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1092

죽 쑤는 여자 / 남태희

죽 쑤는 여자 / 남태희     “이것 좀 먹어봐 동서, 어서” 도리질 치는 내 입에 억지로 숟가락을 넣었다. 며칠째 물만 마시고 있던 내게 형님은 울 듯한 표정으로 다그치고 있었다. 멀리서 녹두죽 한 냄비를 쑤어 달려온 정성과 진정으로 걱정하는 눈빛을 보면서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껄끄러운 입안에 부드러운 죽 알갱이들이 퍼져갔다. 슬픔의 덩어리들을 꾸역꾸역 같이 삼켰다. 어린 것을 잃고 널브러진 스타킹처럼 누워 있던 난 그날 이후 다시 얼어서고 있었다. 죽은 곡물 음식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로 쌀, 보리, 녹두 등의 곡물에 물을 대여섯 배 부어 무르게 만든 음식이다. 오래 끓여 부드럽고 무르게 된 음식이기에 정상인보다는 기력이 쇠한 환자가 먹기에 좋다. 이렇게 고마운 음식이건만 죽에 관한 속담은 그..

좋은 수필 2024.08.16

베개 / 엄옥례

베개 / 엄옥례   무언가가 나를 부른다. 남편 쪽으로 손을 뻗으려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마음만 허우적거리다가 가까스로 깨어난다. 길게 한숨을 쉬고 가슴을 쓸어내려도 놀란 심장은 가라앉지 않는다. 옆을 바라보니 휑한 기운만 감돌고 베개만 덩그러니, 내 곁에 남편이 없음을 알린다. 남편과 부부의 연을 맺을 때,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조건이나 배경은 그다지 따지지 않았다. 그저 베개 하나에 머리를 맞대고 같은 꿈을 꾸는 것이 행복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외모는 달라도 남편과 나는 지향점이 비슷했다. 그래선지 이불 한 겹에 베개 하나일지라도 원앙금침이 부럽지 않았다. 꽃잠은 봄날처럼 달콤했다. 시간이 흘러, 사랑이라는 마취가 약효를 다하자 하나의 베개에 두 사람의 머리를 얹는 게 점점 불편해지기..

좋은 수필 2024.08.16

잠은 힘이 세다 / 권현옥

잠은 힘이 세다 / 권현옥아직 안 자도 되는 시간이구나. 저렇게 불빛이 찬란하잖아.거실로 나가 보았다. 앞 동의 불빛이 띄엄띄엄 살아 있다. 불이 꺼진 창은 벽이 되었지만 편해 보였고 부러웠다. 창이 살아 있는 집을 보면 반가우면서 위안이 되었다. 하루의 끝을 잠에 밀어 넣고 어제와 오늘의 선을 긋고 싶은데 배턴 터치가 순조롭지 않다. 손을 뻗어도 잠이 받아주질 않는다. 괜스레 불안한 호흡, 터덜터덜, 급기야 의욕도 없이, 그러다 앞 동의 불빛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아직 안 자도 돼.잠이 쏜살같이 달려와 낭패를 봤던 시절은 젊었을 때다. 형편없는 체력은 잠에게 참패를 당했고 ‘코끼리나 말처럼 두세 시간만 자도 살 수 있다면 좋을 텐데.’라며 욕심을 채우지 못한 일상을 잠 때문이라며 아쉬워했다. 잠을 ..

좋은 수필 2024.08.15

치목 / 최명임

치목 / 최명임   이날을 위하여 몇 생이나 거쳐 왔을까. 오동의 현신을 눈으로 어루만진다. 열두 현을 퉁기니 하르르 피어나는 만상의 소리, 강물처럼 흘러간다. 뉘 가슴 어드메를 건드려 파문을 일으키려고….  경북 고령에 있는 우륵박물관을 찾았다. 소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곳, 먹먹한 가슴으로 역사의 장을 돌아보았다. 해설사가 뒤꼍에도 꼭 들러보고 가란다. 우륵박물관 뒤꼍에 염천 불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곳에 오동목이 개개의 판목으로 나뉘어 나른하게 늘어서 있다. 서른 즈음에 불려 왔다는 오동목이 하오의 땡볕 아래서 진을 빼고 있다. 일 년 차는 빳빳하게 서서 눈으로만 투덜투덜, 애송이 곁에 삼 년 차가 가탈 부린다. 오 년 차는 그들을 바라보며 싱긋이 웃는다.  오동나무는 본디 목질이 가..

