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1097

숨은 소리/김정화

숨은 소리김 정 화      북소리 찾아 길을 나서는 중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북을 매단 나무를 만나고 싶었다. 세상에는 그 북보다도 더 큰 북이 있을 테지만 나라를 구하기 위해 매단 북보다 더 큰 북이 어디에 또 있을까. 그러한 생각을 하며 소문으로만 듣던 현고수 마을을 찾기로 했다. 의령 유곡천을 지나니 들판 한가운데 아담한 마을이 보인다. 세간리 마을이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마자 동체 굵은 둥구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우뚝 선 나무 밑으로 한적한 마을이 여름날 뜨거운 계절 속에 평온하게 잠들어 있다. 느티나무에서 울려나오는 매미 소리만이 마을의 평화를 잔잔하게 깨트리고 있다. 그것은 시끄러운 소리가 아니라 이 마을에 들어서는 사람이면 누구나 깨어 있으라는 경종의 소리다. 동네를 지키는 ..

좋은 수필 2024.10.27

세상 끝에 선 어미 호박꽃 / 김영수

세상 끝에 선 어미 호박꽃 / 김영수. 21. 4:00​ 세상 끝에 선 어미 호박꽃 / 김영수 ​ 한여름 뒷마당 텃밭은 평화로웠다. 그 평화로움 속에는 보이지 않게 변하는 것들이 있었다. 깻잎을 솎아내고 있을 때, 큰 이파리에 가려 안 보이던 연둣빛 호박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내 엄지손가락보다 조금 굵을까. 며칠 못 본 사이에 호박꽃을 밀어내고 꼭지를 차지한, 갓 태어난 호박일 터였다. 새 생명의 출현이 반가워 작은 탄성을 지르려는 순간, 누렇게 시든 호박꽃에 눈길이 잡혔다. 호박이라는 결실을 얻으려고 모든 기운을 소진하여 지친 듯, 꽃은 제자리마저 내주고 호박 끄트머리에 겨우 매달려 있었다. 제 임무를 다한 꽃은 몸을 오그려 닫아걸었고 관능의 유열을 나누던 여름 볕은 홀로 뜨거웠다. 일주일 전만 해..

좋은 수필 2024.10.25

바다가 그린 추상화 / 려원

바다가 그린 추상화 / 려원  눈앞에 거대한 마크 로스코의 추상화가 펼쳐져 있다. 레드와 오렌지가 뒤섞인 무제 無題다. 하루 종일 달궈진 해가 서서히 바닷물 속으로 몸을 담근다. 뜨거운 조각들이 산산이 흩어지면 바다는 열기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불의 알을 삼키기 직전, 바다는 혀가 엘까 잠시 머뭇거린다. 그 머뭇거림의 순간, 오렌지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바다는 오렌지가 뒤섞인 레드로, 레드가 뒤섞인 오렌지빛으로 타오른다. 불의 알이 아주 작은 공처럼 보일 때쯤이면 바다는 비로소 긴 혀를 내밀어 휘감는다. 적당히 말랑말랑한 불의 알을 삼킨 바다는 붉게 타오르고 밤이 깊도록 뜨거움을 기억한다. 검푸른 어둠이 끝없이 물결을 타고 밀려오고 밀려갈 때 바다는 잠들지 않고 소리로 존재한다. 손에 잡히지 않는 암흑 ..

좋은 수필 2024.10.24

봄 편지 / 박금아

봄 편지 / 박금아​"어느 날, 종가댁 맏며느리 같은 분이 다가와 삼 년 동안 일 천여 통의 편지로 저를 붙잡아 앉혔습니다."*지인이 보내온 수필집의 서문을 읽다가 이런 문구를 발견했다. 수신인과 발신인 사이에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 궁금해지면서 1천 통의 편지를 주고받은 인연이 부러웠다. 문득 지난 한 해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속을 드나들던 손 편지 한 장이 생각났다.몇 번이나 미룬 끝에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매번 그쪽에서 날짜를 잡았고, 취소한 쪽은 나였다. 후일 연락하겠다고 해놓고도 하지 않았다. 손주를 돌보느라 시간을 내기도 어려웠지만, 나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한다는 말이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그날은 일방적으로 시간과 장소를 알려왔다.그녀는 점심을 주문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보자 당신..

