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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이야기 / 김희자

에세이향기 2024. 8. 16. 03:10

 남자 이야기 / 김희자 

 

 

 

 

 기도 같고 통곡 같고 절규 같은 비가 내린다누가 이 구불구불한 생에 주석을 달 수 있단 말인가버리고 싶은돌아보고 싶지 않은 쓰라린 기억들이 모여 인생이라는 그림을 만든다꽃 한 송이 피우지 못했다고 참된 삶을 그리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고통보다통증보다 더 잔인한 한 남자의 마지막 생을 보았다젖은 도로 위의 차들이 아무 일 없다는 듯 질주하지만 나는 장례식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섰다.

 

 

 조등이 걸린 저 안에서 그 남자가 영원히 잠들어 있다슬픈 날에는 눈을 감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울고 나면 나는 바닥을 본다모두 죽었거나 사라진 곳이 바닥이기 때문이다살아있는 육신이 짜낸 눈물이 바닥에 뒹군다상처를 안으로 들이는 것들은 소리가 없다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경계에서 바람마저 맥을 놓았다그 남자가 말하지 않았고 보이지 않았던 속살들이 젖은 바닥에 뒹구는 것 같다이야기는 상처 없이 만들어지지 않는 법이다.

 

 

 홀로 견디는 일이 그토록 힘들었을까오늘 텅 비어 있는 침대를 보았다늘 짐승처럼 웅크리고 누워 있던 남자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고독했던 그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일터로 나오니 새벽닭이  무렵 이승을 떠났다고 했다나는 반 년 동안 한 남자의 마지막 생을 오롯이 보았다그 남자를 지켜보는 일은 인간의 슬픔과 고독모진 고통을 엿보는 것이었다

 

 

 그 남자 가장 큰 고통은 허기였다허기가 지면 간호사실로 와 "배고파!' 하며 손을 쑥 내밀었다어렵사리 내뱉는 짧은 말 속에는 미안함과 배고픔의 고통이 묻어났다만성신부전증에 당뇨병까지 앓고 있는 그 남자에게 간호사들은 너그럽게 대했다저혈당 증세가 나타나 쇼크가 올 수도 있으니 스스럼없이 먹을 것을 주었다

 

 

 그 남자에게는 애타게 찾아오는 가족도 없었고 애틋하게 감싸주는 친구 또한 없었다보호자들이 자주 찾는 환자들 옆에는 간식이 넘쳐났지만 그 남자의 탁자 위에는 휴지 하나만 자신처럼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처자식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늘 혼자였던 남자였다찾아오는 이는 오직 한 사람여동생뿐이었다아주 가끔 방문하는 여동생은 오빠가 좋아하는 양념치킨을 사주었다그 남자는 허기가 유난히 지면 거침없이 먹었다식사량이 늘어 다행이다 싶으면 체해서 삼킨 음식을 토하곤 했다어렵사리 먹은 치킨도 토해 안쓰러웠다.

 

 

 구토증세가 심해지면 몇 날 며칠 동안 먹지 못했다그러다가 구토가 멎고 상태가 나아지면 그 남자는 허기를 더 느꼈다어느 날 병실에서 그 남자를 나무라는 간병사의 목소리가 복도로 새어나왔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남의 것에 손을 대면 되겠냐?"며 꾸지람을 퍼붓고 있었다얼마나 허기가 졌으면 남의 간식에 손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을 문 밖에서 보자니 내가 더 무안해 다른 병실로 발길을 돌렸다.

 

 

 그 남자는 유독 고독했다지독하게 고독했던 그 남자는 아무도 없는 휴게실에서 불을 끄고 앉아 티브이를 보거나 졸고 있었다자신의 침대가 있었지만 휴게실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휴게실에 홀로 있거나 침대에서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파도처럼 고독이 밀려들었다어두운 골짜기를 끝까지 걸어본 사람은 안다그래서일까나는 그 남자에게 유난히 동정이 갔다.

 

 

 은발이 머리의 반을 차지했지만 그 남자는 인생의 가을도 맛보지 못했다천성이 순하고 자존심이 강했지만 병세가 악화되면 불안해했다호흡수를 체크한다 싶으면 숨 쉬는 속도가 빨라졌다고르지 못한 호흡이 공포에 떨고 있음을 말해주었다산소흡입을 하고 링거를 맞으면서도 집에 가야 한다며 헛소리를 쳤다거동이 불편해 기저귀를 차자고 해도 기어코 화장실로 가다가 옷을 버렸다젖은 옷을 갈아입자고 해도 소리를 버럭버럭 질렀다그런 일이 잦아지자 간병사와 실랑이가 벌어졌고 몸에는 억제대가 묶여졌다.

 

 

 그 남자는 어느 날 성난 짐승 같았다호출소리가 나 병실로 달려갔더니 손등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분노한 그 남자는 온몸과 침대에 흐른 피를 보고도 무심했다울분을 못 이긴 그 남자가 링거 줄을 뽑은 것이었다그 남자의 분노 속에는 슬픔의 감정이 내포되어 있었다바늘이 빠진 혈관에서 선홍색의 피가 나오고 있었다놀란 간병사는 허겁지겁 피를 닦고 있었다피가 흐르는 손을 맨손으로 지압하자 간병사는 장갑을 끼라며 소리쳤다.

 

 

 화를 내지 않았다호통을 치지 않고 왜 그랬냐며 그 남자의 손을 잡았다그 남자는 고개를 떨어트린 채 말이 없었다모든 것을 포기하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였고 현실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았으리라신장이식이나 혈액투석을 하면 호전될 수 있겠지만 여동생도 포기를 했다삼 개월 정도 살 수 있다던 그 남자가 일 년 넘게 살아있으니 다행이라고 하기에는 애석했.