좋은 수필 2024.08.15

노을종이 울릴 때 / 김희숙

노을종이 울릴 때 / 김희숙 그리움으로 노을을 만난다. 도심 한복판 빼곡한 고층 사이로 붉은 조각이 설핏설핏 보이다가 언덕을 벗어나면 그렁그렁 추억이 고인 핏빛 하늘이 안겨온다. 그런 날에는 어디선가 하교를 알리던 종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댕~댕~댕. 소리를 좇아 눈길이 먼저 서쪽으로 달려간다.  도시의 삶에 두 발이 지친 날, 마음을 앞장세워 노을을 찾아간다. 태양과 나란히 달리면 해당화 꽃잎을 간질거리는 갯바람과 자갈 굴리는 파도가 거북바위에 부서지는 서쪽 끝에 가 닿는다. 사람들은 그곳을 영광 백수해안도로 노을길이라 부른다. 우리나라 어디 가나 지는 해는 볼 수 있으련만 해안선 따라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노을 지는 광경을 한시도 놓치지 않는 길이라 얻은 이름일 것이다. 쿵쾅대는 심장소리가 느껴지..

좋은 수필 2024.08.09

골목길을 걷다 / 허정진

골목길을 걷다 / 허정진​​​ 골목길은 삶의 자궁이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도 존재하는 골목들. 세상으로 향하는 길은 골목에서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가 만들었을까? 햇볕 따사로운 곳에 외딴 집, 먹을거리를 찾거나 말동무를 만나러 걷다 보면 바위를 피하고 냇물을 건너뛰며 작은 길이 만들어졌으리라. 오랜 시간을 보내며 그 길 주위로 이웃들이 하나둘 들어서고 골목은 골목으로 이어져 마을이 되고 세상을 만들어내었다.​골목길은 만남이고 소통이다. 인연을 만들고 관계를 형성한다. 가고 오는 숨 탄 것들의 통로이고 울고 웃는 인생극장의 여백이다. 길목을 지나는 바람의 층계마다 사람 살아가던 흔적과 풍경들이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다. 그들만의 이야기와 숨결. 몸짓과 냄새들이다. 과거와 현재도, 미래와 영혼..

좋은 수필 2024.08.04

시간을 읽다 / 박종희

시간을 읽다 / 박종희  시간은 기억의 방이다. 아주 내밀하게 드나들 수 있는 나만의 통로다. 문을 열면 아스라이 멀어져 간 추억이 머물고, 손을 뻗으면 놓치고 싶지 않았던 순간이 닿을 듯한 그리움의 곳간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애써 떠올렸던 흔적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오히려 통증만 남겨두는 시간의 속을 나는 아직도 알 수 없다. 그래서일까. 지나간 시간을 열면 그리움과 아픔이 한꺼번에 몰려든다.  하루가 다르게 조바심 내던 시간이 마침내 어머니의 손을 놓았다. 중환자실에 누워 계신지 8개월 만이었다. 단, 1분 만에 생과 사를 정확하게 갈라놓은 시계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초침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이승에서 어머니를 볼 수 있는 시간은 사흘뿐이다.  한정된 시간은 야속하게도 융통성이 없다...

좋은 수필 2024.07.30

돌꽃/김은주

돌꽃                                                                                                                                                                           김은주 저녁 찬거리를 구하러 길을 나선다. 길을 가다 보면 늘 집 앞 횡단보도 앞에서 내 발길이 묶인다. 붉은 신호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호를 기다리는 내내 내 발치에 와 끄떡이는 그림자 때문이다. 그림자는 움직일 때마다 길어졌다 또 짧아지곤 한다. 지는 해에 그림자는 더 길어지고 내 발등을 덮었다가는 가뭇없이 사라지기도 한다. 파란 불이 켜졌다. 흑백 건반 같은 횡단보도를 탕탕 튕기며 생기발랄한 미니..

