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1092

손 / 남영숙

손 / 남영숙금방 세수한 얼굴은 그대로 식물성이다. 일체의 상념을 씻어낸 표정이다. 톡톡 화장품을 바르는 목과 얼굴에는 경계가 없다. 그러나 수고한 손에겐 화장품이 아껴진다. 보습제 하나면 그만이다. 문득 노고에 비해 소홀히 대접받는 손에 대한 생각을 한다.사람들이 세상과 맺고 있는 모든 연결고리의 시작이 되는 신체의 부분이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손이 있어 가능해진다. 인간의 인프라인 것이다. 생활의 최전선에 있으면서 보병처럼 묵묵하다. 음식을 해내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글씨를 쓰며 반가운 이의 손을 덥석 잡고, 온갖 궂은일과 즐거운 일에 첨병으로 나선다.그렇게 세상과의 만남은 손으로 이루어진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엮어주는 최초의 동작도 손에서 시작된다. 처음으로 이성과 손을 잡던 따스하고 말랑..

좋은 수필 2024.07.25

누드모델 / 서은영

누드모델 / 서은영여자의 몸은 곡선이다. 부드럽게 흐르는 그 안에 뼈마디 관절이 들어 있을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둥근 아기집을 품고 지아비를 품고 세상마저도 품어내는 여자는 태생부터 곡선이어야 하는 숙명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신비로운 탄생의 공간을 품으며 동그랗게 무엇이든 갈무리하고 밖으로 내색하지 않는 동심원으로 가득한 여자의 몸, 가히 곡선의 겹침이다.시도 때도 없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곤 하던 여중생 때였다. 미술 시간은 시험기간이나 되어서야 다른 과목들처럼 책을 펼치고 약간의 이론 수업을 했다. 총각 미술 선생님이 ‘누드화란 말이지….’라고 설명하자 나른하던 교실 분위기가 일순간에 긴장감 속으로 빠졌다. 나비 한 쌍만 어울려 날고 있어도 공연스레 얼굴이 붉어지던 우리는 덜 익은 풋사과처럼 ‘푸풋..

좋은 수필 2024.07.25

지중해의 여름 / 한복용

지중해의 여름 / 한복용   푸른 물감을 맘껏 풀어놓은 듯한 지중해 해변에 나는 지금 앉아 있다. 이글거리는 아스팔트를 따라 호텔에서부터 십여 분쯤 걸어 나왔다. 멀리 타우루스산맥이 건너다보이고 바람은 그곳으로부터 줄기차게 불어온다. 망연히 서서 산 정상에 쌓인 만년설을 바라본다. 그동안 내가 맞이하고 싶었던 여름과의 거리는 눈 덮인 산과 안탈리아 해변의 사이만큼이나 멀었으리라. 이런 나의 생각에 동의라도 한다는 듯 바다는 주름진 얼굴로 끊임없이 내게로 향해 달려온다.이곳에 다시 오기까지 나는 몇 년을 망설였던가. 오고 싶은 마음만큼 간절히 떨어져 있던 곳이었다. 첫 방문은 10년 전, 겨울이었다. 그땐 성난 파도 위로 거대한 줄기를 뻗은 눈 덮인 타우루스산맥만 눈에 들어왔었다. 그 겨울에 글과 사진으로..

좋은 수필 2024.07.25

등대바라기 / 변재영

등대바라기 / 변재영 등대는 기다림이다. “철썩철썩 쏴아아~” 발밑에 초록빛 바다가 출렁인다. 내 유년의 아픔이 섬처럼 동동 떠있는 고향 바다, 그리움이 입맛을 당기듯 짭조름한 갯내가 후각을 파고든다. 쪽빛 바다에 갈맷빛 하늘, 기다림의 상징인 빨간 등대, 맴돌이치는 갈매기들의 군무, 갯바위를 훑는 파도의 몸짓까지 아버지의 짧은 생이 웅크린 낯익은 바다가 아니던가. 보물섬 남해 끝자락, 일명 몰갯넘이 내 고향이다. 모래톱에 일군 동네라 붙여진 이름이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작은 어촌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면청을 비롯하여 현대식 건물이 숲을 이루고 있다. 물매진 언덕을 오른다. 밤새 혼신의 힘으로 타올랐던 등대가 쉬고 있다. 철망 같은 섬에 갇혀 뭍을 향해 훨훨 날고 싶었던 까까머리 소년을 기억할까. 문득..

