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1092

호롱불 / 황소지

호롱불 / 황소지   이웃 아파트에 살고 있는 친구 집에 갔다가 응접실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옛날 놋쇠 화로와 흰 사기 호롱을 보았다. 단조로운 아파트 생활에서 옛 정취를 느껴보려는 집주인의 생각인 듯하다. 호롱을 본 순간, 보고 싶었던 옛 친구를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만난 듯 반가웠다.지난 시절 고향에는 전기가 없었다. 해가 지고 대지에 어둠이 깔리면 동네에는 집집마다 호롱불이 켜졌다. 그때는 호롱불 하나를 켜놓고 그 밑에 가족들이 모여 앉아 저녁밥을 먹었고, 그날 일어났던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걱정하고 위안을 받았다. 석유를 아끼려고 웬만한 어둠에는 불도 켜지 않았기에 저녁밥도 어둡기 전에 먹어치웠다.집안에 잔치가 있거나 섣달 그믐날이 되면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게 사방에 유리를 끼운 등불을 처..

좋은 수필 2024.06.20

사금(砂金) 한 조각/이귀복

사금(砂金) 한 조각  이귀복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지하철에서 내려 천천히 계단을 밟아 오르자 투명한 가을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머리는 혼란스러웠고, 무언지 모를 죄책감에 햇빛조차 싫어졌다. ‘그래, 어젯밤 나는 외박을 했어. 외박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여자가 당당할 수가 없지.’자괴감에 빠져 땅만 내려다보며 걷고 있는데 어젯밤 통화에서 따지고 들던 딸아이의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하다.   “계획된 일이 아닌데, 어떻게 엄마가 외박을 할 수 있어요?”맞다. 나는 엄마다. 엄마가 외박을 했으니 고통스러워야 당연하지. 자조하듯 내뱉는 혼잣말이 소태처럼 쓰다. 누가 뭐래도 오늘 밤은 자고 가겠노라고 가족에게 호기롭게 통고하던 결기(決氣)는 어디로 가고 집이 가까울수록 자꾸만 움츠러든다...

좋은 수필 2024.06.20

아프지 않다/ 변애선

아프지 않다/ 변애선    첫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기준은 무엇일까. 미칠 것만 같은 그리움의 척도일까. 사랑을 잃고 난 이후 죽을 것만 같았던 통증의 강도인가. 그 존재의 부재가 주는 하염없는 외로움일까. 평생 잊지 못하는 안타까움인가. 나에게는 그것이 참을 수 없는 마려움이었다. 터질 것만 같은 상태로 차마 부끄러워서 말을 하지 못한 채 몸부림을 치는 고통. 그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다.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겨울방학, 그토록 흠모하고 사모하였던 사람과 만날 약속을 정했다. 그 때는 이메일이 없었으니 분홍편지지에 푸른 잉크로 그리운 마음을 소나기처럼 적어서 보내는 나의 집요함에 그 사람도 더는 버티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 시절은 매순간 그 사람을 먼빛으로나마 스치기라도 해보려는 심정으로 살았으니 ..

좋은 수필 2024.06.20

방 속의 작은 방/김채영

방 속의 작은 방김채영 겨울은 어느 절기보다 공기가 맑고 무결하다. 바람의 거칠고 빠른 이동과 반복적인 순환은 갖은 공해를 멀찌감치 날려버린다. 겨울은 또한 춥기에 따뜻한 계절이다. 코끝이 찡하도록 매운 냉기와 건물들의 문짝을 덜컹대며 흔드는 바람에 한줌 밖에 안 되는 얇은 스카프가 더 없이 포근하고, 먼 곳에 사는 친구의 다정한 전화 목소리에서 온기를 읽는다. 혹한 속에서 길을 걷다가 마신 자판기의 커피 한잔의 의미가 어느 계절보다 간절하게 느껴진다. 그리하여 외출 후 추위를 피할 수 있는 남루한 방 한 칸은 내게는 왕궁처럼 호사롭다. 소소하게 작은 것들이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은 겨울이 어느 계절보다 길고 추운 탓일 것이다.겨울은 우리가 끌어안은 근본적인 서사를 하얀 눈을 덮어 서정으로 채색한다..