 

 

 그 남자 외로움을 유일하게 달래준 여인이 있었다그 병실에 새로 온 간병사였다그녀는 진심으로 환자들을 대했다그 남자는 그녀가 간병사로 온 후부터 달라졌다심성 좋은 그녀가 외로움을 달래주는 것 같았다고분고분하게 나누는 손길에서 진심이 느껴졌다수발을 받지 않은 나도 그녀의 정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그녀는 언제나 꽃처럼 웃었다뭇 남자들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토사물까지 처리하면서도 인상 한 번 찡그리지 않았다.

 

 

 어느 날 병실에 들어서던 나는 화들짝 놀랐다그녀의 어깨를 그 남자가 주물러주고 있었다상태가 좋아진 그 남자는 달라졌다그녀가 "!"라고 다정하게 불려주면 그 남자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연약한 몸으로 환자를 돌보는 그녀의 일을 거들었다자기 몸도 가누지 못하면서 힘을 나누는 걸 보면 흐뭇했다

 

 

 그녀의 어깨를 주물러주는 모습이 마치 연인처럼 보였다그렇다고 이상한 감정이 섞여있는 것은 아니었다그 남자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음이 놀라웠다그런 날들 때문이었을까그 남자는 한동안 컨디션이 좋았다구토로 고통을 겪던 일도 해소되었다젊어서의 사랑은 자신의 행복을 원하는 것이고 황혼의 사랑은 상대가 행복해지길 바라는 것이라고 했다그들은 연인이 아니었지만 나의 눈에는 저물녘 황혼처럼 고매했다.  

 

 

 그 남자가 중환자실로 올라가기 전날 삶은 감자가 먹고 싶다고 했다이십사 시간을 근무하는 그녀는 다음날 감자를 삶아왔지만 그 남자는 이미 중환자실로 올라간 후였다그녀는 "그 흔한 감자 하나도 먹을 복이 없는 남자였다." 며 눈물을 훔쳤다

 

 

 그 남자에게 결핍된 것은 한둘이 아니었다젊은 날 대기업에 다녔다던 그 남자에게는 물질도 사랑도 부족했다어느 날은 안경알이 빠지고 없다며 안절부절 못했다어디에서 빠졌는지 모르는 그 남자는 주치의한테 내려가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안경알을 넣기 위해서였다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그 남자에게는 그나마 세상을 볼 수 있는 안경이 소중했기 때문이다.

 

 

 그 남자를 돕기 위해 병실로 갔다침대 이불을 털고 시트 사이사이를 눈여겨보았지만 안경알은 보이지 않았다병실 바닥과 복도까지 두 눈을 부릅뜨고 찾았지만 찾을 길이 없었다마음은 돕고 싶었지만 허투루 나설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결국 여동생이 해결했지만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돈을 빌리려던 그 남자를 보며 아팠다.

 

 

​그 남자에게 위기의 순간이 몇 번 있었다어떤 날은 동공이 풀린 그를 발견해 응급처치를 하기도 했고 이번이 마지막 순간인가 싶다가도 다시 살아났다그러다 일주일 전부터 백지장처럼 얼굴이 창백해졌다수혈을 받았지만 호흡곤란과 삼키는 기능을 잃었다밥이 죽으로죽이 미음으로 바뀌더니 왜소해져 갔다

 

 

 예견된 일이었지만 팔에는 링거가 달리고 코에는 산소마스크가 씌어졌다그 남자는 웅크리고 누워 숨을 가쁘게 쉬었다뒷바라지를 하던 여동생도 주치의를 만나고 오빠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인간은 자기를 대항해서 바리케이트를 쌓는다고 타골은 말했다하지만 그 남자는 저항할 힘도 소멸되고 없었다하루하루가 다르게 나약해지는 비극 앞에서 그 남자의 번뇌와 갈등을 이해하려 애썼다. '그래죽음에 이르기까지 병원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니 외로운 죽음보다는 낫지 않는가?' 하며 되레 나 자신을 위로했다.

 

 

​그 남자가 살아있음을 확인한 날도 있었다한날은 남자로 존재하는 그를 발견했다혈당을 체크하러 휴게실에 갔더니 티브이 앞에서 넋을 놓고 있었다소녀 가수들이 춤추며 노래하는 모습에 푹 빠져 있었다걸 그룹이 예쁘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모든 것을 상실한 듯 보였지만 본능은 살아있던 남자였다내가 마지막으로 그 남자를 보았던 날도 예쁜 소녀들이 노래를 하고 있었다.

 

 

 몸매가 쭉쭉 빠진 걸그룹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던 그날 밤, 그 남자는 상태가 급속도로 악화되어 중환자실로 올라갔다몸 안에 산소가 부족해지자 죽고 싶다고 소리를 쳤다자신의 생을 포기한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그 남자는 상태가 악화되자 체념을 했다고통을 기피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본능.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죽고 싶다고 했을까? 이처럼 삶은 산처럼 무거우나 죽음은 깃털처럼 가볍다그토록 먹고 싶었던 감자 한 톨도 못 먹고 그 남자는 떠나갔다.

 

 

​그 남자는 자유로워졌다쓰디쓴 인생과 깊은 고독을 맛보고 떠나갔지만 더 이상 고통 받지 않을 것이다이제 휴게실에서 그 남자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는 일도 없을 것이다나는 그 남자에게서 희망보다 등 뒤 있는 절망을 위로하는 법을 배웠다그 남자가 가는 길이 비단길이기를 바라며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다그 남자는 일이 서툰 나를 편하게 해준 사람이었지만 나는 그를 위해 마음 한 번 푼 적이 없어 가슴이 시리다가을 하늘에서 내리는 차가운 저 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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