좋은 수필 2024.10.20

도미의 장례/서*연

도미의 장례    도미의 몸통이 눈부시다. 접시 바닥의 무늬가 그대로 내비칠 만큼 도미는 얇게 회 처져 있다. 드문드문 젓가락질이 오가며 도미의 살점이 한 점 한 점 사라져 간다. 비릿한 물방울을 사방으로 튕기며 파닥이던 도미의 꼬리는 점차 움직임이 느려진다. 그렁그렁, 연한 소금기를 머금고 껌뻑이던 도미의 눈알이 출렁, 하고 터진다. 검은 먹물이 도미의 망막을 시커멓게 뒤덮는다.  도미의 부레는 이미 부패를 시작했다. 혹처럼 부풀어 오른 부레에는 비상 같은 청록색 반점이 돋는다. 그러나 도미는 끝까지 목숨을 놓지 않으려 한다. 다물어지는 아가미를 필사적으로 뻐끔거리며 도미는 숨을 몰아쉰다. 숨 가쁜 도미는 사해의 부력으로 금방이라도 떠오를 것만 같다. 아가미는 산소를 넣고 금방이라도 눈부시게 일어날 것..

좋은 수필 2024.10.20

포란/조현숙

포란 / 조현숙포란/조현숙 행복한 루치024. 10. 14. 13:35URL 복사​ ​ 병실의 밤은 누군가 불을 끄는 순간, 시작된다. 오늘을 파장하는 하늘에서 노을을 쓸어 담은 어둠이 물체와 공간을 한 보자기에 싸안는다. 복도를 구르는 불빛이 문틈 사이로 실뱀처럼 기어들어 온다. 빛을 따라 병상의 모서리들이 각을 풀고 보자기 밖으로 제 몸을 드러낸다. 엄마는 등에 꽂힌 관 때문에 뒤척이지도 못하고 불편한 채 잠들었다. 그래도 얕은 숨을 푸푸, 뱉어내는 걸 보면 긴장이 풀린 모양이다. 노령의 얇은 몸피로 힘든 수술을 이겨낼 수 있을까, 모두의 난제였다.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그 어깨는 기울어지고 눈동자는 빛을 잃었다. 살 만큼 살았으니, 지금부터는 덤으로 주어진 삶이라고, 어둠이 세상을 덮어도 새날은 밝아..

좋은 수필 2024.10.17

꽃분이들을 위한 헌사 / 허창옥

꽃분이들을 위한 헌사 / 허창옥   꽃샘바람이다. 바람 속에서 신천의 수양버들은 연둣빛의 길고 풍성한 가지들을 멋들어지게 흔들고 있다. 늘어선 버드나무들의 배경에 이제 곧 개나리가 만개하겠다. 바람은 꽃을 샘내지만 꽃은, 여린 꽃들은, 세상의 모든 꽃들은, 바람을 이겨내고 아름다이 피어서 열매를 맺고 씨앗을 퍼뜨린다. 그리하여 제가 귀한 꽃임을, 세상을 세상이게 하는 환한 꽃임을 그 한살이로 보여준다.분출이란 여인이 있다. 일흔한 살이다. 위로 언니가 여섯이나 있었단다. 칠공주의 막내다. 그 여인이 이름의 내력을 얘기했을 때 정말이지 아연했다. 나는 요즘의 젊은이도 아니고 그런 이름이 생긴 시대적 또는 심리적 배경을 알고도 남을 만큼 나이를 먹었다. 하지만 이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셋째부터 딸막..

좋은 수필 2024.10.13

명태 / 이규석

명태 / 이규석   모처럼 옛 친구들과 어우렁더우렁 둘러앉았다. 목로주점에서 잘 구운 노가리를 안주로 소주잔을 주고받는데, 자식 농사 망쳤다는 친구의 넋두리에 장단이라도 맞추듯 송창식이 부른 ‘명태’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쇠주를 마실 때/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짝짝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은 남아 있으리라/ …… ’ 허구한 날 겨울 바다를 거슬러 올라야 하는 명태는 이름이 많아도 쓰임새마다 사람들의 입맛을 당긴다. 가까운 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생태는 탕으로서 으뜸이요, 먼바다에서 잡아와 얼린 동태는 서민들의 추위를 녹여주는 찌개가 되거나 명절에는 흔쾌히 담백한 전이되기도 한다. 추운 들판에서 얼고 ..

