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12 20

숫돌을 읽다 / 허정진

숫돌을 읽다 / 허정진    어느 시골 마을에서 빈집들을 둘러본 적이 있다. 잠시 거주할 요량이었는데 '편리'보다 '운치'를 찾고 있었다. 마을 끝자락에 자그마한 집이 마음에 들었다. 겉과 뼈대는 그대로 두고 실내 일부만 개량한 옛집이었다. 일자형 안채와 아래채, 손바닥만 한 텃밭까지 갖춘 집 구조가 아기자기하다. 더구나 집 울타리가 요즘 흔치 않은 대나무로 병풍처럼 둘러싸여 고즈넉한 풍경도 곁들었다. 바람결에 댓잎 흐르는 소리, 마당 한구석에 기울어진 오후의 볕살이 넉넉하고 느릿한 시공간을 연출하고 있었다.장독대 옆에 수돗가가 있다. 예전에는 우물터였음직한 정겨운 그림자들, 돌확과 돌 빨래판이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다. 여름철이면 수박이나 참외를 동동 띄워놓기도 하고 아이들 줄 세워 어푸어푸 등물도 켜던..

좋은 수필 2024.12.28

풍화 (風化) / 박종희

풍화 (風化) / 박종희  오래된 사찰이 안겨주는 편안함과 축적된 시간이 느껴지는 단청의 멋스러움에 끌려 절을 찾는다. 고찰(古刹)의 역사만큼이나 마음이 깊어지는 곳. 하얀 눈이 소복하게 내린 날, 마곡사에 발길이 닿았다. 눈 위에 먼저 길을 내준 사람들의 발자국을 밟으며 들어서는데 속세를 벗어나 법계로 들어선다는 해탈문이 반긴다. 사찰의 정문 역할을 하는 해탈문과 천왕문을 통과해 경내에 들어섰다.  고작해야 30여 분 거리에 있는 마곡사를 얼마 만에 왔는지. 코로나가 발생하기 훨씬 전에 다녀갔으니 족히 5,6년은 지난 것 같다.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비스듬한 듯 불안해 보이던 5층 석탑도 그대로다.  연말이라 그런지 한 해의 안녕을 기원하며 탑돌이 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들을 뒤로하고 대광보전으로 ..

좋은 수필 2024.12.26

종소리 - 강숙련

종소리 - 강숙련 ​     누가 시(詩)를 언어로 그린 그림이라 했다. 밀레의 ‘만종’ 앞에 서면 ‘소리로 그린 감동’이란 표현으로 그 말을 써 보고 싶어진다. 문화의 차이는 감성의 차이도 만든다는데, 종소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비슷한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 같다.  때로는 격렬하게, 때로는 감미롭게 다가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 중에 종소리만한 것이 있을까. 형체도 없는 것이, 잡아 가두려야 가둘 수도 없는 것이 마치 청동의 꽃에서 나는 향기라고나 할까. 교회나 사찰의 새벽종소리를 들으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통도사 절 밑에 있는 어느 호텔로비에서 제야의 종소리를 들었다. 경영주인 지인(知人)이 술잔을 가볍게 부딪치며 덕담을 건넸다.  “올해는 좋은 글 많이 쓰십시오. 수필이란 종소리 같은 ..

좋은 수필 2024.12.25

위장 / 곽흥렬

위장 / 곽흥렬 청개구리는 계절에 따라 몸 빛깔을 달리한다. 카멜레온의 변신술이라든가 대벌레나 나뭇가지사마귀 같은 곤충들의 위장술은 실로 감쪽같다. 하도 정교하다 보니 웬만큼 세밀한 관찰력이 아니고서는 일쑤 속아 넘어가게 되어 있다. 이들의 위장은 무엇보다 적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함이 그 목적이다. 물리적 약자가 생존을 보장받기 위한 수단으로는 위장만 한 무기도 없을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위장이야말로 먹이사슬의 하위 계층이 상위 계층에게서 목숨을 지켜낼 수 있는 최대의 호신술일 터이다. 꼭 방어의 목적만은 아니다.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공격의 방편으로도 위장은 아주 훌륭한 전술이 된다. 뱀이며 악어 같은 포식동물들의 위장은 강자가 지닌 최적의 무기다. 특히,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기 위해서..

