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1097

곁/김혜주

곁/김혜주  되돌릴 수도, 늦출 수도, 멈출 수도 없는 시간은 항상 나를 애태우게 한다. 들숨과 날숨 사이에도 가뭇없이 휘발되는 그것은 나의 얕은 기억 속에만 쌓인다. 스치듯 빠져나가 버리는 무언가를 잡으려고 애쓸 때마다 나는 ‘곁’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불안이 조금 누그러지고 왠지 겨드랑 안쪽으로 끼어드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진다.802호 할머니가 실버타운으로 입주한다고 했다. 같은 아파트에 살았고, 아침저녁으로 인사를 나누던 이웃이었다.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작별 인사를 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나는 반갑게 할머니를 껴안았다. 등이 굽은 할머니는 두 팔을 나의 겨드랑이 사이로 휘감은 채 등을 다독여 주었다. 수줍게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동안 한 꺼풀의 ..

좋은 수필 2024.07.19

그릇을 읽다 / 강표성

그릇을 읽다 / 강표성   시간의 지문들이 쌓였다. 침묵과 고요가 오랫동안 스며든 흔적이다. 때깔 좋던 비취색이 누르스름한 옷으로 갈아입어도 처음 품었던 복(福)자는 오롯하다. 홀로 어둠을 견딘 막사발을 들여다보니 그 안에 고인 시간이 주르르 쏟아진다. 한때, 골동품에 마음이 기운 적 있다. 눈요기라도 할 겸 옛 물건을 기웃거리기 시작한 건 고향 집의 그림들을 털린 후에 생긴 버릇이다. 우리가 도시로 이사한 후 누군가 사랑채의 그림들을 귀신같이 도려내 가버렸다. 이에 눈 밝은 큰집 오빠가 쓸 만한 물건들은 서울로 옮겼다는 소식이 뒤따랐고, 한참 뒤에야 시골집에 내려간 나는 살강 한쪽에 엎어진 그릇 하나를 품고 왔을 뿐이다.무시로 쓰던 막사발 그대로다. 이름 있는 도자기도 아니요, 대를 뛰어넘을 만큼 햇수..

좋은 수필 2024.07.18

시간과 강물/김훈

시간과 강물/김훈       나는 1948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두 살 때 6‧25 전쟁이 나서 엄마 등에 업혀 부산으로 피난 갔고, 부산에서 자라서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에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은 잿더미가 되었다. 학교에는 건물이 없어서 미군이 지어준 천막 교실에서 수업했다. 해마다 보릿고개에는 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고 관공서 건물에는 ‘기아 퇴치’, ‘절량농가 근절’, ‘식량 증산’ 같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고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여름에 큰비가 와서 한강 물이 불었다.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마포구 망원동 쪽 한강으로 물 구경을 나갔다. 한강은 물이 가득 차서 출렁거리며 흘러가고 있었다. 강은 힘차고 거침없었다. 아버지는 상류 쪽을 바라보았고, 멀어서 흐려지는 하류 쪽을 바라보았다. 한참 후에 ..

좋은 수필 2024.07.17

형용사와 부사를 생각함/김훈

형용사와 부사를 생각함/김훈        나는 인쇄된 나의 글을 읽지 않는다. 돌이켜 보면 한 생애가 강물 같이 흐름을 이루지 못하고, 파편으로 부스러져 있다. 삶을 구겨 버리는 그 무질서가 아무리 진지하고 순수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표현하려는 과장된 어조와 단정적 서술을, 이제 견디기 어렵다. 책값을 내고 이걸 사서 읽었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식은땀이 난다. 이 자학적 수치심은 오래된 고질병인데, 증세는 악화 중이다. 사유의 바탕이 성립되지 않거나 골조가 허술하거나 전개가 무리하거나 애초부터 쓸 필요가 없는 것들을 매문賣文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형용사나 부사 같은 허접한 것들이 문장 속에 끼어들어서 걸리적거리는 꼴들이 역겹고, 그런 허깨비에 의지해서 몽롱한 것들을 표현하려 했던 나 자신이 남사스럽..