좋은 수필 2024.07.29

‘도’와 ‘또’ 사이/박영란

‘도’와 ‘또’ 사이/박영란    “요즘도 글 쓰세요.”  “아직도 글 써?”   사람들이 이렇게 물어오던 시절이 있었다. 글 쓰는 일은 나에게 맞지 않는 곧 그만둘 일처럼 보였을까. 그냥 가볍게 물어오는 그 인사말 속에 들어있던 ‘도’의 어감은 늘 강조사처럼 들렸다. 마치 ‘아직도 그 남자를 만나니?’ 하는 확인처럼. 만나지 말아야 할 남자를 아직도 만나고 있는 듯한, 현재진행형인 나의 글쓰기에 대해 다분히 회의적인 시선이 담겨있었는지 모른다. 두 권의 책을 내었을 쯤에야 근황에서 ‘도’ 는 사라졌다.   요즘은 도의 환생처럼 ‘ㄷ’하나가 더 붙어 ‘또’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거듭되는 행위를 나타내는 이 부사가, 로또에 당첨되고 또 당첨된 그런 기염처럼 들렸다면 좋았을 텐데. 네 번째가 되는 책 「책..

좋은 수필 2024.07.29

열무가 있는 여름 / 배혜숙

열무가 있는 여름 / 배혜숙    햇살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날씨는 싱싱하다 못해 퍼덕퍼덕 살아있다. 그래서 여름은 밝다. 오만한 하늘이 세상을 굽어보는 날, 열무김치를 담는다. 냉장고 속, 여러 개의 김치통에서 제각기 다른 맛의 열무김치가 익어가고 있는데 시장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무청이 생생한 열무를 산다. 씹으면 아삭아삭 상큼한 맛을 낼 것 같은 연한 줄기와 그 줄기에 매달린 파릇한 초록의 잎사귀가 생명의 소리로 나를 부른다. 가지런히 묶여서 좌판 위에 놓여 있는 열무를 보면 생각 없이 두 단을 사고 만다. 열무를 풀어헤치자 식구들이 한심한 듯 쳐다본다. 여름내 밥상 위에 올린 반찬은 거의 열무김치였다. 끼니때마다 열무 비빔밥이나 열무 국수, 심지어는 샌드위치에도 열무김치를 듬뿍 넣어주었다...

좋은 수필 2024.07.28

그 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 국명자

그 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 국명자  봄은 산골짜기에서 맞닥뜨려야 한다. 잠시 들르거나 멈추어 선 길손이어도 안 된다.새벽 미명부터 땅거미 내려앉아 어두움이 짙게 깔릴 때까지, 마루와 마당으로 시시각각 다른 모양 되어 들르는 봄의 미세한 모습들을 눈치챌 수 있는 오두막에서 살고 있다면 딱 좋겠다. 고샅으로 내달린다 해도 논두렁 밭두렁이 종착지가 되고, 이마에 손 얹어 먼 눈 뜬다 해도 앞산 뒷산 자락에서 멈추는 그런 산골 삶이라면 더욱 좋겠다.자그마한 남향 집, 낮은 울타리 두른 작은 마당에 서 있으면 가만가만 몸 뒤척이기 시작하는 봄의 첫 기척을 듣는다. 나무들을 깨우는 거센 바람은 당당하게 입성하는 봄의 첫 발자욱 소리다. 간단없이 불어대는 그 바람은 냉기와 침묵만으로 일관하던 골짜기가 드디어 기적..

좋은 수필 2024.07.28

곰배 / 정서윤

곰배 / 정서윤    아무리 예쁘게 보려고 해도 볼품이 없다. 뭉텅한 나무토막에 긴 자루 하나를 쿡 박아 놓은 저 물건! 슬쩍 봐도 못생겼고 자세히 보면 더욱 못난이다. 사람이든 연장이든 인물 보고 평가할 것은 아니지만, 못난 건 못난 것이다.나의 어릴 적 별명은 곰배였다. 별명이 곰배인데 사람들은 이름인 양 곰배라 불렀다. 내가 엄마 뱃속에서 이 풍진 세상으로 나올 때 도대체 어떻게 생겼었기에 곰배라는 별명을 얻었을까? 내 기억에 없는 증조할머니께서 저 물건의 이름을 내게 별명으로 붙어주고 세상을 뜨셨으니, 어디 물어볼 곳도 없어 답답할 노릇이다.초등학교에 가서도 이름은 출석부에만 올려놓고 곰배를 명찰처럼 달고 다녀야 했다. 그건 순전히 윗마을에 살던 반장 글마 때문이었다. 글마는 서윤이라는 고운 내 ..