좋은 수필 2024.06.20

백합, 안녕하신가/김채영

백합, 안녕하신가/김채영                               배꽃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는 듯 배 밭에 촘촘하게 백합이 피어났다. 배꽃이 만개할 무렵에는 그저 풀보기에 불과했을 여린 잎들이 눈부시게 끝도 없이 피어 하얀 나팔을 분다. 이른 봄날부터 한바탕 휘몰이 장단에 꿈같은 향연을 펼쳤던 배꽃이 낙화로 뒹구는 산간 밭은 온통 백합의 차지가 되어 이국적 정취로 고요에 잠겨 있었다. 나는 그날 배 밭을 지나면서 백합 몇 뿌리를 신문지에 조심스럽게 싸들고 온 뒤 베란다 화분에 옮겨 심었다.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면서 백합을 지켜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한 내 마음을 아는 듯 날마다 두 세 송이씩 청신한 꽃을 피워냈다. 나는 그 때 베란다를 환하게 밝히는 순결무구한 백합을 보면서 다음날 피어날..

좋은 수필 2024.06.20

모딜리아니, 파란옷의 소녀 /김채영

모딜리아니, 파란옷의 소녀 /김채영    파란색은 피안 (彼岸)의 저쪽에서 온다는 장콕도의 시 '파란색의 비밀'처럼 신비의 베일에 감춰진 빛깔이다. 일상의 구도 속에 적절하게 조화로우면서 파란색은 어딘지 모르게 비밀스럽다. 파란색은 마치 유리창 밖의 풍경처럼, 혹은 양초를 입힌 종이처럼 실체는 눈에 보여도 본질은 손에 묻어나거나 결코 순화 될 수 없는 아릿한 그리움 같은 것이다,    어둠이 밀려오는 저녁 아스라한 둔덕이나 벌판 위에 파랗게 내려앉은 이내는 애수를 동반하고 가슴에 젖어온다. 초저녁의 하늘은 파란색으로 깊어지다가 검푸르다가 종내는 까만 어둠 속에 함몰되어 버린다. 여명직전의 하늘도 강물처럼 파랗게 물들어 온다. 검푸른 물이 조금씩 바래면서 푸르다가 파란색으로 서서히 밝아 아침 하늘의 지평을..

좋은 수필 2024.06.19

他人의 거울 /김채영

他人의 거울 /김채영      아버지는 내게 어떤 의미인가. 가끔 혼자 생각에 잠겨본다. 내 나이 아홉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 그 분은 언제나 내 생각 밖에서 마른 미역처럼 무심하게 건조되었다가 일단 내 안에 들어오면 거침없이 풀어지는 슬픔이었다.    안타깝게도 지금 내게는 아버지를 기억할만한 사진조차 없다. 오빠들에게 아버지의 독사진이나 추억의 가족사진이 누렇게 빛 바랜 보채 몇 장씩 남아 있을 뿐이다.   나도 아버지의 사진을 한 장쯤은 갖고 싶었지만, 내색을 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그 소중한 것들은 오빠들이 간직하는 게 훗날을 위해 나을 것 같아서이다. 그래도 친정에 가면 사진에 대한 미련인지, 해묵은 사진첩을 뒤적이며 잠시 아버지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했다.     비록 시골..

좋은 수필 2024.06.19

남빛 치마의 추억/ 김채영

남빛 치마의 추억/  김채영    여체의 부드러운 곡선을 최대한 반영시켜 제작한 악기는 기타라고 한다. 그렇다면 여성을 가장 여성답게 연출해 주는 의복은 아무래도 치마가 제격일 것 같다. 펼쳐놓으면 밋밋한 보자기인 한복 치마만 해도 그렇다. 폭이 넓은 치마는 우아하고, 폭이 좁은 치마는 정숙해 보인다. 같은 치마라 해도 치마 말기를 돌리는 쪽에 따라, 허리끈을 조절하기에 따라 이미지가 달라지기도 한다.  치마가 가정이 아닌 나라를 지키기 위한 도구로 쓰인 적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에서 부녀자들은 앞치마로 돌을 날라 군사들을 도왔다. 행주대첩의 그 유명한 설화를 남긴 앞치마는 그 곳의 지명을 따서 행주치마라고 불려졌다. 여인의 치마폭에는 이렇듯 여러 가지 삶의 그림들이 채색되어 있다. 멋과 개성,..