좋은 수필 2024.10.12

강변에 살면서 / 설성제

강변에 살면서 / 설성제  여유를 가지고 가만가만 흘러가는 강이 아름답다. 강은 바람의 발자국으로 수없는 물결을 이룬다. 이른 새벽에는 안개를 피워 올려 사람들의 마음을 촉촉이 적셔준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목 어디쯤에 작은 섬들을 두어 풀들을 자라게 하고 새들이 와서 한가롭게 놀게도 한다. 늘 앞산의 그림자를 품어주고, 마주하는 하늘의 구름들까지 품어주며, 다가가는 것은 누구라도 마다하지 않는다.집 앞에는 강이 있다. 그 강은 영남의 명산인 가지산에서 발원하여 울산만으로 흘러가는 태화강이다. 이곳으로 이사를 온 것은 강가의 마을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강변은 다듬어진 산책로가 있고 운동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많은 사람들의 안식처가 되고 있었다.사계절 내내 강변을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다. 혼자서 생각에 잠긴..

좋은 수필 2024.10.08

밥 / 허창옥

밥 / 허창옥  압력밥솥 밸브가 돌아간다. 똑똑해 빠진 밥솥이 말을 한다. “증기가 빠져나오니 주의하세요.” 잠시 쉬었다가 다시 말한다. “맛있는 밥이 완성되었으니 밥을 저어주세요.” 그래요, 잘 저어서 먹겠습니다. 먹고 사는 일이 고맙다. 삶의 무거운 등짐도, 온갖 근심도 궁극적으로는 밥을 향해 있다. 밥 덕분에 살고 밥 때문에 싸우고 밥을 못 먹어서 죽는다. 짧지 않은 세월을 살면서 죽음에 직면한 혈육과 친지들을 보아왔다. 대개는 질병 때문이다. 질병이 몸을 침범하고 악전 끝에 죽음에 이르게 된다. “곡기를 끊었다.” 란 말을 이따금 들었다. 곡기를 끊는 것, 그건 마지막에 임박했음을 알리는 것이다.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건 그러니까 복된 일이다. 그것은 살아있다는 것이고 살아있음은 그게 어떤 상황이..

좋은 수필 2024.10.03

꽃 접接, 그 신작 쓰기/염귀순

꽃 접接, 그 신작 쓰기/염귀순   색깔 고운 시간이다. 홍매화, 종잡을 수 없는 사람 마음처럼 애매한 날씨의 이른 삼월에 잎보다 먼저 깨어난 꽃. 뭇 봄꽃들이 다투어 피기 전에 서둘러 봄을 점령하고 이내 물러나는 꽃. 섬진강 둔치의 홍매화가 봄 표지판인 양 반가운 여자는 꽃 보러 길을 나섰다. 아직도 봄꿈을 꾸시는가.   지금, 여기, 봄. 세상사에 끌려다닌 사람들에게 꽃은 못다 피운 꿈이든 조물주의 위로이든 딴 세상을 펼친다. 강을 끼고 접어든 광양 매화마을은 부신 꽃 누리다. 잔잔한 들녘과 언덕을 휘도는 흰 빛도 황홀한 하루 치의 무릉도원, 말간 언어들 사이로 막 봄을 열고 나온 홍매화가 난연한 문장을 긋는다. 내 생에도 저런 빛깔 남아있을지, 척박한 터전에 봄 하나 접붙여 볼 마음으로 견주고 따지..

좋은 수필 2024.10.03

풍경소리 / 김 학 명

풍경소리 / 김 학 명  땡∼땡 땡그랑. 땡∼땡 땡그랑.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산허리를 돌아 산사로 내려 앉으면 풍경이 흔들리며 맑고 경쾌한 소리를 굴려 놓는다.산내음이 그윽한 마알간 공기를 살며시 가르는 그 소리는 들을 때마다마음을 밝게하고 편안하게 한다. 햇빛을 받은 이슬방울이 영롱해진 모습으로 서로 부딪치며 나는 소리라고 할까 고요하고 신비롭다.맑은 마음, 맑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세속의 눈에서 벗어나 참사람이    되라는 의미를 가진 풍경은 언제나 마음속의 깨우침을 두드린다. 산사는 늘 그렇게 마음을 끌어 안는다.   산사에서 소리를 내는 사물(종, 북, 운판, 목어)은 인위적으로 힘을 가해야 하지만 풍경은 그런 울림을 원하지 않는다. 종처럼 장엄하거나 북처럼 심장을 두드리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좋은 수필 2024.09.25

