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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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누빔점 / 지영미

에세이향기 2024. 7. 2. 03:27

누빔점 / 지영미

 
 

찌르르 휘리리, 새들의 지저귐이 사위에 울려 퍼진다. 어치가 적갈색 배를 보이며 낭창한 가지에 앉았다가 풀싹 날아오른다. 나무 위로 다람쥐가 달음박질한다. 솔잎을 덮어쓴 버섯이 갓을 한껏 부풀린다. 낯선 이의 발소리에 생명을 가진 것들이 경계 소리로 숲을 달군다. 자연에서 살아남기 위한 개체들의 신호가 적막을 깨운다.

수컷은 가지 위에서 작두 타는 광대가 된다. 앉는가 싶다가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오른다. 혼신을 기울여 만들어낸 춤은 들뜸이 없다. 길게 늘어뜨린 꽁지와 빨간 화관에 구애의 춤이 한층 빛난다. 수수한 암컷이 포르르 날아든다. 화려한 춤이 마음에 든 암컷은 위아래, 좌우로 한 바퀴 빙그르르 돈다. 수컷의 솔로 공연이 끝나갈 즈음, 둘은 한 몸이 된다.

만난 지 백일이 채 되지 않은 남녀는 온몸이 연애 세포로 가득했다. 촉촉한 눈빛 하나만으로도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다. 두근거림과 설렘이 또 다른 언어였다. 남녀의 대화는 핑퐁처럼 박자를 맞춰 오고 갔다. 몽글몽글하고 간지러운 언어는 중력이 사라진 듯 넘실거렸다.

시간은 흐르고 남녀의 언어 속에 삶이 담겼다. 갈수록 숨찬 날들이 겨웠다. 달달한 말 대신 감정을 실은 무딘 말들이 오고 갔다. 다정함을 잊은 말들은 엇박자를 내는 일이 잦았다. 거친 목소리로 겨루듯 말하고, 들어야 할 때는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렸다. 대화는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가슴은 헛헛해졌다. 날 선 감정은 골을 파고 상처를 남겼다.

밤이면 남녀는 날갯죽지를 늘어뜨리고 집으로 들어왔다. 정신적 허기를 배고프다는 말로 대화를 튼다. 여자에게 남자의 말은 단순히 생리적 욕구로만 들렸다. 서로에겐 일에 대한 스트레스로 찌든 가슴을 위로받고 싶은 속마음이 있었다. 남자의 깊은 뜻이 담긴 말은 일과 육아에 지친 여자에게 헛돌았다. 무수한 오해가 해소되지 않은 채로 쌓였다.

상수리나무 사이로 박새가 들락거린다. 새끼들의 먹이 보채는 소리가 요란하다. 어미 새가 쉿쉿 비상 신호를 보낸다. 아비 새는 쏜살같이 바닥으로 날개를 내리꽂았다. 위로 솟구칠 땐 어김없이 검은색 부리에 지렁이를 물었다. 틈틈이 새 부부는 나뭇가지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지친 육아를 응원이라도 하듯, 서로의 깃털을 골라주었다.

이윽고 새끼들은 구멍 사이를 퍼드득거리며 날아올랐다. 미쳐 박차고 나오지 못하던 가냘픈 막내까지 날아가고 둥지는 텅 비었다. 부부는 이소한 자식들이 날아간 방향으로 아련한 눈빛을 보냈다. 가느다란 가지에 다정하게 앉은 부부 새는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꽁지를 파르르 털었다.

인간과 동물이 뒤섞여 살던 시절, 손짓과 발짓, 울음소리는 생득의 언어였다. 야생에서 어림잡아 헤아리는 것으로 살아내기 버거웠다. 어둑한 동굴 입구에 드리운 매머드의 그림자는 몸서리쳐지는 두려움 그 자체였다. 원시인은 우우우 거친 울음소리와 손짓으로 동료를 부르고 발을 굴렀다. 기웃거리던 동물이 사라지고 나면, 비바람이 동굴 벽을 치며 물세례를 퍼부었다. 커진 동공과 불안한 눈빛으로 위험을 알리고 높은 곳을 가리켰다. 원시인은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몸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신호를 보냈다.

식구가 점점 불어났다. 대식구를 먹여 살리려면 살 오른 물고기, 튼실한 열매와 동물사냥이 필요했다. 원시인은 밤을 새워 생각하고 계획을 짰다. 동굴이 희붐해지자 날씨를 살피고 식구를 불러모았다. 이제 막 사냥을 배우는 어린 자식에게는 일러줄 말이 많았다. 먼 강은 물고기가 많지만, 물살이 세다고, 큰 동물을 잡으려면 뿔 달린 짐승의 뼈를 머리에 얹고, 함정을 파고 기다려야 한다고, 색깔이 화려한 열매는 독이 있다고 가르쳤다. 원시인의 간절한 마음은 점점 더 정교한 언어로 나아갔다.

씨족이 점차 커지면서 해야 할 일도 드러낼 일도 많아졌다. 원시인 식구는 얼굴을 마주할 시간이 예전 같지 않았다. 시간의 부족은 적게 말하고 많이 이해받으려 했다. 두텁고 살가운 말들은 사라지고 쉽게 단정 짓고 부정했다. 입에서 나온 말은 미미한 모래알로 부서져 서걱거리기도, 서로에게 돌덩이로 날아가기도 했다.

다시 봄, 숨탄것들은 계절의 흐름을 타고 순간에 집중한다. 애절한 세레나데와 우아한 몸짓으로 짝짓기를 하고 알을 낳는다. 어미 새는 온기로 새끼를 비빈다. 포르르 날갯짓을 보여 주며 날기와 먹이 구하기를 가르친다. 유전적으로 각인된 신호대로, 먹이가 풍부할 때 짝짓기를 하고 새끼를 길러내면 자유로운 삶으로 돌아간다. 그들의 단순한 듯 비슷한 노랫소리는 흐트러지지 않는다. 한결같은 몸짓과 정해진 소리는 생리적 충동에 매여 있다. 누대에 걸쳐 갈고 닦은 본능이다.

하지만 남녀의 언어는 퇴적된 언어다. 인생의 반을 돌아온 그들은, 깊어진 눈빛 속에서 굳이 말하지 않고도 마음으로 느낀다. 감추지 못하는 표정과 눈빛, 목소리로 깊은 속내를 읽어낸다. 서로의 말속에서 울려오는 기운을 느끼고 마음을 다한다. 그림자를 드리운 묵직한 말들은 환한 낯빛으로 맞장구를 쳐준다. 가볍게 스쳐 가는 말에도 옹골진 주장이 담겨있다는 것을 알기에 온화한 표정으로 들어준다.

해가 넘어간 뒤의 어스레한 기운이 노을을 비추듯, 남녀의 언어에도 여운이 자리한다. 달아오른 거친 말과 아슬아슬 선을 넘나들며 심장을 후비던 말들은 푼푼한 언어로 바뀌었다. 각지고 날 선 말들, 굳고 곧은 말들이 스르르 허물어진다. 서로의 말이 스며들지 않고 겉돌더라도 답답해하지 않는다. 각자의 공간에서 느긋이 시간을 곰삭인다.

굳은살 박인 남녀의 언어는 누빔점에 닻을 내렸다.

※ 누빔점- 쇼파나 쿠션의 솜이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해주는 단추 또는 바느질선. 기표와 기의가 미끄러지지 않고 절묘하게 맞아 떨어질 때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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