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1092

엇박자노래 / 임미옥

엇박자노래 / 임미옥 따당~땅, 따당~땅, 왼손으로는 건반을 타건하며 오른손은 햄머로 조율 핀을 조여 간다. 혼을 모아 공중에 흩어지는 맥놀이들을 잡아 동음 시킨 뒤, 현들을 표준 음고에 맞춘다. 엇박자로 두들겨 생기는 맥놀이들, 기억저편서 들려오는 아련한 노래 소리들과 겹쳐진다. 들린다…. 그리운 가락들이 들려온다. 아! 오래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부르시던 엇박자 가락들이다.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몸이 아파 어머니가 몹시 그리운 날은 더욱 선명하게 들리던 소리들이다. 영혼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그윽하고 정겨운 가락들,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지던 소리들,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조율하던 손을 멈추었다. 어머니 손바닥처럼 뻣뻣하고 거칠거칠한 현들을 쓰다듬었다.현이 파르르 떤다. 두들겨 맞고 또 맞아서 건들..

좋은 수필 2024.05.05

내 책상 앞의 풍경과 죽비에 대한 헌사/배한봉

내 책상 앞의 풍경과 죽비에 대한 헌사/배한봉    이야기 하나 ; 풍경과 죽비를 위하여  내 책상에 앉으면 두 개의 물건이 보인다. 하나는 풍경(風磬)이고 하나는 죽비(竹篦)다. 풍경은 책상 앞의 베란다와 통하는 거실 문틀에 걸려 있고, 죽비는 책상 옆, 손이 잘 닿는 곳에 있다. 이 풍경과 죽비는 나의 오래된 친구다. 잘들 아시겠지만 풍경과 죽비는 수행자들의 방일이나 나태함을 깨우치는 역할을 한다. 처음 이 풍경과 죽비를 내 곁에 둘 때만 해도 나의 방일과 나태를 경계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새 처음의 그 목적은 잊히고 그저 나를 묵묵히 바라보는 친구가 되어 있다. 친구와 포도주는 오래 될수록 좋다는 말이 있다. 오랜 벗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도 있다. 굳이 말하자면 풍경과 죽비도 그..

좋은 수필 2024.05.03

거룩한 본능 / 김규련​

거룩한 본능 / 김규련​​동해안 백암(白巖) 온천에서 눈이 쌓인 주령(珠嶺)을 넘어 내륙으로 들어서면, 산수가 빼어난 고원 지대가 펼쳐진다. 여기가 겨우내 눈이 내리는, 하늘 아래 첫 고을인 수비면(首比面)으로, 대구(大邱)에서 오자면 차편으로 근 다섯 시간을 달려야 하는 곳이다.​마을이라고 하지만, 여기저기 산비탈에 농가가 몇 채씩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난한 자연 촌락이다. 이 근방에는 천혜(天惠)의 절경이 많이 있다. 그리고 이 고장 사람들 자신이, 그 절경을 이루는 웅장한 산이며 기암 절벽이며 눈 덮인 수림이며 산새며 바람 소리와 함께, 없어서는 안 될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 있다. 이들의 주된 생업은 채소(菜蔬) 농사와 담배 농사지만, 철 따라 산나물과 약초를 캐고 송이버섯을 따들이기도 한다. 이..

좋은 수필 2024.05.01

봄의 그림자 / 김규련

봄의 그림자 / 김규련  봄은 천지의 기를 뚫고 나오는 것일까.햇볕과 바람, 물과 땅에 온기가 돈다. 누리 가득한 초목의 새싹에서 열여섯 살 소녀의 입술 같은 봄이 얼굴을 뻘쭘히 내민다.산수유 꽃, 생강나무 꽃, 수달래… 온갖 꽃들이 향기를 흩뿌려 남아 있는 냉기를 밀어낸다. 산새며 들짐승이며 사람들, 모든 생령들이 생기를 얻어 저마다의 몸짓에 힘이 넘친다. 마침내 초록 빛깔이 밀물마냥 번져와 온 산야를 물들였다.나는 신록이 향연을 펼칠 때와 갈잎이 귀토의식을 마감할 무렵이면 광기를 참다못해 팔공산에 오른다. 산허리를 감도는 순환도를 따라 파계사 방향으로 걷고 있다.오늘은 일요일. 상춘객과 승용차가 길을 가득 메우고 있다. 웅장한 신록의 바다와 풋풋한 내음, 뛰어난 산세의 위용과 신묘한 산정기, 사람마다..