좋은 수필 2024.12.25

음식에 관한 말

음식에 관한 말[ㄱ]   감투밥; 그릇 위까지 수북하게 높이 담은 밥.  감화보금; 농어나 숭어 같은 생선의 살을 난도하여 펴서, 채소를 놓고 말아 쪄서 토막토막썰어 놓은 음식.  강고도리; 물치의 살을 오이 모양으로 뭉쳐 말린 식료품.  강조밥; 좁쌀로만 지은 밥.  거멀접이; 찰수수 가루를 반죽하여 둥글넓적하에 만들어  끓는 물에 삶아 낸 뒤 팥고물을  묻히거나 전병으로 부쳐 소를 넣고 접은 떡.  건건하다; 맛이 좀 짜다.  겪이; 음식을 차리어 남을 대접하는 일.  곁두리; 농부, 일꾼이 끼니 외에 참참이 먹는 음식.  고수레; 1.흰 떡 따위를 반죽할 때 끓는 물이 골고루 가게 하는 일2.무당이 굿할 때나 들에서  음식을 떼어 던지며 부르는 소리, 또는 그 일.  고수레떡; 고수레하여 반죽한 덩..

우리말 2024.12.24

*사람을 이르는 말

*사람을 이르는 말                                                                                                                                                                                               李 鎭杰 作成 순 우리말에는 다른 어떤 영역(領域)보다도 사람을 이르는 말이 매우 다양(多樣)해 한 곳에 모아보았다. 이 많은 말속에는 조상들의 언어생활(言語生活)에서 뛰어난 비유(比喩)와 해학(諧謔)이 넘치는 여유 있는 생활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한자어(漢字語)는 제외하였음.가난뱅이:‘가난한 사람’을 얕잡아 이르는 말.가납사니:된 소리 안 된 ..

우리말 2024.12.24

나이 호칭 풀이

나이 호칭 풀이   2-3세 해제 (孩提) 어린아이.10세 충년(沖年) 열 살 안팎의 어린 나이15세 지학 (志學) 15세가 되어야 학문에 뜻을 둔다는 뜻.16세 과년(瓜年) 혼기에 이른 여자의 나이20세 약관 (弱冠) 남자는 스무살에 관례를 치루어 성인이 된다는 뜻.20세 방년(芳年), 묘령(妙齡) 스무 살을 전후한 여성의 나이30세 이립 (而立) 서른살 쯤에 가정과 사회에 모든 기반을 닦는다는 뜻.30세 입지(立志) 뜻을 세우는 나이32세 이모년(二毛年) 흰머리가 나오는 나이40세 불혹 (不惑) 공자는 40세가 되어서야 세상일에 미혹함이 없었다는 데서 나온 말.48세 상년(桑年) 뽕나무 상(桑)의 파자를 보면 열 십(十)이 네 개, 여덟 팔(八)이라 48세.50세 지천명 (知天命) 쉰살에 드디어 천명..

우리말 2024.12.24

숫자와 단위를 나타내는 우리말

숫자와 단위를 나타내는 우리말 온 : 100 - 백(百)즈믄 : 1,000 - 천(千)거믄, 골 : 10,000 - 만(萬)잘 : 100,000,000 - 억(億)가마 : 갈모나 쌈지 같은 것을 셀 때 100 개를 이르는 말.갈모: 비가 올 때에 갓 위에 덮어쓰는, 기름에 결은 종이로 만든 물건.펴면 고깔 비슷하게 위는 뾰족하며 아래는 동그랗게 퍼지고, 접으면 쥘부채처럼 홀쪽해진다.쌈지: 담배 또는 부시 따위를 담는 주머니. 종이, 헝겊, 가죽 따위로 만든다. 갓 : 비웃, 굴비 따위의 10 마리. 고사리, 고비 따위의 10 모숨. *비웃: 식료품인 생선으로서의 청어.강다리 : 쪼갠 장작 100 개비를 한 단위로 이르는 말.거리 : 오이, 가지 따위의 50 개를 이르는 단위.고리 : 소주 10 사발을 한..

