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언어
연인 사이에 사랑의 속성 중 하나는 '그리움'이다. 그리움이라는 건 빈 곳이 느껴진다는 것, 다시 말해 이곳이 당신으로 채워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사람은 소유할 수 없다지만, 어쩔 수 없이 소유하고 싶어지는 얄궂은 마음이 사랑이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반대로 조건이 없다. 혼자서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면 마음 한편이 시큰해지기도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은 그런 게 없다. 해가 좋은 날 널려진 빨래가 된 것처럼 뽀송뽀송 유쾌한 기분만 줄 수 있는 건 '좋아하는 사람'이다.
내가 '좋다'라는 마음을 귀하게 보는 데는 이 감정이 가진 실시간성과 일상적임에 있다. 우리는 '좋다'는 말을 언제 하는지 떠올려보면 실시간성이라는 말이 무언지 이해가 갈 것이다. 친구랑 공원에 앉아 기분 좋은 바람을 맞을 때, 마음에 쏙 드는 카페에 앉아 수다를 떨다 문득 뱉게 되는 말. '좋다!'
사랑하는 마음은 나를 붕 뜨게 하기도, 한없이 추락하게 하기도 하는 역동성을 띤 반면 좋아하는 마음은 온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리게 해주는 안정성이 있다.
"우리는 서로를 실망시키는 데 두려움이 없는 사이가 됐으면 좋겠어요."
실망이라 함은 '바라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상한 마음'을 뜻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건 '상한 마음'이 아니라 '바라던 일'이다. 실망은 결국 상대로 인해 생겨나는 감정이 아니다. 무언가를 바란, 기대를 한, 또는 속단하고 추측한 나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완벽하지 않은 고유의 모양으로 존재한는데, 타인을 바라보는 시각 또한 그렇다. 나의 경험치와 취향, 태생적 기질 등이 빚어낸 지극히 사적인 시선으로 서로를 볼 수 밖에 없다.
내가 오래오래 지내고 싶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바로 저 말이었던 것 같다. 실망시키는 데 두려움이 없기를 바란다는,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높은 확률로 당신을 실망시킬 테지만 우리 평균점을 찾아보지 않겠냐는 말···.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만인에게 사랑받을 수는 없다. 하지만 역으로 말하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인 소수와의 관계는 견고한 것이다.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고서는, 나는 누군가와 진실로 가까울 자신이 없다. 우리, 마음껏 실망하자. 그리고 자유롭게 도란거리자.
결정적으로는 그 사람이 좋은 게 아니라 그 사람 눈에 비친 내 모습이 참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느끼는 거죠. 그때 느끼는 벅참이 있잖아요. 저도 그럴 때 벅참을 느끼는 것 같아요. 함께 있기만 해도 나를 좋은 사람으로 느끼게 해주는 사람이 있어요. 그 순간 비로소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또는 '나에게 좋은 사람이구나'하는 감정이 느ㄲㅕ지더라고요.
사랑하기에 좋은 사람은, 이 사람과 함께할 때 나의 가장 성숙하고 괜찮은 모습이 나오는 사람이다.
그러니, 나의 부족한 모습을 끊임없이 비춰주는 사람에게 혹여 '이런 사람이 그래도 나를 발전시켜주겠지'라는 마음에 메여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만 발견되는 나의 고유한 아름다움, 훌륭함이라는 건 분명히 있다. 그리고 그런 좋은 모습을 볼수록, 나 역시도 스스로를 그렇게 믿을 수 있게 된다. 그런 관계에서는 마르지 않는 시너지가 샘솟는다.
··· 시차가 맞는 사람끼리 만나는 것 또한 사랑의 기적 중 하나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뿐이랴. 이별 또한 그렇다. 나는 아직 연인이었던 시간에 머물러 있는데 상대는 아닐 때, 반대로 이미 식어버린 마음을 들고 어쩔 줄 몰라 미안했던 때, 얄궂게도, 이런 시차가 존재하기에 노래 가사라는 게 탄생한다는 건 부인할 수가 없다.
첫사랑이 아픈 이유는 돌아보면 참고할 연애의 데이터가 없어서인지도 모른다. 아무 정보 없이 맨 마음으로 부딪히는 인생 단 한 번의 연애, 첫사랑. 만개하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피어낼 줄만 알았던 순진한 처음.