좋은 수필 2024.07.17

보통의 언어들/김이나

관계의 언어​연인 사이에 사랑의 속성 중 하나는 '그리움'이다. 그리움이라는 건 빈 곳이 느껴진다는 것, 다시 말해 이곳이 당신으로 채워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사람은 소유할 수 없다지만, 어쩔 수 없이 소유하고 싶어지는 얄궂은 마음이 사랑이다.​'좋아한다'는 감정은 반대로 조건이 없다. 혼자서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면 마음 한편이 시큰해지기도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은 그런 게 없다. 해가 좋은 날 널려진 빨래가 된 것처럼 뽀송뽀송 유쾌한 기분만 줄 수 있는 건 '좋아하는 사람'이다.​내가 '좋다'라는 마음을 귀하게 보는 데는 이 감정이 가진 실시간성과 일상적임에 있다. 우리는 '좋다'는 말을 언제 하는지 떠올려보면 실시간성이라는 말이 무언지 이해가 갈 것이다. 친구랑 공원에 앉아 기분 좋은 바람을 맞을 ..

좋은 수필 2024.07.15

파랑, 늑대의 시간 /김채영

파랑, 늑대의 시간 /김채영 저무는 풍경은 몇 단계의 색체를 거느린다. 서녘하늘부터 물든 노을이 사그라지고 허공은 잿빛으로 어스름할 때 짙은 파랑은 온 하늘을 덮는다. 밤이 되기 직전 진파랑은 고운 몽환같이 감동과 여운으로 휘몰아치는 것 같았다. 평생을 따라다니는 상처로 곤비한 내게 천양의 푸른빛은 광활하며 자비롭다. 파랑은 내 안의 질척이는 불온함에 휘산 작용을 하는듯하다. 파랑은 저녁을 닫고 아침을 여는 시그널이다. 일출 전 새벽하늘은 저녁의 푸른 색감처럼 유려하고 신성하다. 새벽하늘을 응시하면 바다를 보는 것 같은 미묘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새벽 하늘빛이 청라처럼 그윽해지면 동쪽 하늘가에서 샐빛이 뿌옇게 움튼다. 그 뒤 까치 노을이 붉게 물들면서 아침이 오는 것이다. 피카소의 청색 시대는 친구의 자..

좋은 수필 2024.07.14

맹그로브 / 장금식

맹그로브 / 장금식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 그곳에 들어서는 순간, 이쪽이 강이고 저쪽이 바다라는 경계가 사라진다. 인간과 자연의 경계마저도 사라지는 것 같은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나무뿌리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봉긋하게 웨이브를 넣은 여인의 머릿결처럼 활모양으로 굽은 가닥이 무리지어 있다. 가느다란 뿌리가 여러 개다. 어우러진 나무뿌리는 반쯤 펼쳐진 우산 같다. 빽빽이 우거진 초록 잎과 옹골차게 얽힌 뿌리는 오랜 세월 동안 흐트러짐 없이 응축된 시간의 흔적이다. 말레이 반도, 안다만해, 랑카위섬 지질공원 안에 있는 맹그로브 숲이다. 도드라진 뿌리는 나의 관심에 잔잔한 파문으로 화답해준다. 스피드보트가 속력을 낮추고 뿌리의 군락으로 다가간다. 나무의 속성에 대해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나무에게..

좋은 수필 2024.07.12

새벽 - 장미숙

새벽 - 장미숙  새벽은 고양이 발걸음처럼 조용히 온다. 한껏 발효된 공기가 어둠의 등을 들어올리면 그 사이로 가만가만 스며든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새벽이 높은 빌딩까지 올라가려면 살아 있는 것들의 생생한 숨소리가 필요하다. 밤의 지친 육신을 벗고 생기로워지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 빛을 깨운다. 새벽은 얇고 투명하다. 두꺼운 어둠을 뚫고 나왔기에 새초롬하고 새뜻하다. 밤이 지쳐 나가떨어질 즈음, 남은 마지막 기운이 새벽의 살 속으로 옮겨온다. 폐기 처분된 희망과 촉을 세우려는 절망의 경계가 흐려지는 시간을 지나고 나면 새벽은 없는 듯 찾아온다. 저녁이 소멸하면서 잉태한 희미한 빛 속에는 가버린 시간과 남아 있는 시간이 넘나든다. 저녁의 발길질에 차여 상처가 난무하는 도시의 옆구리 속에는 비애가 웅크리..

