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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금(砂金) 한 조각/이귀복

에세이향기 2024. 6. 20. 03:43

사금(砂金) 한 조각

 

 

이귀복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지하철에서 내려 천천히 계단을 밟아 오르자 투명한 가을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머리는 혼란스러웠고, 무언지 모를 죄책감에 햇빛조차 싫어졌다.

 ‘그래, 어젯밤 나는 외박을 했어. 외박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여자가 당당할 수가 없지.’

자괴감에 빠져 땅만 내려다보며 걷고 있는데 어젯밤 통화에서 따지고 들던 딸아이의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하다.

   “계획된 일이 아닌데, 어떻게 엄마가 외박을 할 수 있어요?”

맞다. 나는 엄마다. 엄마가 외박을 했으니 고통스러워야 당연하지. 자조하듯 내뱉는 혼잣말이 소태처럼 쓰다. 누가 뭐래도 오늘 밤은 자고 가겠노라고 가족에게 호기롭게 통고하던 결기(決氣)는 어디로 가고 집이 가까울수록 자꾸만 움츠러든다.

   “언니. 나 너무 우울해서 견딜 수 없어, 최진실이 자살한 뒤로 나도 자꾸만 베란다에서 뛰어내리고 싶어.”

  늦공부 할 때 만난 친구의 전화였다. 나 역시 가을 내내 원인을 알 수없는 무력감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던 터였다. 그러고 보니 단순한 가을 탓만은 아닌 것 같았다. 텔레비전을 통하여 오랜 시간을 함께해온 그녀는 이미 우리 모두의 이웃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보니 나도  일주일이 넘도록 텔레비전 앞에 앉아 흰 국화꽃에 싸여 웃고 있는 배우 최진실의 모습만을 쫓고 있었다. 그녀의 죽음을 지켜본 국민 모두가 집단 공황상태에 빠졌다는 말은 내 경우를 보더라도 과장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녀의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두 가지였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선택을 했겠느냐’라는 쪽과, ‘어린 자식들을 남겨두고 그런 결단을 한 것은 어미로서는 있을 수 없다’는 비판이 그것이었다. 죽음을 선택한 사람을 두고 남은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한들 그것은 이미 뒷이야기일 뿐이다.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는 처절한 상황이 되어보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굳이 최진실의 죽음이 아니어도 마음여린 친구는 평소에도 자주 우울감을 토로했다. 짧은 가을해는 기울고 있었지만 깊이 가라앉은 그녀의 목소리를 외면할 수가 없어 저녁약속을 한 뒤 서둘러 외출준비를 했다.

   친구도 친구였지만 스스로에 대한 위로도 필요한 시간이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 것 같지만 돌아보면 모든 것은 주먹 사이의 모래처럼 빠져나가고 젊음조차 찰나였음을 확인해야 하는 쓸쓸함. 가을 내내 빈 손바닥을 펴들고 젖은 사금(砂金) 한 조각이라도 붙어있기를 소망하였다. 손금 사이에 한 조각의 사금이라도 붙어있다면, 그건 마지막 남은 자아일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많이 야위어 있었다. 숯불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조개구이를 바라보며 우리는 말없이 술잔을 부딪쳤다. 술잔을 든 친구의 얼굴이 한없이 어두웠다. 말이 친구지, 나보다 열 살이나 아래인 아름다운 그녀가 죽음을 입에 올리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차라리 숯불에 구워져 향기로운 육즙을 흘리는 조개처럼 관능을 이야기하는 편이 훨씬 어울릴 것이다. 우리들은 모두 몇 가지의 고통을 가슴에 묻고 살아간다. 그러나 최진실의 죽음에 자신의 고통을 투사하고 있는 그녀의 번민도 녹록한 것 같지는 않았다. 한 잔 술 때문인가,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번지기 시작했다. 이럴 때 섣불리 상대에게 고통의 이유를 물어서는 안 된다. 그녀는 그녀의 늪에서, 나는 나의 늪에서 그냥 허우적거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럽다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밤이 깊어갈수록 조개를 굽는 숯불은 더욱 붉게 타올랐다. 그리고 도시의 뒷골목은 휘황한 불빛을 받고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는 우리가 자살을 이야기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우리는 마주 보이는 건물 옥상에 함께 올라가 치마를 뒤집어쓰고 뛰어내려보기도 하고 최진실처럼 목도 매달았다. 그날 밤 우리는 온갖 방법을 다해 죽었다 살아나기를 반복했다. 한참 동안 재미있는 자살놀이를 하고 나자 친구는 마음이 개운해졌는지 한결 가벼운 얼굴로 엉뚱한 제의를 해왔다.

