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1091

삶의 최소단위, 숟가락 / 마혜경

삶의 최소단위, 숟가락 / 마혜경   조용히 밥을 먹는다. 밥을 먹을 땐 말을 하지 않는다. 나에게 밥은 하루만큼의 태엽이고 끈끈한 다정함이다. 어둠과 고통이 밀려올 때마다 밥이 그리워진다. 나에게 말은 의미의 모양이며 활짝 열리는 관계의 끈이다. 밥이 키운 말들이 따뜻한 손이 된다고 들었다. 그러므로 입은 소리를 찍어내는 틀이자 생명을 불어넣는 밥의 입구가 된다. 밥을 먹을 때 말을 하지 않는 이유는 들어가는 밥과 나오려는 소리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말하면서 밥을 먹을 때에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온전히 들어가야 할 밥과 오롯이 나와야 할 소리가 같은 지점에서 만나면 무척 낯설어진다. 난 그날 이후로 목구멍에서의 이 어색한 조우를 정리했다. 밥은 밥대로, 소리는 소리대로 받아들이기로 다짐했다. 그래서 ..

좋은 수필 09:14:51

희망의 단서 / 이성환

희망의 단서 / 이성환     실바람에도 흔들린다. 손쉽게 꺾일 만큼 연약하지만 제 뜻을 굽히지는 않는다. 그것들이 팔짱을 끼고 엮이면 쉽게 떼어 낼 수 없는 힘받이가 된다. 사물을 지탱하고 뭇 생명에게 도움을 주는 자들의 위대한 힘이다.  민속박물관에 전시된 짚신이나 똬리, 달걀 망태가 눈길을 끈다. 메줏덩이를 매단 서너 가닥 지푸라기나, 쌀 한 섬이 거뜬히 담기는 가마니가 새삼스러운 느낌이 든다. 짚풀을 꼬고 엮는 손재주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지 싶다. 건드리기만 해도 바스러질 듯 미약한 몸피가 어떻게 무거운 것을 받아들이고 지탱할까. 약하고 허름한 것이 칡 줄기처럼 실하게 되는 동력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얼핏 보면 알맹이는 가고 껍데기만 남아 있다. 사물의 중심이 아닌 군더더기에 불과..

좋은 수필 09:11:52

별이 되어 / 김필령

별이 되어 / 김필령    밑에 길게 드러누운 황토밭, 운동장에서 교장 선생님의 느린 훈시를 듣고 서 있는 아이들처럼 어린 감나무들이 고개를 떨구고 줄지어 서 있다. 붉고 푸른 단풍나무가 밭둑을 따라 담장처럼 빙 둘러쳐져 있어 산밭은 더욱 아늑하고 고요하다.​ 땡볕이 내리쬐는 오후, 신발을 벗고 밭고랑을 타고 들어가 한 뼘 자란 풀을 뽑는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아픔보다 더 큰 슬픔이 있으랴.’ 한 움큼씩 뿌리째 뽑혀 올라올 때마다 창자가 끊겨 나간듯이 배를 쥐어짠다. 구토가 일어난다. 피눈물이 고이고 두 무릎은 어느새 땅에 꽂혀있다.​ 산밭에 오르는 두 갈래 길에서 왼쪽으로 꺾어 돌아가면 오래도록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이 있었다. 흙벽은 허물어지고 비스듬히 쓰러져 있는 슬레이트 지붕은 낡은..

좋은 수필 2025.01.02

귀꽃 / 김보성

귀꽃 / 김보성      폐사지에서는 나의 말[言]을 방목해도 괜찮다. 모든 것이 벌거벗은 채로 퇴색되어 고요로 쌓이기 때문이다. 기억을 더듬던 연꽃은 까만 연자를 품어 동안거에 들고, 고인을 헤아리다 지친 귀부의 몸통은 덩그러니 황토 자리를 깔고 앉았다. 제각각 흩어진 돌들이 사고무탁으로 노거수에게 제 몸을 맡기고 무연하다. 햇살은 담백하게 내려앉고 바람은 가식 없이 방랑한다. 계절이 비껴간 터는 옛날의 어스름을 닮아 홀로 담담하다. 젖은 숨이 바삭해진다. 사초는 은빛으로 일렁이고 그 뒤를 바람의 소리가 뒤따른다. 아무도 말이 없다. 귀를 열어 소리를 담을 뿐이다. 침묵 속에 나 홀로 소란하다. 하지만 말의 무게를 누르고 고요의 결을 느끼면 생각은 비워지고 몸은 가벼워진다. 점점 내 안의 풍경 속으로 ..