좋은 수필 2024.07.27

등신불 / 신성애

등신불 / 신성애바위산을 올랐다.가끔씩 바람이 불어 왔으나 땀으로 몸을 젖게 하는 초여름이었다. 바위투성이 사이로 메말라 비틀어져 분재가 되어 있는 나무의 모습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가늠할 수조차 없는 시간을 비바람에 홀로 부대끼며 살아온 나무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아득한 몸짓이었다. 여느 산등성이에 의연하게 하늘을 이고 선 푸른 소나무가 아니었다. 쭉 뻗어 가지 못하고 웅크린 옹이진 나무는 안으로만 아픔을 삭혀온 사람의 형상을 닮은 것 같았다. 새의 깃털에 안겨 가다 제 무게에 힘겨워 바위틈에 떨어져 내린 씨앗이리라. 서산으로 넘어가는 자투리 햇살을 받아 제 한 몸 움직이기도 힘든 곳에 싹을 틔웠으리라. 몸은 바위틈새에서 옴짝달싹 못했지만 마음은 구름 따라 흘러가다 이슬로 내리다가 소낙비가 되어 땅속..

좋은 수필 2024.07.27

비녀 / 배혜경

비녀 / 배혜경   빗장이 살포시 풀리며 한옥 문이 열리고 있다. 거칠어 보이는 나뭇결이 문을 타고 흘러내린다. 성숙한 여인의 머릿결처럼 그늘 짙은 나뭇결에 눈을 바투 대었다. 결을 따라 세로로 또박또박 새겨진 ‘진순분’이라는 글자가 들어온다. 이 집에 살았던 처녀의 이름일지도 모른다.어느 임이 오셨기에 기다랗게 질러져 있었을 빗장이 살그머니 열리고 있는 걸까. 흑백 사진 속, 오래된 나무대문이 이십여 년 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에게로 기억의 빗장을 열어 준다.외할머니는 햇살 좋은 날이면 마루 끝에 앉아 계시곤 했다. 방금 세수한 것 같은 얼굴로 다소곳이 앉아 있는 자태는 백자 화병 같았다. 수줍음을 타고 목소리 한 번 크게 낸 적이 없는 분이지만 어디에 계시든 쉽게 눈에 띄었다. 뒷모습만 보아도 할머니가..

좋은 수필 2024.07.27

우거지 사랑 / 송미심

우거지 사랑 / 송미심       한창 붉은 꽃무릇이 지천이다. 그 꽃을 배경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어댄다. 몸매 고운 아가씨도 아니고 우아한 옷맵시로 멋진 자세를 취하는 유명 모델은 더더욱 아니다. 카메라를 쳐다보며 스스로 어수룩한 모습에 쑥스러운 중년 여인은 연신 눌러대는 셔터 소리에 흠칫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실물보다 낫게 찍힐 것을 바라고 있다. 휴일이라 쉬고 싶을 텐데 남자는 행사장에 함께 가겠다고 사진기부터 챙긴다. 여자가 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던 사람인데 웬일로 새벽부터 서둘러댔다. 시간에 늦지 않으려면 승용차로 두어 시간을 달려야 하는 꽤 먼 거리였다. 여자를 목적지에 내려놓고 남자는 사진기를 들고 총총히 사라졌다. 주변을 미리 살펴 사진 찍을 만한 곳을 찾아두려는 것이다...

좋은 수필 2024.07.26

즉경 / 배혜경

즉경 / 배혜경                                                                                                                                                                                                                                         붉은 등대 하나 솟는다. 뜨겁고도 서늘한 시간이다. 시간을 분절할 수 있다면 나는 이 시간을 잘라서 주머니에 넣고 살고 싶다. 붙잡아 두고 싶은 시간 위로 속도를 낮추어 미끄러진다. 무작정 안겨드는 길을 맞바람 삼아 달리고 있다. 오후 늦게 출발했더니 여섯 시를 훌쩍 넘어서야 도시..

