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서기 / 장수영
아침 안개가 들녘위에 이불처럼 누워있다. 안개 속에 잠긴 절집을 기대하며 팔공산 자락에 구름처럼 머무는 거조암을 찾았다. 절 초입에 들어서면 가지런한 담장너머로 반쯤 가려진 영산전이 단아하게 앉아있다. 그러면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듯 마음이 바빠진다.
영산루 앞에 손을 모으고 섰다. 한 발 돌계단에 올라서려는데 물 흐르는 소리가 난다. 구름 한 점이 내려앉은 돌확에 감로수가 찰랑거린다. 한 모금 입에 머금고 속세에서 찌든 영혼을 말끔히 씻어내고 돌계단을 올라가니 석탑 뒤로 영산전이 민얼굴을 드러낸다. 단청도 하지 않은 수수한 모습이 따뜻한 남편의 품 같이 느껴진다.
영산루를 거쳐 계단을 오르면 석탑이 영산전 앞에 단아하게 서 있다. 석탑에는 불자들이 한 장 한 장 매듭을 지어놓은 소원 띠를 두르고 있다. 불자가 아니면 어떠랴. 사는 일이 녹녹하지 않을 때는 누구라도 소원을 빌어보고 싶은 마음이리라. 내 마음도 소원 띠에 걸어두고 합장을 한다. 함께 지고 가던 짐을 내게 맡기고 훌쩍 가버린 남편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어서이다.
사람이 살면서 매번 돌다리를 두드리고 건널 수는 없다. 무심히 건너는 경우가 다반사 일 것이다. 그러다 때로는 복병이 도사리고 있어도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던 남편이 암이라는 복병에 손 쓸 겨를도 없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자신의 몸 가장자리에 암이 비집고 들어와 영양분을 독식하고 몸집을 키우며 비수를 들이대는 것을 그는 방심했던 것이다. 청천벽력이라는 말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그의 몸에 자리 잡은 암은 뾰족하게 날을 세우고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바로 옆 자리로 터를 옮겼다. 그 날 이후 남편은 날마다 수첩에 메모를 하고 있었다. 나는 메모장에 빼곡하게 써놓은 그의 유언장 같은 수첩을 훔쳐보았다. 날마다 무엇으로 못미더운 마음을 풀어놓았을까. 미덥지 못한 어린 아들이 서둘러 어른이 될 수 없는데도 남편은 마음이 바빴다. 내 안에 갇혀서 바깥세상을 모르던 나도 애가 탔다. 한 페이지 씩 그날의 빈칸을 메워가던 글들이 어느 듯 멈춰지고 나는 캄캄한 흙더미 속에 마른 장작 같은 그를 묻고 가슴이 아리도록 울었다.
매일 술독을 안고 사는 그의 스트레스를 왜 몰랐을까. 매사에 정확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의 그에게 사업은 피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유연한 사고(思考)를 가지지 못한 남편은 사업이 자신에게는 맞지 않는 일이었다. 건축이 직업인 남편은 건축에만 충실할 뿐이지 거래(去來)라는 산 앞에 서면 손해를 보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한 남편은 돈을 떼이기도 하고 약속을 어겨 일이 진행이 되지 않으면 자신이 한 약속에 얽매여 못 견뎌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술로 자신을 달래곤 했다. IMF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때도 고민은 혼자 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엇이든 그를 통해서 문밖 세상을 내다보았다. 뙤창 같은 창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그저 내가 알고 싶거나 보고 싶은 것만 보았다. 일찍이 그가 쳐놓은 울타리는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줄 알았다. 언제나 든든하리라 믿고 있었다. 편안함에 길들여진 나는 점점 나태해지고 중년의 남편 건강이 무너지리라고는 의심조차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가벼운 바람에도 기둥뿌리가 뽑힐 듯 흔들거렸다. 그래도 혼자 잘 할 수 있을 거라며 남편과 걸었던 약속도, 나에게 걸었던 기대도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들에게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야겠다는 다짐도 아직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오기도 전에 힘이 빠져 허둥대기 시작했다.
몸피를 줄여가는 모래시계처럼 하늘은 온통 비어지고 무력함이 온 몸을 휘감았다. 그 날부터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을 헤매기 시작했다. 큰 나무가 가려주던 그늘의 고마움을 깨닫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회는 겁 없이 덤비는 나에게 그 어떤 것도 쉽게 내어주지 않았다.
남편의 일을 채 익히기도 전에 늦은 밤 지하 중앙난방 보일러가 멈추었다. 아이들과 세든 사람은 냉골에서 오들거리며 밤을 보내고 원인도 알 수 없는 고장 난 보일러는 전원을 켜면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나를 삼키려 들었다. 지하의 불기 없는 바닥에 앉아 지새는 섣달의 밤은 길었다. 아침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는 악몽 같은 시간은 견뎌내는 것 말고는 어떤 것도 없었다.
매 순간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조용히 염송을 했다. 다 잘 될 거라고. 그리고 남편을 떠올려 보았다. 남편이라면 어떤 결정을 내릴까. 마음을 편하게 가지면서 그 어려움도 감내 할 만큼 의 용기를 주신 신의 섭리에 감사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게도 장애물을 헤치고 갈 지혜가 차츰 생겨났다. 그리고 어떤 어려움도 나의 몫이라면 피하지 말고 해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영산전에 든다. 부처님께 삼배를 올린다. 영산전은 부처님 뿐 아니라 오백나한님이 계시므로 해서 많은 불자들이 기도를 하고 있다. 한 분 한 분 나한님께 눈을 맞추고 공손히 인사를 한다. 오백 분의 나한님은 해학적이고 익살스러운 표정들이라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부처님과는 다른 편안한 표정들로서 저절로 편안해진다. 그렇게 스치다가 내 눈과 딱 마주치는 나한님을 만난다. 그 분은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옷자락의 선이 부드러우며, 양손에 염주를 쥐고 나부죽이 바라보는 명안존자님이시다. 그분 앞에 멈추어 서서 눈을 맞춘다. 기대어 응석이라도 부리고 싶다.
두 손을 모으고 내 안에 있는 그를 불러본다. 어려울 때마다 거짓말처럼 내 손을 잡아주었으니 또 손을 잡아 줄 것이다. 속절없이 가버린 무정함을 원망하던 마음도 구불구불한 나한님의 길을 따라 돌면서 편안해진다. 이제는 그를 보내 주기로 한다. 보내 주어야 할 때도 훨씬 지났다. 다시 오지 않을 시간들에 연연하지 않기로 한다. 이제 홀로서야 한다는 것을 곱씹으며 탑을 돌고 또 돈다. 몇 바퀴를 돌았는지 기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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