좋은 수필 2025.01.02

숫돌을 읽다 / 허정진

숫돌을 읽다 / 허정진    어느 시골 마을에서 빈집들을 둘러본 적이 있다. 잠시 거주할 요량이었는데 '편리'보다 '운치'를 찾고 있었다. 마을 끝자락에 자그마한 집이 마음에 들었다. 겉과 뼈대는 그대로 두고 실내 일부만 개량한 옛집이었다. 일자형 안채와 아래채, 손바닥만 한 텃밭까지 갖춘 집 구조가 아기자기하다. 더구나 집 울타리가 요즘 흔치 않은 대나무로 병풍처럼 둘러싸여 고즈넉한 풍경도 곁들었다. 바람결에 댓잎 흐르는 소리, 마당 한구석에 기울어진 오후의 볕살이 넉넉하고 느릿한 시공간을 연출하고 있었다.장독대 옆에 수돗가가 있다. 예전에는 우물터였음직한 정겨운 그림자들, 돌확과 돌 빨래판이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다. 여름철이면 수박이나 참외를 동동 띄워놓기도 하고 아이들 줄 세워 어푸어푸 등물도 켜던..

좋은 수필 2024.12.28

풍화 (風化) / 박종희

풍화 (風化) / 박종희  오래된 사찰이 안겨주는 편안함과 축적된 시간이 느껴지는 단청의 멋스러움에 끌려 절을 찾는다. 고찰(古刹)의 역사만큼이나 마음이 깊어지는 곳. 하얀 눈이 소복하게 내린 날, 마곡사에 발길이 닿았다. 눈 위에 먼저 길을 내준 사람들의 발자국을 밟으며 들어서는데 속세를 벗어나 법계로 들어선다는 해탈문이 반긴다. 사찰의 정문 역할을 하는 해탈문과 천왕문을 통과해 경내에 들어섰다.  고작해야 30여 분 거리에 있는 마곡사를 얼마 만에 왔는지. 코로나가 발생하기 훨씬 전에 다녀갔으니 족히 5,6년은 지난 것 같다.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비스듬한 듯 불안해 보이던 5층 석탑도 그대로다.  연말이라 그런지 한 해의 안녕을 기원하며 탑돌이 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들을 뒤로하고 대광보전으로 ..

좋은 수필 2024.12.26

종소리 - 강숙련

종소리 - 강숙련 ​     누가 시(詩)를 언어로 그린 그림이라 했다. 밀레의 ‘만종’ 앞에 서면 ‘소리로 그린 감동’이란 표현으로 그 말을 써 보고 싶어진다. 문화의 차이는 감성의 차이도 만든다는데, 종소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비슷한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 같다.  때로는 격렬하게, 때로는 감미롭게 다가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 중에 종소리만한 것이 있을까. 형체도 없는 것이, 잡아 가두려야 가둘 수도 없는 것이 마치 청동의 꽃에서 나는 향기라고나 할까. 교회나 사찰의 새벽종소리를 들으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통도사 절 밑에 있는 어느 호텔로비에서 제야의 종소리를 들었다. 경영주인 지인(知人)이 술잔을 가볍게 부딪치며 덕담을 건넸다.  “올해는 좋은 글 많이 쓰십시오. 수필이란 종소리 같은 ..

좋은 수필 2024.12.25

위장 / 곽흥렬

위장 / 곽흥렬 청개구리는 계절에 따라 몸 빛깔을 달리한다. 카멜레온의 변신술이라든가 대벌레나 나뭇가지사마귀 같은 곤충들의 위장술은 실로 감쪽같다. 하도 정교하다 보니 웬만큼 세밀한 관찰력이 아니고서는 일쑤 속아 넘어가게 되어 있다. 이들의 위장은 무엇보다 적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함이 그 목적이다. 물리적 약자가 생존을 보장받기 위한 수단으로는 위장만 한 무기도 없을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위장이야말로 먹이사슬의 하위 계층이 상위 계층에게서 목숨을 지켜낼 수 있는 최대의 호신술일 터이다. 꼭 방어의 목적만은 아니다.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공격의 방편으로도 위장은 아주 훌륭한 전술이 된다. 뱀이며 악어 같은 포식동물들의 위장은 강자가 지닌 최적의 무기다. 특히,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기 위해서..

