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소리만, 그저 다만 발소리만이라도 /최명희
무엇 하러 달은 저리 밝을까.
섬뜩하도록 푸른 서슬이 마당 가득 차갑게 깔린 달빛을 밟고 선 채로, 아까부터 망연히 천공(天空)을 올려다보던 강실이는, 두 손을 모두어 잡으며 한숨을 삼킨다.
마치 숨도 살도 없는 흰 그림자처럼 서 있는 강실이의 머릿단에 달빛이 검푸르게 미끄러지며, 그네의 등뒤에 차가운 그림자로 눕는다.
사립문간에 선 살구나무도 제 그림자를 땅에 드리운 채, 구부듬한 검은 둥치 검은 가지를 겨울 한공(寒空)으로 뻗치고 서서, 빙무(氷霧) 같은 달빛을 전신에 받고 있었다.
눈(雪)도 없는 극한(極寒)의 밤에, 들여다보기 무서우리 만큼 깊고 검푸른 거울이, 티 하나 없이 말갛게 씻기워 상공에 걸린 겨울밤 하늘, 그 가슴 한복판에 얼음으로 깎은 흰 달이 부시도록 시리게 박혀 있는 빙월(冰月)이야말로, 달의 정(精)이라 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강실이는 그 냉염(冷艶)한 달을 오래 오래 우러르며, 버선의 발등에 묻은 달빛이 속으로 얼어들어도 그 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모른다.
이제는 떨어져 뒹굴 잎사귀 하나 남지 않은 혹한의 뜰에, 사람을 문득 놀라게 하던 나뭇잎 소리조차 들릴 리 없는데.
그네는 귀를 거두지 못하고, 숨을 죽였다. 발소리만. 그저 다만 발소리만이라도 들었으면. 그냥 지나가 버려도 좋으니, 왔다는 기척만이라도 들렸으면.
그네의 온몸은 어느새 귀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바람 소리마저 달빛에 흡입되어 파랗게 얼어 버린 밤, 문풍지도 울지 않는데, 못 듣고 놓쳤을 리 천만 없건만, 그의 발소리는 어디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무정한 사람.
정월 대보름을 맞아 온 마을이 홍소(哄笑)와 함성으로 가득하다.
강실이는 아직도 살구나무 그림자 위에 그대로 하얗게 웅크리고 앉아, 만월의 동산 기슭에서 울리는 그 홍소와 여한 없이 어울리며 트이어 흐드러진 함성에 귀를 맡긴 채,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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