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덤불설계도 / 정정례

에세이향기 2024. 7. 22. 04:11

덤불설계도 / 정정례

 

 

가을덤불은 어둑한 그늘도 이사 간 빈 집이다

찬바람만 들고 나는 곳

햇살이 똬리를 틀던 뱀을 따라하고 있다

푸른 부피가 다 빠진 덤불을 보면 봄과 여름이 이사 간 빈 집 같다

흘리고 간 꽃잎 몇 장.

빛바랜 잎사귀 몇 개 매달려있다

 

뼈대만 앙상한 것 같지만 사실 줏대 없는 것들끼리 지탱할 수 있는 유용한 설계도다.

그래서 봄에 꽃 필 때도 네 줄기 내 줄기 찾지 않는다.

 

굳이 따지고 내려가면 꽃피는 계절이 훌쩍 떠난 뒤에 엉킨 줄기를 헤집고 확인할 필요가 없는 덤불. 잘 못 건드리면 주저앉을 수도 있는 것들. 가만히 두어도 제 자리를 지켜내는 질서가 정연하다

 

휘어지고 얽힌 집에 남아있는 것은

수북이 쌓인 흔적들

이름을 찾기에는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때가 되면 스스로 호명을 한다.

색색이 문패를 단다.

 

빈 줄기 같지만 그 중 하나 뚝 잡아 꺾으면 물기 가득한 전류가

흐르고 있다

 

지금은 더 많은 양의 전류를 충전중이다

잘 못 건드리면 줄기 곳곳에 날카로운 불꽃이 인다.

꽃들이 피다 간 곳, 방전이다.

 

 

전각

 

이빨 가는 소리가 난다

강한 것 끼리 만나는 소리

그 소리가 돌에 길을 낸다

점 하나로 부터 시작되어

골골이 흔적을 남기는 길

정해 놓은 길 따라 가다 보면 어느새

끝이 나는 길

그 길 끝의 소리들이 만들어낸 들뜬 이빨로

부를 수 있는 이름 하나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부스러기 끝에 남는

표정뿐이다

푸른 돌, 잘 익은 돌에 이름 하나 안치면

끓는 소리도 없이 설설 익는다.

제 살을 깎아 만들어낸 각

부스러기들 떨어져나가고 희뿌연 먼지가루

다 날아가고 칼 지나간 곳을

비로소 이름으로 쓴다

바닥을 딛고서야 드러나는

가장 밑 부분의 수결

반대의 획으로 찍히는 이름은

음과 양이 마주한다.

붉은 색깔을 옷으로 입는 것은

이름에도 뜨겁게 뛰는

붉은 심장이 있기 때문이다

 

 

썰물의 무게

 

저녁을 묻히고 어둠의 포구로 밀려오는 밀물

묶여 있던 배들의 바닥에 부력이 달라붙고 있다.

이 진창에도 길이 있다는 듯

물보다 먼저 아낙들이 널배를 타고 돌아온다.

늘 저 시퍼런 물에 쫒기며 살았던 사람들

머리에 얹힌 수건을 풀듯

수평선 끝으로 붉은 해가 빠진다.

 

저녁때의 모든 잠식은 소리가 없다

움직이는 것들의 발길엔 다 제 거처가 있겠지만

저 물 속으로 집을 삼은 것들이 있어

오늘 저 물살이 유독 꼼지락거리는 것 같다.

 

미끄러운 길이었고 구불거리는 길이었다.

 

연체동물같이 밀려드는 썰물

입 꽉 다문 어패류를 싣고

저기 물질 나갔던 썰물이 밀물로 돌아오고 있다

뻘 속에 껌벅거리는 빛들의 피로가

허리춤 천근 무게로 묶여 가라앉고 있다

저 탁류로 배들이 문을 열고 출항을 하고

조개들이 입을 열고 찰박거리는 물소리를 내뱉고 있다.

 

뒤 돌아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평평한 시간들

갯펄에 붙들린 젊음은 빠르고 미끄러웠다.

아낙들이 망태를 저울에 올려놓고

눈금의 절반을 넘은 어느 지점에서 썰물이 바르르 떤다.

붉은 노을은

그 사이 어둠을 건너가고 있다

 

'좋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 낯선 도시를 헹구다/김지희  (0) 2024.07.22
콩에서 콩나물까지의 거리/정영선  (0) 2024.07.22
항아리 우물 /이삼현  (0) 2024.07.18
수평 잡기 / 서상민  (1) 2024.07.01
빈집/김정민  (1) 2024.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