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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맷돌 / 이순금

에세이향기 2024. 6. 18. 03:07
맷돌 / 이순금

 

 드르륵 드르륵 돌아가는 소리만 들어도 그 속에서 갈리고 있는 곡식의 종류를 짐작할 수 있다. 단단한 날팥이나 녹두를 탈 때는 그 소리가 크고 요란하기 이를 데 없다. 반면에 볶은 쌀이나 밀, 수수를 곱게 갈아 낼 때는 소리가 온화하다.

 가루를 거칠게 탈 때는 한 주먹씩 맷돌 아가리에 붓는다. 고운 가루를 만들어야 할 때는 밭에 배추씨 뿌리듯이 살짝살짝 넣었다. 그렇게 완급緩急을 조절해 가며 오름실댁, 그녀는 맷돌을 잘도 다뤘다. 볶은 콩을 쪼개서 거피를 할 때면 그것들은 툴툴거리며 깨진 쪼가리들을 사방으로 뱉어냈다. 마치 화난 사람이 분풀이 하듯이, 반대로 고운 가루를 갈아낼 때는 사뿐사뿐 유순하게도 돌아갔다.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발레리나의 느린 회전동작처럼 말이다.

 장마 때가 되면 밭의 강낭콩은 실하게 여문다. 자칫 수확할 때는 놓치면 금세 하얀 혀를​ 내밀며 촉을 틔운다. 부지런한 그녀는 마루에 맷방석을 깔고 맷돌을 앉힌다. 한 팔은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돌리고 한 손으론 호밀을 집어넣는데 묵언수행자가 따로 없다. 그 일에 한참을 몰두하다보면 원하는 만큼의 가루가 쌓인다. 그것을 체로 쳐 내리고 강낭콩과 버무려서 간을 맞추어 반죽을 하고 채반에 얇게 펴서 가마솥에 쪄내면 그것이 맷돌표 원조 개떡이다.

 언젠가 피서 길에 산장에 들른 적이 있었다. 소나무와 정자나무가 어우러진 개울물을 건너자 갑자기 서늘해졌다. 체감온도가 벌써 달랐다. 계단을 조금 오르자 맑은 도랑이 마중을 나왔다. 그것을 따라 한 귀퉁이에 이르니 돌 틈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그 물은 둥근 돌을 다듬고 파낸 큰 원형의 샘을 가득 채우고 중간 샘,​ 그리고 마지막 작은 샘을 지나서 땅을 적시며 흐르고 있었다. 물기 머금은 샘가엔 꽃들이 너도나도 모여 있었는데 금방 석공의 손을 빠져 나온 듯한 물건들이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었다. 맷돌이었다. 암 수쇠가 없이 모양만을 본떠서 만들어 놓았다. 곡식을 아예 한 번도 갈아 보지 않은 표정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이 맷돌의 역학을 알 길이 없다. 장식용으로 오해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산장의 생가에서 놀고 있는 맷돌들은 해야 할 일과 해온 기억을 잊어 버렸다. 자신의 몸에 있어야 할 손잡이와 암 수쇠의 존재와 조상들의 얘기도 잊어버렸다.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는 돌멩이가 되어버렸다. 신나게 돌아가면서 그녀의 솜씨를 뒷받침해 주던 대접받던 돌이 아니다. 솔뿌리솔로 털고, 때 묻을세라 보자기를 씌워놓던 돌이 아니다. 흐르는 물가에 가지런히 놓여 색다른 기능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붙드는 게 그것들의 현실이다.

 어릴 적에 맷돌 앞에 앉아 큰소리를 치며 어처구니를 두 손으로 잡고 힘껏 돌린 적이 있었다. 오름실댁은 슬쩍슬쩍 그 입에다 메밀을 일정하게 넣었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더 많이 넣으라고 주문을 했다. 그녀는 말없이 두 손으로 한 움큼을 덥석 부었다. 그러자 하얗던 가루위에 거뭇한 껍질과 덜 갈린 그것들이 거칠게 떨어졌다. 나는 급히 속도를 줄였다. 그녀는 묵묵히 한 켜를 다시 걷어서 천천히 처음 속도로 넣었다. 이번엔 손바닥과 팔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입에선 신음이 새어 나왔다. ​

 그러나 오름실댁의 손은 맷돌자루에서 자유로웠다. 숨이 막히게 꽉 잡지도 않았고 팔에 별로 힘을 넣지도 않았다. 돌이 돌아가는 속도에 한번씩 채찍질을 할 뿐이었다. 맷돌의 움직임을 훤히 알고 있었고 그 운동과 혼연일체가 되어 즐기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 무거운 돌을 천하장사처럼 여유있게 다루고 있었다. 늘 부지런하여 걸음마다 바람소리가 났던 그녀가 맷돌 앞에만 앉으면 그렇게 침착할 수가 없었다.

 전주에 가면 한옥마을이 있다. 마을 사이마다 걷기 좋은 거리가 있는데, 옛 물건들도 구경하며 기와집도 감상했다. 깨끗한 돌로 깔은 실개천이 발 옆으로 흐르니 기분도 상쾌했다. 물을 따라 걷다보면 어느덧 상류다. 거기서 나도 모르게 손뼉을 딱 쳤다. ​실개천의 발원은 적당한 크기의 맷돌이었다. 빙글빙글 혼자 돌고 있는 맷돌은 자동이었다. 곡식을 뱉어내던 옆구리로 시원시원하게 물을 갈아내고 있었다. 한 가정의 음식을 도와주던 맷돌의 한계를 거뜬히 뛰어 넘은 모습이었다.

 나는 지금, 옛집 마당 한구석에 먼지를 뒤집어 쓴 낡은 맷돌 하나를 마주하고 있다. 볼품이 없어 식구들이 애지중지하진 않았어도 맏며느리처럼 군소리 없이 오랜 세월 맡은 일을 묵묵히 해내던 오름실댁의 맷돌. 자식들은 그것 돌리는 것만큼은 대를 잇지 못했다. 도시로 나간 자식들은 맷돌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맷돌을 번쩍 들어 아래위 짝을 맞추고 흔들거리는 손잡이를 천천히 돌려본다. 뻑뻑해서 멈춰버리는 맷돌 위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써 본다. 그리운 이름, 오름실댁 내 어머니 함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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