좋은 수필 2024.07.24

등대의 종교/허은규

등대의 종교/허은규 숱한 서사가 채워지듯 수면의 배들이 직선과 나선을 그린다. 바다로 나서는 걸음마다 나직한 독송이었다. 등대의 속살은 사시사철 치성하는 느티나무의 줄기이다. 높이 솟은 그 모양은 우미한 촛대이거나 돌을 정교하게 세공하여 도색한 이국의 기념품이다. 높은 등탑은 가뭇한 바다 수면을 명랑하게 일깨우는 청동의 종탑을 떠올리게 한다. 남해 바다로 낚시를 갈 때마다 등대는 비린내를 휘감고 어촌의 사절인듯 감읍하며 반겨준다. 방수의 페인트로 겹칠 된 탑실을 들여다보면 바깥의 사정과 무관한 침묵과 평온이 곤곤하게 공동을 채운다.단단한 육지를 밟고 선 여행자의 깜냥에 등대는 볼거리를 풍요롭게 북돋는 조형물이거나 내해를 조망하는 전망대로 보이기 쉽다. 바다 등롱이 내뿜는 절실함이 도보하는 행인의 심중으로..

좋은 수필 2024.07.24

하얀 소묘/서숙

하얀 소묘/서숙하얀색은 가장 많이 드러내며 동시에 가장 넓게 가려주는 바탕색이다. 꿈과 환상의 길목을 열기도 슬픔과 체념으 조용히 가누기도 하는 색, 솔직하면서도 은밀하고 세심하면서도 대범하고 흔하면서도 귀한, 색 아닌 색, 아니 색중의 색이다.    언제부터였을까, 여름철 따가운 햇살 아래에서 유난히 내 마음속의 흰색이 아롱아롱 눈부시다.    내 안의 흰빛을 따라 시간을 거스르면 바지랑대와 힘겨루기를 하면서 너울거리던 흰 무명천이 눈앞을 가득 막아선다. 온 폭을 이은 이불잇은 빨랫줄을 다 차지하고 정오의 햇살 아래 하얗게 빛났다. ​길게 누워 어른대는 그림자를 거느리고 옥양목의 홑청이 꾸득꾸득 마르면 나는 그 천을 동그르르 작은 몸에 감았다 폈다하며 들락거렸다. 그럴 때 하얀 천은 범선의 흰 돛이 되..

좋은 수필 2024.07.23

질그릇 / 배종팔

질그릇 / 배종팔     옛것이라 손을 타면 쉬이 깨질까 싶어 찬장 깊숙이 묵혀 둔 것이 잘못이었다. 아내가 며칠 집을 비운 사이, 설거지가 귀찮아 찬장의 그릇을 죄다 꺼내 썼다. 티끌만한 생채기도 큰 흠집이 되는 데 그릇만한 게 있을까. 내 살점이 떨어져 나간 것처럼 마냥 쓰리고 아팠다. 하지만 찬장 한켠에 갇혀 딸아이에게 대물림될 뻔한 그릇이 세상 밖으로 나와 한 식구가 된 것을 위안으로 삼는다. 아이 손 한 뼘 정도의 아가리에 굽이 짧고 허리가 배흘림인, 국수집에나 있음직한 그 질그릇은 이제 다른 그릇과 나란히 찬장에 자리 잡고 있다.거죽이 거무튀튀하고 모양마저 볼품없는, 골동품으로도 실생활 용기로도 쓰기에 어중간한 저 막사발을 아내의 외할머니는 어머니에게, 어머니는 또 아내에게 어떤 의미로 물려주..

좋은 수필 2024.07.23

젖 / 정서윤

젖 / 정서윤  저만치 걸어가던 어미가 다시 돌아온다. 낳아서 3주 동안 품고 있던 애를 내 품에 내어주고 직장으로 돌아가던 며느리였다. 와서는 누가 제 새끼를 빼앗기라도 한 것처럼 서러운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대더니 잠들어 있는 아기의 얼굴에다 종내는 눈물을 뿌리고 만다. 그런 어미의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손자 녀석은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르는 며느리의 안타까움을 지켜보기가 마음 아팠다. 보다 못한 내가 윽박지르듯 밀어냈다. "내가 잘 키울 테니 걱정 말고 얼른 가거라." 나도 새끼를 낳아 기른 어미인데 그 마음을 어찌 모르랴. 이제 겨우 돌아 나오는 젖을 가라앉히고 생이별하는 어미 심정이 오죽하랴 싶어 가슴이 메어져 온다. 내가 아무리 애지중지한다 한들 제 어미만 하겠으며 영양을 ..