좋은 수필 2024.05.01

깃들이다 / 김은주

깃들이다 / 김은주아마 이른 봄이었나 보다. 겨울 일을 막 끝내고 풍성하게 주어진 시간을 바느질로 달래고 있는데 베란다 광목 커튼 뒤가 이상하게 수상쩍다. 꾸르륵 꾸르륵, 창자가 밥을 밀어내는 소리 같기도 하고 어찌 들으니 개수대에 물 빠지는 소리 같기도 하다. 자투리 천으로 말 여러 마리 만들고 고무신 한 켤레를 다 깁는 사이에도 정체 모를 소리는 내내 주위를 맴돌았다. 창밖은 위태로운 난간이고 강을 끼고 있어 사나흘이 멀다 하고 바람이 불어대니 그 무엇도 깃들 틈이 없는 곳이다. 소리의 정체가 궁금하긴 했으나 아직 바람이 차니 창을 열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다 변화무쌍한 봄 날씨는 황사 바람이 몰아치고 볕이 났다가 또 사월에 함박눈까지 내렸다. 조석으로 변하는 날씨에 휘둘리다 묘한 소리는 사라..

좋은 수필 2024.04.30

벽 / 허세욱

벽 / 허세욱벽을 보면 왠지 친근했다. 그 텁텁한 살결이 이웃집 아저씨 같고, 고집불통으로 서 있는 모습은 답답한 선머슴을 보는 느낌이다. 우릴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지만 지금도 작은 공을 꺼내 거기다 벽치기 하고 싶다. 우릴 건너가지 못하게 버티고 섰지만 거기엔 누가 누굴 좋아한다고 갈겨놓은 낙서가 심심찮게 보인다. 우릴 더 멀리 볼 수 없도록 막았지만 거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등짝을 기대고 시원하게 두 어깨를 문지르고 싶다.그 구조는 별 게 아니었다. 황토에다 지푸라기를 반죽하면 그만이다. 양회벽이라도 철근이나 각목을 촘촘히 세우고 거기에 덕지덕지 흙을 붙이고 시멘트를 바르고, 다시 환한 벽지에다 풀을 멱칠하여 슬슬 손질하면 말끔해졌다.작은 집에 많은 것은 섬돌 위에 고무신만 아니었다. 작은 초가삼간..

좋은 수필 2024.04.30

김치와 고등어 / 백금태

김치와 고등어 / 백금태김치와 고등어 / 백금태 시큼한 김치 한 쪽을 썩둑썩둑 썰어 냄비 바닥에 깔았다. 양파와 파도 길쭉길쭉하게 잘라 옆에 곁들였다. 그 위에 금방 어물전에서 사 온 살아 펄펄 뛸 것 같은 고등어를 손질하여 얹고 고춧가루를 듬뿍 뿌렸다. 고등어가 잠길 듯 말 듯 물을 잘박하게 붓고 가스 불을 댕겼다. 시간이 흐를수록 온 집안이 김치의 시큼한 맛과 고등어의 구수한 냄새에 푹 빠졌다. 몇 년이나 냉장고 밑바닥에 묵혀 있던 김치와 고등어가 서로를 품으며 깊은 맛을 뿜어낸다.그 김치는 부산에 사는 언니가 삼 년 전에 담가 준 것이었다. 직장 다니는 동생이 안쓰러운지 툭하면 김치 상자가 택배로 배달되곤 한다. 그해는 동생에 대한 언니의 사랑이 더 깊었는지 아니면 바닷가에 사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

좋은 수필 2024.04.30

옴살/김은주

옴살/김은주 가을이 내리는 골목길은 한적하고 쓸쓸하다. 인적 없는 길을 따라 올라가니 거기 곧 쓰러질 듯 집 한 채 있다.  주황색 양철지붕 아래 한 뼘 크기의 일자집이다. 여닫이 방문 두 짝과 작은 창이 하나 있는 조촐한 여염집이다. 방문 앞에는 낮은 나무 책상이 둘, 나란히 놓여 있고 그 위에 누가 꺾어다 뒀는지 빈 병에 코스모스 한 줌 꽂혀 있다. 오른쪽 추녀 아래로 감나무 한 그루 서 있고 그 아래 블록으로 쌓아 올린 허름한 부엌이 있다. 부엌문은 따로 없고 군용천막을 말아 올렸다 내리는 정도로 문을 대신하고 있다. 예배당 종지기로 일생 살다간 권정생의 생가다. 마당에 무성하게 잡초가 자라나 폐가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 분의 삶에 비춰보자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더 나아 보인다. 물색없이 조성해..

