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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무늬/김훈

에세이향기 2024. 8. 18. 07:38

 

시간의 무늬/김훈

 

시를 쓸 수 없는 나는, 어떤 시인이 그 뻘밭에 새겨진 시간의 무늬를 시로 써 주기를 바란다. 실체가 주는 치매감을 감당하지 못하는 나는, 실체 앞에서 언어를 그리워하고, 언어 앞에서 실체를 그리워한다. 나는 해독되지 않는 시간의 그림자를 버리고 다시 언어 쪽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그 편이 훨씬 더 아늑하고 편안할 것이었다.


 그 여름에 나는 최하림의 새 시집 「풍경 뒤의 풍경」을 읽었다. 최하림의 시들은, 내가 그 시들을 읽은 것이 아니라, 그 시들이 나에게 흘러들어온 것처럼 내 마음에 스몄다. 최하림의 시들은 시간의 본질을 말하지 않는다. 최하림의 시들은 시간의 실체에 닿을 수 없는 격절감을 쓰라리게 토로하지도 않는다. 최하림의 시들은 그 격절감이 주는 거리를 거리로서 긍정하면서, 인간의 바깥쪽으로 흘러가는 시간에 포개진다. 그리고 시간과 더불어 흘러간다. 시 한 편을 옮겨 적는다.


하늘 가득 내리는 햇빛을 어루만지며
우리가 사랑하였던 시간들이 이상한 낙차를
보이면서 갈색으로 물들어간다 금강물도 점점
엷어지고 점점 투명해저 간다 여름새들이
가고 겨울새들이 온다 이제는 돌 틈으로
잦아들어가는 물이여 가을 물이여
강이 마르고 마르고 나면 들녘에는
서릿발이 돋아 오르고 버들가지들이 얼어
은빛으로 빛난다 우리는 턱을 쓰다듬으며
비좁아져 가는 세상 문을 밀고 들어간다
겨울과 우리 사이에는 적절한지 모르는
거리가 언제나 그만쯤 있고 그 거리에서는
그림자도 없이 시간들이 소리를 내며
물과 같은 하늘로 저렇듯
눈부시게 흘러간다




                                                              「버들가지들이 얼어 은빛으로」


 이 시를 읽을 때, 인간과 시간의 관계는 인간이 끝끝내 시간을 짝사랑하는 일방적 관계다. 시간은 인간 쪽으로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인간은 시간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이 소외는 대책 없는 소외다. 가을 물이 마르고 강이 마르고, 여름새가 가고 겨울새가 온다. 시간은 그렇게 인간과는 무관하게 인간이 속해 있는 공간을 드나든다. 시간은 인간과 놀아주지 않는다. 인간은 시간으로부터 제외되어 있다. 시간으로부터 제외된 인간이 그 시간에 관하여 말할 때, 인간의 말은 인간을 데리고 가지 않으려는 시간을 따라간다. 최하림의 시 속에서는 시간들 사이에는 ‘이상한 낙차’가 있고, 계절과 인간 사이에는 ‘적절한지 모르는 거리’가 언제나 있다.
 이 ‘이상한 낙차’와 ‘적절한지 모르는 거리’는, 인간이 거기에 개입할 수 없는 시간의 조건들이다. 그것은 쓰라린 소외의 운명일 터이지만 최하림의 시 속에서 이 소외는 쓰라리지 않고 평화롭다. 최하림의 시는 시간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의 운명을 들여다보면서, 그 운명을 시간의 흐름에 포개면서 쓰여진다. 그리고 시행이 다 끝난 뒤에 인간은 여전히 시간 밖에 주저앉아 있다. 시간 밖에 주저앉은 인간이 흘러가는 시간을 향해 주절거린다. “그림자도 없이 시간들이 소리를 내며/물과 같은 하늘로 저렇듯/눈부시게 흘러간다.” 이 주저앉은 인간의 꼴은, 언어의 힘으로 흘러가는 시간 위에 올라타서 잠깐 함께 흐르다가 다시 시간 밖으로 쫓겨난 자의 모습이다. 그 쫓겨난 자의 주절거림을 가엾고도 평화롭다.
 
 만경강 갯벌 물고랑에서 석양은 빛의 조각들로 퍼덕거렸다. 나는 내 몸으로 흘러 들어오는 시간의 미립자들을 느꼈다. 그 미립자들은 내 생명을 빠져나가 어디론지 또다시 흘러나갔다. 시간이 내 몸을 드나들었지만, 내 몸에는 시간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시간이 내 몸을 드나들었지만, 몸은 시간으로부터 버려져 있었다. 서해의 석양이 수평선 쪽으로 내려 앉았다. 갯벌에서 퍼덕이던 빛의 조각들은 마지막 잔광에 뒤채이면서 어둠 속으로 잠겼고, 이윽고 갯벌도 바다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무 곳에도 도달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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