  “나 오늘 밤 언니랑 찜질방에 가고 싶어. 나랑 하룻밤 보내면 안 될까?”

우리는 이미 스무 번도 넘게 함께 죽었다 살아난 사이가 아닌가. 게다가 온몸을 휘감는 기분 좋은 취기는 도대체 얼마 만인가.

  “찜질방 좋지. 가보자. 난 아직 찜질방이란 데를 한 번도 못 가봤거든. 오늘 밤 우리 그 곳에 가서 또 죽어보는 거지 뭐.”

  내 말에 친구는 낄낄거렸다. 이제 우리는 ‘자살’을 모의하는 것이 아니라 ‘살자’를 도모하는 낙관론자들로 바뀌어 있었다. 밝아진 친구를 본 나는 괜히 즐거워져서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나 친구 손에 이끌려 후끈한 찜질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조금 전의 호기는 어디로 가고 슬며시 불안해졌다.

  ‘집에는 뭐라고 말하지? 남편도 친구를 잘 아니까 상황을 말하면 허락해 줄지도 몰라.’  나는 속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전화기를 들고 망설이는 내가 보기 딱했는지 친구는 내 전화를 빼앗아 남편과 벌써 통화하고 있었다. 남편은 선선히 나의 하룻밤 외박을 허락해주었다. 그러나 복병은 다른 곳에 있었다. 집안일을 부탁하려고 딸아이에게 전화를 넣은 것이 화근이 된 것이다.

  “외박은 엄마가 처음부터 계획한 일이 아니었잖아요? 굳이 자고 오겠다면 어쩔 수는 없지만 엄마의 외박이 불쾌한 것만은 사실이에요.”

  정신이 확 드는 것 같았다. 딸아이의 말이 야멸치긴 했지만 논리정연했다. 느긋하게 찜질을 즐길 기분은 이미 아니었다. 시계를 보니 밤 11시가 조금 지나있었다. 바로 택시를 타고 달려간다면 12시 이전에는 충분히 집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평소 나는 가족들에게 늦어도 밤 12시까지는 꼭 귀가해야 한다고 강조해 온 터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날 밤의 내 행동은 자승자박이었다. 친구에게 양해를 구하고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려는데 알 수 없는 부아가 치밀기 시작했다. 그 부아의 정체는 아이를 향한 것 같기도 하고 나를 향한 것 같기도 한,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그 날 밤의 내 감정은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사회적 규범과 관습에 대한 최초의 반항이기도 했다.

  나는 규범이란 꼭 필요한 것이고, 당연히 그것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내가 생각하는 규칙들은 ‘최고선’이라 믿었다. 그러나 더러는 자유로울 수 있는 융통성, 나는 그것을 간과하고 살아온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지켜온 그 많은 규범 중에 조금 전 딸아이가 말한 ’엄마답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정체를 알 수 없이 끓어대던 부아는 마침내 오기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려던 마음을 접고 꼭 자고 가야겠다고 딸아이에게 통고해 버렸다. 내일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오늘은 마음이 시키는 대로 그냥 한번 놔둬보기로 했다.

