어느 겨울날 오후혼자 매인늦둥이 송아지 눈매에 얹힌낮달처럼저나 나나살아간다는 것이,이렇듯 외따로 있다는 것이,  바닷가에서 주워 온 돌이 몇 개 있다. 까만 돌의 표면에는 물결무늬가 흐르고 파도 소리가 들려왔을 것이다. 몽돌이며 모서리가 덜 깎인 돌, 그리고 조각돌도 있었을 것이다. 시인은 그 돌로 책장을 눌러놓거나 집 안 살림에 쓰는 물건의 평형을 맞추려고 아래를 받치기도 한다. 그러다 돌이 최초로 놓여 있..

좋은 시 2024.09.06

숲의 정거장 / 곽효환

숲의 정거장 / 곽효환  사람들 드문드문 들고 나는호젓한 시골마을 간이역 철길을 이어백두대간 숲 속 깊은 곳에작은 역 하나 더 지어야겠다간이역과 간이역을 잇는 기차하루에 한 번 혹은 두 번 오고가게 해야겠다 비자나무 가죽나무 굴참나무 측백나무 팔 벌리고작은 짐승들 새들 벌레들 분주함 가득한숲의 정거장엔철커덕 철커덕 쉼 없이 달려왔을 기차도같이 온 바람도 잠시 숨 고르리라플랫폼에 이어진 호젓한 오솔길 따라나란히 흐르는 계곡물에 발 담갔다가단청 고운 절집 탱화아래 앉아잠시 먼 산에 한눈팔아도 좋겠다세상의 시간과 일상이 한동안 멈춰몸 부리고 쉬었다 느릿느릿 흘러가는작은 역 하나 숲의 양식대로 지어야겠다 빛바랜 회색 기와집 아래 의상실과 세탁소슬레이트 지붕집엔 전파사와 분식집붉은 벽돌집에 포목점과 연쇄점그리고 ..

좋은 시 2024.09.03

시조 모음

가랑잎 자서전​                                                            민진혜​ 등 굽은 지팡이에 몸을 싣는 저물녘나른한 공원 벤치 낮달 함께 앉은 그대숨소리 바스락바스락, 뼈가 닳은 노인이다​ 해를 쫓던 녹음이며 뜨건 비도 쪼개 담아한껏 부푼 정복의 꿈 흙에 도로 뱉어낸다바람이 읽는 판결문 무릎 꿇고 들으며​ 꿈에 기댄 지난날도 돌아보면 아지랑이보풀 같은 겹을 누벼 나이테에 새겨둔 채뒤틀린 뿌리에 안겨 별의 안부 건넨다​                            물풀                                                    백점례  불볕 터진 들녘 너머 풀떨기 못물 아래따라지들 몰려들어 스크럼을 짜고 있다물길이 ..

좋은 시 2024.08.31

출품되는 밤/안정숙

출품되는 밤                                                                                         안정숙  청미래 마을은 100호 규격이다 명도가 지속적으로 밤하늘을 봉인했다왼쪽에서 들여다보면 달이고오른쪽에서 관람하면 창문의 나열이다 망개나무 경사는 거칠다 도시 불빛과 언덕의 어둠이서로 다른 질감이듯처음 본 별이 독특한 빛을 내놓는다 구불구불한 골목들중간 붓처럼 생긴 고랑 본 적 있나요오래된 조도를 소장한 가로등검은 취객의 노래에 흐늑거린다 달빛이 낮은 지붕 사이사이를 칠한다 불 켜진 창문 속두세 걸음 걷던 아기가 주저앉고늦게 귀가한 사내가 젖은 발을 닦고혼자 중얼거리는 노인이 전시되어 있다 너무 낯익어서 모르는 내일 그 밖의 무채색..

좋은 시 2024.08.31

물체주머니의 밤/김지녀

물체주머니의 밤보이는 것을 집어삼키기 위해내 몸의 절반은 위가 되었다 가끔헛배를 앓거나묽어진 울음을 토해냈지만송곳도 뚫고 들어올 수 없는 내벽의 주름들은쉴 새 없이 움직이며굶주린 항아리처럼 언제까지나 입을 벌리고 있다 안쪽으로 쑥, 손을 넣어 악수하고손끝에 닿는 것들을 위무하고 싶은, 밤나는 만질 때에만 잎이 돋는 나무 조각이거나따뜻해지는 금속에 가깝다내 안에 꽉 들어찬 것은 희박하고 건조한 공기기침을 할 때 튀어나오는 금속성 소리날카롭게 찢어진 곳에서, 푸드득 날아간 새는 기침의 영혼인가한 문장을 다 완성하기도 전에소멸하는 빛과 밤, 사이에서나는 되새김질을 반복했다, 반복해도소화되지 않는 나의 두 입술사물들의 턱뼈가 더욱 강해진다밧줄처럼 허공에 매달린 나는 공복이다김지녀· 2007년 「세계의 문학」 데..

