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5/06/14 3

채혈실 소묘/황진숙

채혈실 소묘/황진숙 난 매일 피를 뽑는다. 피를 봐야 끝이 난다.“팔 주세요. 채혈하겠습니다.”“왼쪽 팔이에요? 오른쪽 팔이에요?”“노다지 다니는데 무슨 피검사여.”“쪼금만 뽑아유. 겁나게 많이 뽑네.”“피가 왜 이리 시커멓대유.”“한번에 성공하세요. 제가 좀 예민해요.” 한 번의 채혈에 제각각의 요구사항이 보태진다. 각양각색의 문답으로 채혈실이 소란스럽다. 그나마 이 정도는 소박하다.“이봐요 애기엄마, 아니 어떻게 했길래 팔에 멍이 잔뜩 들은 거예요.”며칠 전에 채혈한 아주머니다. 혈관을 찌른 거라 꾹 눌러야 피가 멎는다고 얘기해 줬건만, 들은 체도 안 하고 마구 문지른 탓이다. 근육주사가 아니라서 문지르면 멍이 든다고 설명해줘도 막무가내다. 내 잘못이란다. 알아들으면서도 내뱉은 말을 주워 담기가..

발표작 2025.06.14

흘러가는 대로/황진숙

흘러가는 대로/황진숙 묶는다. 가득 찬 쓰레기들이 튀어나오지 않게 손아귀에 힘을 준다. 웬만하면 봉투를 하나 더 사용하라는 남편의 지청구에도 요지부동이다. 마지막 쓰레기봉투라도 되는 양 배불뚝이가 되도록 밀어 넣고 우격다짐으로 묶어 버린다. 오랜만에 대청소라 치울 게 산더미다. 헌 옷가지며 잡동사니며 책들을 추려서 자루에 넣는다. 옆에서 뒤적거리던 남편이 아직 쓸만한데 버리냐며 만류한다. 자리만 차지한다는 이유로 그예 쓸어 담는다. 아무리 소용이 다 했다고는 하지만 물건들도 연이 닿아 여기로 왔을 텐데. 동고동락한 추억도 깃든 시간도 한데 묶어 버리는 내 모습이 순간, 생경하다. 쓸모를 다한 마지막이란 이리 무감각한 것인가. 그동안 버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연을 묶어 왔을까. 노끈으로 칭칭 감으며..

발표작 2025.06.14

자선전을 읽다/허정열

자선전을 읽다/허정열 ​돌아서서 가는 사람의 등을 본다. 꽤 오랜 세월을 견뎌낸 등은 산의 등줄기처럼 굽어 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삶의 무늬가 느릿느릿 출렁인다. 한 번도 소리 내어 목소리를 들려준 적 없는 등이 뒤뚱이며 말을 걸어온다. 수시로 흔들렸을 바람의 시간과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먹구름의 무게가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다. 고독과 외로움이 깃든 쓸쓸함이 덮여있다. 정면으로 마주칠 때는 볼 수 없었던 사연들이 무딘 봉분처럼 숨어 있다. 어떤 말보다 따뜻한 온기가 가득하다. 한 사람의 삶이 층층이 쌓여 오래된 서가를 보는 듯하다. 세월의 무늬를 그려 넣으며 경전 같은 일기를 혼자 써 내려가느라 닳아진 어깨. 진실과 정성이 담긴 등을 읽으며 여러 가지 상상으로 골몰해진다.등은 내가 써서 ..

좋은 수필 2025.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