좋은 수필 2024.07.22

외닫이 격자문/전옥선

외닫이 격자문/전옥선아래채가 사람이 살지 않아서 인지 많이 허물어졌다. 할 수 없이 중장비를 불러서 처리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집을 허물기전에 외닫이 격자문을 뗐다. 이 문은 할머니의 숨결이 고스란히 스며있는 유품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혼자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만사 음과 양이 있듯이 평생을 해로하기 위해서 짝이 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문은 짝도 없는 작은 외닫이 격자문으로 태어났을까. 할머니는 그래도 이 문을 무척 아꼈다.   햇빛이 비치는 봄이 되면 할머니는 항상 신성한 의식을 치르듯 창호지를 바르셨다. 마루가 있는 쪽의 때가 별로 타지 않은 양문여닫이는 안 하더라도, 축담에서 바로 방으로 들어가는 외닫이 문은 소창같이 깨끗하고 하얀 창호지를 바른다. 그 일은 보기보다 쉽지가 않았다. 먼..

좋은 수필 2024.07.22

은비녀/임 경 희

은비녀/임 경 희     산화된 세월을 건드리면 기억이 환원된다. 습기제거제를 넣으려고 옷장을 뒤적거렸다. 차곡차곡 놓인 옷들의 맨 아래 종이뭉치 하나가 보인다. 제법 도톰하고 길쭉하다. 겉포장을 벗겨 펼치니 수년이 지난 신문의 날짜가 눈에 들어온다. 내용물의 지난 세월을 말해 주고 있었다. 뽀얀 한지로 된 속포장지를 보고서야 외할머니의 유품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 유년의 기억을 고스란히 떠올릴 수 있는 할머니의 은비녀다. 오랜 세월에 은비녀의 색은 변했지만 할머니의 기억은 오히려 또렷하게 다가온다.푸르스름한 여명의 시각, 할머니는 방바닥에 신문지를 펼쳐놓고 긴 머리를 풀어 동백기름을 발랐다. 가르마를 반듯하게 타서 한 올의 흐트러짐 없이 참빗으로 싹싹 빗어 내리고, 쫑쫑 땋아서 말아 올린 후 쪽을 쪘다..

좋은 수필 2024.07.22

가얏고/박시윤

가얏고박 시 윤   바람의 파장에 오동나무 너른 잎이 흔들린다. 빛은 잎을 통과하지 못하고 그늘로 남겨진 지 오래다. 그늘에 가려진 민초들은 계절마다 고개 숙여 말없이 피고 졌다. 고을마다 바람을 동그랗게 말아 쥔 연보랏빛 오동의 꽃은 올 해도 가뭇없이 피어, 꽃등燈처럼 환하게 켜져 있다. 제 명을 다하고 바닥으로 내려앉아 마지막 숨을 다할 때까지도 꽃들은 멸망한 나라, 잊혀진 이야기들을 전하려 안간힘을 썼다.홀로 가야천 변을 걷는다. 나는 꽃들이 전해준 전설을 따라 며칠째 끼니도 거르고 가야로 흘러들었다. 꽃들이 최후를 맞으면서까지도 신음하며 읊조렸던 이야기를 찾고 싶었다. 오동나무가 품고 있다는, 멀고도 먼 옛날의 이야기에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천년의 소리는 무엇일까. 세월이 발효된 공명이, 깊은 뜻..

좋은 수필 2024.07.22

참빗 ㅣ신성애

참빗 ㅣ신성애 참빗처럼 촘촘한 햇볕이 내리쬐는 한가로운 오일장이다. 시장을 설렁설렁 한 바퀴 돌아보는 데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 길모퉁이를 돌자 유행 지난 중절모자에 헐렁한 윗도리를 걸친 노인이 망연히 앉아 졸고 있다. 발자국 소리에 화들짝 깨어난 노인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좌판의 먼지를 털어 낸다. 아직도 생의 가운데 자리한 오밀조밀한 잡화들이 가지런히 놓여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검붉은 낙죽(烙竹)이 선명한 빗 하나가 내게 가만히 말을 걸어온다.동네에서 산전댁이라고 불리던 할머니는 곱게 빗은 쪽머리의 정갈한 모습이었다. 물오른 당산나무가 연두 바람에 흔들리던 날, 산골 처녀는 헌헌장부(軒軒丈夫)에게 꽃이 되어 오셨다. 꽃향기에 취한 듯 그믐달은 아스라이 구름 가지에 걸리고 무논의 개구리는 밤새 ..