좋은 수필 2024.07.10

호미論/윤정인

호미論/윤정인      호미가 콕콕 텃밭을 쫀다. 흡사 새의 부리 같다. 날이 움직일 때마다 햇살이 사금파리처럼 튄다. 쇠비름, 바랭이가 속절없이 뽑힌다. 긴 뿌리 민들레도 서너 번 호미질에 투항하고 만다. 이랑에 일순 긴장이 돈다. 전원으로 이사 온 후론 텃밭에 나가는 일이 잦아졌다. 도심에선 경험하지 못했던 일상이다. 우기에 접어드는 육칠 월은 며칠만 발걸음을 늦추면 잡초로 덮여 묵정밭이 돼버린다. 대파모종보다 잡초가 더 웃자라버린 이웃 텃밭이 흉하다. 그 꼴이 나지 않게 얼마 전 양파를 수확하고 비워 둔 곳을 뒤적거린다. 호미는 잡초를 뿌리째 뽑고 땅속 깊이 든 감자나 고구마를 손쉽게 캐내게 한다. 생김새에 따라 그 쓰임이 다르다. 끝이 뾰족한 ‘막호미’는 작물을 캐거나 흙을 팔 때 사용한다. ‘..

좋은 수필 2024.07.03

붉은 모과/강현자

붉은 모과/강현자 창밖에 걸린 봄볕이 주춤주춤 겨울을 밀어낸다. 봄을 찾아 나섰다. 우암산 아래 용화사에 가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겠지. 미륵불 뒤로 능수벚나무가 긴 머리채를 죽죽 늘어뜨렸다. 가지마다 꽃망울이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듯 가쁜 숨을 몰아쉰다. 광채가 난다. 달달한 봄볕에 취해 자몽한데 은근한 향이 나를 이끈다. 코를 벌름거리며 향을 따라 발길을 옮겼다. 오케스트라가 처음 시작될 때의 크레센도 연주처럼 희미하던 향기가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자극적이지 않다. 낯설지도 않다.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뭘까?마른 풀더미 위에 모과 서너 개가 아무렇게나 놓여있다. 그런데 붉다. 봄볕을 얹은 색이 더욱 화려하면서 1월의 탄생석 가넷처럼 붉다. 붉은 모과라…. 처음 보는 붉은 모과가 궁금했다...

좋은 수필 2024.07.03

발소리만, 그저 다만 발소리만이라도 /최명희

발소리만, 그저 다만 발소리만이라도 /최명희    ​무엇 하러 달은 저리 밝을까.​섬뜩하도록 푸른 서슬이 마당 가득 차갑게 깔린 달빛을 밟고 선 채로, 아까부터 망연히 천공(天空)을 올려다보던 강실이는, 두 손을 모두어 잡으며 한숨을 삼킨다.​마치 숨도 살도 없는 흰 그림자처럼 서 있는 강실이의 머릿단에 달빛이 검푸르게 미끄러지며, 그네의 등뒤에 차가운 그림자로 눕는다.​사립문간에 선 살구나무도 제 그림자를 땅에 드리운 채, 구부듬한 검은 둥치 검은 가지를 겨울 한공(寒空)으로 뻗치고 서서, 빙무(氷霧) 같은 달빛을 전신에 받고 있었다.​눈(雪)도 없는 극한(極寒)의 밤에, 들여다보기 무서우리 만큼 깊고 검푸른 거울이, 티 하나 없이 말갛게 씻기워 상공에 걸린 겨울밤 하늘, 그 가슴 한복판에 얼음으로 깎..

좋은 수필 2024.07.02

허울과 애착을 다 벗은 조그만 씨앗이 되어/최명희

허울과 애착을 다 벗은 조그만 씨앗이 되어/최명희최명희내 어린 날의 서랍 속에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갖가지 물건들이 가득 차 있었다. 무엇이나 쉽게 버리지 못하고 오래 간직하는 성격 때문이었으리라.뒤안 마당 감나무 아래 앉아 소꼽 놀던 사금파리 꽃접시며, 깨진 조갑지를 곱게 갈아 흙밥도 담고 싱건지 국물도 떠 놓던 밥그릇, 국그릇,그리고 그 빛깔이 하도 선명하고 예뻐서 만지기조차 아깝던 색색갈 색종이들의 노랑․빨강․남색․초록․보라․주황. 설레이며 그 빛깔들을 접고 오려서 저고리․치마에 레이스 달린 원피스 입혀준 중이인형들. 쓰다가 더 못쓰게 된 몽당연필들과 닳아진 지우개, 귀퉁이가 꺾인 책받침, 낡은 필통. 서투르게 한 자 한 자 꼭꼭 눌러 쓴 국어 공책, 방학숙제 일기장과, 참 잘 썼어요, 라고 적힌..