  가운으로 갈아입은 나는 친구와 함께 찜질방에 누웠다. 자살이야기에 더 이상 흥미가 없어진 친구는 몇 번 뒤척이는가 싶더니 뜨끈한 온기에 몸을 맡긴 채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버렸다. 넓은 찜질방에는 여인네 몇이 누운 채 텔레비젼을 보며 잡담을 즐기고 있었지만 편치 못한 마음 탓인지 나는 잠들지 못하고 계속 한 가지 생각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나는 지독한 모성콤플렉스에 시달린 한 사나이를 알고 있다. 오랜 병고에 시달린 이유로 우리 문학사에서 소외되어버린 그의 이름은 ‘허윤석’이다. 내가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순전히 그가 추구한 모성 때문이었다. 그가 남긴 유일한 장편소설 『구관조』에서 작가 자신은 육십 고개를 넘어서서도 자아를 발견하지 못했는데, 그 원인을 모성애의 결핍에서 찾고 있었다. 유아적 애착 관계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한 그 사나이는 모성애를 인간 구원의 에너지로까지 확대해석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나이에게 매료되어 있던 그 시절엔 나 역시 모성을 최고의 선(善)으로 인식하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내 본능 속에 잠재된 모성을 신(神)의 경지까지 격상시키는데야 여자인 내가 마다할 이유가 있겠는가.

   사춘기가 아닌 사추기(思秋期)에도 반항의 인자가 작용하는지, 요즘 나의 사고는 젊었을 때와는 달리 많이 바뀌었다. 지금까지 내가 생각해 온 것들이 과연 정답인지 회의가 든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최고의 선으로 추앙하는 모성의 무게에 여성 자신이 ‘기쁘게’ 압사당하고 있다는 생각도 그런 맥락이다.

   모성은 아름다운 본능이라 믿었다. 나 역시 결혼과 함께 엄마 되기를 원했고, 엄마가 된 후에는 최선을 다해 자식을 길렀다. 그런데 자식이 성장한 지금, 그 찬양받아 마땅한 모성도 사회적 강요로 형성된 여성들의 무의식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딸아이가 어미의 하룻밤 외박을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운해서 해본 생각이 아니라 손바닥에 붙어있는 사금 한 조각, 그 슬픈 자아 찾기에서 시작된 나의 고뇌였던 것이다.

   사실 ‘엄마’라는 말에 나는 안주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안주는 인간으로서의 내 자아와 맞바꾼 이름이었다. ‘여자’란 말에서는 청바지의 자유가 느껴진다. 그러나 ‘엄마’란 말에서는 행주치마의 이미지를 떨쳐버릴 수가 없다. 여성들은 그 행주치마에 자신의 꿈을 포함한 모든 것을 담아버렸다.

   ‘엄마답다’는 말은 ‘모성에 위배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모성이라는 말에서 맡아지는 슬픈 희생의 냄새. 모성에 대한 열광은 바로 그 희생을 예찬하는 것일 게다. 모든 것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어도 끝까지 남아 빛나는 그 무엇. 그것은 모래 사이에서 겨우 발견한 사금 한 조각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손가락 사이에 남아있는 한, 나는 남루해진 모성에 내 전부를 걸진 않을 것이다. 반짝이는 사금 한 조각, 그건 바로 소중한 자아가 아니겠는가.

  새벽을 가리키는 찜질방의 시계를 바라보며 나는 다시 최진실을 생각했다. 어떤 경우에도 자살은 옳지 못하다. 그러나 자식 때문에 못 죽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소중하기 때문에 죽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스스로를 응원했다.

  ‘지난 밤 너는 친구와의 자살놀이 끝에 겨우 모성으로부터 자유를 꿈꾸게 되었어. 그러다 보니 시간이 흘러 다시 낮이 된 것 뿐인데 그것도 외박인가!’

  나는 가슴을 편 채 당당하게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눈부신 가을 햇빛이 기분 좋게 내리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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