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문 / 엄정숙

에세이향기 2024. 7. 22. 04:20

 / 엄정숙

 

 

 

 

 

닫혀 있는 문안에서 나는 고립된 하나의 섬이 된다. 차미 적지에서 살아 나온 패잔병처럼 숨을 죽이며 집 안에 틀어박혀 지내고 있다. 그런 지 며칠이나 되었을까. 다람쥐 쳇바퀴 글리듯 매일 하는 일을 해치우고 나면 개운함도 잠시, 별의별 생각으로 탄력 없는 거미줄을 짜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그러다 낮잠이라도 설핏하게 들면 몽골의 기마병처럼 적진을 뚫고 다니는 꿈을 꾸기도 한다. 문밖의 일들이 궁금해지면 창문을 열고 바람과 햇살을 끌어들이는 게 고작이다. 다들 바깥세상으로 눈을 돌리고 마음 밖으로까지 뛰쳐나가려고 야단인데 나는 고층 아파트의 적막 속에서 물고기처럼 잠수나 하고 있다. 문득 종일토록 한 번도 열어 본 적이 없는 문을 본다.

예전에 문밖에서 기다림을 배운 적이 있다. 할머니는 사립문 밖에서 딸을 기다렸고, 어머니는 대문 밖에서 딸을 기다렸다. 그리고 나는 철제 현관문 밖에서 딸을 기다렸다. 늦은 시간에 자식의 귀가를 고대하는 부모의 마음은 문안과 문밖이 참으로 먼 거리이다. 문밖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서성이는 간절한 마음이 젖줄처럼 흐르던 시간이 있었다. 휴대폰으로 온갖 주술을 부리는 요즘 아이들에게는 물려줄 수 없는 아름다운 유산이다. 나는 오늘 누구를 가다릴까. 아이는 다 커서 제 갈 길로 갔고 우편 배달부조차 편지함에 청구서 나부랭이만 던져 놓고 가버린다. 어제는 인터넷 서점에서 보내온 책을 배달하러 택배회사 직원 한 명이 왔다가 돌아갔을 뿐이다.

가끔은 이웃집 안부가 궁금하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서로 인사를 하는 사이지만 다른 장소에서 부딪치면 알아보지 못하는 일이 많다. 한 울타리 안에 살면서도 나는 언제나 아파트 사람들이 낯설다. 그래도 밤이 되면 건너편 집들이 불켜진 창이 따뜻해 보인다. 발코니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도 내 집 식구처럼 가깝게 느껴질 때가 있다. 언젠가는 거실에서 열심히 에어로빅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런 날은 아파트 전체가 하려한 무대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나도 내 삶의 어떤 부분을 남에게 들키고 나면 외로움이 사라지려나. 창틀에 예쁜 꽃이라도 놓아둘까. 아니면 고운 색깔의 커튼을 달아 볼까. 깨끗하게 삶은 빨래를 널어 말리던 모습도 틀림없이 그리움의 표적이 되었으리라. 지금 누군가가 내 창문의 어른거림을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은 왠지 어렸을 적의 우리 동네 사립문들과 낮은 울타리가 그립다. 늘 반쯤 열려 있어 지나다 슬쩍 남의 집 마당으로 들어서면 분꽃이며 봉숭아, 상추, 아욱 등이 감나무 밑에서 오순도순 자라고 있었다. 치마 가득 야들야들한 상추를 안겨 주시던 이웃집 어른의 푼푼한 인정이 잃어버린 보석처럼 아쉽다. 낮고 엉성한 울타리에 넘치듯 피어나는 넝쿨장미의 매혹적인 빛깔을 잊을 수가 없다. 나팔꽃이 아침마다 종소리를 내는 동네, 날마다 다 아는 안부를 묻고 그만그만한 살림살이를 서로 걱정해 주는 이웃사촌들이 살던 곳이다. 집집의 경계는 있었지만 마음의 경계는 없었다. 소유를 지키기 위한 욕심으로 문을 만들었다고 한다. 가진 것이 많아질수록 담과 벽을 튼튼히 하고 마음의 문까지 잠근 뒤에야 겨우 발을 뻗고 잔다.

사람은 누구나 문을 열면서 하루를 시작하여 문을 잠그고 하루를 마감하는 행위를 반복하며 죽음에 이른다. 문을 열거나 닫을 수 없을 때는 이미 세상에서 볼일을 마쳤음을 뜻한다. 사후에, 업적이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든 문은 오래오래 지상에 남아 있다. 충신, 효자, 열녀를 기리는 정문(旌門)과, 관아 들머리에 세우는 홍살문, 독립문과 개선문도 있다. 또 좁은 문이라는 비유의 문도 있다. 좁은 문은 생명의 길이라고 성경에 씌여 있다. 차원은 다르지만 요즘은 좁은 문 때문에 청년들이 마음 고생을 많이 한다. 입시의 문과 취직의 문은 물론 결혼의 문까지 편편치 않아 희망보다 절망을 먼저 배워 버린 젊은이가 많은 것 같다. 지금의 다리에서 한 계단만 올라가려고 해도 통과의례를 거쳐야 한다. 산문(山門)과 입문(入門), 등용문까지 부단한 오력으로 지식과 지혜를 겸비해야만 들어갈 수 있다. 살아 있는 한 많은 문을 거치며 생의 굽이굽이를 돌아가야 한다. 그런 문들에 비하면 마음의 문은 종이쪽처럼 가볍다. 그러나 불가사의하게도 세상에서 가장 견고한 문은 마음의 문이다. 다행히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비웠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런데 왜 그 말이 자꾸 유행가 가사처럼 들리는 걸까. 내 안에서 또 한 개의 빗장을 걸어 잠그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우리 조상들은 ‘開門萬福來’ 라는 문구를 대문짝에다 붙이고 살았지만, 실제로는 문을 너무 굳게 닫아서 나라를 잃은 적도 있다. 내가 먼저 마음의 문을 열어야만 남의 문을 열 수 있다. 상대방의 동정을 살피고 자신의 잣대로 평가를 해 가며 마음을 열기에는 우리의 삶은 너무 짧다. 요즘처럼 속도가 빨라진 사회에서는 더구나 구겨지거나 닫힌 마음을 한시라도 빨리 펴놓지 않으면 자칫 우울증 같은 병을 얻을 수도 있겠다. 이쯤 해서 나도 나의 잠수를 끝내고 싶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산책로라도 따라 걸으며 마음속에 끼여 있는 게으름과 아집의 녹을 털어 내야 할 것 같다. 육중한 마음의 문을 열 듯이 나는 현관문을 밀어 본다.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들어온다. 내 마음의 잠금장치는 어느새 풀려 있다.

 

 

'좋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얏고/박시윤  (0) 2024.07.22
참빗 ㅣ신성애  (1) 2024.07.22
아버지의 발/고경숙  (0) 2024.07.22
물두멍 / 송옥선  (0) 2024.07.22
곁/김혜주  (0) 2024.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