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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하얀 소묘/서숙

에세이향기 2024. 7. 23. 03:27

하얀 소묘/서숙

하얀색은 가장 많이 드러내며 동시에 가장 넓게 가려주는 바탕색이다. 꿈과 환상의 길목을 열기도 슬픔과 체념으 조용히 가누기도 하는 색, 솔직하면서도 은밀하고 세심하면서도 대범하고 흔하면서도 귀한, 색 아닌 색, 아니 색중의 색이다.  
 언제부터였을까, 여름철 따가운 햇살 아래에서 유난히 내 마음속의 흰색이 아롱아롱 눈부시다.  
 내 안의 흰빛을 따라 시간을 거스르면 바지랑대와 힘겨루기를 하면서 너울거리던 흰 무명천이 눈앞을 가득 막아선다. 온 폭을 이은 이불잇은 빨랫줄을 다 차지하고 정오의 햇살 아래 하얗게 빛났다. ​길게 누워 어른대는 그림자를 거느리고 옥양목의 홑청이 꾸득꾸득 마르면 나는 그 천을 동그르르 작은 몸에 감았다 폈다하며 들락거렸다. 그럴 때 하얀 천은 범선의 흰 돛이 되어 바람을 한 아름 받아 터질 듯 팽팽하고, 푸른 하늘은 끝 간 데를 모를 망망대해를 펼쳐냇다.  
 가끔은 빨랫줄에 걸리지 않는 이부자리의 홑청도 있었다. 개울가에서 비누질에 방망이로 매타작을 거쳐 양잿물에 푹푹 삶아진 고행의 길은 간신히 끝나고 드디어 뽀얀 속살로 목욕을 끝내고서, 빨래는 곧장 땡볕으로 달구어진 자갈밭 위에서 온몸을 편안히 폈다. 빨래의 가시밭길이 끝나면 이제부터의 고행은 아이들 차지였다. 어른들은 돌아가고 햇볕은 쨍쨍 꼬맹이들만 남아 빨랫감을 지켜야 했다. 햇볕에 그을린 아이들 얼굴은 동글동글 반질반질 차돌을 닮았다. 시냇물에 퉁퉁 부은 맨발에 자갈은 뜨겁고 내리쬐는 태양을 피할 그늘은 버드나무 잎새로는 어림도 없었다.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네 귀퉁이에 굵은 돌 얹고 일렬횡대로 나란히 길게 누워있는 천은 하나의 풍경을 완성하면서, 지루하고 시무룩한 표정의 아이들을 달래며 힘겨운 노역 끝의 청결한 세상을 보여주고자 했다. 어느 새 물기가 마른 이불잇은 흰 캔버스로 펼쳐져 마냥 넓은 화폭이 되어 알록달록 다채로운 아이들의 꿈을 실어 나르려고 빳빳이 깃을 세웠다.  
 흰 빨래와 엮인 유년을 지나는 연결부호는 어느 틈에 여름에 피는 하얀 꽃들로 환치되었다. 장미원의 울타리 안에서​ 얌전히 꽃망울을 부풀리던 장미는 초여름을 기다려 약속처럼 한꺼번에 활짝 터진다. 저마다의 자태로 한껏 아름답지만 그중에도 흰 장미는 푸르른 계절의 싱그러움 속에서 청초하면서도 화려한 기품이 돋보였다. 이즈음은 안개꽃도 한 철이라 도심의 복판에서도 가슴 가득 한 아름 안아들 수 있었다. 길섶의 찔레도 망초도 무수한 하얀 빛 환상여행의 통로가 되어주었다.  
 교정의 장미가 한창이던 어느 날, 우리는 흰 머릿수건과 앞치마를 채비하여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청소하러 갔다. ​그렇지만 그곳은 씻은 듯 깨끗하여 할 일이라곤 별로 없었다.  
 이곳저곳 둘러보던 중, 어떤 정경 하나가 시선을 끌었다. 인적 없이 화강암의 묘비만 질서 정연하건만 어느 묘석 앞 소복의 젊은 여자가 정물처럼 앉아 있었다. 여고생들의 수다가 일순 끊겼다. 저고리의 긴 고름은 나풀거리고 둥글게 부풀은 치맛자락이 푸른 잔디 위에 두둥실 고운 곡선을 그렸는데 한 무릎을 세워 깍지 낀 두 손을 얌전히 올려놓은 자태가 한 떨기 흰 백합처럼 너무나도 고와서, 그만 나는 가슴이 철렁하였다. 서너 살쯤 된 여아는 체크무늬 점퍼스커트의 짧은 치마를 나비처럼 팔랑이며 석물들 사이 파아란 잔디밭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분홍색 패랭이꽃을 꺾어 작은 다발을 만드느라고 열심인데 그 모습은 또 얼마나 티 없이 맑고 귀엽던지, 명치끝이 찌르르했다. ​  
 여인은 남편의 이름 석자 새겨진 비석에 조용히 시선을 둔 채,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나는 그저 숙연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그 모든 추억과 사랑을 뒤로 하고 한 줌 재가 된 사람에게서 죽음은 오히려 잊혀지고 산 사람만이 죽음을 생각하고 흐느끼고 되새기는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을 수 없어서 당신도 나처럼 이렇게 열 손가락 끝 마디 마디가 저린가요. 그녀는 그렇게 허공으로 스러져간 이에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은 한가하건만 세상은 아직도 평화를 모르고, 그래서 그만 젊은 군인의 무덤가에 조용히 눈길을 떨군 소복의 미망인과 패랭이꽃을 모아 쥔 작은 여자애가 있는 영상을 만들어내고야 마는 것이다. 날씨가 너무 화창해도 하늘이 너무 파래도 슬퍼지는 건가. 내게 그런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렇지만 이내 내 속의 어딘가로부터 슬픔 속으로 숨는 것은 비겁한 일이야, 가슴이 아프다는 말로 얼버무리려 하지 마, 낮게 나무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즈음​ 파월국군장병 아저씨에게 위문편지를 형식적으로 써 보내고, 휴가 나온 맹호부대 용사의 짐 속의 소니 포터를 카세트 라디오를 선망했다. 젊지 않은 아버지, 아직 어린 오빠, 그래서 파월군인의 집이 아닌 것에 안도하였다.  
 오늘 하루 흰 교복 상의에 만년필의 잉크를 떨어뜨려 푸른 얼룩을 만들지 않으면 그로써 마음이 맑게 개었던 우리 착하고 순진하고 무지했던 소녀들, 그들 중의 하나였던 나에게 그 화창한 계절 장미가 흐드러진 때, 특히 백장미가 만발할 때, 그림같이 앉아있던 그녀의 치마저고리가 그려낸 하얀 소묘는 초록 잔디를 바탕으로 햇볕을 받아 어찌나 눈부시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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