좋은 수필 2024.07.26

못난이 백서 / 노정숙

못난이 백서 / 노정숙  싹둑, 머리를 커트했다. 내 20대 스타일이다. 그 푸르던 시절에도 긴 머리 찰랑이며 여성미를 뽐내보지 못했다. 선머슴처럼 짧아진 머리를 보며 남편은 그게 뭐냐고 난리다. 얼굴이 함지박만 해 보인다나. 요즘 얼굴 작게 보이는 게 대세인데, 못생긴 얼굴을 다 드러냈다고 핀잔이다. 이 남자에게 립서비스를 기대하지는 않지만, 자기는 정직하다며 매운 말만 한다. 내 참, 못생긴 것 다 아는데도 호시탐탐 기회를 잡아서 상기시킨다. 집에서 헤어밴드로 머리를 올려붙일 때마다 그런 스타일은 잘 생긴 사람이 하는 거라나. 이렇게 말본새 없는 사람과 삼십 년을 넘게 살다보니 나도 많이 여물어졌다. 웬만한 말폭탄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사실은 못생겼다는 데 대해서 면역이 있다. 어릴 때 오빠들한테 ..

좋은 수필 2024.07.26

바가지 / 강여울

바가지 / 강여울  눈비가 번갈아 다녀간 뒤라선지 주유소 세차장에 차들이 줄을 섰다. 기름을 넣고 차례를 기다리며 자동세차터널로 들어가는 차를 바라본다. 얼룩 먼지를 뒤집어 쓴 차들이 터널을 통과하면 말갛게 세수를 한 아이처럼 나온다. 내 앞 차의 뒤를 이어 세차터널 입구로 들어선다. 세차터널은 차가 시동을 끄고 수동적 자세를 취해야 움직이기 시작한다. 일상생활에서 씻기는 모든 것들은 ‘나 죽었소’ 하고 몸을 맡기는 법이다. 물을 뿌리고 걸레질을 하며 차가 씻기는 동안, 나는 비오는 골방에 앉은 듯 고요히 생각에 잠긴다. 정신없이 달려온 내 삶이 빠른 영상으로 지나간다. 세차기는 바람으로 물기를 쓸어내리고 목욕한 아이의 엉덩이를 두드리듯 나가도 좋다는 신호를 보낸다. 들어 갈 때와는 달리 깨끗해진 차 유..

좋은 수필 2024.07.26

홀로서기 / 장수영

홀로서기 / 장수영아침 안개가 들녘위에 이불처럼 누워있다. 안개 속에 잠긴 절집을 기대하며 팔공산 자락에 구름처럼 머무는 거조암을 찾았다. 절 초입에 들어서면 가지런한 담장너머로 반쯤 가려진 영산전이 단아하게 앉아있다. 그러면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듯 마음이 바빠진다.영산루 앞에 손을 모으고 섰다. 한 발 돌계단에 올라서려는데 물 흐르는 소리가 난다. 구름 한 점이 내려앉은 돌확에 감로수가 찰랑거린다. 한 모금 입에 머금고 속세에서 찌든 영혼을 말끔히 씻어내고 돌계단을 올라가니 석탑 뒤로 영산전이 민얼굴을 드러낸다. 단청도 하지 않은 수수한 모습이 따뜻한 남편의 품 같이 느껴진다.영산루를 거쳐 계단을 오르면 석탑이 영산전 앞에 단아하게 서 있다. 석탑에는 불자들이 한 장 한 장 매듭을 지어놓은 소원 띠를..

좋은 수필 2024.07.25

구두 / 정경자

구두 / 정경자벗어놓은 구두에도 표정이 있다. 작고 하찮게 생각하는 신발에도 주인의 삶의 방식이나 철학이 고스란히 배어 있음이다.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첫 대면일수록 인상은 참으로 중요하다. 첫인상이라면 흔히들 얼굴이나 옷차람일 떠올린다. 얼굴이나 옷차림이 의도된 것이라면 땅바닥에 붙어 옷에 가려진 채, 무심해질 수 있는 차림새는 신발인 셈이다. 그것으로 나는 사람들의 습관이나 개성, 성품까지도 미루어 짐작 해본다.남편의 구두 때문에 우리 집에는 며칠째 한랭전선이다. 싸움의 발단은 남편이 구두 뒤축을 꺾어 신는데서 비롯되었다. 올바르게 착용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벗은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황이 딱 남편의 유들유들한 성격을 닮았다. 모질지 않는 유순한 심성 때문에 오늘날 한 이불을 덮는 식구가 되었지만 남..

좋은 수필 2024.0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