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5/07/03 5

김륭의 「하품」평설 / 홍일표

김륭의 「하품」평설 / 홍일표 하품 김륭 사월, 벚꽃나무 아래 김밥 싸놓고 싸웠다 김밥 한 줄 먹여주지 못하고 애인이랑 싸웠다 명박이 때문에 싸웠다 병든 아비걱정 까먹고 공부 못하는 자식걱정 팽기치고 명박이 때문에 싸우다니, 할 일이 그렇게 없냐고 햇살이 쿡, 쿡쿡 눈구녕을 찔렀다 씨발, 눈에 뵈는 게 없었다 거지발싸개 같은 봄날이었다 서로 살을 섞었지만 가보지 못한 곳이 있었다 이 비겁한 눈구녕, 이 치졸한 눈구녕, 이 더러운 눈구녕, 썩고 썩어 곪아터진 눈구녕 가득 애인이 폭삭, 늙었다 저만치 개나리 샛노랗게 웃었다. 눈구녕 깊숙이 봇짐 내려놓고 나비를 풀어주었다. —《시와 경계》2010년 봄호———김륭 / 1961년 경남 진주 출생. 198..

평론 2025.07.03

손택수의 「단지(斷指)」평설 / 홍일표

손택수의 「단지(斷指)」평설 / 홍일표단지(斷指) 손택수간밤에 못물이 얼어붙고 말 것을너는 미리 알고 있었던 거다못물 속에 잠긴 버들가지손가락 하나가얼음 속에 끼여 있다피 한 방울 통하지 않도록옴짝달싹 못하게 꽉 죄여 있다손가락이 반쯤 달아나다 만버드나무, 허연속살을 드러낸 생가지뭉툭해진 끝에서뚝, 뚝, 노을이 진다내일 모레면 입춘, 얼어터진땅이 그걸 받아먹고 있다------------------------------------------------------------------------------------------------------------------ 우주적 존재론의 시 이 시는 손택수 시인의 첫 시집 『호랑이 발자국』에 실려 있는 작품이다. 좋은 시 만나는 일이 쉽지 않을 때 자..

평론 2025.07.03

사물주의자의 틈- 김기택 시집 『낫이라는 칼』해설-송승환

https://naver.me/G2VYb3Xe 사물주의자의 틈- 김기택 시집 『낫이라는 칼』해설POETIKA2022. 9. 25.송승환 (시인. 문학평론가)( 인간의 편에서 바라본 사물에서 사물의 편에서 사물 바라보기)김기택 시인은 사물주의자이다. 그의 시에서 사물은 일상 세계의 도처에서 출현하며 일상의 삶 자체를 개진한다. 사물은 인간의 삶을 구성하고 삶의 사태에 참여한다. 인간의 삶은 사물과 함께 사물 안에서 사물을 통하여 전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물은 일상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 사물은 모든 곳에 편재(遍在)하고 있으면서도 마치 보이지 않는 곳에 편재(偏在)한 것처럼 있지 않은 듯이 있다. 사물은 인간의 의식 이전에 현존하고 있음에도 사물에 대한 의식의 지향성을 표명하기 전까지 부재한 듯싶다...

평론 2025.07.03

슬픔이 드러나는 방식/나윤옥

슬픔이 드러나는 방식/나윤옥 20년 전에, 고향 춘천이 그리운 나머지 그 근교에 집을 한 채 샀다. 산을 휘감아 도는 도로 옆 산비탈에 지어진 집이라서 15미터쯤 오르막길을 가고도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집채를 대지의 어느 한쪽에다 놓지 않고 가운데 앉혀놔서 뜰이 좁은 게 흠이긴 했다. 그래도 잣나무와 낙엽송 숲에 둘러싸여 있어서 사계절 내내 초록 숲을 볼 수 있겠다 싶었다. 한적한데다가 지대가 높아 동네가 내려다보였고, 찻길에서 마당이 보이지 않는 것도 좋았다. 집을 사고서 수시로 계단 양 옆 둔덕과 뜰에다 과실수와 꽃나무들을 심었다. 뜰은 더욱 좁아졌다. 큰 돌들을 디디고 올라가게 만들었던 둔덕에 방부목으로 계단을 만들었더니 제법 운치도 있었다. 그런데 집이 산에 둘러싸여 있으니 집안에 벌레가 잘 들..

좋은 수필 2025.07.03

어느 날, 흐린 가로등 아래서 /노 혜 숙

어느 날, 흐린 가로등 아래서 /노 혜 숙 나는 술이다. 현재시제로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매혹적인 액체를 품었던 플라스틱 소주병이다. 쭈그렁 빈껍데기가 되었으나 술의 혼만은 뼛속 깊이 품고 있으니 내 정체성은 여전히 술인 셈이다. 어느 날 나는 선술집 골목에 내동댕이쳐졌다. 나의 주인은 병째 나발을 불던 중년 사내였다. 밥벌이의 분노였을까. 그의 뜨거움이 나의 뜨거움을 압도했다. 나는 오가는 이들의 발길에 차여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시장통 오거리 가로등 아래에 이르렀다. 광고 전단지가 덕지덕지 나붙은 가로등 밑에는 함부로 내다 버린 쓰레기와 오물이 뒤섞여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나처럼 뭇사람의 사랑과 추앙을 받은 존재가 있을까. 오래전부터 나는 세상의 낭만과 외로움과 근심에 더할 나위 없는 ..

좋은 수필 2025.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