우리말 2024.12.24

양태(樣態:모양)에 관한 말

양태(樣態:모양)에 관한 말[ㄱ]   가년스럽다; 몹시 궁상스러워보이다.거년스럽다  가든하다; 1.(물건이나 차림 따위가)알맞게 가볍고 단출하다2.마음이 가분하고 상쾌하다.거든하다.  가량없다; 1.어림이 없다. 대중함이 없다 2.어림이나 짐작을 못하다.  가뭇없다; 1.눈에 띄지 아니하다 2.간 곳을 알 수 없다 3.소식이 없다 4.흔적이 없다  가살; 가량스러운 야살.@언행이 얄망궂고 되바라져서 잘 어울리지 않는 태도.간사하고 얄미운 태도.  가즈럽다; 아무 것도 없으면서 온갖 것을 다 갖춘 듯이 뻐기는 태도가 있다.  가직하다; 거리가 조금 가깝다. (반대어; 멀찍하다)  가칫거리다/대다; 작고 단단한 것이 조금씩 살에 닿아 걸리다.촉각에 조금씩 거칠게 느껴지다.  각다분하다; 일을 하여 나가는데 ..

우리말 2024.12.24

무문 / 김미향

무문 / 김미향비가 내린다. 허공이 젖고 나도 젖는다. 저녁나절에 깃든 적막한 폐사지. 부처가 없다고 사찰이 아닐까. 범종이 보이지 않는다고 그 소리를 듣지 못할까. 폐허라도 언제나 금당이고 대적광전인 것을. 빈 윤회의 공간을 지키는 불탑이 서럽도록 장엄하다.세월이 삼층 석탑의 기상만은 꺾지 못했다. 맨 위 노반의 한 모서리만 풍상에 내주었을 뿐 흐르는 시간에서 비켜난 듯하다. 임진왜란 때 재가 되어버린 법수사의 맥을 잇고자 석탑은 부처를 대신해 천 년이나 생불의 삶을 살아왔다. 자신을 버려둔 세상이 노여울 만도 하련만 하루하루 웅숭깊은 숨을 가다듬으며 불법을 전하고 있다. 순정한 시간 앞에 엄숙해진다.매장 문화재 보호 및 발굴, 훼손의 행위를 금한다는 안내문이 눈길을 보내온다. 석탑과 빈터를 에두르는 ..

좋은 수필 2024.12.23

시와 시조 사이, 웃음과 눈물 사이/이승하

시와 시조 사이, 웃음과 눈물 사이  ㅡ시집,『쌍봉낙타의 꿈』 2011년, 박성민 『고요아침』                                                                                                                                                                        이승하(시인, 중앙대 교수)                                                                                          서양에서 시의 시작은 서정시가 아니었다. 서사시와 극시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호머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긴 서사시요 극적인..

평론 2024.12.19

망치학 개론/허정진

망치학 개론/허정진“탕! 탕! 탕!” 망치 소리다. 심장이 덜컹덜컹 울려온다. 광야의 천둥소리도, 전장의 총탄 소리도, 굿판의 꽹과리 소리도 아니다. 둔탁하면서도 옹골진 타격감이 허공을 가로질러 손바닥에 고스란히 전해온다. 두 번 세 번 가만히 듣고 있으면 어느덧 낯섦의 거부감은 사라지고 저 멀리 생(生)의 울림처럼 다가온다. 그 누군가의 땀방울과 거친 숨소리가 뱉어내는 삶의 소리가 틀림없다. 고목 둥치를 붙잡고 홀로 씨름하는 딱따구리처럼 망치가 저 혼자 우는 소릿결이다. 저 소리를 따라가면 세상 누구도 삶의 길을 잃지 않을 것 같다. 그 소리는 묵직하고 단단하다. 철성(鐵聲)이다. 아무렴 망치가 못보다 약하거나 물러서는 안 될 일이다. 짧고 단순해서 오히려 경쾌하고 명쾌하다. 해토머리 얼음장에 쩡쩡 금..