좋은 수필 2024.07.02

숨쉬는 기둥 / 최명희

숨쉬는 기둥     /  최명희     가을에는 나무가 옷을 벗는다.   지난 여름의 폭우는 사납기도 하여, 잎사귀 무성한 생가지를 참혹하게 찢으며 쏟아지더니, 그 무슨 꼬투리 하나로 창대 같은 빗줄기를 이겨냈는지, 비가 멎은 다음 날 아침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여전히 우거져 푸르던 이파리들이, 이제는 꽃보다 고운 단풍으로 물들어 저렇게 황홀한 빛깔로 타오르는데, 나무는 단풍을 벗는다. 홀로 고요히.   자연의 순민順民으로 나무만 한 것이 또 있을까.   맨 처음 티끌만 한 씨앗이 땅에 떨어져 캄캄한 어둠 속에 묻혔다가, 이윽고 아기 이빨처럼 파랗게 싹이 돋아 오른 그 자리에서 기나긴 세월의 한 세상을 살다가 바로 그 자리에서 나이 다하여 죽어가는 나무.   나는 방랑하는 나무를 본 일이 없다.   ..

좋은 수필 2024.07.02

누빔점 / 지영미

누빔점 / 지영미   찌르르 휘리리, 새들의 지저귐이 사위에 울려 퍼진다. 어치가 적갈색 배를 보이며 낭창한 가지에 앉았다가 풀싹 날아오른다. 나무 위로 다람쥐가 달음박질한다. 솔잎을 덮어쓴 버섯이 갓을 한껏 부풀린다. 낯선 이의 발소리에 생명을 가진 것들이 경계 소리로 숲을 달군다. 자연에서 살아남기 위한 개체들의 신호가 적막을 깨운다. 수컷은 가지 위에서 작두 타는 광대가 된다. 앉는가 싶다가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오른다. 혼신을 기울여 만들어낸 춤은 들뜸이 없다. 길게 늘어뜨린 꽁지와 빨간 화관에 구애의 춤이 한층 빛난다. 수수한 암컷이 포르르 날아든다. 화려한 춤이 마음에 든 암컷은 위아래, 좌우로 한 바퀴 빙그르르 돈다. 수컷의 솔로 공연이 끝나갈 즈음, 둘은 한 몸이 된다. 만난 지 백일이 ..

좋은 수필 2024.07.02

P. E. N / 조재은

P. E. N / 조재은    P의 언어는 향기로워 그 향기는 현실을 잠시 잊게 했다.P의 얘기는 맑은 날보다는 흐린 날에 더 감미롭고 낮보다 밤에 더 잘 들렸다. 그는 감탄하거나 분노를 삭일 때,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을 때,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푸른 정맥이 드러나는 가늘고 긴 손가락에서 그의 감각적인 매력이 나타났다. 가끔은 짧은 몇 마디로 자신의 깊은 마음을 전하는데,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찰나의 눈빛을 붙잡아야 했다. 나는 항상 긴장하며 그를 응시했다. P의 말은 절규로 들리기도 하고 통한의 신음 소리로도 들렸다. 이러한 감각적인 면에 이끌려 시작된 만남은 시간이 흐르자 감정의 올무가 되었다. 그의 감정에 휘말려 훼척해 가는 자신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약하지 않은 건강한 영..

좋은 수필 2024.07.01

서울여자 / 정재순

서울여자 / 정재순   고갯마루가 간들거렸다. 연보라 꽃이 나풀대는 양산을 쓴 여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나른한 여름날 오후, 한복 차림의 여자는 측백나무가 둘러진 기와집 마당으로 거침없이 들어왔다. 고요한 시골 마을에 알 수 없는 기운이 술렁였다. 일곱 살 소녀가 난생처음 양산을 만난 날이었다.아버지의 아내는 몸매가 늘씬하고 이웃마을까지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미인이었다. 그에 반해 서울여자는 작고 오동통한 체구에 착착 감겨드는 말투를 지녔다. 겉모습처럼 엄마는 청한 목소리였고 그녀는 젖은 듯 비음이 몸에서 묻어나왔다. 경상도 토박이 남자의 가슴에 그 맛이 오죽 달짝지근하였겠는가. 당시 말씨가 그러해 서울여자로 불렀으니 아버지를 염두에 둔 예우였을 것이다.서울여자는 오붓하던 집안에 찬바람을 몰고 왔다. 대..

