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법(刀法)/ 김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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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끝이 닳았다.
자루를 보니 한창 시절에는 몸피가 제법이었을 칼날이 턱없이 야위었다. 뽀족한 칼끝이 퍼덕이는 전어의 아가미를 내려찍는다. 바다로 돌아갈 듯 퍼덕이던 전어는 일순 잠잠해진다. 할머니 잽싼 손놀림에 물속에 있던 전어 수십 마리가 순식간에 물 빠진 소쿠리로 이동한다. 할머니는 반쯤 내려온 머릿수건을 걷어 올릴 시간도 없이 절명한 전어의 옷을 벗긴다. 은빛 비늘이 할머니 손등에 눈가루처럼 쏟아진다. 전어의 등줄기를 긁어내리는 할머니 손길이 리드미컬하다. 어깨와 굵은 팔뚝을 적당히 흔들 때마다 칼질은 신명이 오른다. 물오른 칼날에 알몸이 된 전어는 다시 소쿠리에서 물이 든 바가지로 옮겨져 배를 연다. 그리고 자신의 속을 토해 낸다. 이때도 여윈 칼끝은 전어 배 가르기에 안성맞춤이다. 찍고 가르며 할머니의 칼날은 전어를 완벽하게 분해한다.
분해된 전어를 마른 도마에 눕히고 흰 수건을 깔아 수분을 닦아낸다. 깨끗이 물기를 제거한 전어를 반으로 갈라 수압을 지탱하게 해준 뼈들을 발라낸다. 뼈를 버린 살들은 부드럽다. 뼈들이 쌓인 도마 반대쪽에 전어의 살들이 차곡차곡 쟁여진다. 뼈를 다 바른 살들을 쌓아 놓고 할머니는 잠시 숨을 고른다. 손등으로 흘러내린 머릿수건도 밀어 올리고 마른 콧물도 한숨 들어마신다. 숨가쁘게 진행되던 지금까지의 과정에 잠시 쉼표를 찍고 있다. 어깨를 두어번 들썩이는가 싶더니 쌓아 놓은 전어 살을 한꺼번에 썰어 나간다. 칼과 전어 사이에 간격이 없다. 칼의 움직임이 너무 빨리 눈길이 칼질을 따라잡지 모한다. 예술이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칼의 속도에 취해 있다. 도톰하던 살이 칼 반대쪽에서 채가 되어 눕는다. 할머니의 손놀림은 온몸을 살짝 비틀 듯 흔들어 대며 리듬을 탄다. 썰린 전어를 보니 그 굵기가 한결같다. 신비한 일이다. 이미 술術의 경지는 지났따. 도道라 할 수밖에 없는 할머니의 칼솜씨, 그런데 어느 구석에도 의도된 손놀림은 없다. 무수한 일상이 탑 쌓듯 쌓여 어느 날 저절로 이루어지는 경지다.
정신을 홀딱 빼앗겨 그 진풍경을 보다 고개를 드니 시장 오른쪽 구석 볕 잘 드는 곳에 애완동물 차가 와 있다. 분홍 철창 안에 토끼며 친칠라 다람쥐가 제집에 한 마맀기 들어 있다. 그 중 다람쥐는 열심히 쳇바귀를 돌리고 있다. 새끼 단풍잎 같은 발을 쳇바퀴에 대자마자 몸은 또다시 밀려나며 바퀴를 민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끝없는 발놀림이 가만 보고 있자니 할머니의 칼 솜씨와 흡사하다. 돌아가는 체바귀가 등지고 있는 담벼락에 동그란 그림자를 만든다. 다람쥐 발걸음이 담벼락 그림자에서 찰칵찰칵 채썰려 나간다. 토막토막 잘려나가는 그림자를 보고 있자니 다람쥐가 시간을 채썰고 있는 듯하다. 시장 올 때만 해도 하늘 중앙에 있던 해가 제법 서쪽으로 기울었다. 시간을 잘라 내고 있는 다람쥐의 발놀림도 그 칼질이 장난이 아니다. 일정한 스피드와 일정한 간격, 숨 한번 돌리지 않는 진지함이 할머니의 칼질과 너무 닮았다. 둥근 쳇바퀴는 쉼 없이 다람쥐에게 자를 시간을 제공하고 다람쥐는 그걸 무심의 상태에서 받아들이는 것 같다. 내가 숨이 가빠 온다. 잠시 내려섰다가 다시 돌려도 되련만 다람쥐는 내 눈길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시간을 썰고 있다.
두 칼질을 가만 보고 있자니 이미 의식이 개입되기 이전의 상태다. 너무나 오랜 세월 반복된 훈련 속에서 잘 썰겠다는 다짐마저도 무화無化된 상태. 그 상태를 오래 지속하다 보면 언제 자신이 칼질을 하고 있는지조차 잊고 있는 상태에 이른다. 그때는 이미 칼질이 몸과 떨어진 한 행위가 아니라. 이미 몸에 이입된 상태가 된다. 이때 진정한 도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움직임이 있고, 숨을 쉬며, 피가 흐르는 산 칼은 진정한 도법을 이루는 과정에서 나온다. 닳아서 얇아질대로 얇아져 모양새는 볼품없어져도 그런 칼이 살아있는 칼이다.
한번은 대구 박물관 한국의 칼이라는 전시회에 간 적이 있었다. 크고 웅장한 장수들이 들었던 칼보다 작고 앙증맞은 여인네들의 칼에 마음이 빼앗긴 나는 사도세자의 어머니가 들었던 패월도 앞에서 오래 걸음을 멈추었다. 상어의 껍질에 붉은 물을 들여 칼집을 만든 칼은 보면 볼수로 그 붉은색이 눈길을 끌었다. 먼발치에서 보니 자잘한 고기비늘이 동그란 꽃잎처럼 보여 흡사 붉게 무리를 이루어 핀 홍매를 보는 듯 했다.
헌대 이 아름다운 칼은 진정 살아 있지 않았다. 칼은 칼인데 칼의 기능이 전혀 사라진 박제된 칼날이었따. 호흡도 꿈틀거림도 없는 유리 부스 안 조명 아래 죽어 있는 칼이었다. 생동감을 잃어버린 칼은 그저 새색시 마냥 다소곳이 앉아 있을 뿐 내게 아무런 기운도 전해주지 않았다. 사도세자가 질곡의 삶을 건널 때는 이 칼도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식을 구하려고 꿈틀거렸던 적이 있지 않았을까? 하나 지금은 이미 절명된 칼임에 틀림이 없었다.
볼품없으나 살아있는 칼과 아름다우나 죽은 칼을 보며 포항 죽도시장 호라어 골목 진배기 할머니 칼솜씨가 진정 빛나는 도법임을 새삼 깨닫는다. 쉼 없는 일상이 내면에 물고이듯 고여 신들린 칼질에 이르는 순간, 도법의 절정에 가 닿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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