좋은 수필 2024.12.18

허창옥의 수필 읽기

허창옥의 수필 읽기  1-1. 김순분 아지매의 비닐봉지 국지성호우가 있겠다는 예보가 있었다. 실제로 나라의 곳곳에 말 그대로 국지적으로 폭우가 내리고 있다. 워낙 다른 곳에 비가 많이 내리니 거들지 않을 수 없었던가. 비 없기로 유명한 이 지역에도 비가 많이 내린다.빗물막이 차양 속에서 뒤꼍의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단풍나무 높은 가지에 검정비닐봉지가 걸려서 비바람에 사정없이 휘둘리고 있다. 잎이 한창 무성한지라 그렇듯 온몸을 찢으며 펄럭이지만 벗어날 가망이 영 없어 보인다. 그 무생물이 불현듯 생물로 보인다. 생물이 아니라도 그렇다. 어딘가에 걸려서 제 살을 찢고 있는 걸 보는 건 여간 불편하지가 않다. 불편한데, 고통을 덜어줄 방도가 없다. 가지는 높고 비는 세차게 내린다. 항상 그랬다. 타자의 ..

좋은 수필 2024.12.17

어느 상자로부터/ 조은수

어느 상자로부터/ 조은수     배송이 완료됐다는 문자였다. 며칠 전 온라인에서 주문한 복숭아가 도착한 것이다. 시장까지 가지 않고 내 방에 앉아 클릭 한 번으로 원하는 물건이 배달되는 일은 이제 도시인의 일상이 된 지 오래였다. 종국엔 인간을 무력하게 만들 시스템일지언정 애초에 나는 운전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재래시장이나 마트서부터 복숭아 상자를 머리에 이고 올 자신도 없었다. 이미 무력한 인간 부류인 내가 이 빈틈없이 편리한 배달 문화를 포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클릭 한 번에 공산품도 아닌 생물이 내 집 앞에 도착했을 뿐 아니라 그 향기로 입 안에 침이 고일 때, 배달 시스템에 대한 내 경외심은 극에 달했다. 그래봐야 달콤한 복숭아 한쪽 맛볼 기대가 전부였으나 마음은 복숭아밭을 뛰노는 아이처..

좋은 수필 2024.12.16

아버지의 가방/최수연

아버지의 가방/최수연   아버지는 외로운 등대였다. 망망대해를 향해 사계절 홀로 서서 나가고 들어오는 배들이 위험하지 않게 불을 비춰주는 등댓불이었다.  심장마비로 하늘나라로 가신 지 십수 년이 지났어도, 어려운 환자에게 헌신하던 모습이 선하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 늦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정원 유실수들이 시샘하듯 실하게 맺을 즈음이었다. 자식들은 철부지였고 하루아침에 가장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무엇에 비유하랴.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환자를 돌보고 화장실에 갔다가 쓰러지신 걸 뒤늦게 발견하고 응급조치했지만, 소용없었다. 날벼락이었다. 하루도 쉬는 날 없이 위급한 환자가 생기면 한밤중에도 먼 길을 마다하지 않으셨으니 과로가 누적되었던 것 같다.  요즘은 소도시에서도 응급을 다툴 때 연락하면 구급차가..

좋은 수필 2024.12.15

등의 자서전/장미숙

등의 자서전/장미숙  메마른 대지를 손으로 쓸어내리자 까슬하게 뭉친 세월이 잡힌다. 물기가 말라버린 딱딱한 표면, 탄력도 윤기도 잃어버린 지 오래다. 고난이 할퀴고 간 상처가 곳곳에 유적처럼 자리 잡은 대지 위로 90년 날들이 유구하다. 중심을 가로지르는 산맥은 이미 휘어지고 굳어서 지형마저 바꿔놓았다. 융기한 뼈를 사이에 두고 대지는 굴곡의 세월을 그러안은 채 동그랗게 말려 있다. 손에 닿자마자 싸한 아픔을 몰고 오는 건 한 사람의 일대기이다. 좁은 대지가 수십 권의 책이 되어 기나긴 서사를 전한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색과 활자가 달라진다. 어둠이 깃든 페이지 속에 글자들이 방황한다. 대지를 덮은 침울한 색, 흐릿한 글자들의 뒤엉킴은 혼돈의 날들을 전하며 페이지마다 주석이 빼곡하다. 세월이 견고히..

