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경 / 배혜경
붉은 등대 하나 솟는다. 뜨겁고도 서늘한 시간이다. 시간을 분절할 수 있다면 나는 이 시간을 잘라서 주머니에 넣고 살고 싶다. 붙잡아 두고 싶은 시간 위로 속도를 낮추어 미끄러진다.
무작정 안겨드는 길을 맞바람 삼아 달리고 있다. 오후 늦게 출발했더니 여섯 시를 훌쩍 넘어서야 도시를 벗어나기 시작한다. 고속도로로 올라 한동안 달리자, 하루치 시간을 불사르는 해가 지평선에 솟아 앞 길을 밝혀 준다. 해거름이면 마음이 서성댄다. 다 버리고 말 시간이 아쉽다는 생각에 뭐든 어서 해야 할 것만 같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어스름 가운데에 앉는다. 이런 저런 얼굴을 떠올리고 이런 저런 상념에 취해 보지만 최고의 즐거움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 소박한 의식이 지고 있는 시간의 놀 속에서라면 고만고만한 일상생활마저 숭고한 제의로 격상되는 느낌이 들곤 한다.
하루치 이별을 고하는 해의 발뒤꿈치를 눈으로 한 발 한 발 따라간 적이 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재빨리 변신하는 마을 경관을 내려다보며 시선이 허둥대었다. 어둑발이 조금씩 짙어질수록 장난감처럼 엎드려 있는 파란 지붕 집들의 이쪽저쪽에서 노란 불이 하나 둘 들어오고 있었다. 극진한 점등식이었다. 지상의 별빛이 천상의 별빛보다 밝았다. 하루치 삶의 전쟁터에서 승전보를 안고 식구들도 하나 둘 귀환하고 있었다. 낡은 옷자락에 먼지바람을 묻히고 노란 등불을 점화하는 일상의 의식이 날마다 피고 지는 누추한 삶을 명랑하게 밝혀 주고 있었다.
꽃이 지듯 매미 소리가 지듯 시간도 진다. 매달려도 부질없는 일이다. 지는 꽃송이에서는 사랑의 송가가, 지는 매미 소리에서는 생명력의 찬가가 들린다.
시간은 어떤가. 지나가 버리는 것들, 스쳐 가서 돌아오지 않을 것들 앞에서 우리는 어줍은 내용이나마 이야기를 재생하고 어렵사리 편집하고 추억의 그릇을 빚어 간직하고자 한다. 즉시卽時를 사는 우리는 등짝을 보이는 시간을 잡아 두려고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사소한 것 하나도 붙들어 두고 싶어 순간을 영원으로 묶으려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쇠를 녹슬게 하는 시간의 괴력에 무엇으로 맞붙어 보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을까. 지는 것들에 경배를!
겨울 마이산에서 돌아오던 길의 즉경卽景이 가로수길처럼 기억에 펼쳐졌다. 탈속한 나뭇가지들에 잔설이 내려앉아 있었다. 장식을 털어낸 담대한 성장盛裝이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며 갈팡질팡하던 마음을 다독여 주었다. 어둠이 서서히 내리던 차창 밖으로 정경情景이 스치듯 달아나고, 내 눈에는 순한 눈물이 차 올랐다. 꼬리를 감추고 있는 시간이 애상스레 여겨졌던 것이다. 모든 걸 거둬들이는 시간, 모든 게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모든 곳에 평화가 내려앉는 시간, 그 수굿한 시간의 손을 잡고 싶었다.
저 멀리 주홍빛 해가 시간을 거슬러 천천히 뒤로 달리고 있었다. 내가 앞질러 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한동안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는데 어느 순간이었던가. 마지막 기염을 토하더니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눈 깜짝할 새였다. 즉물卽物이었다. 잘 붙잡고 있었다 싶었는데 야멸차게 내 눈을 떨치고 떠나 버렸다. 떠나보낼 것은 그렇게, 떠나야 할 때도 그렇게 하라고 말하는 것이었을까.
사위四圍가 회색의 품으로 안기기 시작했다. 물상들이 한층 선명해졌다. 가을걷이 끝낸 밭에도, 낡은 모자 눌러쓴 허수아비 두 팔에도 손에 잡힐 듯 올망졸망한 산등성이가 완만한 곡선을 드러냈다. 낮게 또 깊게, 평등하게 평화롭게 세상의 사물들이 손에 손잡고 고립의 평원에서 마음을 잇고 있었다. 허공에는 전신주들이 버스와 나란히 달리며 기나긴 또 하나의 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길 위에 회색의 팔을 크게 벌일수록 하늘도 풍만하게 안겨 누웠다. 세상에 돋아난 목숨있는 것들의 윤곽이 시나브로 선명해졌다. 하늘과 길이 접신을 한 듯 끝도 없이 이어져 하나의 배경이 되고 있었다. 경계도 없이, 한순간도 머무르지 않되 한순간도 벗어나지 않는 배경이 되고 있었다. 우리의 길도 서로 그런 배경이 된다면 괜찮게 살았다 할 수 있을까. 내 의식의 배경엔 어떤 채색이 있나 생각해 본다. 파스텔 톤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회색이어도 좋겠다.
차를 세울 뻔했다. 몸피를 키운 해가 제 목구멍으로 힘겹게 넘어가고 있다. 세월을 먹는다는 것은 뜨거운 불덩이 하나 꿀꺽 삼키는 일이다. 무채색 그 무한한 배경이 존재를 일으켜 세워 주는 시간 위를 느리게 달리고 있다.
예약도 하지 않고 길을 나섰던 것이다. 닥치는 대로 하자는 생각으로 가평선착장 가장 가까운 동네에 도착하니 밤 열한 시가 다 되었다. 인생은 계획대로 다 되는 것이 아니다. 저 높은 곳에 있는 누군가의 계획이 있을 뿐, 나의 계획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벌레 있으면 싫다고 야단인 아이들에게는 잘된 일인지, 아주 근사한 공간에 머물게 되었다.
재잘대는 소리가 복층의 높은 천장에 부딪혀 울려 퍼진다. 눈앞의 얼굴들을 새삼스레 쳐다본다. 또 다른 즉경이다. 차를 달려오며 바라본 저녘놀과 아이들의 아침 햇살 같은 얼굴이 겹쳐 오고 지는 것들과 피는 것들이 교차한다. 꽃도 지고 시간도 지고 매미 소리마저 지는데 고독이라는 그림자는 지는 법이 없다. 길을 돌아서 돌아갈 때까지 지지 않는 것 하나쯤 안고 있어서 너끈히 좋다.
우리의 마음도 한순간의 풍경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모른다. 즉심卽心이다. 애초에 정처 없는 것들, 바람 끝자락에 매달려 나붓대는 것들에 마음을 붙들리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창밖에는 밤하늘과 하나가 된 검은 강이 낮게 엎드려 뒤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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