좋은 수필 2024.12.25

무문 / 김미향

무문 / 김미향비가 내린다. 허공이 젖고 나도 젖는다. 저녁나절에 깃든 적막한 폐사지. 부처가 없다고 사찰이 아닐까. 범종이 보이지 않는다고 그 소리를 듣지 못할까. 폐허라도 언제나 금당이고 대적광전인 것을. 빈 윤회의 공간을 지키는 불탑이 서럽도록 장엄하다.세월이 삼층 석탑의 기상만은 꺾지 못했다. 맨 위 노반의 한 모서리만 풍상에 내주었을 뿐 흐르는 시간에서 비켜난 듯하다. 임진왜란 때 재가 되어버린 법수사의 맥을 잇고자 석탑은 부처를 대신해 천 년이나 생불의 삶을 살아왔다. 자신을 버려둔 세상이 노여울 만도 하련만 하루하루 웅숭깊은 숨을 가다듬으며 불법을 전하고 있다. 순정한 시간 앞에 엄숙해진다.매장 문화재 보호 및 발굴, 훼손의 행위를 금한다는 안내문이 눈길을 보내온다. 석탑과 빈터를 에두르는 ..

좋은 수필 2024.12.23

망치학 개론/허정진

망치학 개론/허정진“탕! 탕! 탕!” 망치 소리다. 심장이 덜컹덜컹 울려온다. 광야의 천둥소리도, 전장의 총탄 소리도, 굿판의 꽹과리 소리도 아니다. 둔탁하면서도 옹골진 타격감이 허공을 가로질러 손바닥에 고스란히 전해온다. 두 번 세 번 가만히 듣고 있으면 어느덧 낯섦의 거부감은 사라지고 저 멀리 생(生)의 울림처럼 다가온다. 그 누군가의 땀방울과 거친 숨소리가 뱉어내는 삶의 소리가 틀림없다. 고목 둥치를 붙잡고 홀로 씨름하는 딱따구리처럼 망치가 저 혼자 우는 소릿결이다. 저 소리를 따라가면 세상 누구도 삶의 길을 잃지 않을 것 같다. 그 소리는 묵직하고 단단하다. 철성(鐵聲)이다. 아무렴 망치가 못보다 약하거나 물러서는 안 될 일이다. 짧고 단순해서 오히려 경쾌하고 명쾌하다. 해토머리 얼음장에 쩡쩡 금..

좋은 수필 2024.12.18

허창옥의 수필 읽기

허창옥의 수필 읽기  1-1. 김순분 아지매의 비닐봉지 국지성호우가 있겠다는 예보가 있었다. 실제로 나라의 곳곳에 말 그대로 국지적으로 폭우가 내리고 있다. 워낙 다른 곳에 비가 많이 내리니 거들지 않을 수 없었던가. 비 없기로 유명한 이 지역에도 비가 많이 내린다.빗물막이 차양 속에서 뒤꼍의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단풍나무 높은 가지에 검정비닐봉지가 걸려서 비바람에 사정없이 휘둘리고 있다. 잎이 한창 무성한지라 그렇듯 온몸을 찢으며 펄럭이지만 벗어날 가망이 영 없어 보인다. 그 무생물이 불현듯 생물로 보인다. 생물이 아니라도 그렇다. 어딘가에 걸려서 제 살을 찢고 있는 걸 보는 건 여간 불편하지가 않다. 불편한데, 고통을 덜어줄 방도가 없다. 가지는 높고 비는 세차게 내린다. 항상 그랬다. 타자의 ..

좋은 수필 2024.12.17

어느 상자로부터/ 조은수

어느 상자로부터/ 조은수     배송이 완료됐다는 문자였다. 며칠 전 온라인에서 주문한 복숭아가 도착한 것이다. 시장까지 가지 않고 내 방에 앉아 클릭 한 번으로 원하는 물건이 배달되는 일은 이제 도시인의 일상이 된 지 오래였다. 종국엔 인간을 무력하게 만들 시스템일지언정 애초에 나는 운전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재래시장이나 마트서부터 복숭아 상자를 머리에 이고 올 자신도 없었다. 이미 무력한 인간 부류인 내가 이 빈틈없이 편리한 배달 문화를 포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클릭 한 번에 공산품도 아닌 생물이 내 집 앞에 도착했을 뿐 아니라 그 향기로 입 안에 침이 고일 때, 배달 시스템에 대한 내 경외심은 극에 달했다. 그래봐야 달콤한 복숭아 한쪽 맛볼 기대가 전부였으나 마음은 복숭아밭을 뛰노는 아이처..

