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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베개 / 엄옥례

에세이향기 2024. 8. 16. 02:57

베개 / 엄옥례

  

무언가가 나를 부른다. 남편 쪽으로 손을 뻗으려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마음만 허우적거리다가 가까스로 깨어난다. 길게 한숨을 쉬고 가슴을 쓸어내려도 놀란 심장은 가라앉지 않는다. 옆을 바라보니 휑한 기운만 감돌고 베개만 덩그러니, 내 곁에 남편이 없음을 알린다.

남편과 부부의 연을 맺을 때,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조건이나 배경은 그다지 따지지 않았다. 그저 베개 하나에 머리를 맞대고 같은 꿈을 꾸는 것이 행복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외모는 달라도 남편과 나는 지향점이 비슷했다. 그래선지 이불 한 겹에 베개 하나일지라도 원앙금침이 부럽지 않았다.

꽃잠은 봄날처럼 달콤했다. 시간이 흘러, 사랑이라는 마취가 약효를 다하자 하나의 베개에 두 사람의 머리를 얹는 게 점점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체형이 같지 않아 잠버릇도 달랐고, 자란 환경이 달라 생각에도 차이가 있기에 서로의 습관과 생각을 인정해 주자는 뜻으로 각자의 베개를 나란히 두고 자기로 했다.

마음을 모으고 손을 잡으니 소소한 꿈이 하나, 둘 이루어졌다. 일머리를 알고 논리가 정연한 남편의 의견을 존중한 덕분인지 여러 번의 시행착오도 무난히 넘겼다. 숟가락과 밥공기만으로 기대감에 충만한 나는 우화(羽化)한 남편의 등을 타고 훨훨 나는 꿈을 꾸기도 했다.

야무진 꿈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잘 나가던 사업이 예측할 수 없는 수렁에 빠지면서 의견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이 고비만 벗어나면 날개를 달기에 어떤 벽도 넘을 텐데, 안달이 난 나는 남편만 보면 따따부따 말을 쏘아댔다. 집요한 공격에도 한동안 끄떡없던 남편은 더는 상처 받기 싫었는지 사업에서 손을 떼겠다고 선언했다. 둘 사이에 틈이 벌어지면서 나란히 맞대고 있던 베개도 조금씩 멀어졌다. 부부 사이가 더 벌어져 심하게 다투기라도 하는 날이면 나는 베개를 들고 다른 방으로 가곤 했다.

어느 날 남편은 새로운 일을 찾아 바다 건너로 떠났다. 바다를 사이에 둘 만큼 남편과 내가 멀어진 것이다. 남편이 안고 자던 베개와 머리를 눕히던 베개를 한 쪽 귀퉁이에 밀쳐놓고, 시원한 기분에 나 혼자 이리저리 뒹굴며 한동안 널찍한 자유를 누렸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 남편이 빠져나간 자리를 혼자 매우다 보니 몸이 점점 지쳐갔다. 날이 갈수록 황폐해지는 마음자리에 꿈자리까지 을씨년스러워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옛 여인은 베갯잇에 수를 놓았다. 고관대작은 영화가 영원하길 꿈꾸고 가난한 서민은 신분상승을 꿈꾸었다. 잠을 자는 동안 머릿속에 차있던 잡다한 기억과 생각이 지워지고 그 자리에 희망이 스며들라고 베갯잇에 꿈의 무늬를 수놓았다. 일이 잘 안 풀리거나 꿈자리가 사나우면 베개를 바꾸기도 했으니, 옛 사람에게 베개는 단순히 머리를 받치는 침구가 아니라 꿈을 꾸는 언덕인 셈이다. 나 또한 어머니가 수를 놓은 언덕에서 고운 꿈을 꾸며 자랐기에 그 기억을 잊을 수 없다.

긴 겨울밤이면 어머니도 호롱불 앞에 앉아 베갯잇을 만들었다. 아버지는 눈이 어두운 어머니 곁에 앉아 색실을 골라주고 바늘에 실을 끼워주었다. 부모님의 베개는 암수 사슴이 얼굴을 부비는 문양이고 우리들의 베개는 꽃과 나비 문양이었다. 어머니는 가난한 친정을 돌봐주는 남편을 위해 사랑과 고마움을, 사랑스런 자식들을 위해 아름다운 꿈을 베갯잇에 한 땀 두 땀 새겼다. 새해가 되면 헌 베갯잇을 벗기고 새 베갯잇을 씌었으며 가까운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으니, 너나 할 것 없이 팍팍한 삶에 집집마다 행운이 깃들고 무병장수를 함께 누리자는 시골 아낙의 소박한 바람이었으리라.

부모님도 생각이 어긋날 때가 있었다. 다툼도 잘 봉합하면 돈독해진다고, 낮에는 티격태격 싸워도 부모님은 베개를 나란히 두고 주무신 뒤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원앙이 되었다. 웬만해서는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지 않는 시절인데도 어머니가 도마질을 할 때 아버지는 물을 긷고 아궁이에 불을 땠다. 한겨울 이불 속에서 나오기 싫어 뭉그적대다보면, 둘 사이에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부엌에서 구수한 이야기가 밥물처럼 넘치곤 했다.

옛일을 생각하다가 문득, 구석에 밀쳐둔 남편의 베개를 본다. 지금까지 흘려보았는데, 귀퉁이가 닳아 속이 보이는가 하면 군데군데 묵은 때가 배어있다. 안고 자던 베개는 풀이 죽은데다가 문양까지 희미하다. 내 마음의 얼룩을 보는 것 같아 얼른 감추고 싶다. 가만히 돌아보면 나는 좋은 아내가 아니다. 출세를 바라며 남편을 바깥으로만 떠밀었지 지친 머리가 포근히 쉴 자리를 돌보지 못했다. 아이들에 밀려 늘 뒷전인 남편은 아내의 싸늘한 가슴에 얼마나 한기를 느꼈을까. 꿈자리조차 편안하지 못했을 남편을 생각하다가 가슴이 먹먹해져 그만 베개를 끌어안고 만다.

며칠 뒷면 남편이 돌아온다. 새롭게 시작하자는 뜻으로 이부자리를 바꾸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손재주가 없는 내가 어머니처럼 직접 수를 놓지는 못해 침구 가게에 들른다. 형형색색 온갖 자수가 나를 유혹한다. 여러 가지 문양의 베개를 만지작거리다가 사슴이 수놓인 것으로 두 장 고른다. 긴 베개에는 신혼의 꿈이 깃들어 있기에 잇만 바꾸기로 한다. 이리저리 살피다가 남편이 품고 자면서 다시 한 번 날개 달리는 꿈을 꾸라고 봄꽃 위를 나는 나비 문양으로 한다.

새 베갯잇을 빨아 말린 다음 속통에 씌워 이부자리 위에 나란히 놓는다. 황량한 겨울 같던 침대에 화사한 봄이 오자 금방이라도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것 같다. 모처럼 아내의 역할을 한 것 같아 가슴속에도 애틋한 뭔가가 피어오른다. 나란히 놓인 네 개를 남편이 볼 때 무슨 말을 할까.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아니 절대로 베개의 거리를 떼지 않을 거라고 말하면 남편의 얼굴은 어떤 색으로 변할까. 혼자 상상에 잠기다 보니 내 볼이 먼저 붉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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