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는 기둥 / 최명희
가을에는 나무가 옷을 벗는다.
지난 여름의 폭우는 사납기도 하여, 잎사귀 무성한 생가지를 참혹하게 찢으며 쏟아지더니, 그 무슨 꼬투리 하나로 창대 같은 빗줄기를 이겨냈는지, 비가 멎은 다음 날 아침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여전히 우거져 푸르던 이파리들이, 이제는 꽃보다 고운 단풍으로 물들어 저렇게 황홀한 빛깔로 타오르는데, 나무는 단풍을 벗는다. 홀로 고요히.
자연의 순민順民으로 나무만 한 것이 또 있을까.
맨 처음 티끌만 한 씨앗이 땅에 떨어져 캄캄한 어둠 속에 묻혔다가, 이윽고 아기 이빨처럼 파랗게 싹이 돋아 오른 그 자리에서 기나긴 세월의 한 세상을 살다가 바로 그 자리에서 나이 다하여 죽어가는 나무.
나는 방랑하는 나무를 본 일이 없다.
그뿐인가. 푸른 잎 피어나고 붉은 잎 지는 순리를 두말없이 충실하게 따르는 모습은 보는 이를 숙연하게 한다.
나는 반란하는 나무 또한 본 일이 없다.
비 내리면 그 비 다 맞고, 칼바람 불면 휘어져 울면서 발등이 시린 서리, 정수리에 쌓이는 찬 눈을 우산 하나 없이 한평생 견디는 나무.
“허나, 이 나무의 성깔이란 참말로 대단합니다.”
거의 일생 동안 나무를 깎아 기둥을 세우며 집을 지어온 늙은 목수는 어느 날 그렇게 말했다.
“산에서 나무를 베어다가 집의 네 귀퉁이 기둥을 삼을 때, 아무렇게나 막 세우면 안 되지요. 양지 쪽에서 큰 나무는 앞마당 양지 쪽에, 북쪽 바람닫이에서 큰 나무는 북풍 부는 뒤안 쪽에, 제대로 제 성질을 살려서 세워줘야 합니다. 만일에 저 섰던 자리하고 다른 방향에다 바꿔 세워 놓으면 그만 기둥이 뒤틀어져 버려요.”
그것도 남쪽 나무라 해서 그저 남쪽에다 세우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한다. 남쪽에서도 해를 보면 얼굴이며 배를 보게 세워주고, 그림자였던 등은 똑같이 그림자 지게 해서 세워 주어야 몇백 년, 몇천 년이 흘러가도 여전히 제 모양을 지키고 서있다 하였다.
그렇게 안 하면 아무리 굵은 기둥이라도 어그러지고, 트고, 갈라져버리니 이런 매서운 성깔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 요즘 목수들은 나무를 몰라요. 대패질은 말끔하게 해가지고, 위아래도 구분 못해서 나무뿌리가 공중으로 치솟아 다리를 뻗치고, 대가리가 땅속으로 처박히게 기둥을 세우니, 거꾸리 세상이지요. 그렇게 하면 죽은 나무라도 오장이 거꾸로 쏟아져서 쉽게 썩어버립니다. 옛날 집은 지은 지 몇백 년이 지난 지금도 기둥은 물론이고 문짝 하나 틀어진 데 없이 제대로 여닫히는데 왜 요새 지은 집들은 한 해 겨울을 못 넘긴 채 뒤틀어져 못쓰게 되고 마는지 알 만한 일이지요.”
그저 기둥이면 다 같은 기둥인 줄 알지마는 그렇지가 않다고 노인은 말했다. 기둥으로 쓰는 나무는 말릴 때도, 성질을 달래주어야 한다. 베어내는 즉시 성급하게 뙤약볕에 말리면 나무는 터지고 비틀어져 버린다고 했다.
“그늘에 두고 제대로 말려야지.”
지그시 참고 기다려야 하리라.
제가 흙속에 뿌리 내리고 살던 때와 마찬가지로 흥건한 비 먹고, 바람 마시면서, 밤이면 이슬에 젖고, 낮이면 저만치 물러선 햇살을 이만큼 빗기어서 받게 하여, 자연의 기운이 저절로 스며들어 마르도록 두어야 한다니.
베어낸 나무 하나의 성질을 그렇게 오래 다듬어주는 심성은 바로 우주를 어질게 보듬는 마음이 아니랴.
이런 갖은 기운이 배어든 나무라야 수풀 속의 살아 있는 나무처럼 숨을 쉬면서, 집의 네 귀퉁이를 묵묵히 지키며 비바람 눈보라를 이겨줄 것이다.
나무 기둥 하나의 성품이 이러하건대, 저마다 자신의 한 세상을 받치고 서서 제 몸으로 제 기둥을 삼는 ‘사람’을 두고 새삼스럽게 무엇을 더 이르리오.
이제 가을이 저물고 있다. 머지않아 첫눈이 내리고 겨울이 오겠지. 잎사귀를 벗은 나무들은 산속에서, 거리에서, 앞마당에서, 우주의 기둥처럼 묵묵히 선 채로 길고 긴 겨울을 나리라.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스스로 제 성품을 깊이 다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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