좋은 수필 2024.12.16

아버지의 가방/최수연

아버지의 가방/최수연   아버지는 외로운 등대였다. 망망대해를 향해 사계절 홀로 서서 나가고 들어오는 배들이 위험하지 않게 불을 비춰주는 등댓불이었다.  심장마비로 하늘나라로 가신 지 십수 년이 지났어도, 어려운 환자에게 헌신하던 모습이 선하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 늦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정원 유실수들이 시샘하듯 실하게 맺을 즈음이었다. 자식들은 철부지였고 하루아침에 가장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무엇에 비유하랴.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환자를 돌보고 화장실에 갔다가 쓰러지신 걸 뒤늦게 발견하고 응급조치했지만, 소용없었다. 날벼락이었다. 하루도 쉬는 날 없이 위급한 환자가 생기면 한밤중에도 먼 길을 마다하지 않으셨으니 과로가 누적되었던 것 같다.  요즘은 소도시에서도 응급을 다툴 때 연락하면 구급차가..

좋은 수필 2024.12.15

등의 자서전/장미숙

등의 자서전/장미숙  메마른 대지를 손으로 쓸어내리자 까슬하게 뭉친 세월이 잡힌다. 물기가 말라버린 딱딱한 표면, 탄력도 윤기도 잃어버린 지 오래다. 고난이 할퀴고 간 상처가 곳곳에 유적처럼 자리 잡은 대지 위로 90년 날들이 유구하다. 중심을 가로지르는 산맥은 이미 휘어지고 굳어서 지형마저 바꿔놓았다. 융기한 뼈를 사이에 두고 대지는 굴곡의 세월을 그러안은 채 동그랗게 말려 있다. 손에 닿자마자 싸한 아픔을 몰고 오는 건 한 사람의 일대기이다. 좁은 대지가 수십 권의 책이 되어 기나긴 서사를 전한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색과 활자가 달라진다. 어둠이 깃든 페이지 속에 글자들이 방황한다. 대지를 덮은 침울한 색, 흐릿한 글자들의 뒤엉킴은 혼돈의 날들을 전하며 페이지마다 주석이 빼곡하다. 세월이 견고히..

좋은 수필 2024.12.12

종지/윤상희

종지/윤상희  굳게 잠겨 있는 문을 연다. 매캐한 곰팡이 냄새가 기다렸다는 듯 달려든다. 오랫동안 밀폐된 곳간이라 음습한 기운마저 감돈다. 천장에는 거미줄이 세월을 엮고 있고, 사용하지 않은 집기 위로 쌓인 먼지 더께가 시간을 헤아리게 한다. 쌀뒤주며 장독 같은 온갖 세간들이 감방을 지키듯 어둠 속에서 고요를 삼키고만 있다.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넓은 플라스틱 함지로 눈길이 머문다. 차곡차곡 쟁여 있는 놋그릇의 얼룩무늬 위로 어머니의 환영이 살아나는 듯하다. 손때 묻은 어머니의 유산에 누구하나 탐하거나 동정하는 이는 없었다. 어머니의 애장품에 탐심을 내는 일은 성역을 범접하는 것쯤으로 믿어서 그럴까 아니면 한물 간 것으로 치부해서였을까.어머니는 유기에 애정이 남다른 분이셨다. 세밑이면 으레 제수를 담을 ..

좋은 수필 2024.12.10

운 / 박찬웅

운 / 박찬웅 바람에 따라 정처 없이 떠다닌다. 둥실 두둥실. 바람에 몸을 맡겨 그저 흘러간다. 새하얀 뭉게구름을 보고 있으면 그곳에 안기고 싶다. 푹신푹신할 것만 같으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허상이다. 안개가 하늘에 떠 있으면 그게 구름이다. 산에 걸쳐 있는 구름을 본 적이 있다. 그 산을 올랐을 땐 구름이 아닌 짙은 안개가 깔려 있었다. 생각과는 다른 구름의 모습은 마치 누군가의 본모습을 봤을 때와도 비슷하다. 멀리서 보았거나 말로 들었던 사람을 가까이서 실제로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이미지와는 다른 경우가 종종 있었다. 마치 구름과도 같이 가까이서 보았을 때와 멀리서 보았을 때는 차이가 있었다.​구름은 다양한 모양을 띤다. 양털 모양의 권적운, 줄무늬 모양의 권운, 흑색 구름은 고층운, 눈과 비를..

