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녀 / 배혜경
빗장이 살포시 풀리며 한옥 문이 열리고 있다. 거칠어 보이는 나뭇결이 문을 타고 흘러내린다. 성숙한 여인의 머릿결처럼 그늘 짙은 나뭇결에 눈을 바투 대었다. 결을 따라 세로로 또박또박 새겨진 ‘진순분’이라는 글자가 들어온다. 이 집에 살았던 처녀의 이름일지도 모른다.
어느 임이 오셨기에 기다랗게 질러져 있었을 빗장이 살그머니 열리고 있는 걸까. 흑백 사진 속, 오래된 나무대문이 이십여 년 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에게로 기억의 빗장을 열어 준다.
외할머니는 햇살 좋은 날이면 마루 끝에 앉아 계시곤 했다. 방금 세수한 것 같은 얼굴로 다소곳이 앉아 있는 자태는 백자 화병 같았다. 수줍음을 타고 목소리 한 번 크게 낸 적이 없는 분이지만 어디에 계시든 쉽게 눈에 띄었다. 뒷모습만 보아도 할머니가 분명하다는 표지는 쪽 찐 머리에 한결같이 꽂혀 있던 은비녀였다. 그리 길지 않은, 민무늬의 소박한 장신구, 그것이었다.
열 살 계집아이가 할머니 방에 들어가려다 문턱에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은비녀의 포박에서 막 풀려난 긴 머리카락이 참빗에 쓸리며 미세하게 떨다가 가녀린 어깨를 타고 방바닥까지 흘러내리고 있는 참이었다. 창호지를 넘어 들어온 햇살이 머리카락에 반사되며 가루로 흩어졌다. 예순을 넘겼을 외할머니의 머리카락은 군데군데 흰색이 덧칠되어 있어 더욱 야릇한 감흥을 불러왔다.
천경자 전(展)을 보면서 기억 속의 그 장면이 되살아났다. 화가의 화폭에 자주 등장하는 뱀과 여인 앞에 섰을 때였다. 화가 자신의 한이고 업이자 수호신을 상징하는 뱀의 형상들이 본능적으로 꿈틀대고 있었다. 형형색색 수많은 뱀이 이글대고 있는 여인의 머리에는 녹록하지 않은 삶을 지탱하여 살아가게 할 만한 힘이 도사리고 있었다.
인생에는 정해진 행로가 어느 정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외할머니에게는 한 지아비와 해로하지 못할 길이 주어졌던가 보다. 남편을 세상 밖으로 먼저 보낸 후, 세상 물정에 발맞추기에도 이재에 눈 밝히기에도 서툴렀던 아낙은 키워내야 할 아이들 때문에라도 다른 가정을 꾸려야 했다. 남들의 이목과 구설은 어찌하고 풍상(風箱)의 삶을 홀로 견디셨을까.
어머니의 오래된 사진첩에서 빛바랜 흑백 사진을 본 적이 있다. 한복을 수수하게 입은 젊은 외할머니는 자개농처럼 윤기 나는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빗어 쪽을 찌고 새치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 눈에 띄는 미색(美色)에 단아한 품새까지 동네 아낙들 속에서도 돋보이던 외할머니 뒤로는 청진에서 한약방을 하던 남편이 서 있었다. 사진으로만 본 외할아버지다.
생생한 기억 속의 외할아버지는 따로 있다. 외할머니 생의 마지막 동반자다. 성품이 꼬장꼬장하셨던 외할아버지는 어느 날인가부터 한 손에 긴 나무 지팡이를 짚고 다니셨다. 오줌주머니를 차고 걸음을 놓을 때면 장대 같은 몸이 한쪽으로 기우뚱해 보였다. 할머니는 몸이 성치 않은 남편을 밤낮으로 보살폈다. 오줌줄을 끼워 드려야할 때면 담이 크지 못한 할머니의 손길은 둔해지기만 했다. 할아버지는 통증으로 신경이 날을 돋우고 그럴 때면 한밤이고 새벽이고 어머니가 달려가 대신 달아 드리며 날 선 마음자리를 다독여 드렸다.
외할아버지는 몇 해를 그렇게 고생하다 영영 돌아오지 못할 걸음을 하셨다. 의지할 곳 잃은 외할머니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지고 머리카락을 똬리로 튼 비녀는 한일자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이후로 할머니의 긴 머리카락을 본 기억이 없다.
외할머니는 여든을 넘기고 돌아가실 때까지 빗장을 지르듯 그 비녀를 꽂고 계셨다. 생의 마지막 동반자를 보낸 후 정물처럼 붙박여 있던 비녀는 홀로 가는 먼 길에 누워 계셨던 중환자실에서도 침묵으로 빛났다. 비녀를 정갈히 꽂으며 물결치는 마음을 흐트러짐 없이 매무시하였을까. 불만을 토로하거나 하소연이라도 할 성정이 못 되니 평생 가슴에 눌러 재웠을 한숨의 더께가 얼마였을까. 은장도 같은 비녀를 뽑아 잠시 방바닥에 내려 두고 오래도록 참빗질을 하던 할머니의 어깨 위로 햇살이 그려내던 세월의 무늬가 선연(鮮姸)하다.
불꽃같은 순간의 인상은 세월의 바람을 타고 머리카락과 방바닥에서 사금파리 빛을 쪼개어내던 은비녀를 질러 놓은 머리도 곱상이었지만 실뱀처럼 남실대는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뒷모습은 내게 잊히지 않는 초상이다. 오래 품어 오던 꿈을 피워내듯 한 송이 백합화로 피어나던 해사한 그 옆얼굴도 또렷하다.
누구든 마음에 빗장 하나쯤 걸고 산다. 빗장은 걸기 위해 있다지만 서서히 풀어 헤칠 때 안겨 오는 환희를 감추기란 쉽지 않다. 살면서 만나는 미더운 사람에게 마음의 빗장을 풀게 되듯 잠재워 둔 힘을 쏟아 붓고 싶은 일 앞에서도 알게 모르게 걸어 둔 온몸의 빗장을 풀 수 있으면 좋겠다. 오감의 빗장, 육감의 빗장, 영혼의 빗장까지도.
빗장이 열리고 있는 틈새로 여인의 정갈한 아미가 살짝 보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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