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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치는 사람의 실루엣 / 김채영

에세이향기 2024. 6. 19. 09:37

 

스치는 사람의 실루엣 / 김채영






     어쩌면 오늘 그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막연한 불안감은 점차 확신으로 굳어졌다. 텅 빈 실내의 무거운 적막을 뭉텅뭉텅 베어내며 등 뒤에서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이별의 통보처럼 날카로웠다.고개를 돌린다면 그의 얼굴이 보일 텐데, 나는 여느 때처럼 무심한척 밀실 안 연노랑 커튼의 꽃무늬만 건성으로 헤아리고 있었다. 그를 만난 게 몇 번이었을까 생각해본다. 적어도 이삼일에 한번 씩은 만났을 것이다. 그게 한 달이 지난 일이니까 열 번은 족히 넘었다.
   그의 목소리는 듣기 좋은 바리톤이다. 그윽하고 귀족적인 음색이어서 대화의 내용과는 동떨어진, 그가 소화해낼 법도 한 오페라의 부분 부분이 불쑥 떠올랐다. 어쩌면 그에게는 물 찬 제비처럼 잘빠진 공단 연미복이 어울릴 듯 싶었다.
    그의 음성은 다분히 예술적이었다. 오늘같이 우중중하고 한기가 관통해가는 날 , 세빌리아의 이발사 중 ‘만물박사의 노래’를 불러준다면 실내가 환하게 살아날 것만 같았다. ‘만물박사의 노래’는 호쾌한 음악 속에 짧은 순간 지나가는 강렬한 휘파람 소리가 묘미이다. 악의 없는 동네 날건달처럼 불어대는 휘파람 소리는 모든 시름을 떨치게 해줄 것 같았다.
     남자의 향취는 은은하면서 오묘한 데가 있었다. 유리병 속에 박제된 숲의 향기가 그의 옷섶에서 되살아나곤 했다. 얼핏 축축한 나뭇잎 냄새 같기도 했고 이끼 냄새 같기도 했다. 마치 젖은 나뭇잎과 이끼가 어우러진 저녁 숲에 감도는 박명의 시간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남자가 쓰는 향수는 어둡지만 어딘지 모르게 따스함을 지녔다. 젖은 숲의 무게감을 머스크향이 혼합되어 벨벳처럼 부드럽게 상쇄시켰다. 그 신비로운 향수 냄새는 은근하게 관능적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오늘은 그를 따라다니던 향기가 없다. 나는 벌써부터 그의 눈치를 살핀다.
   그의 시선 아래서 나는 참담한 포즈로 개구리처럼 납작 엎어져 있다. 따라서 그의 눈길은 중년여자의 볼품없이 푹 퍼진 엉덩이를 훑어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수치스러웠다. 남자는 오늘따라 자상한 목소리로 나의 근황이며 건강을 물어온다. 그러다가 돌연 날씨 타박을 한다.
   “ 여름에서 곧바로 겨울로 접어드는 것 같아요. 안 그래도 다들 춥고 배고프고 어려운 세상에 한겨울 같은 가을 날씨는 기운을 빠지게 하는군요.”
   이 남자만큼은 적어도 내 앞에서 죽는 소리를 하지 않길 바랐다. 그 완벽하게 기품 있는 목소리와는 궁핍 따위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이즈음에 반죽을 맞춰줘야 최소한의 예의였지만, 내가 입을 닫음으로서 그의 말은 독백으로 흩어졌다. 그는 무안했던지 낄낄거리면서 짧게 웃었다. ‘춥고, 배고프고, 어려운 ’ 갖은 궁상과 청승이 묻어나는 단어의 조합이라니. 그 통속적인 말은 이별의 느낌과 상통된 언질 같아서 두려웠다. 나는 새삼 백 속에 들어있는 지폐의 액수를 머릿속으로 헤아려본다.