좋은 수필 2024.07.01

나무의 내력 / 조현숙

나무의 내력 / 조현숙​ 진득거리는 머리카락이 자꾸만 목에 휘감겼다. 성하의 햇발을 고스란히 받은 정수리에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사방 천지에 뻗친 빛줄기가 출렁거리는 물결처럼 쏟아지는 신작로를 걸어가자니 멀미가 날 듯 어지러웠다. 길은 끝이 보이지 않고 멀기만 했다.​ 엄마가 말해준 곳에 아버지는 없었다. 아버지가 있어도, 없어도 내겐 어려운 임무였다. 그곳에 아버지가 있다고 내 손 잡고 집에 올 리도 없었고, 아버지가 없었다고 말하면 엄마는 또 복장이 터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헛걸음만 시켰네”라고 엄마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문 앞에는 아버지의 구두가 놓여 있었다. 종일 달궈진 사택의 방문 하나가 바람 한 점 들어갈 틈 없이 굳게 닫혀 있다. 엄마랑 아버지는 그새 또 싸웠..

좋은 수필 2024.07.01

장롱 속의 질서장 / 이정화

장롱 속의 질서장 / 이정화  저 멀리서 쏜살같이 그분이 오신다. 만사를 제쳐놓고 서둘러 종이와 연필을 찾지만 불현 듯 떠올랐다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지금 붙잡지 않으면 잽싸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리는 모래와 같다. 일단 흘려버리면 되찾으려 해도 소용없다. 순간을 붙잡는 것만이 상책이다.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그것을 기다리며 머리맡에도, 책상 위에도, 가방 안에도, 손이 닿는 곳에는 메모장을 놓아둔다. 조금 전까지 머릿속을 돌아다니던 문장머리를 간신히 잡아들고 어싯비싯 하다보면 몸통은 떨어져 어느새 사라지고 만다. 잊을세라 허리 깍지 끼듯 문장을 곱씹어가며 받아쓰다보면, 어이없게도 뒷부분은 흔적도 없이 어디론가 날아간다. 찾을 수가 없다. 이미지 언저리에서 헤매며 멀리 달아나 버린 글맥이 무엇이었을..

좋은 수필 2024.06.30

목탄화 속으로 / 이상수

목탄화 속으로 / 이상수 가로등이 하나둘 목련처럼 피어난다. 어스름이 발묵하는 시간, 먼 산이 먹빛에 잠기고 들녘은 천천히 지워진다. 사각의 창문마다 둥근 불빛이 내걸리면 저녁의 품속으로 사람들이 귀가한다. 해가 넘어가는 이맘때쯤이면 영문을 알 수 없는 고독이 밀려온다. 초콜릿처럼 달콤하고 계피처럼 아릿하여 멀미하듯 거리를 표류한다.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과 낯익은 상점이며 형형색색의 간판들. 타인 틈에 섞이면 마술처럼 슬몃 내가 사라짐을 느낀다. 그 가만한 스러짐이 좋아 어둠의 발치에 혼자 서 있을 때가 많다. 프랑스에서는 해질녘을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 한다. 사물의 윤곽이 희미해져 언덕 너머로 다가오는 실루엣이 내가 기르는 개인지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시간이란 뜻이다. 이쪽도 아니고 저..

좋은 수필 2024.06.30

시금치 한 소쿠리/공순해

시금치 한 소쿠리/공순해 아는 분이 한 소쿠리 되는 시금치를 나눠줬다. 시장 물건이 아닌 야생 시금치라고 보물 건네듯 은밀히. 2월도 안 된 날씨에 스캐짓 밸리 그 추운 벌판에 가서 캐 온 것이라니 하긴 보통 물건은 아니다. 하지만 들여다보니 시금치 꼴이 꾀죄죄하다. 채도 짧고 캐 온 시간이 지났는지 빛깔도 새들거려 볼품이 없다.  게다 난 부엌일을 하지 않는다. 부엌이 없기 때문이다. 하긴 부엌일 하지 않는 사람이 나뿐이랴. 미국 주부 중엔 부엌을 두고도 집에서 요리 안 하는 여자들이 꽤 된다고 한다. 그들은 직장에서 일이 끝나면 어느 곳에 가서 저녁을 해결할까, 인터넷을 뒤진단다. 나야 그들과는 경우가 다르다, 며느리에게 부엌을 내준 탓이다. 일단 물려준 공간은 그 애 소관이다. 한 공간에 주인이 둘..

좋은 수필 2024.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