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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시간과 강물/김훈

에세이향기 2024. 7. 17. 03:02


 

시간과 강물/김훈

 

 

 

 

 

 

 나는 1948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두 살 때 6‧25 전쟁이 나서 엄마 등에 업혀 부산으로 피난 갔고, 부산에서 자라서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에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은 잿더미가 되었다. 학교에는 건물이 없어서 미군이 지어준 천막 교실에서 수업했다. 해마다 보릿고개에는 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고 관공서 건물에는 ‘기아 퇴치’, ‘절량농가 근절’, ‘식량 증산’ 같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여름에 큰비가 와서 한강 물이 불었다.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마포구 망원동 쪽 한강으로 물 구경을 나갔다.

 한강은 물이 가득 차서 출렁거리며 흘러가고 있었다. 강은 힘차고 거침없었다. 아버지는 상류 쪽을 바라보았고, 멀어서 흐려지는 하류 쪽을 바라보았다. 한참 후에 아버지는 말했다.

 “물을 잘 봐라. 흐르는 물을 보면 다시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느낀다. 물이 흘러가는구나.”

 나는 좀 더 자란 후에야 아버지의 말에 담긴 고통과 희망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흐름을 잇대어 가면서 미래로 나아가는 시간의 새로움을 말한 것이었다. 경험되지 않는 새로운 시간이 인간의 앞으로 다가오고 있고, 그 시간 위에서 무너진 삶을 재건하고 삶을 쇄신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말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강물은 미래로 향하는 시간이었다.

 ‘시간이 희망의 토대’라는 말에는 잿더미가 되고 가루가 되어 버린 시대의 폐허에 맨몸뚱이로 부딪혀 나가야 하는 인간의 고통이 스며 있었다. 아버지는 시간에 대한 희망으로 폐허의 슬픔과 절망을 감당하고 있었고, 흐르는 강물이 새로운 시간의 흐름을 아버지의 마음속으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마지막 몇 페이지에서, 경찰 토벌대에 쫓겨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게 된 빨치산 대장 염상진은 마지막 남은 부하들과 수류탄으로 자폭해서 생을 마감한다. 염상진의 후배 하대치가 대원 다섯 명과 한밤중에 염상진의 무덤에 절하고 나서 동트는 새벽의 어스름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에서 이 대하소설은 끝난다. 이 어둠은 새벽의 빛을 잉태한 어둠이었다. 어둠의 밑바닥에서 밝음이 번져 오기 시작하는 새벽에 하대치와 대원들은 미래의 시간을 향해 나아간다. 하대치는 시간과 더불어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기나긴 이야기가 끝나는 시간은 새벽인데, 이 소설은 마지막에서 무한한 미래를 향해 새로 시작된다. 막이 내리면서 다시 열리고 있다.

나는 내 아버지의 강물과 하대치의 새벽 시간에서 인간의 생명을 통과해 흐르는 시간과의 힘과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다. 새로운 시간 앞에서 인간은 미래를 향해 열려 있고, 시간과 더불어 새롭다.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순간은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악기를 연주하는 인간은 자신의 생명 앞으로 바싹 다가온 미래의 시간 위에서만 음과 선율을 불러낼 수 있다. 지나간 시간 위에서는 악기를 연주할 수 없다. 한 개의 음은 창세기의 새벽처럼 이 세상에 태어나고 또 소멸한다. 모든 악기들은 아직 당도하지 않았으나 곧 다가올 미래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악기는 살아 있는 인간의 생명과 시간을 연결해서 시간을 지속된 흐름으로 흘러가게 하고, 그 흐름 위에서 선율은 태어난다.

 물리학자들은 빅뱅 이후 40억 년의 시간을 수리적으로 계량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인간의 생명 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시간을 객관화해서 물리적 대상으로 인식할 수는 없다. 시간은 언어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시간이 스스로 새로운 것인지, 인간의 생명이 다가오는 시간을 새롭게 만들어서 수용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 어느 쪽이라 하더라도 같은 말이다. ‘날마다 새로워지고, 더더욱 날로 새로워진다日日新又日新’라는 <대학大學>의 문장은 시간 자체의 새로움보다는 인간의 능동적 쇄신 의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읽히지만, 이 문장에서 시간의 본질적 새로움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별들이 운행하는 우주 공간 속의 시간과 땅 위의 흙을 익혀서 흙 속에 잠들어 있던 태초의 색을 발현시키는 도자기 가마 속의 시간과 몸속에서 몸을 길러내는 포유류의 자궁 속의 시간과 씨앗에서 꽃을 피워내는 식물들의 시간과 김치를 익히는 김장독 속의 시간이 모두 동일한 질감과 작용을 갖는 것인지를 나는 알지 못하지만 그 모든 시간들을 인간의 언어의 영역으로 끌어넣을 수 없다 하더라도, 저 여러 가지 시간들은 말의 길이 끊어진 절벽 건너편에서 제가끔 아름답다.

 

 안중근 안중근安重根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덕순 우덕순禹德淳을 만나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러 가자고 제안했을 때 우덕순은 두말없이 따라왔다. 이 두 젊은이는 이토를 죽여야 하는 대의大義를 거대담론으로 말하지 않았고, 실탄과 여비는 모자라지 않은지, 성공할 수 있을 것인지, 이토를 쏘고 나서 어디에 몸을 두어야 할 것인지를 말하지 않았다. 뜻은 순식간에 서로에게 스몄다. 이토를 쏘러 가기로 작정한 그다음 날 아침에 두 젊은이는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으로 가서 하얼빈으로 향하는 3등 열차에 몸을 실었다.

 소설 <하얼빈>을 쓰면서 나는 이날 아침에 밝아오는 어둠을 뚫고 달리는 하얼빈행 열차를 생각하면서 행복했다. 내 아버지의 한강이 고통과 시련의 과거를 이끌고 새로운 시간 속으로 흘러가듯이, 안중근의 열차는 약육강식하는 시대의 어둠을 뚫고 하얼빈으로 갔다. 이날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의 아침에 청춘은 아름답고 강력하다. 그들은 서른한 살이었다.

 

 어린아이들은 길을 걸어갈 때도 몸이 리듬으로 출렁거린다. 몸속에서 기쁨이 솟구쳐서 아이들은 오른쪽으로 뛰고 왼쪽으로 뛴다. 아이들의 몸속에서 새롭게 빚어지는 시간이 아이들의 몸에 리듬을 실어 준다. 호랑이나 사자의 어린 것들도 스스로 기뻐하는 몸의 율동을 지니고 태어난다. 그것들은 생명을 가진 몸의 즐거움으로 발랄하고 그 몸들은 신생하는 시간과 더불어 뒹굴면서 논다. 이 장난치는 어린것들의 몸의 리듬을 들여다보는 일은 늙어가는 나의 내밀한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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