좋은 수필 2024.04.28

다시 시작 / 김은주

다시 시작 / 김은주 목화가 툭 하고 고개를 꺾었다. 경주어 얻어 온 씨앗이 되 피우고 다시 살아나 여러 해 나의 뜰에서 산다. 솜이 칭칭 감긴 씨앗 몇 알을 누구에게 받아 왔는지 통 기억에 없다. 백련이 지고만 어느 논둑에서 받은 기억은 아련한데 누구였는지 무슨 일로 연 밭에서 목화씨를 건넸는지 아득하기만 하다. 마른 기억은 바람에 사라졌지만 해마다 야무진 검은 씨앗을 쓰다만 종이에 싸 확독에 보관해 둔다. 옹기에서 겨울을 난 씨앗은 봄이 되면 다른 일년초와 함꼐 뜰 여기저기 뿌려지는데 그 위치는 꽃 피는 여름이나 되어야 정확히 알게 된다. 마당 귀퉁이에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꽃 피우고 지다가 초록이 쓰러지는 이맘때쯤 흰 솜꽃을 피워 존재를 드러낸다. 집 비운 사이 된서리가 다녀간 모양이다. 온통 ..

좋은 수필 2024.04.28

글밥/김은주

글 밥                                                     김은주 젓가락을 밥 속에 찔러 넣는다. 옆으로 젖히니 덩어리에서 덜어져 나온 밥 한 덩이가 내 입속으로 들어온다. 밥을 입속으로 데리고 온 젓가락을 빼내며 오래 밥을 씹는다. 밥을 씹으며 내다 본 창밖에는 오월의 장미가 붉다. 참으로 게으른 식사다. 어른들이 봤으면 복 달아난다며 등을 쳤을 일이다. 매번 처음인 듯 밥을 씹는다. 처음에는 혀 위에서 구르던 밥 덩어리가 씹을수록 알갱이로 변하며 양옆 턱 선으로 가 고인다. 고인 밥 알갱이가 다시 어금니 위로 올라와 부서지고 다시 턱 아래로 가 씹힌다. 한참을 이러다 보면 혀 아래 침샘에서 달달한 침이 입 안 가득 고여 온다. 밥 알갱이가 녹아들며 느껴지는 이..

좋은 수필 2024.04.28

사막 건너기/김은주

사막 건너기 / 김은주   첫닭이 울기도 전 더듬더듬 어둠을 가르고 골목길에 나선다. 골목길은 이미 낯선 이국의 언어와 분주한 지프의 시동 소리가 함께 실타래처럼 엉켰다. 세상의 모든 말은 귀가 열리면 언어이고 귓등을 되돌아 나가면 소음이다. 왕왕거리는 소음도 며칠 듣다가 보니 말속에 가락도 있고 정情도 느껴진다. 여남은 대의 지프가 일제히 한 방향으로 불빛을 쏜다. 길쭉한 빛 사이로 건조한 먼지가 둥둥 떠다니고 출발을 재촉하는 시동 소리가 사뭇 우렁차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흰옷을 입은 남자가 고개와 손을 동시에 차 쪽으로 흔들며 차에 오르라는 신호를 보낸다. 긴말은 필요 없고 서로 알아서 제자리를 찾아 차에 오른다. 찬 새벽공기에 코트 깃을 세우고 손가방도 가슴을 가로질러 단단히 맸다. 지금 우리는 깜..

좋은 수필 2024.04.28

달개비/김은주

달개비                                                                                                                 김은주  국 안에 무가 제법 투명하다. 함께 넣은 파와 마늘이 어우러져 끓고 있는 국물도 곡진해졌다. 반찬 몇 가지를 조물조물하고 뒤이어 식혜 한 통을 다 삭혀 두는 사이에도 그녀는 여태다. 빠진 목으로 짐작건대 오고도 남았을 시간이건만 감감무소식이다. 기다리는 자가 느끼는 시간은 오마는 사람의 두 배로 길다. 같은 시간이지만 오는 이에게는 서둘러야 하니 짧게 느껴질 테고 기다리는 사람은 오리무중이니 까막눈이 될 수밖에 없다. 엿가락처럼 늘어진 시간을 주체할 수 없어 걸레질하다가 무단히 멀쩡하게 놓인..