  그의 존재는 그림자 같아서 정말 우리가 만나기는 했는지도 애매하다. 다만 수려한 목소리와 보드랍고 살집이 도톰한 손의 감촉에 의존한 이미지는 확고하져갔다. 성악가들이 대개 그렇듯이 다부진 체격에 배가 동그랗게 나왔을 것이고 입술은 육감적으로 두툼할 거 같았다. 반 곱슬에 동안이고... 나의 상상은 거기에서 멈춘다.오늘따라 속옷과 함께 벗겨져 내려간 청바지로 신경이 곤두서있다. 그는 내 엉덩이의 맨살을 짚어가면서 노련하게 침을 꽂았다.  
  “ 오래전에 다친 곳은 간단하게 침을 맞아서 고치기가 힘들어요. 침을 백날 맞아도 약을 같이 제때에 써주지 않으면 효과가 떨어집니다. 오늘은 미루지 말고 꼭 약을 지으실 거죠? ”
    약을 지으라고 권하는 대목에서 신뢰가 가지 않는지 남자의 목소리가 조금 흔들렸다. 나는 잠시 갈등을 한다. 당당하게 지갑을 열 것인가. 용감하게 병원 문을 빠져 나갈 것인가. 엉덩이에 침을 꽂던 손길이 청바지를 걷은 왼쪽 다리로 옮겨갔다.
   어느 첫 눈 오는 날 모처럼 기분 전환을 하려고 외출을 하던 길에 넘어져서 심한 부상을 입었다. 그날 다친 발목으로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 병원 저 병원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어린 시절 엉덩이에 관절염 수술을 한 자리까지 재발해서 고통스러웠다. 어느 날은 멀쩡했다가 이삼일이 지나면 다시 시작되는 통증은 미친년 널뛰듯이 거침없이 광풍의 소용돌이 속으로 유린했다. 시내 쪽의 병원을 다니다 차도가 없어서 한의원으로 옮기게 되었다. 정형외과와 물리치료 기구도 비슷했고 양질의 서비스에 침까지 놓아준다. 여러 달에 거쳐 한의원을 두 군데 다니고 약을 세재나 지었으나 이렇다 할 효과가 없었다. 듣자니 환자를 잘 본다기에 이곳으로 옮겼다. 찜질팩도 엉덩이와 발목 두 군데나 올려주고 물리치료나 마사지도 성의 있게 해주었으며 친절까지 했다.
    첫날부터 간호사가 한약을 지을 거냐고 물어온다. 예상했던 일이다. 한 달 전의 일이니 참 오래도 버틴 거다. 나는 다시 마땅한 병원을 찾아 나뭇잎이 어지럽게 떨어져 휘날리는 거리를 해매이게 될 거라는 생각에 울컥해졌다. 그 바리톤의 멋진 음성을 어디에서 들을 수 없다는 것도 서운했다.
    나는 다리에 붕대로 칭칭 감은 채 또 오랜만에 지인들의 밤 모임에 참석했던 날을 후회하고 있다. 그날만 참았더라도 지금처럼 혹독한 시간을 살지 않았을지 모른다. 동네까지 찾아온 지인들의 배려에 얼굴이나 보여주자는 의도와는 달리 몇 군데 장소를 거치면서 집과의 동선은 멀어져 갔다. 절룩거리면서 노래방까지 따라가서 놀았으니 그 경망스러움이란 . 발목 통증은 내 일생에 고질병이 될까 두렵다.  
   다리에 침을 다 꽂은 남자가 잠시 멈칫하다가 커튼을 열고 밀실을 나가고 있었다. 다급하게 돌아보았지만 창문에 번진 석양 쪽으로 등을 돌린 희미한 뒤 꼭지만 찰나적으로 훔쳤을 뿐이다. 오, 이런. 내 상상 속의 모습과 꼭 뒤태가 닮아있었다 . 하얀 가운을 걸친 등짝이 넓고 다부진 체격의 곱슬머리 남자. 그런데 둥글게 부푼 머리끝이 고무줄로 묶인 것을 보는 순간 , 실소가 터져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얼굴을 감춘 채 드러난 남자의 꽁지머리는 더 이상의 접근을 거부한 물음표인양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우리의 농담 같은 기이한 만남을 대변해주는 듯 했다. 그런데 그와 정말 만나기는 한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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