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 잡기 / 서상민
이사한 다음 날
삐걱거리는 장롱의 수평을 잡기 위해
괼 만한 것을 가져오라 시켰다
딸아이는 표지가 너덜거리는
시집 두 권을 가져왔다
열한 번의 이사와
어느 날의 화재에도 살아남아
책꽂이 후미진 곳에 처박혀 있던 시집을
용케 찾아왔다
주름이 이마가 되고
물 자국이 무릎을 파먹은
어두운 안색의 시집에는
젊은 날의 소인 같은 곰팡이가 슬었고
빼꼭히 써놓은 다짐들은 먼 세월을 다해
당도한 편지 같았다
마음에 없는 여자에게 아름답다 말할 수 있고
비겁한 손을 아무 데서나 불쑥 내미는 나이에
무릎을 꿇고 이마에 뻘뻘 땀 흘리면서
어긋난 장롱 다리 밑으로
시집 두 권을 우겨 넣었다
이사한 다음 날
난데없이 끌려 나온 두 권의 시집이
기울어 가는 살림을 받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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