좋은 수필 2024.04.28

토굴 /김은주

토굴 /김은주  글을 재우려고 방문을 닫는다. 자꾸만 들떠 달아나는 글을 잡고 뉘여 토닥토닥 등을 두드린다. 이불도 끌어당겨 덮어 보고 흥얼거리며 자장가도 불러 본다. 겨드랑이 아래 끼고 누워 충분히 숨길도 열어주고 그래도 뒤척이면 머리까지 쓰다듬어 준다. 스르르 눈 감을 때까지, 달디 단 잠 속에 들 때까지 오래 글을 어르고 달랜다. 처음부터 재우려는 생각은 없었다. 행간을 넘나들며 혼자 잘 놀 때는 그러려니 하고 두고 보지만 걸려 넘어지고 징징거리기 시작하면 그때는 푹 재우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문턱에 걸리고 툴툴거리는 글을 어찌 그냥 두고 보겠는가? 쓰는 자는 툴툴거림의 이유라도 알지만 읽는 자에게 그것은 독서의 물길을 막는 일이니 말이다. 접시꽃 흐드러진 칠월의 뙤약볕이 방까지 도달하기에는 ..

좋은 수필 2024.04.28

자객 / 김은주

자객 / 김은주  자객이 떴다. 푸른 안개도 바람을 가르는 그림자도 없다. 끊어 놓을 듯한 호흡도 꿈틀거리는 맥박 또한 찾아볼 수 없다. 달빛 한줌 등에 업지 않고 월담은 애당초 꿈도 꾸지 않은 듯하다. 자객은 그 흔한 검 한 자루 손에 쥐지 않고 무더운 염천을 건너 우리에게로 왔다. 심복 하나쯤 둘 법도 한데 오직 혼자다. 이울어진 빛의 배후에 도사리고 앉았다가 싸늘한 쇠붙이 올가미 하나 달랑 들고 긴 유리병의 목을 따러 하강한 것이다. 금방이라도 숨 줄을 끊어 놓을 듯한 자객의 기세에도 마개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다. 병은 긴 목을 빼고 앉아 언제나 목숨을 내놓기 위한 것이라는 듯 일말의 저항도 없어 뵌다. 병은 자객을 만나기 전 냉골의 방에 앉아 긴 참선에 들었을 것이다. 화두타파를 위해 목구멍까지 ..

좋은 수필 2024.04.28

빈방/김은주

빈방                                                                                            김은주  홍매화가 붉게 핀 길 건너 할머니집이 전에 없이 부산하다. 마당 가득 사람이 북적대고 환하게 불도 밝혀져 있다. 집 앞 텃밭에 흙이 녹아 씨를 넣어야 할 때가 다 되었는 데도 할머니는 기척이 없었다. 추운 겨울을 건너기 위해 아들네 집에라도 가셨나 싶었는데 오늘 밤 할머니는 조등(弔燈)으로 내걸려 있다. 일 년 내도록 드나드는 사람 하나 없더니 오늘 보니 식구들도 참 많다. 보이지 않는 식구들이 저리 많은데 할머니는 겨우내 빈방에 사람을 들이고 싶어 그리 안달이셨을까. 나는 베란다 창틀에 기대 할머니 집 마당을 유리병 속처럼 내려..

좋은 수필 2024.04.28

비와 당신의 이야기 / 김 경

비와 당신의 이야기 / 김 경     비가 내린다. 여름엔 그토록 야박하더니 가을 들어 장맛비처럼 퍼붓는다. 마치 누군가의 미련 같다.때마침 라디오에서는 '비와 당신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한때 김태원이 이끄는 록그룹 「부활」에 빠져서 전국 콘서트를 따라다닐 때 엔딩 곡으로 어김없이 등장하던 노래다. 화려한 조명 아래 비의 영상이 펼쳐지고 보컬이 혼신을 다해 무대를 장악하면 마지막이라는 아쉬움과 함께 절절한 노랫말이 모두들 까무러치게 했다.김태원이 열일곱 살에 썼다는 이 곡은 비오는 날 들어야 제격이다. 그것도 소나기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어두컴컴한 날 홀로 음률 속을 헤매노라면,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이된다. 내게도 언젠가 비오는 날의 약속이 있었고, 그 약속을 지키지도 못한 채 떠나간 사랑이 존재했..

