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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등의 자서전/장미숙

에세이향기 2024. 12. 12. 10:26

등의 자서전/장미숙

 

메마른 대지를 손으로 쓸어내리자 까슬하게 뭉친 세월이 잡힌다. 물기가 말라버린 딱딱한 표면, 탄력도 윤기도 잃어버린 지 오래다. 고난이 할퀴고 간 상처가 곳곳에 유적처럼 자리 잡은 대지 위로 90년 날들이 유구하다. 중심을 가로지르는 산맥은 이미 휘어지고 굳어서 지형마저 바꿔놓았다. 융기한 뼈를 사이에 두고 대지는 굴곡의 세월을 그러안은 채 동그랗게 말려 있다.

손에 닿자마자 싸한 아픔을 몰고 오는 건 한 사람의 일대기이다. 좁은 대지가 수십 권의 책이 되어 기나긴 서사를 전한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색과 활자가 달라진다. 어둠이 깃든 페이지 속에 글자들이 방황한다. 대지를 덮은 침울한 색, 흐릿한 글자들의 뒤엉킴은 혼돈의 날들을 전하며 페이지마다 주석이 빼곡하다.

세월이 견고히 쌓인 틈새로 바람이 일고 햇볕이 내리쬔다. 대지를 훑는 거친 바람 소리가 들린다.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이 휩쓸리며 무너진다. 커다란 나무가 뚝뚝 부러지고 열매들이 떨어진다. 기름진 흙이 흩어지고 뒤엉키며 소용돌이친다. 논둑 밭둑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뿌리째 뽑힌 생명의 아우성이 천지를 뒤흔든다. 한차례 광풍이 지나간 후의 고요, 어둠을 등에 업고 고요는 몇 날 며칠 대지 위에 엎드려 있다.

대지가 꿈틀거린다. 안간힘으로 어둠을 밀어내느라 성한 곳이 없다. 그런데도 아랑곳하지 않는 절실함이 마침내 햇빛을 불러온다. 처참한 몰골로 기진맥진한 대지에서 가느다란 훈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상처에서 새살이 돋고 갈라진 틈에서 가쁜 숨이 터진다. 고난에 무릎 꿇지 않는 의지가 생명에의 태동을 불러온다. 다시 운명 앞에 우뚝 선 당당함 위로 바람이 길을 내고 물소리가 튀어 오른다.

부러진 나무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투박한 온기, 모든 것이 끝날 것 같은 광풍의 순간에도 자신이 품은 생명을 지키고자 했던 온기가 손에 전해진다.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지점마다 꿈틀거렸을 뜨거운 피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피가 일으켜 세운 육체의 한 부분을 침묵 속에서 바라본다.

손바닥에 힘을 주고 엄마의 등을 읽는다. 눈으로 보지 않고 귀로 듣지 못했던 한 사람의 그늘진 삶을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긴다. 읽는 동안 내가 기억하는 모든 일이 활자가 되어 등을 가득 채운다. 엄마는 차마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모두 등에 모아놓은 모양이다. 매끈하던 등이 이렇게까지 변하는 동안 하고 싶은 이야기는 얼마나 많았을까. 등이 꼿꼿했던 젊은 날의 엄마를 생각한다. 그리고 현재 철저히 시들어버린 90세의 노구를 바라본다.

몇 년간 누군가에게 등을 맡겨본 적이 없다며 엄마는 딸의 손을 빌려 등을 밀었으면 했다. 욕실 바닥에 웅크린 노쇠한 몸은 정물처럼 고요했다. 순조롭게, 혹은 평안하게 살아온 흔적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늙어간 모습이라고 하기엔 한없이 아픈 형상이다. 동그랗게 휘어버린 등은 한 사람의 지나온 역사를 고스란히 담았다.

그건 대지였다. 당신이 황폐해지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생명을 올곧게 키우려는 단단한 열망이 엄마의 등을 대지처럼 보이게 했다. 그랬다. 우리는 그 등을 발판삼아 엎어지고 고꾸라지면서도 끝내 일어서려 했던 나무며 꽃이었다. 비바람에 휩쓸리다가도 뿌리를 붙잡는 대지의 목소리를 듣곤 했다. 지형이 바뀌고 환경이 달라져도 중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척추가 으스러지는 고통 속에서도 가슴으로 품은 생명을 온전히 지키고자 했던 엄마의 생을 등에서 읽는다.

내게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동화 같은 건 없었다. 한창 아버지의 손길이 필요했을 때에도 아늑한 그늘을 가져보지 못했다. 젊은 나이에 병을 얻은 아버지는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버렸다. 가난은 파도처럼 집을 덮쳤고 아버지는 또 다른 엄마의 짐이 되었다. 작은 몸집의 엄마가 당신 키만큼이나 높은 지게를 지고 산길을 오르내릴 때 등은 벗겨지고 갈라졌으리라.