좋은 수필 2024.12.01

모탕, 그 이름만으로도 / 허정진

모탕, 그 이름만으로도 / 허정진   허연 날을 세운 쇠도끼가 하늘 높이 솟구친다. 온몸에 힘을 끌어모아 짧은 기합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내려치는 도끼날에 매섭고 날카로운 파동이 허공을 가로지른다. 도끼가 날아올 때마다 그 육중한 타격감에 질끈 눈을 감는다. “퍽”“퍽” 나무가 갈라지는 파열음과 함께 지축을 흔드는 충격력이 고스란히 모탕으로 전달된다. 의연한 묵언으로 받아내는 것 같지만 순간순간이 아프고 두렵다. 그때마다 수없이 흔들리고 까무러치고, 운명이라면 차라리 숙명으로 여기며 혼신의 힘을 다해 버티어 낸다. 오래전 산중 농막에서 몇 해를 보낼 때가 있었다. 겨울에는 아궁이에 불을 때서 온돌 난방을 해야만 했다. 방고래를 향해 훨훨 타오르는 장작불에 불멍의 멋과 낭만도 있었지만, 따뜻한 겨울을 나기..

좋은 수필 2024.12.01

옹기 / 윤승원

옹기 / 윤승원  옹기 일가족이 베란다에 오종종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쌀이며 고추장을 담은 크고 작은 배불뚝이들이 반가운 얼굴로 나를 맞는다. 요즘엔 플라스틱, 스테인 그릇들이 대량으로 생산되어 옹기의 기능을 대신하고 있지만 그것들엔 물질문명을 지향하는 획일성만 있어 좀체 정이 가지 않는다. 그에 비해 옹기는 무뚝뚝하지만 언제나 따뜻한 흙의 질감을 느낄 수 있어 볼수록 친근감이 더해지는 것이다. 옹기는 질그릇과 오지그릇을 아울러 말한다. 질그릇은 오지잿물을 덮지 아니하고 진흙만으로 구워 만든 것이고 오지그릇은 붉은 진흙으로 만들어 볕에 말리거나 약간 구운 위에 오짓물을 입힌 것이다. 삼국시대부터 만들어진 옹기는 주 부식을 저장하거나 고추장 된장 등 양념이나 주류를 발효시키는 용구로 사용되었으며 세..

좋은 수필 2024.11.26

옛길을 걷다/허정진

옛길을 걷다/허정진길은 만남이고 소통이다. 인연을 만들고 세상을 만난다. 가고 오는 숨탄것들의 통로이고 울고 웃는 인생극장의 여백이다. 길목을 지나는 바람의 층계마다 사람 살아가던 시간과 풍경들이 시시각각 저장되어 있다. 그들만의 이야기와 숨결, 몸짓과 냄새들이다. 과거와 현재도, 미래와 영혼도 모두 길의 연장선상이고 삶의 여정이다. 하늘엔 새의 길이, 강에는 숭어의 길이 있다. 그대에겐 그대의 길이, 나에게는 나의 길이 있다.길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햇살이 따뜻한 곳을, 별빛이 반짝이는 곳을 연정으로 발걸음 하다가 오솔길이 생겨나지 않았을까. 강물 흐르는 대로 구름에 달 가듯이 고독으로 걷다가 나그네 길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처음 가는 길에는 이름이 없다. 그냥 발자국이고 흔적일 뿐이다. 화석처럼 나..

좋은 수필 2024.11.24

여백이 머무는 정자(亭子)/허정진

여백이 머무는 정자(亭子)/허정진간이역 같은 여백이다. ‘빨리’란 낱말이 낯설어지고, 째깍거리는 시간도 여기에서는 느려질 것만 같다.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손이 잠시 멈추고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올리는 정적 같은 것, 가마솥의 밥이 끓어 장작을 꺼내고 뜸을 들이는 시간 같은 것, 떠들썩한 목소리 대신 잔잔한 미소 같은 것, 그래서 여백은 한옥의 툇마루나 음악의 정가(正歌) 같은 여유가 아닐까 한다. 채우기보다 비워서 나는 소리, 단선율의 수평적 음악인 정가를 듣고 있으면 들리는 소리보다 마음을 내려놓은 상태인 나를 들여다보게 된다.여백에는 멈춤과 쉼표가 있다. 법정 스님의 ‘텅 빈 충만’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적당한 간격이다. 화폭에서 황금분할의 숨겨둔 공간이고, 어깨 힘을 뺀 간이한 행서체 같은 글씨다..

좋은 수필 2024.1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