좋은 수필 2024.04.27

사랑길 / 박월수

사랑길 / 박월수 소리 내지 않는 마루를 본다. 솟을대문 높다란 송소고택 큰 사랑채에 딸린 툇마루는 밟아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쪽문쯤에서 안채 바람벽으로 이어지는 툇마루는 두께가 유난하다. 사랑채에 기거하던 바깥양반이 안채로 밤 나들이 가던 길이란다. 모르긴 해도 가슴이 꽤나 두근거렸을 아름다운 길이다. 아랫사람 눈에 띄지 않으려 부러 그리 만들었단다. 이슥한 밤 사랑채의 툇마루 밟는 소리를 체통을 흐려놓는 소리로 여겼던 옛 양반이 측은해진다. 아흔아홉 칸 저택에서 많은 식솔을 호령하던 양반에게도 드러내 놓고 사랑하는 일만은 허용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남의 눈을 피해 아내마저 은밀하게 만나야 했던 남자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한 집에 살면서도 부부가 떨어져 지내는 마음은 애틋하고 절절했을 게다. 하나 ..

좋은 수필 2024.04.23

숫돌 / 박영순

숫돌 / 박영순 칼을 빼 들어 본다. 칼의 무딘 정도를 손끝으로 직감한다. 칼날이 무뎌진 걸 느끼면 칼 가는 줄로 쓱싹 대충 갈아 사용하는 나이다. 그러나 나의 옛집에서는 매 식사 때마다 찬거리를 썰고 다졌던 칼이 도마 위에서 재료들을 미끄러뜨리면 칼을 들고 장독대로 향해 걸어 나가셨던 엄마가 계셨다. 그곳에서 마음에 드는 항아리 뚜껑 하나를 열어 거꾸로 덮어놓으시고는 뚜껑 테두리에 칼날을 쓱싹 문질러 갈아 쓰셨다. 칼날이 더 무디어지면 툇마루 아래 놓아둔 우리 집의 숫돌이 등장하였다. 숫돌은 아버지의 전유물처럼 칼이나 낫을 갈 때만 우리들 앞에 놓였다. 아버지의 수고로 칼날은 시퍼렇게 번뜩였다. 그런 칼날을 받아 보며 긴장하여 떨던 엄마는 자주 칼날에 베이셨다. “조금만 덜 갈아 주면 될 텐데, 소 잡..

좋은 수필 2024.04.23

못을 뽑다/권남희

못을 뽑다/권남희 벽이 갈라진다. 너무 큰 못을 벽에 겨누고 두드려 박은 것이다. 오래된 벽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왜 깨닫지 못했을까. 새해 아침부터 못 박을 곳이 없나 벽을 바라보다 일을 냈다. 집안 곳곳에 못을 박고 뽑아낸 흔적과 새로 박은 못들이 있다. 벽은 이미 간격조정을 할 수 없을 만큼 박힌 못으로 가득 찬 느낌이지만 미처 비명 지를 틈도 주지않고 대못을 들어 박기 시작한다. 못 박히는 소리는 온 집안을 울리고 아래 위층까지 대못 치는 소리가 퍼져나간다. 망치소리는 내 팔을 따라 몸 안으로 돌아다니며 진동 하다가 머리까지 흔들기 시작한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밤 아홉시 이후에는 벽에 못을 박지 말아달라는 문구가 붙여있다. 아침이지만 잠시 숨을 고른다. 새집을 계약하고 이사했을 때 벽..

좋은 수필 2024.04.21

적과/이정경

​ 적과/이정경 사과 꽃봉오리 수줍게 올라오던 봄, 오랜만에 옛 친구들이 모였다. 모처럼 나들이라 꽃단장했지만, 어디 세월의 흔적을 얄팍한 분칠로 가릴 수 있을까. 파운데이션 위로 드러나는 주름살에서 그녀들의 지난 시간이 숨어있다. 백발이 성성하고 느슨해진 말투에서 삶의 연륜을 느낀다. 늘 동생을 업고 다녔던 친구의 등을 슬쩍 만져본다. 아직도 그녀의 빈 등에서 젖내가 묻어있는 듯하다. 세상 언저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았던 친구들이다, 그녀들의 이야기는 날이 저물도록 끝이 나지 않는다. 적과로 떨어진 과일처럼 숨을 죽이고 산 시간을 쏟아내려면 아마도 이 밤을 하얗게 새워야 할 것 같다. 엄동의 추위를 이겨낸 사과나무는 가지마다 꽃눈을 틔운다. 꽃은 액화를 제거하는 과정을 거치고 정화만 남긴다. 선택된 꽃은..

좋은 수필 2024.0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