좋은 수필 2024.07.22

문 / 엄정숙

문 / 엄정숙     닫혀 있는 문안에서 나는 고립된 하나의 섬이 된다. 차미 적지에서 살아 나온 패잔병처럼 숨을 죽이며 집 안에 틀어박혀 지내고 있다. 그런 지 며칠이나 되었을까. 다람쥐 쳇바퀴 글리듯 매일 하는 일을 해치우고 나면 개운함도 잠시, 별의별 생각으로 탄력 없는 거미줄을 짜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그러다 낮잠이라도 설핏하게 들면 몽골의 기마병처럼 적진을 뚫고 다니는 꿈을 꾸기도 한다. 문밖의 일들이 궁금해지면 창문을 열고 바람과 햇살을 끌어들이는 게 고작이다. 다들 바깥세상으로 눈을 돌리고 마음 밖으로까지 뛰쳐나가려고 야단인데 나는 고층 아파트의 적막 속에서 물고기처럼 잠수나 하고 있다. 문득 종일토록 한 번도 열어 본 적이 없는 문을 본다.예전에 문밖에서 기다림을 배운 적이 있다. 할머..

좋은 수필 2024.07.22

아버지의 발/고경숙

아버지의 발/고경숙  가을날 오후, 거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 햇살이 따스하다. 햇살을 등에 지고 낮잠을 주무시는 아버지의 야윈 몸이 그림자처럼 고요하다. 짧은 바지 밑으로 드러난 아버지의 발은 까칠하고 거무죽죽하다. 깎은 지 오래되어 보이는 엄지발가락의 발톱 양끝은 살 속에 깊이 파묻혀있다. 살 속을 파고들어가 상처를 만드는 발톱이 문득 아버지의 피폐한 정신세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딱딱한 발톱이 살 속에 상처를 내는 것에 아랑곳없이 아버지는 곤한 잠에 빠져있다.아버지의 정신은 지금 어디쯤에 멈춰있는 것일까. 부처님 귀처럼 생긴 오른쪽 귀가 베개에 눌려있지만 아버지의 얼굴은 편안해 보인다. 아버지의 머리를 바로 놓아드리고 나는 아버지의 손등을 훑어본다. 창백해 보이는 손등에 굵은 핏줄이 도드라져 있다...

좋은 수필 2024.07.22

물두멍 / 송옥선

물두멍 / 송옥선     항아리에 귀를 바짝 대 본다. 몸 전체를 열어 색색 고르게 쉬는 숨소리가 들린다. 베란다 한쪽 구석에서 묵묵히 쓰일 때를 기다려 온 배가 둥그렇게 부른 두 개의 항아리. 장독을 제대로 갖추어 놓을 수도 그 항아리를 놓아둘 부뚜막도 딱히 없는 아파트라는 주거 공간에서 이 두 개의 항아리는 그동안 식구들에게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항아리를 굳이 가보처럼 끌고 다니기를 고집하는 나도 그동안 쓸모로만 따지자면 우리 집에 꼭 필요한 물건이라고 우기기에는 좀 무리가 있지 않나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사를 할 때면 귀중품이나 되는 것처럼 특별 대우를 하며 옮긴 까닭은 그 항아리에 의존해 살던 내 유년이 의식의 안쪽에 선명히 박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항아리를 떠올리며 ..

좋은 수필 2024.07.22

곁/김혜주

곁/김혜주  되돌릴 수도, 늦출 수도, 멈출 수도 없는 시간은 항상 나를 애태우게 한다. 들숨과 날숨 사이에도 가뭇없이 휘발되는 그것은 나의 얕은 기억 속에만 쌓인다. 스치듯 빠져나가 버리는 무언가를 잡으려고 애쓸 때마다 나는 ‘곁’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불안이 조금 누그러지고 왠지 겨드랑 안쪽으로 끼어드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진다.802호 할머니가 실버타운으로 입주한다고 했다. 같은 아파트에 살았고, 아침저녁으로 인사를 나누던 이웃이었다.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작별 인사를 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나는 반갑게 할머니를 껴안았다. 등이 굽은 할머니는 두 팔을 나의 겨드랑이 사이로 휘감은 채 등을 다독여 주었다. 수줍게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동안 한 꺼풀의 ..

