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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접接, 그 신작 쓰기/염귀순

에세이향기 2024. 10. 3. 07:16

꽃 접接, 그 신작 쓰기/염귀순




   색깔 고운 시간이다. 홍매화, 종잡을 수 없는 사람 마음처럼 애매한 날씨의 이른 삼월에 잎보다 먼저 깨어난 꽃. 뭇 봄꽃들이 다투어 피기 전에 서둘러 봄을 점령하고 이내 물러나는 꽃. 섬진강 둔치의 홍매화가 봄 표지판인 양 반가운 여자는 꽃 보러 길을 나섰다. 아직도 봄꿈을 꾸시는가.
   지금, 여기, 봄. 세상사에 끌려다닌 사람들에게 꽃은 못다 피운 꿈이든 조물주의 위로이든 딴 세상을 펼친다. 강을 끼고 접어든 광양 매화마을은 부신 꽃 누리다. 잔잔한 들녘과 언덕을 휘도는 흰 빛도 황홀한 하루 치의 무릉도원, 말간 언어들 사이로 막 봄을 열고 나온 홍매화가 난연한 문장을 긋는다. 내 생에도 저런 빛깔 남아있을지, 척박한 터전에 봄 하나 접붙여 볼 마음으로 견주고 따지지 않은 하룻길 용기에 햇살도 혼혼하게 속정을 내비친다.
   저마다의 길을 잠시 내려놓은 사람들이 꽃봄 한 잔을 흠향한다. 마음이 불콰하게 취하면 볕도 더욱 은근하다. 아웅다웅하던 삶도 뻑뻑한 혈관도 누긋해지고 베인 상처도 선해지는지 까칠하던 얼굴에 화색이 얼비친다. '지금 나도 봄' 오직 이것만으로 족하노라고 가당찮은 객기를 부린들 탓하지 않는다. 매화의 품격을 한껏 올려놓은 한시의 구절을 읊조리며 숨을 돌려도 재촉하는 이 없다.
梅一生寒 不賣香 (매화는 일생을 추위 속에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고졸한 자태는 고독과 눈물로 단련되어진다. 매화는 눈 속에서 추위를 이기고 피어 설중매라는 이름도 지녔다. 잎을 내지 않은 마른 가지로 꽃 심지를 돋운다. 고난 역경에 모양을 흩뜨리지 않고 세상에 피어나는 꽃만큼 우아한 등불은 없을 성싶다.
   삶이 일순 환해지는 꽃 천지. 흐드러지게 꽃을 피우고 땅으로 눕다시피 기운 나무둥치가 간신간신 봄을 받치고 있다. 무슨 파란을 겪었는지 속도 시커멓게 타버린 쇠잔한 몸이 초롱초롱한 꽃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오래 품은 세월의 처연함, 깊게 품은 만고의 찬란함. 꽃들은 제바람에 한창이고 풍진세상을 건너온 노구의 가지에 봄바람이 조용히 머문다. 덕분에 둥치 위 꽃송이들이 어느 노기老妓의 트레머리에 꽂힌 화려한 장식을 연상시킨다. 순간, 아무 소리도 할 수가 없다. 삶의 처지가 제각각이거늘 봄이라고 어찌 음영이 없으랴, 살아있는 무게가 가볍지 않을진대 춘풍화기의 봄날엔들 눈물이 없으랴.
개개의 일생은 암만해도 가슴 저릿한 서사다. 파릇한 어린나무가 가지 많은 어미나무가 되고, 튼실하던 몸이 마른 둥치로 변하는 동안, 나무를 훑고 간 혹독한 시간들이 감지된다. 흔들고 비틀고 밀어붙이는 된바람 앞에 만만찮은 실존의 고독 아픔 그리움 우여곡절이 굳은 몸피를 뚫고 마침내 꽃, 저리 영롱한 길 하나 밝혔다. 나무의 믿음성은 정녕 꿋꿋한 뿌리 내림에 있다. 어쩜 눈물조차도 아픔을 곱게 다스리기 위한 것일지 모른다. 속이 푹 꺼진 나무둥치가 누군가의 시름 같아서인지 바람마저 그 속에서 한참 맴을 돈다.
