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거지 사랑 / 송미심
한창 붉은 꽃무릇이 지천이다. 그 꽃을 배경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어댄다. 몸매 고운 아가씨도 아니고 우아한 옷맵시로 멋진 자세를 취하는 유명 모델은 더더욱 아니다. 카메라를 쳐다보며 스스로 어수룩한 모습에 쑥스러운 중년 여인은 연신 눌러대는 셔터 소리에 흠칫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실물보다 낫게 찍힐 것을 바라고 있다.
휴일이라 쉬고 싶을 텐데 남자는 행사장에 함께 가겠다고 사진기부터 챙긴다. 여자가 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던 사람인데 웬일로 새벽부터 서둘러댔다. 시간에 늦지 않으려면 승용차로 두어 시간을 달려야 하는 꽤 먼 거리였다. 여자를 목적지에 내려놓고 남자는 사진기를 들고 총총히 사라졌다. 주변을 미리 살펴 사진 찍을 만한 곳을 찾아두려는 것이다. 방금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던 남자가 살며시 입꼬리를 치켜 올려 웃는다. 이어서 한마디 툭 던진다.
“우리 마누라, 여전히 이쁘네.‘
함부로 허튼소리를 하지 않는 남자다. 누구를 탓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랑을 늘어놓는 일도 껄끄러워 하는 사람이다. 기분을 맞춰 주기 위해, 입에 발린 말이나 달콤한 말은 닭살 돋아 스스로 견디지 못하는 사나이다. 그러니 살가운 말 한마디 듣기가 쉬우랴.
그런 남자 입에서 뜻밖에 애정 섞인 말이 튀어 나오다니, 부대끼며 살아온 세월이 남자의 눈에 콩깍지를 씌운 모양이다. 나이든 마누라가 제일 좋아하는 남편의 직업은 오래된 것들에 애정을 보이는 고고학자라는데, 이 남자도 혹 그런 취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더라도 아직 고운 시선을 버리지 않고 있는 남자가 미더워 보인다. 적어도 외양으로야 때깔 좋은 시절이 지나갔으니 마음의 빛깔이 곱지 않으면 그리 말하기 쉽지 않을 터이다. 눈가의 주름은 세월의 잔영으로 남아 얼비치더라도 그동안 얼키설키 들었던 미운 정 고운 정 덕분에 사진 속의 여자가 예뻐 보였을까. 앞으로도 한쪽 발을 엉뚱한 곳에 딛고 배반을 들먹이는 사람은 아닐 듯하다.
처음 만나던 날, 유난히 소복한 손이 탐스러운 총각은 시종일관 말이 없었다. 그저 쫑알대는 처녀의 입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기만 있었다. 섬마을 여선생이야 처음 보는 맞선 자리이니 설령 그날로 인연이 다한다 해도 아쉬울 것이 없다 싶어 신나게 떠들어댔다. 그 무거운 입이 오히려 처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의 크고 두툼한 손이 한 여자는 거뜬히 먹여 살릴 것 같았다.
‘말없음표’, 남자에게는 편리한 부호이지만 여자에게는 무척이나 인내심이 필요한 난수표였다. 매번 부딪치는 일들을 언어로 표현해 인수분해 하듯 풀어 해답을 찾아야하는데, 과정이 무시된 결과에만 만족을 해야 했다.
여자는 남자의 대화를 풀어갈 공통분모를 찾지 못해 가슴을 치는 날이 많았다. 남자가 사용하는 언어는 여자가 쓰는 말보다 일만 개나 적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설명이 생략된 구석은 높아진 눈치 단수로 대신 알아챘다. 도톰한 손과 발로 우직하게 가족을 지키고 있다는 신앙 같은 믿음이 아니었다면, 그 여자는 채워지지 않는 마음을 어찌 달랬을까.
어느덧 여자도 익숙해져, ‘말줄임표’가 소리만 높은 공약(空約)이나 살살 녹이는 말보다 훨씬 깊은 맛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슴으로 열리는 소리, 눈빛으로 이어지는 교감 속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어 서로 생각이 다르다고 앙탈을 부리지 않았다. 무용수가 아무리 빙글빙글 돌아도 넘어지지 않는 까닭은 한 곳에 눈길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듯이, 천방지축 나대는 가솔들이 듬쑥한 남자에게 기대어 버텨가는 일만으로도 고마울 뿐이다.
우거지가 겨우내 김치를 감싸 게미 나게 하듯 밖으로 튕겨나갈 말을 안으로 잡아 들여 가슴에 켜켜로 쌓던 남자는 여자를 감싸 곰삭게 하고 있다.
군둥내 나는 묵은 김치라도 여전히 입맛 다셔주는 남편, 그를 위해 이제 내가 우거지 되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