좋은 수필 2024.12.12

종지/윤상희

종지/윤상희  굳게 잠겨 있는 문을 연다. 매캐한 곰팡이 냄새가 기다렸다는 듯 달려든다. 오랫동안 밀폐된 곳간이라 음습한 기운마저 감돈다. 천장에는 거미줄이 세월을 엮고 있고, 사용하지 않은 집기 위로 쌓인 먼지 더께가 시간을 헤아리게 한다. 쌀뒤주며 장독 같은 온갖 세간들이 감방을 지키듯 어둠 속에서 고요를 삼키고만 있다.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넓은 플라스틱 함지로 눈길이 머문다. 차곡차곡 쟁여 있는 놋그릇의 얼룩무늬 위로 어머니의 환영이 살아나는 듯하다. 손때 묻은 어머니의 유산에 누구하나 탐하거나 동정하는 이는 없었다. 어머니의 애장품에 탐심을 내는 일은 성역을 범접하는 것쯤으로 믿어서 그럴까 아니면 한물 간 것으로 치부해서였을까.어머니는 유기에 애정이 남다른 분이셨다. 세밑이면 으레 제수를 담을 ..

좋은 수필 2024.12.10

11월/배한봉

유진의 詩가 있는 풍경 11월배한봉늑골 뼈와 뼈 사이에서 나뭇잎 지는 소리 들린다햇빛이 유리창을 잘라 거실 바닥에 내려놓는 정오파닥거리는 심장 아래서누군가 휘파람 불며 낙엽을 밟고 간다늑골 뼈로 이루어진 가로수 사이 길그 사람 뒷모습이 침묵 속에서 태어난 둥근 통증 같다누군가 주먹을 내지른 듯아픈 명치에서 파랗게 하늘이 흔들린다♦ ㅡㅡㅡㅡㅡ 나뭇잎지고 억새꽃도 말라 버썩거리는 가을 끝자락, 해도 많이 짧아졌다. 잎 다 내려놓은 나무들은 홀가분하기만 할까. 낙엽 밟는 소리도, 아련한 추억도, 정오의 햇살 속에 잠시 머물다가고, 뼈처럼 늘어선 가로수 사이로 스산한 바람이 종횡무진, 낙엽을 굴리며 휘파람을 분다.떠날 것들 다 보내고 난 뒤 허전하고 쓸쓸한 가을 끝자락이 ‘침묵 속에서 태어난 둥근 통증 같다’ ..

좋은 시 2024.12.06

운 / 박찬웅

운 / 박찬웅 바람에 따라 정처 없이 떠다닌다. 둥실 두둥실. 바람에 몸을 맡겨 그저 흘러간다. 새하얀 뭉게구름을 보고 있으면 그곳에 안기고 싶다. 푹신푹신할 것만 같으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허상이다. 안개가 하늘에 떠 있으면 그게 구름이다. 산에 걸쳐 있는 구름을 본 적이 있다. 그 산을 올랐을 땐 구름이 아닌 짙은 안개가 깔려 있었다. 생각과는 다른 구름의 모습은 마치 누군가의 본모습을 봤을 때와도 비슷하다. 멀리서 보았거나 말로 들었던 사람을 가까이서 실제로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이미지와는 다른 경우가 종종 있었다. 마치 구름과도 같이 가까이서 보았을 때와 멀리서 보았을 때는 차이가 있었다.​구름은 다양한 모양을 띤다. 양털 모양의 권적운, 줄무늬 모양의 권운, 흑색 구름은 고층운, 눈과 비를..

좋은 수필 2024.12.01

모탕, 그 이름만으로도 / 허정진

모탕, 그 이름만으로도 / 허정진   허연 날을 세운 쇠도끼가 하늘 높이 솟구친다. 온몸에 힘을 끌어모아 짧은 기합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내려치는 도끼날에 매섭고 날카로운 파동이 허공을 가로지른다. 도끼가 날아올 때마다 그 육중한 타격감에 질끈 눈을 감는다. “퍽”“퍽” 나무가 갈라지는 파열음과 함께 지축을 흔드는 충격력이 고스란히 모탕으로 전달된다. 의연한 묵언으로 받아내는 것 같지만 순간순간이 아프고 두렵다. 그때마다 수없이 흔들리고 까무러치고, 운명이라면 차라리 숙명으로 여기며 혼신의 힘을 다해 버티어 낸다. 오래전 산중 농막에서 몇 해를 보낼 때가 있었다. 겨울에는 아궁이에 불을 때서 온돌 난방을 해야만 했다. 방고래를 향해 훨훨 타오르는 장작불에 불멍의 멋과 낭만도 있었지만, 따뜻한 겨울을 나기..

좋은 수필 2024.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