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분이들을 위한 헌사 / 허창옥
꽃샘바람이다. 바람 속에서 신천의 수양버들은 연둣빛의 길고 풍성한 가지들을 멋들어지게 흔들고 있다. 늘어선 버드나무들의 배경에 이제 곧 개나리가 만개하겠다. 바람은 꽃을 샘내지만 꽃은, 여린 꽃들은, 세상의 모든 꽃들은, 바람을 이겨내고 아름다이 피어서 열매를 맺고 씨앗을 퍼뜨린다. 그리하여 제가 귀한 꽃임을, 세상을 세상이게 하는 환한 꽃임을 그 한살이로 보여준다.
분출이란 여인이 있다. 일흔한 살이다. 위로 언니가 여섯이나 있었단다. 칠공주의 막내다. 그 여인이 이름의 내력을 얘기했을 때 정말이지 아연했다. 나는 요즘의 젊은이도 아니고 그런 이름이 생긴 시대적 또는 심리적 배경을 알고도 남을 만큼 나이를 먹었다. 하지만 이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셋째부터 딸막이, 분남이, 말남이(‘남’에는 동생이 남아로 태어났으면 하는 염원이 담겨있다.)를 무슨 부적처럼 붙였건만 기어이 분출씨가 내어난 것이다. 가루 분粉, 단장할 분이다. 나쁠 까닭이 없다. 오히려 예쁘다. 날 출出, 뭐 이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 예쁘거나 세련되지는 않지만 글자 자체에 문제가 있어보이지는 않는다.
나는 하루에 수십 명의 이름을 확인하고 소통하며 일을 한다. 예쁘거나 우아하거나 때로는 그 뜻이 준엄하기까지 한 이름들을 대하게 된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심심찮게 만난다. 나이 지긋한 여성의 이름들이 특히 그렇다. 중학교 때 내 친구 중에 분희가 있었다. 그 이름이 내 이름처럼 예사로운 이름이었다. 그 친구도 나도 이른바 딸부자집의 셋째 딸이다. 내게 붙여진 평범한 이름에 딱히 불만은 없었지만 나는 은지, 현수, 소영이 같은 예쁜 이름을 부러워했었다. 어느 날 분희가 말했다. 또 딸을 낳아 분해서 분희라 이름을 지었다고, ‘분해’가 아닌 게 아디냐고 말하며 깔깔 웃었다. 내 이름은 감지덕지네 하면서 나도 웃었다.
분출씨는 ‘분하다’가 거의 극에 달한 일곱 번째 딸이다. 시어머니, 그러니까 분출씨의 할머니가 부엌에서 미역국을 끓이면서 “무신 놈의 뱃속에 가시나만 소복이 들었노!”라고 혼잣말을 했는데 방금 일곱 번째 딸을 낳은 엄마가 들어서 울고 또 울다가 아기를 이불로 덮을까, 얄궂은 생각을 하다가, 화들짝 놀라서 아기를 안고 잘못했다고 말하면서 또 오래 울었다고 한다. 뱃속에 딸만 소복이 들어있었던 여인은 소실이 비단치마자락을 펄럭이며 당당하게 입성해서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생물학적으로 태아의 성별을 결정짓는 게 여성의 탓이 아니라는 걸 이제 모두들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시절이 있었다. 지난 일은 지난 일이니 돌이킬 수가 없다. 오호 애재라!
며칠 전에 ‘분통’이란 이름을 가진 여인이 왔다. 나는 그 이름을 부를 수가 없어서 그냥 눈을 맞추며 소통을 했다. 내가 아는 이름들을 대충 나열하면 이렇다. 끝남이, 분생이, 분남이, 딸막이, 또순이, 그리고 위의 분출이, 심지어 분통이 물론 이런 이름들 중에서 아기를 낳은 여인을 압박할 의도 없이 정말로 그 이름이 어여뻐서 지은 경우도 없지는 않을 터이다. 그분들에겐 대단히 미안하지만 ‘분’이 붙여진 연유가 대게 그러했다는 얘기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인 것이 이미 오래 전에 그런 세상이 끝났다는 것이다. 딸이든 아들이든 금이야 옥이야 차별이 없다. 이젠 누나가 먼저 자욱한 공장에서 실 풀어서 남동생 공부시키는 세상이 아니다. 또 딸을 낳았다고 미역국조차 끓여주지 않는 시어머니도 없다. 출산은 경사 중의 경사다. 더 이상 아기의 성별에 따라 축복의 강도가 달라지는 시대가 아니다.
생각해보면 세상의 모든 분출씨들이 세상의 모든 딸들과 아들들을 낳았고 그 이이들이 성장하여 또 금쪽같은 아기들을 낳았다. 생명들이 이어지고 이어져서 인류가 되고 세계를 형성하였다. 개개의 인간은 숭고하며 인류는 유장하고 장엄하다.
이제는 할머니가 된 세상의 모든 분출씨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그들의 이름 위에 꽃으로 엮은 관을 씌워드린다. 꽃분이, 꽃분이님, 여기에서 꽃은 흔히들 생각하듯 여성이란 의미의 꽃이 아니다. 말 그대로 꽃이다. 비할 바 없이 아름다운 꽃이다. 오랜 습속 때문에 까잙 없이 서러움을 당한 그들에게, 그럼에도 굳건하게 잘 살아온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붙여드리는 ‘꽃’이다. 김꽃분님, 박꽃분님.
꽃샘바람이 불어도 꽃은 피고 꽃들이 피어서 세상은 아름답다. 그런 세상을 만들어준 ‘시대’의 어머니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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