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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그로브 / 장금식

에세이향기 2024. 7. 12. 03:15

맹그로브 / 장금식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 그곳에 들어서는 순간, 이쪽이 강이고 저쪽이 바다라는 경계가 사라진다. 인간과 자연의 경계마저도 사라지는 것 같은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나무뿌리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봉긋하게 웨이브를 넣은 여인의 머릿결처럼 활모양으로 굽은 가닥이 무리지어 있다. 가느다란 뿌리가 여러 개다. 어우러진 나무뿌리는 반쯤 펼쳐진 우산 같다. 빽빽이 우거진 초록 잎과 옹골차게 얽힌 뿌리는 오랜 세월 동안 흐트러짐 없이 응축된 시간의 흔적이다. 말레이 반도, 안다만해, 랑카위섬 지질공원 안에 있는 맹그로브 숲이다.

 도드라진 뿌리는 나의 관심에 잔잔한 파문으로 화답해준다. 스피드보트가 속력을 낮추고 뿌리의 군락으로 다가간다. 나무의 속성에 대해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나무에게 말을 걸어본다.

 '물 아래 진흙땅엔 산소가 부족해서 물 위로 뿌릴 드러낸 거였구나. 하필이면 물 위라니! 뿌리를 내린다 해도 짠 바닷물 때문에 살아가기가 만만치는 않았을 텐데, 네 모습이 당당하고 든든해 보여. 힘들게 얻은 뿌리라 잔뿌리도 잘 벋는다니 놀라워. 열매에서 싹이 터, 그 싹이 파도에 휩쓸리고, 바다에 떠돌다 자리 잡은 그 여정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래도 너의 뿌리는 바다 생명체들이 알을 낳는 보금자리잖아. 네가 내뿜는 우숨결은 우리의 숨결까지도 한결 부드럽게 하지.'​

 흔들리는 물결, 진초록 잎들 위에 걸쳐 있는 햇빛 한 줌, 파란 하늘 아래에서 날아다니는 독수리 떼, 물결 따라, 햇빛 따라, 독수리 날갯짓 따라 내 눈이 홀려든다. 환상의 세계에 빨려드는 것 같다.

 뿌리란 원래 나무의 근본이 아닌가. 보이지 않는 곳에 깊게 뿌리를 내릴수록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인데, 보통 나무들의 근성을 닮지 않았다. 숨겨야할 소중한 뿌리를 드러내기까지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포기할지를 얼마나 숙고하였을까. 혹시 겉으로 드러난 뿌리가 찢어져 다칠까봐 노심초사 하지나 않았는지. 어두운 땅 속 보다는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수면 위를 선택하여 무성한 잎을 머리에 이고 수많은 혼란을 겪었으리라.

 사람으로 말하자면 뿌리는 한 사람, 한 집안의 근본이 될 수 있다. 맹그로브처럼 자신의 뿌리를 겉으로 드러내고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속내를 보이는 사람, 솔직한 사람은 밑천을 다 내어 보이는 사람이라고 사람들이 쉽게 대할 수 있고 또 만만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을까. 진솔하게 속 깊은 이야기를 하면 가볍게 보거나 여러 오해를 할 수 있고, 감추는 것이 오히려 상대를 배려하는 미덕이라며 핀잔을 줄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하여 사람들은 대개 자신을 솔직하게 나타내기보다는 감추는 것에 더 익숙해지며 맹그로브처럼 살아가기를 거부하는 게 아닐까 싶다. ​

 나를 감출수록 마음이 허함을 잘 알지만 드러내기가 두려워서 자꾸 숨기고 포장하고 싶을 때가 많다. 멀리 외딴곳에다 참된 마음을 두고 솔직함과는 거리가 먼 위선과 망상으로 그동안 맹그로브가 내뿜는 것과 같은 삶의 산소를 꺼려하며 살아오고 있지는 않았는지.

 망망대해는 고요와 정적을 휘몰아 실핏줄 같은 뿌리에 혼을 불어 넣는 것 같다. 맹그로브의 숨김없이 솔직한, 민낯을 한, 허물을 벗은 모습이 오히려 바다를 압도하는 듯하다. 부족함이나 부끄러움은 드러낼수록 헛된 거짓을 꾀하지 않아도 되고, 작은 치부라도 들킬 수 있는 내면의 뚫린 구멍을 막을 필요가 없다. 이런 맹그로브를 계속 보고 있으니 뿌리와 맥박을 같이 하고 호흡하는 결에 하나가 되는 느낌이다. 한 아름 껴안아보고 싶기도 하고, 그 위에 덜컥 걸터 앉아보고 싶은 마음도 든다.

 겉으로 드러낸 뿌리를 지닌 맹그로브처럼 내 진면목을 누구에게나 부여줄 수 있다면, 뿌리가 수없이 곁뿌리를 내리듯이 내 주변에도 여린 뿡리같이 착하고 순수한 사람이 늘 북적거리리라. 물 위의 뿌리가 썩지 않듯이 사람과의 관계도 잘 유지되리라.

 나무가 아닌 뿌리가, 감춰진 것이 아닌 드러난 것이 매력 포인트인 맹그로브 숲, 계절과 상관없이 사람들은 이 숲으로 많이 몰려든다. 그들의 가슴 한 구석에도 맹그로브처럼 솔직해지고 싶은 마음으로 회귀하려는 본능이 자리하고 있을까. 나처럼 에메랄드 물빛​으로 포장을 하며 사는 사람들, 진솔함에 허기진 사람들의 역설이리라.

 맹그로브 숲에서 나도 모르게 내 깊숙한 심연을 들여다봤다. 화장기 없는 얼굴로 나서고 싶었다. 민낯을 보이고 살 수만 있다면 찜찜하거나 갑갑하지 않겠지. 파란하늘과 에메랄드 물빛 사이의 수직 공간, 바다와 강 사이의 수평공간에서 맹그로브가 더욱 선명하게 와 닿는다. 두 팔을 뻗으며 길게 숨을 내 뿜고 숲의 숨결을 가슴으로 들여온다. '누군가에게 맹그로브 나무가 되어야지' 맹그로브가 촘촘히 어우러진 경계 없는 이 숲을 내 가슴 가득 안아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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