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그릇 / 배종팔
옛것이라 손을 타면 쉬이 깨질까 싶어 찬장 깊숙이 묵혀 둔 것이 잘못이었다. 아내가 며칠 집을 비운 사이, 설거지가 귀찮아 찬장의 그릇을 죄다 꺼내 썼다. 티끌만한 생채기도 큰 흠집이 되는 데 그릇만한 게 있을까. 내 살점이 떨어져 나간 것처럼 마냥 쓰리고 아팠다. 하지만 찬장 한켠에 갇혀 딸아이에게 대물림될 뻔한 그릇이 세상 밖으로 나와 한 식구가 된 것을 위안으로 삼는다. 아이 손 한 뼘 정도의 아가리에 굽이 짧고 허리가 배흘림인, 국수집에나 있음직한 그 질그릇은 이제 다른 그릇과 나란히 찬장에 자리 잡고 있다.
거죽이 거무튀튀하고 모양마저 볼품없는, 골동품으로도 실생활 용기로도 쓰기에 어중간한 저 막사발을 아내의 외할머니는 어머니에게, 어머니는 또 아내에게 어떤 의미로 물려주었는지 잠시 혼란이 인다. 꾸밈없이 소박하게, 뚝심 좋고 암팡지게, 남 앞에 나서지 말고 묵묵히 인내하며 살라는 주문으로 대물림되었는지, 그릇은 그저 내 앞에서 침묵하고 있다. 나는 그 메시지를 꼭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듯 그릇에 귀를 갖다 댄다.
박제된 세월이 산 생물처럼 꿈틀대며 그릇 밖으로 나와 조잘댄다. 삼대의 세월을 고스란히 담았을 질그릇. 외할머니의 한과 설움, 어머니의 인내와 고통이 빈 그릇 구석구석 밥알처럼 묻어 있다. 솔가지를 아궁이에 쑤셔 넣기 바쁘게 어머니의 손은 부뚜막의 채반으로 건너간다. 제 피붙이 챙길 새도 없이 할아버지의 권위만큼이나 그릇 가득 고봉밥을 담았으리라. 봉사 삼 년, 벙어리 삼 년, 귀머거리 삼 년의 기막힌 체에 걸려 더러 눈물을 그릇에 떨구었을 것이다. 가부장의 틀에 묶여 절대적 타인으로, 묵묵한 희생자로 살아야 했을 그들의 운명.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이고 존재의 이유인 양 그릇을 움켜쥐고 고단한 일상을 달랬으리라. 그릇은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일기이며 그들의 내력을 기록한 역사이기도 하다. 그들 삶의 체취와 무늬, 온갖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외할머니의 하루가 엿보이고 자박자박 어머니의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손끝을 그릇에 갖다 대자, 그들의 체온이 느껴져 화들짝 몸을 움츠린다.
아내는 가끔 분수에 넘치는 이사를 꿈꾸었다. 굳이 청소를 하지 않아도 반들반들한 거실. 그 한쪽 붙박이 찬장엔 형형색색의 유리잔과 고급 그릇들이 즐비한 새 집. 형편이 허락하여 비취색의 우아한 청자나 담백한 빛깔의 백자를 곁들인다면 금상첨화일 것 같은 찬장, 그녀만의 세계. 그런 찬장과 그릇을 갖고 싶어 했다. 흔들의자에 기대 잔디 깔린 정원을 내려다보며 포인트세티아 빛의 찻잔을 두 손에 감싸 쥐면 중세 황실의 귀부인이 부럽지 않을 것 같았고, 이태리제 셀레늄 그릇에 고슬고슬한 밥을 담으면 한 숟갈 뜨기도 전에 입 안에 침이 괼 것 같았다. 차와 커피도 담는 그릇에 따라 향과 맛이 달라질 것이라 여겼다. 아내는 어쩌면 우아하고 화려한 삶을 살고 싶은 욕망을 이사를 꿈꾸며 내비쳤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그릇이 이제 아내 몫이 아님을 안다. 아름답고 화려한 그릇은 그만큼의 사치와 풍요, 때로는 허영의 탈을 쓰도록 아내에게 강요할 것만 같다. 중년이 되기까지 여태 밟아온 족적과 아이의 엄마로서, 분수를 아는 주부로서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생각하면, 아내에게 청자나 백자 같은 우아한 분위기의 그릇보다 소박하고 질박한 질그릇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까탈스럽게 품격 있는 자리에 놓이려 하지도 않고, 밥그릇과 국그릇 같은 아무 그릇과 한 데 놓아도 어울릴 만큼 경계와 구분을 짓지 않고, 남새와 밑반찬, 어떤 것을 담아도 자기보다 더 돋보이게 하는 포용력을 갖춘 그릇. 질그릇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조화와 겸손의 미덕을 알게 한다. 그래서일까. 아내는 요즘 요리를 할 때 질그릇에 곧잘 손이 가곤 한다.