좋은 수필 2024.06.19

위험한 곡예/ 김채영

위험한  곡예/ 김채영     실내의 작은 연못에서 금붕어와 비단잉어들이 헤엄을 치며 놀고 있다. 아는 이가 경영하는 음식점인 이곳은 중앙에 분수와 화려한 조명으로 멋을 낸 연못이 볼거리였다. 크고 작은 섬돌을 괴어 만든 연못가에는 보기 좋게 자라난 화초들을 배열해서 풀숲 같은 자연미를 살려주었다. 적당한 먹이와 환상적인 조명과 분위기 있는 음악, 관상용 물고기들의 호사스러운 삶이 아닐 수 없었다. 식물에게 자연의 소리를 녹음한 그린 음악을 들려줌으로서 성장을 촉진시킨다는데 물고기들은 사람들의 다양한 삶이 녹아있는 여러 장르의 음악을 들으며 살고 있었다.    비단잉어와 금붕어가 뒤섞여 무리 없이 조화를 이루는 평온한 연못 .그 안에서 그것들은 답답한지 몸을 푸는 듯 했다. 이곳에는 한동안 야생붕어와 함..

좋은 수필 2024.06.19

지킬수 없었던 약속 /김채영

지킬수 없었던 약속   /김채영     그녀에게서는 결국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다. 역시 약속 날짜를 잊은 것일까. 휴대폰을 힘주어 눌러본다. 부재중이니 메시지를 남기라는 사무적인 자동 응답 장치로 돌아간다. 호출도 해보고 문자 메시지도 보내본다. 영영 무반응이었다. 맹랑한 그녀, 두 번씩이나 약속을 저버린 것이다.    십여 년 정든 곳에서 살다 고향으로 이사를 했을 때 타향보다 더욱 낯설어 있었다. 외로움에 적당히 지쳐있을 무렵 한 친구를 만났고 ,한동네에 산다는 그녀의 친구를 소개받았다. 둘보다 셋이 더 좋을 것 같았다. 트라이앵글처럼 다채로운 화음을 경험할 것 같은 설렘도 있었다.    친구의 친구인 M은 활발한 여인이었다. 상큼한 단발머리에 캐주얼 차림이 어울리는 그녀, 스카프 한 장으로 멋을 낼..

좋은 수필 2024.06.19

마루가 있는 집/김채영

마루가 있는 집/      김채영     창을 열면 언제나 안채의 마루가 눈에 가득 찼다. 한낮의 햇살이 털실처럼 따사롭게 내려앉은 마루가 쉬었다 가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마루가 있는 집에서 살고 싶었다. 그 곳에서 보송보송한 빨래를 개고 싶고, 윤이 나게 마루를 닦아 반가운 손님을 맞아들이고 싶었다. 그러다 집장만이 내게 거리가 먼 현실로 느껴질 때, 차라리 마루는 도도하게 높아 보이기까지 했다.    단칸셋방에서 오글오글 네 식구가 모여 살았다. 늦은 밤 예고 없이 손님이라도 오는 날이면, 남루한 이불이나 옷가지를 장롱 속에 꼭꼭 숨기느라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그나마 어려운 손님이면 슬쩍 자리를 빠져 나와 하릴없이 부엌을 서성거려야 했다. 부엌 유리창에서도 안집 마루가 훤히 보였다. 아이들이 시원..

좋은 수필 2024.06.19

담벼락에 걸린지도/ 김채영

담벼락에 걸린지도/   김채영     깊은 밤 잠결에 들려오는 소리들은 다채로웠다. 바람이 문풍지를 한 차례 훑고 지나가면 뒤뜰의 나뭇가지에서 눈 뭉치 풀썩 내려앉는 소리, 밤새 댓돌 위 마른 나뭇잎 도란대는 소리며, 날씨가 조금 풀리기라도 한다면 고드름이 와지끈 부러져 떨어지는 소리 같은 것이 나른한 잠 속에 섞여서 감미롭게 전해졌다.그리고 유년의 잊을 수 없는 정겨운 소리 하나, 밤이면 윗목에 놓인 하얀 사기요강에다 오줌 누는 소리. 파란 붓꽃 그림의 사기요강에 오줌 떨어지는 소리는 콩나물시루에서 물 떨어지는 것처럼 청량했다. 그런 밤이면 조용하던 방안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세 살 터울인 작은오빠는 호기심 많은 나의 표적이었다. 그가 요강에서 뒤 돌아앉아 소변을 볼 때는 매우 궁금했다. 왜 남자는 ..