살다 보면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기도, 주기도 한다. 모든걸 무난하게 중화하려는 습관이, 그 당연한 감정에 불필요하게 많은 이유를 주렁주렁 달아줬던 것 같다. 상대방의 프레임에 갇혀 생각할 필요 없이 그냥 단순히 그 사람이 싫다고 단정지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반드시 정교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더라고, 그냥 단신에게 해악한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그냥 그 사람을 싫어할 수도 있는 거라고.
나는 오랫동안 이 일을 기억하고 있는 걸로 '미안하다'는 내용의 문자로 다 갚지 못한 죄책감을 갚아나가기로 했다. 후련한 마음과 속 편한 기분이 눈치 없이 밀려와도 애써 밀어내기로 다짐했다. 사과를 받아준 것에 대한 고마움은 앞으로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걸로 갚아 나가기로 한다. 그 사람은 그 마음을 알아줄 사람이니까.
'미안하다'라는 말은 말꼬리가 길수록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 말은 털어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심어두는거라는 깨달음을 준 누군가에게 다시 한 번 고개 숙이며.
아쉬운 건 다정한 사람들은 말수가 적다는 거다. 말을 하기보다는 듣는 게 익숙한 사람, 누군가를 향한 마음은 풀어헤치기보다는 품어 버릇하는 사람들. 이는 다정한 이들이 가진 특성이다. 굳이, 어딘가에, 나의 마음을 글자로 쓰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혹시 악플에 상처받는 이들을 보고 마음이 아파본 적이 있다면, 좀 더 요란스럽게 그들을 보호할 수 있는 말을 써보기를 부탁한다. 그 한마디가 어쩌면 소중한 누군가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호방한 사람들이 놓친 작은 세계를 들여다봤을 때 그곳이 아름다울 수 있는 건 어쩌면 바로 이런 지질한 사람들 덕이 아닐까.
주는 자가 받는 이를 오랫동안 세심히 지켜봐온 시간이 선물 받는 이의 만족도를 좌지우지하듯, 조언도 그렇다. 듣는 이의 성향과 아픈 곳을 헤아려 가장 고운 말이 되어 나올 때야 '조언'이지, 뱉어야 시원한 말은 조언이 아니다.
소중한 것은 글자가 뜻하는 것처럼 힘을 들여 지켜야 하는 것임에도, 우리는 종종 말로만 그것을 소중하다 칭한 채, 방치한다. 그래서인지 가사 속에서 '소중하다'는 말은 주로 과거형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세상의 모든 소중한 것들은 그것이 유한하기에 그렇다. 꽃을 보고 드는 반가운 마음은 이것이 곧 시들 것을 알기 때문이고, 청춘을 예찬하는 이유도 쏜살처럼 빨리 사라져버림을 알기 때문이다.
감정의 언어
중학생 시절, 집으로 가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본 장면이 이상하게 잊히질 않는데 바로 그 장면의 제목이 내겐 '서글픔'이다. 서글픈 누군가는 슬픈 누군가, 서러운 누군가와 달리 본인 스스로는 정작 슬프지 않을 수도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 서글픔에는, 왠지 모르게 그 풍경에서 느껴지는 애틋한 아픔이 담겨 있다. 즉 나의 감정이 개입된 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를 서글프게 본다는 문장에는 이전의 히스토리가 담겨 있다. 이미 그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느낄 수 없는 감정이니까.
분노가 주로 외부 자극에 뿌리를 둔다면 용기는 내 안에 쌓인 결심들이 모여 탄생한다.
사랑과 행복은 비처럼 내려오는 감정들이다. 나의 의지로써가 아니라 누군가 갑자기 연 커튼 너머 햇살처럼 쏟아져 내린다.
'결혼도 했는데 왜 외롭냐'는 질문을 하는 사람은, 나를 정말이지 한없이 외롭게 만든다. 나에게 외로움은 반드시 채워져야 하는 결핍이 아니다. 오히려 오롯이 내게 집중할 수 있는 소중한 감정이다. (···) 내가 아무 장치 없이 혼자임을 느낄 때 만나는 감정, 오랫동안 감당항 수 없는 감정임에 틀림없지만, 우리는 가끔 이런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닐까.
