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지를 바르며 /김해남
벽지를 바르기로 했다.
네 귀 반듯한 양옥도 아니고, 지은 지 삼십 년도 더 된 낡은 한옥 사방 아홉 자 네 칸 방에 벽지를 바르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만, 낡은 벽지 위에 살짝 눈속임하듯 덧바른 게 싫어서 오늘은 큰 맘 먹고 묵은 벽지를 뜯어내기로 했다.
켜켜이 숨겨둔 비밀을 들쳐내듯 벽지를 뜯어낸다. 한 겹 한 겹 방바닥에 나동그라지는 벽지 조각들. 십 년 아니 그보다 더 오랜 세월 동안 한 방 거처를 해 온 살가운 정 때문일까, 미세한 한 점의 먼지도 내 몸에서 떨어져나간 부스러기처럼 느껴져 왠지 애틋하다.
낡은 조각들은 치워 버리면 그뿐이지만 갈팡질팡 했던 시간들은 고스란히 남아 나를 짓누른다. 내 삶 곳곳에 남은 권태, 또는 이기심도 쌓아 두면 이렇듯 볼썽사나운 꼴이 되어 버릴까.
벽지를 바르는 일은 늘 남편과 함께 한다. 풀을 끓이는 건 내 몫이고 벽지를 재단하는 일은 언제나 남편이 한다. 손끝이 야무지지 못한 나와는 정반대로 남편은 벽지를 자를 때도 줄자를 갖다 댈 만큼 한 치 오차 없이 깔끔한 성격이니 언제나 내가 하는 일은 못미더워한다.
"풀을 쑤는데도 요령이 필요하다. 너무 되어도 안 되고 너무 묽으면 또 안 될 일, 몽글몽글한 덩어리가 생겨서는 더욱 더 안 되고."
분주한 손놀림만큼 남편의 잔소리 또한 만만찮다. 되다, 묽다 소리를 들어가며 문지방을 넘나들어 풀 그릇을 남편 코앞에 들이댄다. 겨우, 그래 됐다. 라는 소리를 들으면 벽지에 풀칠을 한다.
"거지 동냥 주듯 너무 아끼지 말고, 그렇다고 생과부가 홀아비 만난 듯 헤프게도 말고."
남편에게 풀칠한 벽지를 조심스레 갖다 바친다. 나는 참 고분고분하다. 벽지가 마르기 전에 마른걸레, 또는 빗자루를 손에 들려준다. 남편이 꽃무늬를 맞추면 나는 얼른 팔뚝 끝에 힘을 모아 공을 들여 마무리한다.
이제 나도 나이를 먹은 걸까, '그래, 너 참 잘났다.' 또는 '까짓, 내가 참자.' 라고 내 속을 다독이지만 새댁시절엔 싸움도 참 많이 했다. 나는 무슨 일이라도 대충대충 그저 쉽고 편하게, 까짓 꽃무늬 하나쯤 뒤틀어지는 게 무어 그리 대순가. 그랬고 남편은 다 붙인 벽지라도 비뚤어지면 뜯어내야 직성이 풀렸다. 그러니 뒤에서 궂은 심부름 다해도 나는 언제나 면박데기다.
벽지를 선택할 때도 남편은 늘 자기 취향 대로다. 내 의견 따윈 안중에도 없다. 서른을 갓 넘은 젊은 시절에도 경로당 분위기가 나는 회색이나 살색의 흐리터분하고 밋밋한 벽지를 사다 바르는 사람이니 화사하게 방을 꾸미고 싶은 내 마음은 아예 안중에도 없다.
그런 남편이 너무 미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어느 날인가 나는 남편과 한마디 의논 없이 자잘한 꽃들이 사방으로 줄줄이 핀 연분홍 빛 벽지를 사 오고야 말았다. 시위하듯 내 마음대로 벽지를 바르기로 작정을 하고 나니 잃어버린 내 자존심을 찾은 듯 했다.
풀을 끓이며 혼자 방을 바르기로 했다. 되도록 출타한 남편이 돌아오기 전까지 벽지를 다 발라야 했다. 벽지를 자르며 동동걸음 칠 때였다. 어느 새 들어 와 내 행동거지를 지켜 본 걸까, 등 뒤를 넘어 온 남편의 한마디에 가슴이 무너진다.
"촌스럽긴. 그렇게 감각이 없어? 눈은 뭐 악세사리로 달고 다니나?\"
순간 나는 감정을 조절하는 모든 기능이 마비된 그런 느낌이 되어버렸다. 나라는 존재, 부부란, 무엇인가! 풀 솔을 남편을 향해 힘껏 던졌다. 풀 그릇 까지 뒤집어 버리고 싶은 마음을 다독거리느라 진땀이 났다.
풀 먹은 솔은 방바닥에 나동그라져 뻣뻣하게 선 채로 뿌연 액체를 뚝뚝 떨어 드리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어설픈 내 자존심이 우려내는 눈물 같았다. 세월 앞에서는 당해낼 자가 없다고 했던가!
산만해 보이던 꽃무늬 벽지도 오늘은 내 방에서 남편의 손에 의해 기품 있게 피어났다. 꽃무늬 벽지도 세월 따라 조금씩 퇴색되어 가겠지. 나도 모르게 조금씩 쌓여 가는 일상의 찌꺼기들처럼. 그래서 사는 게 가끔씩 고단하게 느껴지면, 나는 또 새 벽지를 바르리라.
그리고 나 스스로를 다독여서 탄력적인 삶을 이끌어 나가리라. 이제 한데 어우러져 부대끼며 살아 온 날들을 돌아보아야 할 만큼 나이도 먹었다. 자존심 겨루기에 혈안이 되기도 했던 젊은 시절을 생각하면 얼굴만 달아오른다.
그이와 나란히 누워 천정을 올려다보면 더러는 꽃무늬가 엇갈리고 뒤틀어져 우스운 꼴이 되어 버린 곳도 있지만, 이파리에서 꽃이 피고 꽃송이에서 줄기가 뻗어나가면 무어 그리 대순가, 도톨도톨 몽우리 진 곳도 못 본 척 슬쩍 눈감아 버리면 그 뿐. 우리 부부는 얼굴을 마주보며 웃어 넘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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