좋은 수필 2024.06.19

스치는 사람의 실루엣 / 김채영

스치는 사람의 실루엣 / 김채영     어쩌면 오늘 그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막연한 불안감은 점차 확신으로 굳어졌다. 텅 빈 실내의 무거운 적막을 뭉텅뭉텅 베어내며 등 뒤에서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이별의 통보처럼 날카로웠다.고개를 돌린다면 그의 얼굴이 보일 텐데, 나는 여느 때처럼 무심한척 밀실 안 연노랑 커튼의 꽃무늬만 건성으로 헤아리고 있었다. 그를 만난 게 몇 번이었을까 생각해본다. 적어도 이삼일에 한번 씩은 만났을 것이다. 그게 한 달이 지난 일이니까 열 번은 족히 넘었다.   그의 목소리는 듣기 좋은 바리톤이다. 그윽하고 귀족적인 음색이어서 대화의 내용과는 동떨어진, 그가 소화해낼 법도 한 오페라의 부분 부분이 불쑥 떠올랐다. 어쩌면 그에게는 물 찬 제비처럼 잘빠진 공단 연미복..

좋은 수필 2024.06.19

금지된 사랑 / 김채영

금지된 사랑    / 김채영     한여름 밤의 꿈이었을까. 아니면 환시일지도 모를 일이다. 무더위의 적막한 산길에서 눈보라를 만나다니. 어둠 속에서 자동차의 불빛을 향해 끊임없이 밀려오는 눈보라의 향연, 늦여름에 어떤 이적이 창궐하나 싶은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것은 은행잎 같기도 했고 공중에 분해된 새털 같기도 했다. 자동차 앞 유리에 꾸물꾸물 몰려드는 괴이한 물체의 비행에 정상적인 운행이 불가능해졌다. 운전을 하던 일행이 어이없는 웃음을 날렸다.   "이게 뭐야 , 무슨 나방 떼가 눈을 쏟아 붓는 것 같군 그래"    여행 중, 주말이라 차가 밀리는 고속도로를 피해 낯선 산길을 택했다. 고즈넉한 시골길에서 자동차는 상쾌하게 미끄러지듯 질주해갔고 드물게 지나치는 농가의 불빛이 정겨웠다. 시..

좋은 수필 2024.06.19

사인용 식탁/ 김채영

사인용 식탁/  김채영      식탁 하나가 있으면 행복할 것 같았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잠자리에 누우면 아담한 사인용 식탁이 떠올랐고, 그 것을 중심으로 머릿속에 구체적인 그림이 활발하게 그려지곤 했다. 식탁에 우선 빨간 타탄무늬 식탁보를 깔고 싶었다.  그 생각 속에서 수없이 갓 지은 밥과 노릇하게 구워진 생선, 향기로운 나물 반찬을 꽃무늬 그릇에 담아 상을 차렸다. 식탁 중앙에는 애호박과 두부, 조갯살이 달싹거리면서 달궈진 된장 뚝배기에서 끓고 있는 안온한 시간. 내 옆자리에는 남편이 있고 아들, 딸과 함께 정담을 나누며 식사하는 장면까지 상상하면 뜻 모를 감동에 눈물이 났다. 그 것은 식탁이라는 물건을 처음 본 순간부터 매료되어, 수차례 수정 끝에 완성된 내 기준으로 가장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이..

좋은 수필 2024.06.19

고등어를 굽고 싶다 /김채영

고등어를 굽고 싶다 /김채영                                                                                      창가에 서면 싱그러운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집에서 살았다. 맑은 날의 바다는 은빛 거울처럼 백사장 위에 고요하게 떠올라 있었다. 그런 날이면 남편은 바다로 가기 위해 부지런히 짐을 챙겼다. 그는 낚시를 떠나기 전 반드시 베란다에 나가 바다의 움직임을 보면서 그날의 날씨 여부를 판단하곤 했다.  가을이면 하늘과 맞닿은 바다 또한 감청색으로 물든다. 그즈음 바닷가 주변은 어떤 생기로 술렁거리곤 한다. 찬바람이 불면 남해안으로부터 반가운 손님인 고등어 떼들이 따스한 남쪽바다를 찾아오는 것이다. 고등어 주요어장의 하나인 울산 방어진은..