   파란만장한 서사에 숨은 변수가 없다면 영 허무일 테다. 뜻밖의 많은 변수들로 삶의 문장은 더욱 풍성해지는 법, 쇠락한 나무둥치도 예술작품으로 거듭나려 한다. 두 개의 카메라를 메고 든 사진작가가 이쪽에서 저쪽, 앉았다 섰다, 극적인 찰나를 포착하는 촬영 삼매경에 들었다. 같은 사물을 두고서도 보는 각도마다 달라지는 봄의 이미지와 향기와 바람과 그늘까지 담으려는 예술가의 묵묵한 집중을 읽는다. 사진작가는 피사체와 정서적 교감을 나눌 때 최상의 작품이 나온다. 추하지 않은 눈과 온 마음으로 대상을 향하는 묵묵함은 외려 치열함이겠다.
   ‘언불진의言不盡意하므로 입상진의立象盡意하라'(말은 뜻을 다 전달할 수 없으므로 이미지를 세워 뜻을 전달하라) 했다. 듣고 보고 만지고도 해독하지 못하는 세상을, 시끄럽게 허물만 부각시켰던 우리 아니었을까. 자주 하늘을 올려다보던 첫 마음은 어디 가고 얼마나 칙칙한 것들을 품고 있는지, 몸으로 긋고 쓰는 인생행로에서 간혹 삶의 문양을 굽어보는지. 몇 발치쯤에서 무심코 바라본 장면이 마음에 찍혀 함량 미달인 스스로를 두드린다.
   인생은 발등에 얹힌 현실. 그 비장함을 일찍 알아차리면서 자꾸 목이 메었다. 의욕이 줄어들 적에 길을 나선다. 생각을 제쳐두고 걷는다. 외로움도 약이 된다고 일러주던 길이 성큼 다가와 있다. 봄은 첫 마음으로 보라는 여운을 남기며 앞장선다. 빈 들판에 풀물을 들이고 땅 구석구석 맨발의 뿌리들이 봄꿈으로 잠을 설치게 하는 세상의 첫 장 처음. 꽃 피어 봄 마음 이리 설레니 아, 이 젊음을 어이 할거나, 라고 읊었던 신라의 여승 설요도 있다. 봄을 유독 ‘새봄’이라거나 ‘핀다’고 말 대접하는 연유를 설요는 분명 알았으리라.
피운다는 게 웬만한 일인가. 꽃 피우고 잎 기르고 가지 뻗고 끝내는 가만히 마침표 찍는 일, 그건 자신을 송두리째 바치는 걸작이다. 그보다 더 경건한 돋을새김이 없다 하나 가슴을 통과하는 삶은 여전히 목이 멘다. 현재에 옥죄인 사람들이 봄을 앞세워 길을 나선 속마음을, 이른 봄꽃은 눈치챘던가 보다. 제 몸에 사무치도록 봄 길 내고 싶은 날 꽃길을 소환했다면, 목이 메는 것 또한 삶의 뜨거움이라는 꽃의 전언이 아릿하다. 저절로 되는 것이 있으려고, 길은 나아감으로 가능성을 만든다. 오리무중에 빠지고 허우적대면서도 다시 한 발 내딛기를 꿈꾸는 풀숲 생명들이 껍질을 벗느라 바쁘다.
   저쪽 가지 끝 홍매화가 활짝 봄을 출력했다. 딛고 선 자리야 각각이어도 매화는 봄을 쓰고 봄은 젊음을 켜고 있다. 빛나는 새봄을 다 써버린 여자, 건조한 시간을 받아쓰며 빗장 밖으로 꽃봄 맞으러 나온 저 여자. 일상을 벗어나려 달려왔지만 결국 더 세차게 끌어안기 위해 해종일 봄을 필사 중인데, 나무는 그녀의 새 작품이 궁금한 모양이다. 겨울을 받아낸 매화나무가 줄줄이 꽃등을 내건다. 가뭇없이 지고도 화들짝 깨어나는 그야말로 영원한 신작, 그 봄날이 어김없다.
   삶이란 ‘지금과 지금’을 접붙여 쓰는 혼신의 신작 쓰기 아닐까.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래왔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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