무언가에, 또 누군가에게 싫증이 잘 난다며 그건 아마도 '싫증이 잘 나는 성향'이라서가 아니라 잘 마모될 수 밖에 없는 부분만 골라서 좋아하는 성향 탓일 수 있다. 싫증이 주는 죄책감이나 불쾌감이 없다면 상관없겠지만, 그런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의 공통점을 찾아보는 것을 추천한다. 그것이 사람이라도 마찬가지이다. 아주 구체적이지는 않아도 그 사람이 가진 고유의 결, 태도, 에너지 같은 것을 찾아내어 그게 내 사랑의 진원지임을 정한다면, 반복되는 패턴에 지루해지는 현상은 줄어들 수도 있다. 내 피부가 아닌, 마음 깊은 곳까지 다가와 툭 건드리는 것들을 구분해내는 것은 나름의 훈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기억은 틀릴 수가 있다.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 중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라는 가사는 기억의 속성을 잘 활용한, 거의 명언과 같은 표현이다. 반면에 추억은 틀릴 가능성이 없다. 이미 내가 어떻게 저장하기로 한, 나의 감정이 적극적으로 개입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 상황이 실제로 좋았든 나빴든, 추억이 되느냐 마느냐의 감독 권한은 전적으로 내게 있다. 뼈아픈 슬픔도 시간이 흘러 추억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자존감의 언어
중력이 내게 해주고픈 말을 받아들이면서 다만 너무 아프지 않게 나이 드는 것, 그러나 숫자로 모든 걸 판단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 것, 육체의 유한함 앞에 겸허해지는 것, 이것이 앞으로의 내 나이에 관한 바람이다.
수많은 무안한 순간들에도 불구하고, 내면의 유난스러움을 지켜준 나에게 새삼 고맙다. 보통 유난스러운 게 아닌 덕이었는지, 수치심에 취약한 나임에도 불구하고 꺾이질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런 나의 성향이 결국, 작사가 되는 데 큰 몫을 했을 테니 말이다. 생각건대, 유난스럽다고 지적받은 적이 있다면 그 부분이 바로 당신을 빛나게 해줄 무언가일 것이다. 그러니 유난스러운 자들이여, 온 힘을 다해 스스로의 특별함을 지키자.
겁이 많은 자들은 지켜야 하는 것들의 가치를 아는 자들이다. 또 자신과 얽힌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 일에 대한 신중함이 있는 자들이다. (···) 삶에 있어 충동보다는 지구력으로 대처하는 이들, 그중에서도 '나는 겁이 많은 편이야'라고 스스로 말하는 사람들은 더욱 호감이다. '겁이 없음'을 매력적인 무기로 휘두르지 않는 그들은, 결과적으로 늘 강했다.
모든 곳에서 온전한 나로서만 존재한다는 건 아주 이기적이어야 가능하다. 배려하기에, 사랑하기에, 책임이 있기에, 히스토리가 있기에 우리는 종종 다른 모습을 한다.
기억하자. 오래 살아남는 시간 속에 잠깐씩 비참하고 볼품 없는 순간들은 추한 것이 아니란 걸. 아무도 영원히 근사한 채로 버텨낼 수는 없단 걸.
예측 불허의 내일들이 펼쳐져 있는 시간은 막상 그곳에 있을 때는 주로 암담하다. 아마도 이건 내가 모험가 유형이 아닌 성향 탓도 있겠지만, 불안의 가장 보편적인 원인은 알 수 없는 내일 때문 아니겠는가. (···) 특별한 하루라는 것은 평범한 하루들 틈에서 반짝 존재할 때 비로소 특별하다. 매일이 특별할 수는 없다. 거대하게 굴러가는 쳇바퀴 속에 있어야지만, 잠시 그곳을 벗어날 때의 짜릿함도 누릴 수 있다. 마치 월요일 없이 기다려지는 금요일이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스스로가 대견한 순간은 굉장히 작은 것들이다. 철저히 분리수거를 하는 것, 어리숙한 알바생의 실수에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소소한 말을 건네는 것, 플라스틱 줄이기 운동에 동참하는 것 등등의 사소한 것들이 바로 그런 거다. 나의 존엄을 가꾸어 나가는 일은 결코 거창할 필요만은 없다. 존엄이라는 말의 무게 때문에 창씨개명에 맞서고 인권운동에 삶을 바치는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 같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존엄한 사람들은 일상 속 하찮은 순간들이 정갈한 이들이다.
[출처] 김이나 에세이 《보통의 언어들》|작성자 dori
'좋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간과 강물/김훈 (0) | 2024.07.17 |
---|---|
형용사와 부사를 생각함/김훈 (0) | 2024.07.17 |
파랑, 늑대의 시간 /김채영 (1) | 2024.07.14 |
맹그로브 / 장금식 (0) | 2024.07.12 |
새벽 - 장미숙 (0) | 2024.07.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