좋은 수필 2024.06.19

맷돌 / 이순금

맷돌 / 이순금  드르륵 드르륵 돌아가는 소리만 들어도 그 속에서 갈리고 있는 곡식의 종류를 짐작할 수 있다. 단단한 날팥이나 녹두를 탈 때는 그 소리가 크고 요란하기 이를 데 없다. 반면에 볶은 쌀이나 밀, 수수를 곱게 갈아 낼 때는 소리가 온화하다. 가루를 거칠게 탈 때는 한 주먹씩 맷돌 아가리에 붓는다. 고운 가루를 만들어야 할 때는 밭에 배추씨 뿌리듯이 살짝살짝 넣었다. 그렇게 완급緩急을 조절해 가며 오름실댁, 그녀는 맷돌을 잘도 다뤘다. 볶은 콩을 쪼개서 거피를 할 때면 그것들은 툴툴거리며 깨진 쪼가리들을 사방으로 뱉어냈다. 마치 화난 사람이 분풀이 하듯이, 반대로 고운 가루를 갈아낼 때는 사뿐사뿐 유순하게도 돌아갔다.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발레리나의 느린 회전동작처럼 말이다. 장마 때가 되면..

좋은 수필 2024.06.18

옴팡눈의 사내/ 김진진

옴팡눈의 사내/ 김진진  그를 처음 보았을 때는 마치 된장 밑에서 오래 묵었다가 금방 꺼낸 무장아찌처럼 검고 찌글찌글한 그런 느낌의 사내였다. 변변찮은 산골 오지에서 그저 손바닥만 한 땅뙈기나 일구다가 어느 날 불쑥 도심 한복판에 출현한 무지렁이 촌부와 똑같았다. 둥근 테가 넓게 돌아간 낡아빠진 카키색 모자의 그늘 밑으로 움푹 주저앉은 두 눈은 이상스런 광채를 품고 있는 듯해서 심연의 이끼처럼 검푸르고 칙칙했다. 그 눈은 주먹만한 얼굴 위로 무지막지하게 뛰어나온 광대뼈 때문에 더욱 작고 깊게 가라앉아보였다. 눈과 마찬가지로 폭삭 꺼져 내린 양 뺨 사이로 우묵하게 말려들어간 입술은 영락없이 꾀죄죄한 노인의 행색이었다. 중키도 못되는 바짝 마른 몸매의 이 사내는 대체 몇 살이나 되었을까?​'완전히 깜씨로군...

좋은 수필 2024.06.11

여자의 풍경, 시간의 풍경/김훈

여자의 풍경, 시간의 풍경/김훈사쿠라꽃 피면 여자 생각난다. 이것은 불가피하다. 사쿠라꽃 피면 여자 생각에 쩔쩔맨다.어느 해 4월 벚꽃 핀 전군가도全群街道(전주-군산 도로)를 자전거로 달리다가, 꽃잎 쏟아져 내리는 벚나무 둥치 밑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나는 내 열려지는 관능에 진저리를 치면서 길가 나무둥치에 기대앉아 있었다. 나는 내 몸을 아주 작게 옹크리고 쩔쩔매었다. 온 천지에 꽃잎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나무둥치 밑에 쪼그리고 앉아서 바라보면, 만경 평야의 넓은 들판과 집들과 인간의 수고로운 노동이 쏟아져 내리는 꽃잎 사이로 점점이 흩어져 아득히 소멸되어 가고, 삶과 세계의 윤곽은 흔들리면서 풀어지면서, 박모의 산등성이처럼 지워져 가는 것이었는데, 세상의 흔적들이 지워져 버린 새로운 들판의 지평..

좋은 수필 2024.06.04

라면을 끓이며/김훈

라면을 끓이며/김훈 1 사실, 이 글은 오랜 세월 동안 라면을 끓이고 또 먹어온 나의 라면 조리법을 소개하려고 시작했는데, 도입부가 너무 길어졌다. 이제부터가 본론이다.라면 포장지에는 끓는 물에 면과 분말스프를 넣고 나서 4분 30초 정도 더 끓이라고 적혀 있지만, 나는 센 불로 3분 이내에 끓여낸다. 가정에서 쓰는 도시가스로는 어렵고 야외용 휘발류 버너의 불꽃을 최대한으로 크게 해서 끓이면 면발이 불지 않고 탱탱한 탄력을 유지한다. 면이 불으면 국물이 투박하고 걸쭉해져서 면뿐 아니라 국물까지 망친다.또 물은 550ml(3컵) 정도를 끓이라고 포장지에 적혀 있지만, 나는 700ml(4컵) 정도를 끓인다. 물이 넉넉해야 라면이 편하게 끓는다. 라면이 끓을 때 면발이 서로 엉기지 않아야 하는데, 물이 넉넉하..

좋은 수필 2024.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