좋은 시 2024.08.18

복어 / 권수진

복어 / 권수진 ​​거친 난바다에서 살아남으려면과장된 허세가 필요했다덩치를 최대한 크게 부풀려서얕잡아보는 상대의 기를 눌러야만함부로 시비를 걸지 않았다집을 살 때는 대출한도를 늘려서가능한 평수를 최대한 넓히고최소 중형차 이상은 몰고 다녀야만파도치는 풍랑에 맞서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헤엄칠 수 있었다옷을 입거나 밥을 먹을 때에도명품으로 치장하는 기술이 필요했다소문난 맛집에서 인증샷을 누르고유명 로고가 박힌 옷을 걸치고명품 가방 정도는 들고 다녀야만무리에서 도태되지 않았다이래도 저래도 안된다면독기라도 품고 살아야 했다험한 세상에 맞서 죽기 살기로 부딪치며잔뜩 오른 독을 내뿜다 보면혼자라도 건들만한 놈이 없었다시류에 휩쓸려 무리를 이루며 살든, 나 홀로 떠돌며 살든,맨정신으로 사는 세상은 아니었다 ​황태마을 ..

좋은 시 2024.08.04

주걱/박은형

주걱 박은형 개망초 흰 머릿수건 사이 여름 오후가 수북한그 집은 가득 비어있다 인기척에 반갑게 흘러내리는 적막의 주름 컴컴한 부엌으로 달려간 빛이삐걱, 지장을 놓으며눈썹처럼 엎드린 먼지를 깨운다 밥상을 마주했던 날들을 배웅한 징표일까남은 것들로는 그림자도 세울 수 없는 회벽그을음으로 본을 뜬 그늘 주걱 하나가 거기,테 없는 액자처럼 걸려 있다 무쇠솥이며 부엌 바닥의 벙어리 주발들눈이 침침한 채 아직 남은 밥 냄새, 만지작거린다누군가와 마주앉아 먹던 모든 첫 밥에는허밍처럼 수줍고 고슬한 기억이 들었을 것이다 선명한 그을음이 빚은 밥 냄새의 화석에서뭉클한 식욕의 손잡이가 돋는다 멀리 수평의 여름 저녁이 이고 오는고봉밥 한 그릇산마루를 지나 평상으로 식구들 불러들인다

좋은 시 2024.07.22

삽/이종섶

삽이종섶    오래 쓰면 쓸수록 뾰족한 그곳이 둥그런 엉덩이처럼 변해가는 삽, 처음부터 찌르기 위해 만들어진 삽날은 흙을 갈아엎고 퍼 나르는 동안 닳고 닳아 유순하게 변화되기까지 수없는 세월을 홀로 울며 견뎌야 했다 조금씩 추해지는 표정을 감추려고 찬물로 세수하는 것도 잠시뿐, 쓰레받기로나 쓰이는 늘그막이 되어서야 위협적인 꼭지 부드럽게 깎여 거름더미라도 한 짐 푸짐하게 퍼주고 싶은 착하디착한 곡선으로 변한 것이다 땅을 파면 팔수록 산봉우리 닮아가고 모래를 뜨면 뜰수록 물의 흐름 배워가는 삽 한 자루의 성실한 노동 앞에 겸손히 머리 숙이고 싶은 날, 평생 맞서기만 하던 땅위에 서서 일방적으로 저지른 잘못을 사과라도 하듯 자근자근 눌러보는 삽날의 애교 나의 노년도 저랬으면 좋겠다 싶어 몇 군데 짚이는 곳을..

좋은 시 2024.07.22

가을, 낯선 도시를 헹구다/김지희

가을, 낯선 도시를 헹구다 김지희 한잔 노동이 넘실대는 부엌에는여자의 일생이 부조되어 있다 엄마 허벅지 베개 삼아 달게 잠들었던 소녀시절이캄캄해 보이지 않는 새벽 어스름잠든 아이의 꿈자리를 지나슬그머니 부엌에 나가 불을 켠다문득 완전한 어둠 속에 던져졌던 세상 한 곳이 환하다옹이 박힌 가슴으로 숭숭 새는 물소리를 잠근다부엌 속에 갇혀 맵고 짜고 달고가끔 바삭바삭 타는 소리 너머나는 세상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나온존재하지 않은 가을이었다부엌에 앉아 작은 상을 성좌처럼 펴고나의 언어를, 별을 찾다가 웅크린 어깨선이어느 파도에 부딪혀 무너지는지 속이 거북하다살다 남은 시간을 쪼개고찬 손을 비비고싱크대 속에 갇혀 몇 년째 속앓이 한 냄비를 닦고예리한 어둠에 그을린 낯선 도시를 헹구며깊은 수심(水深) 속에 기..

