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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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징 / 김규인

에세이향기 2024. 9. 25. 09:00

징 / 김규인

 

장인의 눈이 가마 안을 응시한다. 가마 안에 넣은 쇳물이 끓으면 색깔로 온도를 가늠한다. 저울에서 주석과 구리의 무게를 달아 가마에 넣는다. 떠오르는 이물질을 바가지로 걷어내고 쇳물 한 바가지를 떠서 틀에 붓는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듯 구리에 주석을 더하면 새로운 금속이 잉태한다.

놋쇠 덩어리인 바대기를 가마에 넣고 열을 가한다. 뜨거운 불을 가하여 놋쇠를 길들일 수 있다. 바대기가 벌겋게 달면 가마에서 꺼내 모루 위에 올린다. 바대기를 돌려가며 두드리는데, 원하는 모양이 될 때까지 가마에 넣었다가 꺼내어 메질한다. 메질하다가 다시 열을 먹이면 바대기는 고분고분 해진다. 장인이 어떻게 두드리는가에 따라 바대기는 작은 꽹과리가 되고 큰 징이 된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은 열기로 뜨겁다. 뛰고 달리고 몸부림치고 아우성치고, 목표를 이루려는 사람들의 몸짓은 치열하다. 가진 것 없는 소시민은 그 과정에서 크고 단단한 그릇이 되기를 꿈꾼다. 꿈을 이루려면 오래도록 자신을 두드려야 한다. 매질은 고통스럽고 지난해서 신음이 절로 나온다. 자신을 어떻게 두드리는가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장인이 바대기를 한참 두드리다가 세 장을 겹친다. 메질하면 안쪽이 바깥쪽으로 점점 밀려 테두리가 높아진다. 징의 모습이 갖추어지면, 우개리를 다시 가마에 넣는다. 벌겋게 달은 우개리를 집게로 집어 뜨거운 불에서 꺼낸다. 이글이글 불똥이 떨어지는 우개리를 차가운 물속에 집어넣는다. 뜨거운 쇠와 차가운 물, 극과 극이 만나 거품과 김을 뿜으며 소용돌이치고서야 놋쇠가 작은 입자로 변한다.

이쯤이면 일하느라 몸도 많이 달아올랐다. 장인은 몸에도 찬물을 끼얹는다. 찬물을 맞은 몸이 단단해진다. 뜨거워진 몸으로 맞던 매질을 차가운 몸으로도 맞을 수 있다. 이렇게 사람도 앞으로 맞을 수많은 매질을 견딜 맷집을 갖춘다. 사람도 숱한 매질과 담금질을 견디어야 한 분야의 장인이 된다.

사회는 더 많은 능력을 갖추라고 요구한다. 능력이 모자라면 가차 없이 떨어뜨린다. 허리를 펴지 못하고 일하고 밤낮없이 뛰어도 실적의 그래프는 완만하다. 회사에서는 실적을 내놓으라고 호통친다. 살아야 하기에 허리를 굽신거린다. 밤늦게 집에 들어와 자리에 누우면 두들겨 맞은 자리가 욱신거린다. 몸을 뒤척일 때마다 등과 허리가 결린다. 옆에 누운 아내가 들을까 신음을 참는다.

사람은 얼마나 긴 시간을 단련해야 방짜가 될 수 있을까. 햇볕이 따가운 한여름과 차가운 바람이 부는 겨울을 수십 해 견뎌낸다. 일하느라 처진 어깨는 자식을 보며 다시 펴고, 아픈 허리에는 파스를 붙인다. 속이 상하거나 울분이 솟구치면 소주 한 잔으로 달랜다. 시간이 쌓여 몸과 마음에 근육이 생기면 맨정신으로도 메질을 이겨낼 수 있다.

장인이 채로 징을 두드린다. 음이 흔들린다. 수 없는 메질로 울퉁불퉁해진 몸에서 나는 소리가 고를 리 없다. 메질을 당한 흔적들을 망치로 두들겨 표면을 고른다. 채로 쳐 소리를 듣고 망치로 쳐 소리를 잡는다. 치고 두드리기를 되풀이한다. 면을 고르는 망치의 두드림에 따라 울음소리가 점점 깊어진다. 잔 망치질을 거듭하며 맑고 길게 이어지는 깊은 소리를 찾는다.

징은 황소를 닮았다. 황소는 매질을 당하며 논밭을 갈고 죽어서도 북이 되어 울음을 운다. 징의 울음소리는 힘겨운 삶을 살아낸 황소의 울음소리다. 제 모습을 갖추어도 매를 맞고 울음을 운다. 맑고 길게 이어지는 소리는 착한 눈매를 가진 황소의 본성에 닿아있다. 한이 맺힌 소리일 것 같은데,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희망을 품고 사는 사람들의 소리이다.

서민의 삶도 황소를 닮았다. 부지런히 쟁기를 끌어도 멍에를 내려놓을 수 없다. 한 푼 벌기 위해 내일도 내년에도 몸을 수없이 구부려야 한다. 접었다 폈다를 반복하다 보면 굽어진 허리가 펴지지를 않는다. 일하라고 다그치는 말채찍 소리가 따귀를 후려쳐도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듣기만 한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꾹꾹 눌러놓는다. 귀는 더 커지고 목소리는 점점 작아진다.

서민의 삶은 고달프다. 잡초처럼 이 땅에 뿌리를 박고 살아가는 사람들, 서민은 전쟁으로 살기 위해 피난 가고, 나라가 어려울 때는 국가의 부름에 나선다. 시장 바닥에서 공사판에서 살아가려면 신음이 절로 난다. 삶은 고달프다. 살아내야만 하는 삶들의 소리,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면 삶의 아우성도 깊고 긴 바닥에서 올라온다.

살아가면서 다친 마음을 아우르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린다. 수천 번의 매질은 깊은 애환을 담기 위한 시간이다. 메질은 소리와 함께 가슴에 멍으로 뭉쳐진다. 맞고 멍들기를 반복하면 단단해지고, 멍이 단단해질수록 울음이 깊어진다. 징은 소리와 함께 응축된 멍을 안고 있기에 깊은 울음을 운다.

서민들의 울음소리도 징 소리를 닮아간다. 살아내느라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들어 뜨거운 맛도 보고 차가운 맛도 본다. 숱한 세파에 살아남으려면 울음인지 웃음인지 모를 눈물도 꾹꾹 눌러두어야 한다. 누르고 참아내야 몸과 마음에 근육이 생긴다. 단단한 삶의 근육을 가져야 가시 같은 말도 웃으며 받아넘긴다. 무엇을 해도 어디를 가도 원래 거기에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상사*가 있어 서민의 소리가 하늘까지 닿는다. 장인은 망치로 징을 두들겨 울음을 잡은 후 징 소리가 넓게 퍼져 하늘에 닿기를 바라며 징에 원을 새긴다. 서민의 흥도 담고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삶의 답답함을 징 소리에 실어 하늘에 알린다. 끝없이 이어지는 울림이 있기에 소리는 하늘에 닿는다.

징 징 지이잉

울음은 원이 되고 원은 바람으로 승화되어 하늘에 새겨진다. 그 바람이 하늘에 닿기를 바라는 꿈이 금빛으로 반짝인다. 원(願)이 원(圓)이 되고 단단한 원(院)이 된다. 금빛 상사가 서민들의 가슴속으로 스며든다.

 

 

*상사 - 징에 새겨진 나이테 모양의 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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