좋은 수필 2024.07.19

그릇을 읽다 / 강표성

그릇을 읽다 / 강표성   시간의 지문들이 쌓였다. 침묵과 고요가 오랫동안 스며든 흔적이다. 때깔 좋던 비취색이 누르스름한 옷으로 갈아입어도 처음 품었던 복(福)자는 오롯하다. 홀로 어둠을 견딘 막사발을 들여다보니 그 안에 고인 시간이 주르르 쏟아진다. 한때, 골동품에 마음이 기운 적 있다. 눈요기라도 할 겸 옛 물건을 기웃거리기 시작한 건 고향 집의 그림들을 털린 후에 생긴 버릇이다. 우리가 도시로 이사한 후 누군가 사랑채의 그림들을 귀신같이 도려내 가버렸다. 이에 눈 밝은 큰집 오빠가 쓸 만한 물건들은 서울로 옮겼다는 소식이 뒤따랐고, 한참 뒤에야 시골집에 내려간 나는 살강 한쪽에 엎어진 그릇 하나를 품고 왔을 뿐이다.무시로 쓰던 막사발 그대로다. 이름 있는 도자기도 아니요, 대를 뛰어넘을 만큼 햇수..

좋은 수필 2024.07.18

시간과 강물/김훈

시간과 강물/김훈       나는 1948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두 살 때 6‧25 전쟁이 나서 엄마 등에 업혀 부산으로 피난 갔고, 부산에서 자라서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에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은 잿더미가 되었다. 학교에는 건물이 없어서 미군이 지어준 천막 교실에서 수업했다. 해마다 보릿고개에는 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고 관공서 건물에는 ‘기아 퇴치’, ‘절량농가 근절’, ‘식량 증산’ 같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고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여름에 큰비가 와서 한강 물이 불었다.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마포구 망원동 쪽 한강으로 물 구경을 나갔다. 한강은 물이 가득 차서 출렁거리며 흘러가고 있었다. 강은 힘차고 거침없었다. 아버지는 상류 쪽을 바라보았고, 멀어서 흐려지는 하류 쪽을 바라보았다. 한참 후에 ..

좋은 수필 2024.07.17

형용사와 부사를 생각함/김훈

형용사와 부사를 생각함/김훈        나는 인쇄된 나의 글을 읽지 않는다. 돌이켜 보면 한 생애가 강물 같이 흐름을 이루지 못하고, 파편으로 부스러져 있다. 삶을 구겨 버리는 그 무질서가 아무리 진지하고 순수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표현하려는 과장된 어조와 단정적 서술을, 이제 견디기 어렵다. 책값을 내고 이걸 사서 읽었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식은땀이 난다. 이 자학적 수치심은 오래된 고질병인데, 증세는 악화 중이다. 사유의 바탕이 성립되지 않거나 골조가 허술하거나 전개가 무리하거나 애초부터 쓸 필요가 없는 것들을 매문賣文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형용사나 부사 같은 허접한 것들이 문장 속에 끼어들어서 걸리적거리는 꼴들이 역겹고, 그런 허깨비에 의지해서 몽롱한 것들을 표현하려 했던 나 자신이 남사스럽..

좋은 수필 2024.07.17

보통의 언어들/김이나

관계의 언어​연인 사이에 사랑의 속성 중 하나는 '그리움'이다. 그리움이라는 건 빈 곳이 느껴진다는 것, 다시 말해 이곳이 당신으로 채워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사람은 소유할 수 없다지만, 어쩔 수 없이 소유하고 싶어지는 얄궂은 마음이 사랑이다.​'좋아한다'는 감정은 반대로 조건이 없다. 혼자서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면 마음 한편이 시큰해지기도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은 그런 게 없다. 해가 좋은 날 널려진 빨래가 된 것처럼 뽀송뽀송 유쾌한 기분만 줄 수 있는 건 '좋아하는 사람'이다.​내가 '좋다'라는 마음을 귀하게 보는 데는 이 감정이 가진 실시간성과 일상적임에 있다. 우리는 '좋다'는 말을 언제 하는지 떠올려보면 실시간성이라는 말이 무언지 이해가 갈 것이다. 친구랑 공원에 앉아 기분 좋은 바람을 맞을 ..

좋은 수필 2024.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