징 / 김규인

징 / 김규인  장인의 눈이 가마 안을 응시한다. 가마 안에 넣은 쇳물이 끓으면 색깔로 온도를 가늠한다. 저울에서 주석과 구리의 무게를 달아 가마에 넣는다. 떠오르는 이물질을 바가지로 걷어내고 쇳물 한 바가지를 떠서 틀에 붓는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듯 구리에 주석을 더하면 새로운 금속이 잉태한다. 놋쇠 덩어리인 바대기를 가마에 넣고 열을 가한다. 뜨거운 불을 가하여 놋쇠를 길들일 수 있다. 바대기가 벌겋게 달면 가마에서 꺼내 모루 위에 올린다. 바대기를 돌려가며 두드리는데, 원하는 모양이 될 때까지 가마에 넣었다가 꺼내어 메질한다. 메질하다가 다시 열을 먹이면 바대기는 고분고분 해진다. 장인이 어떻게 두드리는가에 따라 바대기는 작은 꽹과리가 되고 큰 징이 된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은 열기로 뜨겁다. ..

좋은 수필 2024.09.25

받침, 그 위 / 최명임

받침, 그 위 / 최명임    어느 씨족의 씨방에서 빠져나와 저의 왕국을 세웠을까. 바람도 지치는 변방에 홀로 피었더라면 멍이 들었을 꽃이다. 무리를 이끌고 봄의 뜨락에 흐벅지게 피었다. 꽃은 제 모습에 반해 나르시시즘에 빠지고 나는 꽃들의 하느작거림에 벌겋게 취기가 오른다. ​ 개양귀비가 붉은 깃발을 높이 올렸다. 아래로 필까, 위로 필까 고개를 내리 꺾고 몇 날을 생각에 잠겼더니. 꽃잎들이 하늘가에서 팔랑거린다. 향기에 취한 바람이 어쩌자고 꽃 속을 누비고 다닌다. 햇살 정원에서 벌이는 꽃들의 왈츠 바야흐로 그들의 우주가 펼쳐진다.​ 그들의 우주는 한 점으로부터 발아하였다. 바람과 비와 산소와 대지의 뭇 요소와 알 수 없는 무수한 입자들과 융합하여 존재의 출현을 예고하였다. 한 점은 현상의 근원이 되..

좋은 수필 2024.09.25

차가는 달이 보름달이 될 때/윤국희

차가는 달이 보름달이 될 때                                                                 윤국희아파트 현관문 앞에만 서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호흡이 가빠진다. 집에 들어가야 하는데, 잠시 머뭇거리다가 큰 숨 한번 뱉어내고 비밀번호를 꾹꾹 눌렀다. 아이들이 먼저 알고 뛰어나온다. 막내 얼굴에 그리움이 묻어있었고, 아이들의 눈을 보니 마음이 시렸다. 막내가 안기면서 “엄마, 방금 언니가 나 놀렸어.”, “아이고, 그랬어, 왜 너는 동생을 놀려?” 하면서 일상의 대화를 안고 거실로 들어왔다. 그 순간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베란다에 가득 쌓여있는 배추들. 앗, 김장이다. 순간 몸이 얼어버려 막내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아버렸다. 큰딸은 순식간에 차가워진 엄마의 ..

좋은 수필 2024.09.23

도법(刀法)/ 김은주

도법(刀法)/ 김은주  칼끝이 닳았다. 자루를 보니 한창 시절에는 몸피가 제법이었을 칼날이 턱없이 야위었다. 뽀족한 칼끝이 퍼덕이는 전어의 아가미를 내려찍는다. 바다로 돌아갈 듯 퍼덕이던 전어는 일순 잠잠해진다. 할머니 잽싼 손놀림에 물속에 있던 전어 수십 마리가 순식간에 물 빠진 소쿠리로 이동한다. 할머니는 반쯤 내려온 머릿수건을 걷어 올릴 시간도 없이 절명한 전어의 옷을 벗긴다. 은빛 비늘이 할머니 손등에 눈가루처럼 쏟아진다. 전어의 등줄기를 긁어내리는 할머니 손길이 리드미컬하다. 어깨와 굵은 팔뚝을 적당히 흔들 때마다 칼질은 신명이 오른다. 물오른 칼날에 알몸이 된 전어는 다시 소쿠리에서 물이 든 바가지로 옮겨져 배를 연다. 그리고 자신의 속을 토해 낸다. 이때도 여윈 칼끝은 전어 배 가르기에 안성..