기름진 땅을 갖지 못했기에 척박함은 안팎으로 엄마의 힘을 앗아갔다. 거친 땅을 일구느라 손에서 호미를 놓지 못했던 날들은 그나마 다랑이 밭으로 거듭났다. 가파른 비탈에서도 키를 세우던 작물들처럼 엄마는 푸른 밭을 위해 흙을 움켜쥐고 땅에 매달렸다. 막다른 길은 또 다른 막다름으로 이어져 생을 갈구하게 된다.

학교가 파하고 집에 가면 반겨주는 건 가마솥에서 식어버린 고구마나 감자였다. 온기 없는 부엌은 엄마의 부재를 말해주었고, 말라버린 물동이는 엄마의 고단한 하루를 알려주었다. 아버지는 정신을 놓은 채, 면 소재지를 방황하고 있을 테고 동생들은 고샅 어디쯤에서 시간과 뒹굴며 배고픈 하루를 견디고 있을 터였다.

감자를 보자기에 싸 들고 산으로 향하는 길에서 열 살을 갓 넘긴 나는 벌레와 뱀 때문에 엄마를 부르고 또 불렀다. 웃자란 풀이 가로막고 있는 좁은 산길을 따라 엄마의 발자국은 가장 높은 곳까지 이어져 있었다. 옷자락에 풀을 매달고 다랑이 밭에 다다를 즈음, 산 그림자는 서서히 밭둑을 내려오곤 했다.

키 큰 모시나 들깻잎 사이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엄마의 등에는 뙤약볕이 남긴 지문이 깊었다. 으깨어진 감자를 앞에 두고 엄마는 끙, 눕혔던 등을 비로소 잠시 세웠다. 수많은 계절과 헤아릴 수 없는 날들 속에서 엄마의 등은 햇볕에 그을리고 비바람에 깎이며 눈보라에 얼었다 녹기를 반복했다.

어느 여름날이었던가. 밭둑에 엎드린 엄마를 보았다. 강렬한 뙤약볕에 색이 바랜 얇은 티셔츠가 등을 간신히 가려주고 있었다. 까맣게 탄 목덜미 밑으로 퍼진 퍼런 멍 자국이 갈라진 대지를 연상하게 했다. 아버지가 현실과 망상 사이를 오갈 때면 엄마의 등에는 푸른 멍이 점점이 피어났다.

멍은 새벽으로 이어졌다. 비손하는 엄마의 등은 경건함으로 다시 차올랐다. 문틈 사이로 들어오던 푸른 새벽빛 속에서 장독대를 오가는 발걸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의지를 살리기 위한 안간힘이 또 다른 하루를 깨우는 모습을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나는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렸고 어른들의 삶을 엿보느라 마음 한쪽에 그늘 샘이 움푹 파였다. 하지만 누군가 엄마를 보호해야 한다는 절박함은 어린 내게 자꾸 푸른 멍을 보도록 부추겼다.

대지가 재생을 포기한 채 자포자기에 빠져버리면 생명은 사라진다. 시들시들 마르다가 끝내는 황폐한 땅으로 변하고 말리라. 엄마의 기도와 염원은 갈라진 대지를 메워 물이 흐르게 했다. 그 대지에서 우리는 다시 뿌리를 넓혀갔다. 비옥한 토지는 아니었지만 다독이는 손길의 따뜻함을 기억했다.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나도 대지가 되었다. 흔들리는 날들 속에서 등을 온전히 지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되었다. 그건 눈물로 통하는 길이기도 했다. 모든 걸 포기해버리고 싶은 순간은 시시때때로 찾아왔고 그때마다 한 사람을 떠올렸다. 엄마는 많은 눈물을 헛되이 버리지 않고 대지에 뿌렸다. 정신력으로 버틴 기력마저 더는 지탱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땅을 움켜쥐고 흙빛이 되어갔다.

아들과 함께 고향에 갔을 때 마늘밭에 있는 엄마를 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등이었다. 땅에 붙을 듯 쪼그려 앉아 안간힘으로 마늘을 뽑는 느린 손놀림, 90세의 등은 이미 하강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상승과는 멀어진 날들이 엄마의 머리 위에서 흩어지는 걸 바라보았다.

그날 밤, 메마른 대지가 되어버린 엄마의 등을 닦고 또 닦았다. 고단한 날들을 견뎌낸 대지는 푸른 생기를 잃고 곳곳에 까만 폐허를 남겼다. 거죽만 남은 살갗 위로 흐르는 서사를 다 읽어낼 수는 없었다. 주석으로도 해석하지 못한 이야기들은 엄마의 무의식으로 깊이 숨어버렸다.

튀어나온 척추 아래 어린 시절의 내가 보인다. 발밤발밤 오르던 산길, 그때는 걸핏하면 미끄러져 무릎에 상처가 나곤 했다. 풀밭을 헤치느라 손가락도 성할 날이 없었다. 피가 맺힌 무릎을 어루만져주며 날 바라보던 엄마의 젖은 눈빛, 이제는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그날들을 등에서 읽는다. 산 밭을 내려오는 엄마와 나의 그림자 뒤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빠르게 지나간다. 그리고 이제 엄마는 아흔의 고개를 힘겹게 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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