좋은 시 2024.07.22

콩에서 콩나물까지의 거리/정영선

콩에서 콩나물까지의 거리   정영선   눈물 빠지게 불린 콩알들 뚫린 시루에 주르르 붓고 검은 보자기 덮는다 콩알 자존심 상한다   자라목처럼 안주 속으로 몸을 밀어 넣는 슬픈 습관을 두드려 부수느라 퍼부어지는 물줄기 돌풍, 돌풍 세상 밖에서는 아무 일 일어나지 않는데 콩알 속 허물어져야 할 일 허물어지는 일만 남는다 저리 깐깐한 침묵을 버틴 콩 껍질을 후딱 날리는 모자처럼 들고 검은 보자기 씌운 막막함을 대못같이 밀어올리고 사랑은 눈부시게 노오란 해를 한 덩이씩 이고 나올 날 그대 속에도 잠재해 있을 저 힘 기다리느라 나는 질겨지고 있다

좋은 시 2024.07.22

덤불설계도 / 정정례

덤불설계도 / 정정례  가을덤불은 어둑한 그늘도 이사 간 빈 집이다찬바람만 들고 나는 곳햇살이 똬리를 틀던 뱀을 따라하고 있다푸른 부피가 다 빠진 덤불을 보면 봄과 여름이 이사 간 빈 집 같다흘리고 간 꽃잎 몇 장.빛바랜 잎사귀 몇 개 매달려있다 뼈대만 앙상한 것 같지만 사실 줏대 없는 것들끼리 지탱할 수 있는 유용한 설계도다.그래서 봄에 꽃 필 때도 네 줄기 내 줄기 찾지 않는다. 굳이 따지고 내려가면 꽃피는 계절이 훌쩍 떠난 뒤에 엉킨 줄기를 헤집고 확인할 필요가 없는 덤불. 잘 못 건드리면 주저앉을 수도 있는 것들. 가만히 두어도 제 자리를 지켜내는 질서가 정연하다 휘어지고 얽힌 집에 남아있는 것은수북이 쌓인 흔적들이름을 찾기에는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때가 되면 스스로 호명을 한다.색색이 문패..

좋은 시 2024.07.22

항아리 우물 /이삼현

항아리 우물 /이삼현 고향집 곳간에는 커다란 쌀독 하나가 있었지요바가지를 든 어머니가 아침저녁으로 퍼 올리던 우물이었지만 늘 말라 있었습니다 어둠을 뚫고 피어나는 연꽃 송이처럼 발그레 동창이 물들 즈음 바닥 긁는 소리에 잠을 설치곤 했습니다 빠지면 풍덩 잠길 우물 앞에서 까치발을 들고 공손히 허리 숙여 깊어진 어머니한 톨이라도 더 식구들을 먹일까고대하는 목마름으로 바닥을 훑곤 했습니다한껏 퍼 담고 싶은 바가지와 맨 바닥이 만나 지르는 비명몇 톨 남은 알곡들이 참새 떼처럼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짹짹거렸습니다 언제 적 끊긴 물길더는 샘솟는 우물이 아니라는 걸 잘 알면서도 아홉 식구의 공복이 피가 나도록 긁고 또 긁었습니다  가을 한철, 겨우 차고 넘쳤을 항아리 우물아무리 퍼 담아도 한 바가지 어둠한 바가지 소..

좋은 시 2024.07.18

수평 잡기 / 서상민

수평 잡기 / 서상민 이사한 다음 날삐걱거리는 장롱의 수평을 잡기 위해괼 만한 것을 가져오라 시켰다딸아이는 표지가 너덜거리는시집 두 권을 가져왔다열한 번의 이사와어느 날의 화재에도 살아남아책꽂이 후미진 곳에 처박혀 있던 시집을용케 찾아왔다주름이 이마가 되고물 자국이 무릎을 파먹은어두운 안색의 시집에는젊은 날의 소인 같은 곰팡이가 슬었고빼꼭히 써놓은 다짐들은 먼 세월을 다해당도한 편지 같았다마음에 없는 여자에게 아름답다 말할 수 있고비겁한 손을 아무 데서나 불쑥 내미는 나이에무릎을 꿇고 이마에 뻘뻘 땀 흘리면서어긋난 장롱 다리 밑으로시집 두 권을 우겨 넣었다이사한 다음 날난데없이 끌려 나온 두 권의 시집이기울어 가는 살림을 받쳐 주었다​

좋은 시 2024.07.01

빈집/김정민

빈집김정민뒤꼍의 대나무 뿌리 구들장을 장악하고들락날락 바람이 돌쩌귀 빠진 문짝을 열고 닫던 집임종도 없이 죽어버린 괘종시계를 떼 내고포클레인 버킷을 들어 올려장승처럼 지켜선 용마루를 누른다꿈 버무렸던 흙벽도, 서까래도병색 짙은 신음처럼 무너진다게으른 골목 깨우던 워낭소리 쪽마루에 걸쳐두고뻐꾹 소리에 피곤 달래던 아버지의 그림자기와, 연목, 대들보에 매달려 버팅기다 내처진다‘원룸 두 동 지으면 끝내주겠다’평평하게 땅을 고른 포크레인 남자의 말끝에언뜻, 오빠 얼굴에 미소가 번졌던가마당가에 쪼그린 아버지, 엄동설한에 어디로 가시나요이승과 저승을 잇는 속울음뿌연 먼지 속에 구덩이를 파는데♦ ㅡㅡㅡㅡㅡ 어떤 집이든 사람이 거주하지 않고, 돌보지 않으면 어느새 폐옥이 되고 만다.아버지가 떠나신 뒤로 비워져 있던 집..

좋은 시 2024.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