좋은 수필 2024.09.22

여백, 삶을 묻다 / 허정진

여백, 삶을 묻다 / 허정진  여백은 간이역이다. ‘빨리’란 낱말이 낯설어지고, 째깍거리는 시간도 느려질 것 같은 시공이다.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손이 잠시 멈추고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올리는 정적 같은 것, 가마솥의 밥이 끓어 장작을 꺼내고 뜸을 들이는 시간 같은 것, 떠들썩한 목소리들 사이에 누군가의 잔잔한 미소 같은 것. 그래서 여백은 한옥의 툇마루나 음악의 정가(正歌) 같은 여유가 아닐까 한다. 채우기보다 비워서 나는 소리, 단선율의 수평적 음악인 정가를 듣고 있으면 들리는 소리보다 마음을 내려놓은 상태인 나를 들여다보게 된다. 여백에는 멈춤과 쉼표가 있다. 법정 스님의 ‘텅 빈 충만’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적당한 간격이다. 화폭에서 황금분할의 숨겨둔 공간이고, 어깨 힘을 뺀 간이한 행서체 같은 ..

좋은 수필 2024.09.22

무성서원, 움직이는 서책/허정진

무성서원, 움직이는 서책                                             허석(허정진)    책 읽는 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라 했다. 예부터 ‘꽃향기는 백 리를 가고, 술향기는 천 리, 사람 향기는 만 리를 간다.’라는 말이 있다. 인향(人香)의 싹은 책향(冊香)에서 나온다. 서원은 ‘책의 집’이다. 전통을 계승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배움의 전당이다. 지난 5백 년 조선의 철학과 사상을 관통하던 성리학의 상징적 장소이고, 유가적 이상인 존현양사(尊賢養士)의 실체적 공간이다. 세상에 맛있는 것보다, 눈에 즐거운 것보다 마음에 위안과 평온을 찾고자 할 때가 있다. 나 안의 내가 누구인지, 세상 앞에 흔들리는 마음을 어떻게 다 잡아야 할지 가슴이 답답할 때 선비정신의..

좋은 수필 2024.09.09

하현달 아래서/김애자

하현달 아래서                                                                                                                                        김애자그이는 하현달 아래서 생의 층계를 내려가고 있다. 희미한 그림자를 앞세우고 천천히 가벼운 걸음으로 내려가고 있다. 가장으로서의 책임, 직장이란 조직에서 성과 비율에 따른 경쟁과 갈등에서 벗어난 지 25년이다. 그 무방한 세월이 그를 달관시켰다. 어제와 그제, 그리고 오늘과 내일이 별반 다르지 않다. 굴곡 없는 수평적인 일상의 연속이지만 그는 높은 것과 낮은 것의 차이란 결국엔 아무 것도 아니란 것을 안다. 부자란 개념도 현재 내가 가진 것보다 더 ..

좋은 수필 2024.08.28

쓸쓸함을 위한 묵상/서영희

쓸쓸함을 위한 묵상                                                                                                    서영희  6월은 봄도 아니요. 여름도 아닌 계절이다. 푸르게 물들어 가는 세상이 싱그럽긴 하지만, '잔인한 4월'이니, '계절의 여왕'이니 하는 화려하거나 달착지근한 수식어도 없다. 좋게 말하면 무던한 달이고 나쁘게 말하면 나른하고 무미건조한 달이다. 그저 여둣빛 여린 잎들이 말없이 초록으로 짙어갈 뿐이다. 그런 6월의 오후 4시는 더더욱 어중간한 시간이다. 하루를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고, 마무리를 하기엔 너무 이르다. 이떄쯤이면 직장에 적을 둔 사람이나 집에서 살림을 하는 사람이나 약간은 심심하고 지루..

좋은 수필 2024.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