도요지 진례의 도자기축제 때, 도자기 체험실에서 손수 그릇을 만든 적이 있다. 물레에 얹힌 찰진 도토를 몸통이 볼록한 긴 원통형의 그릇으로 빚으려 했으나 그만 아가리 넓은 막사발이 되고 말았다. 물레 속도를 줄이고 손을 오므려 온갖 정성을 들여도 포인트세티아 빛의 꽃병은 쉽게 자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무릇 우리 삶의 그릇도 마음 먹은 대로 잘 빚어지지 않는다. 생각한 대로, 처음의 의도대로 호락호락하게 성형되진 않는다. 불가마 속에서 오랜 시간 내화(耐火)를 거치고, 불가마 밖에서 망치의 두들김을 견뎌야만 겨우 쓸모 있는 그릇으로 거듭나 세상의 밥상 위에 놓인다.
그동안 아내의 삶의 그릇도 안팎이 그리 옹골차지만은 않은 것 같다. 거죽의 태깔은 남 못지않게 매끄러웠는지 몰라도, 속은 거칠고 연신 부스러기가 떨어져 나갔다. 살림을 혼자 도맡아야 하는 아내로서, 발이 불어터지도록 바삐 걸어야 하는 직장인으로서, 잠을 자지 않는 아이 옆에서 불면으로 뒤척이는 엄마로서, 불가마 속에서 고온의 열과 압력을 견뎌내며 허덕일 때, 나는 가마 입구에 서서 포인트세티아 빛의 자기를, 비취색의 청자를 구워내기를 고대하며 나름의 꿈을 꾸었다. 좀체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꿈을 좇는 나의 방황은 아내에게 마음 놓고 숨 쉴 겨를도 허락하지 않았다. 아내가 불구덩이에서 혹독한 내화를 견디는 동안 나는 방황을 끝내고 도공으로서 내공을 묵묵히 쌓았고, 마침내 가마의 숨통을 열어 숲과 하늘을 보게 했고, 새소리와 바람 소리를 듣게 했고, 심지어 찬장과 식탁에 오르는 기쁨을 맛보게 했다.
질그릇은 여전히 채반에 놓여 내 눈길을 받고 있다. 볼수록 수더분하고 암팡지다. 비취의 색조나 반지라운 곡선은 없어도 오랜 내화 덕분인지 펄펄 끓는 국과 시린 얼음마저 견딜 만큼 다부지고 옹골차다. 삶에 부딪혀 그릇 안쪽에 빼곡히 생긴 상처 자국이 아내의 분신처럼 여겨져 더 정감이 간다. 아내의 내면도 내화를 거치면서 한층 단단해졌다. 상처도 나뭇결의 옹이처럼 아픔을 견디는 굳은살이 되었을까. 흠집 말고도 묵은 손때에 가려진 자잘한 상처가 눈에 띈다. 누구나 삶의 굴곡을 비켜갈 수 없는 법, 아내는 또 어떤 상처가 낀 미래를 그릇에 새길까.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메시지를 듬뿍 담고 있는 걸까. 무언가를 중얼거리듯 질그릇의 입을 벌린 형상이 예사롭지 않다. 유품으로 보관하든, 지금같이 생활 용기로 쓰든, 질그릇처럼 살라며 자꾸 되뇌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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