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참빗 ㅣ신성애

에세이향기 2024. 7. 22. 04:25

참빗 ㅣ신성애

 

참빗처럼 촘촘한 햇볕이 내리쬐는 한가로운 오일장이다. 시장을 설렁설렁 한 바퀴 돌아보는 데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 길모퉁이를 돌자 유행 지난 중절모자에 헐렁한 윗도리를 걸친 노인이 망연히 앉아 졸고 있다. 발자국 소리에 화들짝 깨어난 노인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좌판의 먼지를 털어 낸다. 아직도 생의 가운데 자리한 오밀조밀한 잡화들이 가지런히 놓여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검붉은 낙죽(烙竹)이 선명한 빗 하나가 내게 가만히 말을 걸어온다.

동네에서 산전댁이라고 불리던 할머니는 곱게 빗은 쪽머리의 정갈한 모습이었다. 물오른 당산나무가 연두 바람에 흔들리던 날, 산골 처녀는 헌헌장부(軒軒丈夫)에게 꽃이 되어 오셨다. 꽃향기에 취한 듯 그믐달은 아스라이 구름 가지에 걸리고 무논의 개구리는 밤새 울어 댔다. 십여 년 봄날은 꿈결처럼 흐르고 청명하던 하늘에 먹장구름이 몰려왔다. 건장한 할아버지의 눈앞에 작은 벌레가 날더니만 안개비가 내려 시야를 가렸다. 할머니는 억장이 무너져 숯덩이 된 가슴으로 천지신명님께 빌고 또 빌었다. ‘우리 대주 눈뜨게 해 주십사.’ 나무 위의 까치 소리에도 귀를 곧추세웠다.

한바탕 회오리바람이 훑고 지나간 하늘에는 무심한 구름이 떠 가고, 가장이 된 지어미는 치마허리를 질끈 묶고 세상 밖으로 나갔다. 바람 숭숭 들어오는 틈새마다 황토를 바르고 대들보가 기울어진 집안은 서까래라도 튼튼해야 한다고 자식들을 다독였다. 멀건 음식을 선걸음으로 드시고, 신 새벽부터 땅거미 질 때까지 허리 펼 날 없었다.

봄이면 산과 들을 온종일 헤집으며 양식거리를 마련하여 보릿고개를 넘겼다. 냇가의 대마 밭이 짙푸르게 무성하면 낫으로 베어 내어 등짐으로 져 날랐다. 잘라 온 삼 줄기는 가마솥에 푹푹 삶아 껍질을 벗겨 내고, 가닥가닥 물에 째서 새하얗게 윤이 나는 계추리를 만들었다. 겨릅은 겨릅대로 발을 매어 널어놓고 삼 톱으로 가늘어진 살결 고운 계추리는 손으로 꼬아 잇는 삼 삼기를 해야 했다. 수많은 삼 가닥을 비벼 이은 무릎팍은 닳아서 맨질맨질 실핏줄이 보였다. 건드리면 터질 듯 팽팽해진 살갗은 불에 덴 듯 아려서 잠 못 들고 뒤척였다. 지게뿔에 초롱불을 달빛인 양 걸어 놓고 짚 멍석에 둘러앉아 길쌈으로 지새울 때 마당가의 모깃불도 밤새 속을 태웠다. 소슬한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들면 건넛방 베틀 소리가 밤이 이슥하도록 투덕거렸다. 그 시절 할머니는 찬물 한 바가지로 허기진 배를 달래고 선잠에 들곤 했다.

사람의 몸이 천 냥이면 눈은 구백 냥이라 했는데, 빛을 잃어버린 지아비에게 세파는 매서웠다. 행여나 입방아에 오르내릴까 할아버지는 사랑방에 기거하시고 밥상도 따로 내드렸다. 내 기억 속의 할아버지는 비록 앞을 보진 못하셨지만 지팡이를 짚고 길을 나서면 늘어진 흰 수염이 멋진 분이셨다. 시력을 잃고 어두운 세상을 더듬으며 걸어도, 할아버지의 다른 감각은 달팽이의 촉수보다 더 예민하셨다. 논두렁에 심어진 콩밭을 매는데 눈으로 보듯이 잡초만 가려내어 잘도 뽑아내셨다. 논에서 김을 매고 피사리를 할 때도 나락은 하나도 뽑아내지 않으셨다. 바람 소리만 들어도 비가 몰려오는 것을 아시고, 열다섯이나 되는 손자 손녀를 목소리로 기억하셨다.

세월이 가도 할아버지의 가슴 속에는 아카시아 꽃처럼 향기롭고 소담스런 아내의 모습만이 간직되어 있었다. 풍년초 꾹꾹 눌러 장죽으로 태우시고 재떨이를 탕, 탕 안채까지 들리도록 인기척을 보내셨다. 나들이할 때마다 틀어 올린 상투에는 할머니가 사다 주신 은동곳이 꽂혔다. 사랑방에서 안채까지의 거리는 가까웠지만 ‘지척이 천리라’ 닿을 수 없는 곳에 할머니는 계셨다.

아랫목에 누우면, 손자들을 재우시던 할머니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또렷하게 들린다.

“은을 주면 너를 살까, 금을 주면 너를 살까. 국가에는 충성 동이, 부모에는 효자 동이, 형제간에 우애 동이, 일가친척 화목 동이, 동네방네 의리 동이. 친구간에 신의 동이. 태산같이 강건해라, 하해같이 깊어져라. 자장자장 우리아기. 멍멍개야 짖지 마라, 꼬꼬닭아 울지 마라. 칭얼칭얼 보채던 우리 아기 잠들었다.”

무릎베개하고 가슴 토닥이시며 나직이 부르시던 그 간절한 소망이 담긴 주문 같은 자장가.

앞만 보고 내달리며 쉼표 없이 살아오신 할머니의 자갈길은 참빗 닮은 삶이었다. 흥건하게 젖어 있던 봄비 같은 마음은 잘게 쪼갠 빗살만큼 메말라져 갈라졌다. 먼지 낀 일상도 생활의 잡티도 부옇게 밝아 오는 창호지 바라보며 참빗으로 훑어 내렸으리라. 시간의 퇴적 속에서 화석 되어 버렸을 할머니의 눈물과 열정은 머릿결 곱게 다듬던 빗살에 고스란히 배었으리라. 쪽 진 머리에 동백기름 한 방울 곱게 펴 바르면, 울 안에 피어 있는 동백꽃조차 그 모습 서러워 속절없이 마당 끝만 바라보았다. 할머니 돌아가신 날, 백 마디 말보다 긴 작별을 고하듯 가랑비는 온종일 추녀 끝에서 서성거렸다.

여문 손끝 같은 참빗으로 엉킨 머리를 빗어 본다. 맑아지는 머릿속에 울림 하나 들어찬다.

“네가 똑바로 서 있으면 절대 뒤틀릴 이유가 없는 거야.”

등허리를 훑어 내리는 짱짱한 햇살이 느슨한 나의 생을 담금질하고 있다.

 

'좋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은비녀/임 경 희  (1) 2024.07.22
가얏고/박시윤  (0) 2024.07.22
문 / 엄정숙  (0) 2024.07.22
아버지의 발/고경숙  (0) 2024.07.22
물두멍 / 송옥선  (0) 2024.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